세인트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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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영어: St. Louis, 문화어: 쓴트루이스)는 미국 미주리주 동쪽 끝에 있는 독립시이다.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미주리주 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의 합류점에 위치하는 상공업 도시로 근접해 있는 일리노이, 카본데일 등 도시들과 광역권을 만들어 도시권 인구가 290만 명이 된다.[1]
개요
- 행정 단위: 미국 미주리주 도시
- 면적: 171.3 km²
- 지역어: 영어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stlouis.missouri.org/
세인트루이스는 미국 중부, 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이 합류하는 곳 부근에 위치하고, 오래 전부터 미시시피강의 주요 하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대륙의 십자로에 해당하며 서부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25개의 철도를 비롯하여 다수의 고속도로, 항공로, 미시시피강의 수운 등 교통망의 발달로 오늘날은 상공업과 경제의 중심이 되어 발전하였다. 미국 역사보다 오래된 도시의 특성 때문에 많은 별명이 있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관문도시(The Gateway City)이다. 이는 세인트루이스가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인식되기 때문이고, 또 서부 개척자들 상당수가 미시시피강을 따라 세인트루이스를 통해 서부로 갔던 이유도 있다. 프랑스 탐험가들이 1673년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원주민들이 이곳에 큰 무덤(Mound)을 대규모로 조성했다. 마운드라 부르는 당시 무덤들은 현재 상당부분 훼손됐다. 프랑스 탐험가들은 도시와 그 주변지역을 프랑스령으로 선포했고,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기념해 루이지애나(Louisiana)로 부르게 됐다. 그 후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의 지배하에 있다가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의 일환으로 나폴레옹에게 매입해 미국령이 되었다. 1804년 3월 10일에 공식적으로 미합중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긴 세월동안 받은 프랑스 문화의 영향으로 1820년대까지도 프랑스어가 많이 사용됐다. 1808년에 시의원단을 선출했고 1809년 11월에 정식 시로 등록 됐다. 21세기에 세인트루이스는 제조업, 의학, 바이오 기술, 및 각종 과학에 중점을 두고 시 정부와 산업, 또 학교 등이 많은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 중서부의 교육, 문화의 중심지로서 세인트루이스대학교(1818), 워싱턴대학교(1853),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세인트루이스교향악단(1880) 등이 있다. 특히 세인트루이스대학교 도서관에는 바티칸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들의 마이크로필름이 소장되어 있다. 포리스트파크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루이지애나 구매박람회)가 열린 곳으로, 이 곳에는 미술관, 제퍼슨기념박물관, 극장, 동물원, 천문관, 스케이트장 등이 있다. 이 밖의 관광 명물로서 1846년 노예 드레드 스콧의 소송을 다룬 옛 법원청사, 1860년 세인트루이스의 자선가 헨리 쇼가 만들어 11,000종 이상의 식물을 가지고 있는 미주리보태니컬가든(쇼스가든), 세계 최초의 3각 철골구조 다리인 이드스교(1874), 부시기념체육관 등이 있다.[2]
지리 및 기후
미주리주의 동부, 미시시피강의 서쪽 연안에 위치하며, 미주리강의 합류점 부근에 있다. 미시시피강 건너편은 일리노이주에 속하며 이스트세인트루이스라는 위성도시가 있고, 넓은 지역을 대도시권으로 두고 있다. 시카고 기준으로는 남서쪽으로 약 450km 떨어져 있다. 북위 38도~39도 선에 위치하여 1월 평균 기온 -2℃, 7월 평균기온 27℃, 연평균기온은 13℃로 대전시와 비슷한데 대전보다 대륙성이 강하고 미국 대륙 중앙부 동서남북의 기단의 영향을 다 받으므로 일년 내내 기온 변화가 심하고, 토네이도의 타격을 받기도 한다.
역사
프랑스 모피 상인들이 세웠으며, 시성된 루이 9세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 미국의 중요한 내륙 수로인 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의 합류점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수상 교통의 요지로 주목받았다.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구입을 통해 양도받은 땅이며, 처음에는 중서부의 서쪽 끝이자 중부의 시작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서부개척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는 (당시 기준으로) 미국에서 문명의 향취를 맡을 수 있는 최서단에 위치한 도시였으며, 서부개척시대 이후로는 개척의 시작점인 동시에 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동부와 서부,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어 미시시피강, 미주리강의 수운과 철도 교통으로 19세기 중반부터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하여, 초반에는 시카고보다 먼저 성장한 도시가 되었다.
남북전쟁 직후, 이 도시는 뉴욕, 필라델피아, 브루클린 다음가는 미국 제4의 도시였고, 브루클린이 후에 뉴욕 시에 편입된 것을 감안하면 미국 제3의 도시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후 시카고가 철도산업으로 급격히 성장하고 수운 경제가 쇠퇴하고 미국 인구 제 10위권 도시로 추락했다.
미국 남북전쟁 직전에는 전쟁의 도화선이 된 드레드 스콧 재판이 이 곳에서 열렸고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서 소송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역사적 판결이 나온 장소이기도 하며 현재 인종간 사회경제적 격차가 제일 심한 도시로 꼽히며 2014년에는 퍼거슨 소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 시절 이후에 흑인인권신장을 재요구하는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시발점이 된 도시다.
1900년 인구는 57만 여명이었고, 당시 미국에서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 다음가는 미국 제4의 도시로 미국의 대표적인 전국구급 도시의 하나였다. 1904년에는 엑스포와 하계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오대호 연안의 공업도시들이 성장하고, 서부의 "개척"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가 생겨나며 덴버와 같은 새로운 중간기착지까지 성장하기 시작하자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
인구는 1920년에는 자동차와 철강 산업으로 급격히 성장한 디트로이트와 클리블랜드에 추월당해 중서부 콩라인 도시 위치에서 밀려났고, 1930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하는 로스앤젤레스에도 추월당해 미시시피 강 서쪽의 최대 도시의 지위도 넘겨주었다. 1950년 인구는 85만 여명으로 미국 8위, 1950년 대비 2010년 인구 감소율은 62.6%로, 몰락한 도시의 대명사인 디트로이트보다 더 높았다. 2010년 인구는 31만 여명으로 전성기 때 인구의 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미국 도시 인구순위는 58위로 급추락했다. 한국인은 6천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도심 공동화가 문제시되기 시작하면서 전국에 도심 공동화와 젠트리피케이션의 대명사인 도시가 되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재개발을 계획하고 왕년의 영화를 기념하는 랜드마크인 게이트웨이 아치를 건설하기도 했지만, 도시의 몰락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2015년부터 시 정부의 친기업 정책을 시행하고 난 뒤 이케아, 마스터카드 본사, 그리고 홀푸드 (Whole Foods)가 들어 오면서 다시 번영 하였다.[3]
경제
교통수단의 생산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제조업이며, 세인트루이스는 중요한 자동차 생산의 중심지다. 또한 전투기를 생산하기도 한다. 세인트루이스의 메트로폴리스 지역에는 버드와이저로 유명한 세계적인 맥주 양조 회사인 앤하이저부시의 본사가 있다. 또한 약품, 식품과 그 가공업, 금속 등의 공업이 발달하기도 하였다. 세인트루이스와 워싱턴 D.C.의 대학들의 의료 연구를 위한 중심지들을 두고 있다. 도시는 식물과 생명과학의 연구와 개발의 중심지가 되었다. 건전지 및 손전등 제조 회사인 에너자이저의 본사가 세인트루이스 서쪽의 타운 앤드 컨트리에 있다. 다만 건전지 겉면에는 타운 앤드 컨트리 대신 세인트루이스로 기재되어 있다. 세인트루이스는 미시시피강 중부 유역의 재정적 중심지이다. 연방 준비 은행의 본부들이 자리잡고 있다.
교통
시내 대중교통은 시내버스가 주가 되며 경전철 메트로링크가 1993년 개통되었다. 메트로링크는 2량짜리로 경전철로, 블루라인와 레드라인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사실 두 노선보다는 한 노선이 분기되는 것에 가깝다. 램버트 국제공항에서 출발하여 다운타운을 관통하는 굉장히 효율적인 노선을 가진 경전철이고, 미시시피강을 건너 일리노이주까지 노선이 통한다. 다운타운 구간 일부는 지하로 되어있다.
세인트루이스는 처음에 철도교통과 미시시피강의 수운으로 발전한 도시이다. 19세기 후반, 철도교통의 전성기에는 사방에서 모여드는 철도망이 집중되었고, 그 위상에 걸맞게 1890년대에 크고 아름다운 유니언역 건물을 만들었다. 당시 유니언역은 세계구급의 철도역 건물이었고, 많은 승객들이 이 역을 거쳐갔다. 20세기 들어 철도교통이 조금씩 쇠퇴하기는 했어도, 20세기 중반까지는 그래도 상당히 중요한 역이지만 항공기 교통과 자동차 교통의 급성장으로, 미국 철도회사들도 몰락하고 사람들은 철도를 더 외면하게 되었다. 1978년 암트랙 열차는 유니언역에서 여객 취급을 중단하면서, 유니언역은 폐역이 되었고 이후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건물 비슷한 곳에서 하루 몇 차례 안 다니고 승객도 거의 없는 암트랙 열차가 서고, 최근에는 그레이하운드 터미널에서 탑승 수속을 밟는 웃기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유니언역은 그래도 크고 아름다운 건물로 보존가치가 있어, 개조작업을 거쳐 1985년 쇼핑몰과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도시는 미국 각지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어 항공교통의 발전이 기대되었고 TWA가 세인트루이스 램버트 국제공항을 메인 허브로 사용하면서 성장했지만 TWA의 몰락과 함께 현재 램버트 국제공항의 위상 역시 많이 추락했다.[4]
문화
미국에서 2번째로 오래된 오케스트라단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파월 심포니 홀에서 연주를 한다. 그 오케스트라 단은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설립된지 40년 후, 1880년 합창단으로 시작되었다.
서부의 역사를 전시하는 서부개척 박물관과 찰스 린드버그의 트로피가 전열되어 있는 제퍼슨 국립 확장 기념관 등 여러 박물관들이 자리잡고 있다. 1904년에 한 세인트루이스 엑스포 부지를 이용해서 포레스트 공원(Forest Park)을 만들었으며 몇몇 건물은 헐리지 않은 채로 박물관, 미술관, 연극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레스트 공원은 뉴욕시의 센트럴 파크보다 500에이커나 더 크다.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 공원이 유명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아치형 인공구조물인 게이트웨이 아치가 있는 곳으로, 미시시피강 바로 주변으로 유람선이 운행하며 서부 문화 박물관이 있다. 아치에는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역사와 문화 선전을 열심히 하며 가톨릭 문화가 드세다. 프랑스 식민지 양식의 건물과 거대주택, 광장들이 즐비한 편이다. 그 흔적으로 연방법원 건물, 세인트루이스 도서관, 우체국 건물, 유니온 역, 세인트루이스 성당과 세인트루이스 대학 성당이 굉장히 화려하다. 가톨릭 문화권이었던 곳 답게 가톨릭 행사 카니발의 일종인 마디 그라(Mardi Gras) 축제를 열심히 챙기기도 한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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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세인트루이스〉, 《위키백과》
- 〈세인트루이스〉, 《나무위키》
- 〈세인트루이스〉, 《요다위키》
- 〈세인트루이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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