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자동차
미쓰비시자동차(Mitsubishi Motors)는 일본 미쓰비시그룹의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1917년부터 자동차를 생산했으며, 1970년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기업이 되었다. 1990년대 후반 잇따른 도덕적 해이와 극우 기업 논란으로 인하여 이미지가 추락하고, 이에 미국 내 자동차할부금융채권의 부실화가 더해지면서 해외 현지공장을 대거 폐쇄하였다. 결국 2016년 5월 12일 르노의 계열사인 닛산(Nissan)이 2,000억 엔에 인수하여 르노(Renault) 계열로 넘어갔으며, 2020년에는 실적 악화로 유럽 시장에서의 철수 계획을 밝혔다.
목차
개요
정식명칭은 미쓰비시자동차공업주식회사 (三菱自動車工業, Mitsubishi Motors Corporation). 일본의 자동차 제조사이다. 연원을 따지면 1870년 해운회사 쓰쿠모(九十九)상회에 이른다. 쓰쿠모는 훗날 미쓰비시중공업이 된다. 미쓰비시자동차는 1917년부터 미쓰비시중공업의 사업부로 자동차를 만들어오다 1970년 6월 1일에 독립하였다. 트럭과 버스부문이 분사된 2003년 이후에는 승용차에 전업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전투기 ‘제로센(零戰)’과 전함 ‘야마토(大和)’를 만든 회사이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쓰비시자동차는 1946년에 전쟁 전에 만들던 후소(Fuso) 버스의 생산을 재개하고 3륜트럭을 개발한 데 이어 1950년 미국의 카이저-프레이저의 소형차, 1953년 윌리스의 지프를 조립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직접 디자인한 4륜소형승용차를 시작으로 미쓰비시는 10년간 미니카에서 고급승용차, 버스, 중형트럭까지 차종을 다양화하고 1970년 독립하였다. 이듬해에는 미국의 크라이슬러가 35% 지분을 인수하였다.[1] 2016년 10월 닛산자동차가 최대 주주가 되고 닛산자동차와 프랑스의 르노와 함께 르노·닛산자동차·미쓰비시자동차를 구성하고 있다.[2]
자회사 및 제휴
미쓰비시 중공업
미츠비시 후소
르노
닛산자동차
주요인물
사토 유우지
사토 유우지(佐藤勇二)는 일본의 실업가이다.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출신이며 야마구치 고등 상업학교를 거쳐 구제 도쿄 상과대학(후의 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했다. 미츠비시중공업 부사장을 거치고, 1970년 미츠비시 자동차공업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크라이슬러와의 제휴와 합작 사업을 실시했고 미국으로의 진출을 진행시켜 1971년에는 북미의 크라이슬러 채널에서 콜트 갤런의 발매를 개시했다. 1977년 12월 4일 세타가야구의 하시모토 병원에서 간경화로 사망했다.[3]
쿠보 토미오
쿠보 토미오(久保富夫)는 일본의 경영가이다. 나가사키현 출신이며 1931년에 도쿄 제국대학 공학부 항공학과를 졸업하고, 미츠비시 항공기(후의 미츠비시중공업)에 취직하여 나고야 제작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에 의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하기 전까지 일본에서의 항공기 연구개발은 금지되었다. 1946년 1월에 쿠보 토미오는 미즈시마 기기 제작소(현재의 미츠비시 자동차공업 미즈시마 제작소)로 전임하고, 1947년 2월에는 기술부장으로 취임했다. 1950년 미츠비시중공업의 분할에 의해 자동차를 담당하는 중일본 중공업(후의 신미츠비시중공업)에 소속되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에서도 항공기 개발이 다시 가능해졌다. 10월 신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제작소로 이동해 다시 항공기 개발의 자리에 몸을 실었다. 1962년 5월에 제작소장 재직으로 이사로 임명되어 1963년 5월에 상무이사가 된다. 1970년에 미츠비시중공업의 자동차 부문은 미츠비시 자동차공업으로 분리 독립되고, 1973년 5월, 쿠보 토미오는 미츠비시 자동차공업 이사 사장으로 취임한다. 1979년 6월 이사회장이 될 때까지 6년을 지냈다. 1974년 11월부터는 미쓰비시자동차판매 사장, 1976년 1월부터 이사회장, 1981년 3월부터 이사상담역도 겸했다. 1983년 6월, 이사회장에서 물러나 상담역이 된다. 1975년 현대차의 한국 최초의 자국 생산 자동차인 '현대 포니'에 엔진·변속기 등 플랫폼을 공급하고 한국 자동차 산업의 원천기술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기술을 제공하였다. 쿠보 토미오가 사망한 지 22년 만인 2012년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미쓰비시(三菱)자동차공업의 유럽 공장 폐쇄에 대해 "유럽 재정위기로 자동차 수요가 급감한 데다 한국 현대자동차의 공세로 미쓰비시가 채산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4][5]
역사
1970
- 1970년 6월 1일 :미츠비시 중공업 산하의 자동차부에서 미츠비시 자동차공업으로 독립했다.
- 1971년 : 북미의 크라이슬러 채널에서 콜트 개런(현지명: 닷지 콜트)이 출시됐다.
- 1973년 : 랜서를 출시하고, 한국의 현대자동차와 소형차 생산을 위한 차체나 엔진, 기어등의 생산 기술 공여 계약을 체결했다.
- 1974년 : 제22회 사파리 랠리에서 랜서 1600 GSR 랠리카가 우승했다.
- 1975년 : 엔진·변속기 등 플랫폼을 공급한 현대자동차가 현대 포니를 출시했다.
- 1978년 : 승용차의 제2 판매 채널로서 카 플라자점을 설립하고 전매 전용 차량인 미라주를 출시했다.
1980
- 1981년 : 미국에 미쓰비시 자동차 판매를 설립했다.
- 1984년 : 미쓰비시 자동차 판매를 합병했다.
- 1985년 : 미합중국에 다이아몬드·스타·모터스(DSM)를 설립했다. 제7회 파리 다카르랠리에서 파제로가 종합 우승을 차지하고, 말레이시아 정부와의 합작회사 프로톤의 공장을 준공했다.
- 1988년 : 마츠토야 유미의 콘서트 투어에 협찬하고, 도쿄·오사카·나고야의 증권 거래 시장 제 1부에 주식 상장됐다. (구 오사카·나고야의 양 증권거래소는 2016년 현재 상장 폐지)
- 1989년 : 오카자키 연구소내에 미츠비시 오토 갤러리를 개관했다.
1990
- 1991년 : 네덜란드 정부, 스웨덴의 볼보와 네덜란드에서 승용차 합작 생산 계약을 체결하고, 네드카(NedCar)를 출시했다.
- 1992년 : 초대 랜서 에볼루션을 출시했다.
- 1993년 : 파제로가 파리 다카르랠리에서 종합 우승했다.
- 1994년 : 베트남에 프로톤등과의 합작회사 비너스타·모터스(Vinastar Motors)를 설립하고,FTO가 올해의 일본차를 수상한다.
- 1996년 : GDI 엔진이 일본 자동차 저널리스트들과 애널리스트들의 모임(RJC)d의 올해의 엔진상을 수상했다. 미국 미쓰비시자동차제조(MMMA)에서 성희롱이 있었다고 하여 민사소송이 미합중국에서 제소되었다.
- 1997년 : GDI 엔진이 일본 자동차 기술회상/기술 개발상을 수상했다. 총회꾼에게의 이익 공여 사건이 적발되었다.
- 1998년 : 랜서 에볼루션이 세계 랠리 선수권 대회 (World Rally Championship, WRC )를 완전 제패했다. 버스 차량 제조를 미츠비시 자동차 버스 제조(MBM, 현재의 미츠비시후소 버스)로 이동하고 마이크로버스 로자만 미츠비시자동차 제조 버스 차량으로 남았다.
- 1999년 : 볼보와 대형차 분야의 자본·업무 제휴를 맺었다. 토미·마키넨이 전인미답 WRC4년 연속 드라이버즈 챔피언을 달성하고 그 기념으로 2000년 1월에 랜서 에볼루션 VI 토미 마키넨 에디션을 출시했다.[6]
2000
- 2000년 : 도로운송차량법 위반(리콜 은폐)이 발각되어 가와조에 사장이 사임하고 본사 등의 강제 수사를 받았다.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승용차 분야의 자본·업무 제휴 체결하고, 대형차분야에서의 제휴 파트너를 볼보에서 다임러·크라이슬러로 변경했다.
- 2001년 : 롤프·에크로트가 이사 집행 부사장겸 승용차 부문의 최고 집행 책임자로 취임했다.
- 2002년 : 롤프 에클로트가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했다.[7] 써플라이어 등 거래처 협력조직인 '카시와회'를 해산하고 미라주 딩고와 RVR가 생산 종료됐다. 카플라자점 전매 차종이 사실상 소멸되었다.
- 2003년 : 갸란점과 카프라자점이 통합되었다. 버스 자체 제조 부분과 대형차쪽의 자회사를 후소로 이동시켰다. 본사를 시나가와 미츠비시 빌딩(현 시나가와 그랜드 센트럴 타워, 도쿄도 미나토구)으로 이전시켰다.
- 2004년 : 프로톤의 보유 주식(7.93%)을 전량 매각하고 자본 제휴를 해지했다. 2000년의 리콜 은폐 사건을 훨씬 뛰어넘는 '리콜 은폐'가 발각되고 그로 인해 다임러 크라이슬러가 경영 추가지원의 중지를 발표했다. 미쓰비시그룹이 주도한 경영재건 계획은 교토로 본사를 이전하고 오카자키 공장을 폐쇄하여 법령 준수을 철저히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부 무산됐다.또 2002년에 발생한 후소 트럭의 타이어 탈락 사고 수사를 시작으로 추가 리콜 은폐와 '얌체 수리'가 발각되어 카와조에 전 사장 등 많은 경영 간부나 개발 부문 관계자가 체포되어 경영에 큰 타격을 받았다.
- 2005년 : 배로 늘어난 적자로 2004년에 취임한 일부의 이사진이 퇴임하고 새로운 이사진이 취임했다. 닛산 자동차와의 포괄적인 사업 제휴를 맺고, 닛산에 eK왜건·스포츠를 새롭게 연간 3만 6000대의 예정으로 공급한다고 발표했다. 두 회사에서 새로운 경차 제조사를 창설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철회되었다.[8] 신경영계획인 '미츠비시 자동차 재생 계획'을 발표했다. 미츠비시 그룹의 미츠비시중공업, 미츠비시상사, 도쿄 미츠비시 은행(현 미츠비시 UFJ 은행)에 증자등의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미쓰비시중공업의 출자비율이 15%를 넘기 때문에 지분법 적용에 따라 연결대상 회사가 돼 미츠비시 중공업의 산하에서 재건을 목표로 삼게 됐다. 2월, 프랑스의 PSA·푸조 시트로앵(PSA)에, 일본에서 2005년 10월에 발매된 아웃랜더를 연간 3만대 규모로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방식으로 공급한다고 발표했다. 11월에는 다임러 크라이슬러가 주식 전량을 매각하고 자본 관계가 해제되었다. 시장 침체를 이유로 중대형 세단 시장에서 철수하고 갤런, 디아만테의 일본내 생산,판매를 종료했다. 미츠비시 중공업의 지분법 연결회사가 되었다. 2006년도부터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 워크스팀의 활동을 경영 재건에 집중하기 위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 2006년 : 산리오와의 헬로 키티를 선전이나 판촉에 사용하기 위해 포괄적인 라이센스 계약의 기본 합의를 체결하고, 헬로키티가 해피 드라이브 앰배서더로 취임했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했다. i(아이)가 굿 디자인 대상을 받고, i(아이)가 2007 연차 RJC카 오브 더 이어 수상했다.
- 2007년 : 본사를 시나가와 그랜드 센트럴 타워에서 구본사 빌딩이었던 다이이치다쵸 빌딩(도쿄도 미나토구 시바)으로 재이전했다. 4년 만에 2006년도 당기이익 흑자전환을 발표했다.경승용차로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던 미니카(5넘버차)의 생산이 종료되었다.(4넘버 밴은 제외) 직계딜러의 체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월경합병을 포함한 대폭적인 통합을 실시했다. 개런 포르티스 출시하며 개런의 이름이 국내에서 부활했다.
- 2009년 : 6월, 리튬 이온 배터리를 탑재한 양산형 전기 자동차 아이미브(i-MiEV)를 발표했다. 에볼루션 및 상용 밴을 제외한 국내용 랜서의 생산을 종료했다. 사실상 대중용 소형세단 시장에서 철수하는 셈이다. 전기 자동차 아이·미브를 베이스로 한 유럽 전용 모델을 푸조·시트로앵에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으로 공급하는 기본 계약 체결을 발표했다. 2010년 10월부터 생산을 개시하여 2010년 말에 출시했다. 크라이슬러는 2005년부터 미시간주 댄디에서 합동 생산하던 미쓰비시와 현대자동차의 저연비차용 엔진의 합작 생산사업을 더이상 진행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9] 12월, 오사카 증권거래소에서 상장을 폐지했다.
2010
- 2010년 : 6월, '미쓰비시 애착력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구체적 내용은 일본 메이커 최초로 '최장 10년 10만km 특별 보증 연장한다는 것이며, 대상 차종은 i-MiEV·RVR·콜트·콜트 플러스·델리카D:5로, 향후 개량 모델에 따라 대상 차종은 증가할 예정이다. 변화하는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자동차 내부 청소 차체 코팅등의 각종 서비스와 복지차량을 제공하는 서비스와 전지 교환이나 세차, 유리 발수등 을 제공하는 서비스로 나누어 진행했다.
- 2011년 : 2세대 스즈키 솔리오의 OEM에 해당하는 소형 허슬러 델리카 D:2를 출시했다. 미니카밴의 생산이 5월로 종료되고, 이에 따라 미니카의 상표는 명실상부한 8대 49년 역사에 막을 내리게 됐다. 닛산 자동차와 함께 경차 사업을 하는 주식회사 NMKV 를 합작회사로 설립했다. 자본 구성은 쌍방 50%씩으로 나누었다.
- 2012년 :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経済新聞)에 유럽 재정위기로 자동차 수요가 급감하고 1973년부터 기술을 제공하던 한국 현대차의 공세로 미쓰비시가 채산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판단할 정도로 유럽 생산공장 폐쇄에 내몰리게 됐다.[4] 6세대 미라주를 출시했는데 미라주의 차명은 약 10년만의 부활한 것이다. 12월, 경차의 엔진 불량에 관해, 대응이 불충분하다고 해서 국토교통성으로부터 구두로 엄중 주의를 받았다.
- 2013년 : . 미니 캡 밴과 미니 캡 트럭의 가솔린 엔진 모델의 생산 종료로 스즈키와 경상용차의 OEM 공급에 대한 기본 합의를 했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와 생산·기술을 공용하는 프로젝트에 합의했다. NMKV와 르노의 협업으로 전기 자동차 사양을 가진 글로벌 엔트리카의 개발·생산을 추진해 갈 방침이다.르노의 산하인 한국·르노삼성자동차에서는 미국·캐나다 시장을 위한 미쓰비시 브랜드의 D세그먼트 세단의 생산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발표되었다.[10][11]
- 2015년 : 랜서 에볼루션 X의 생산 종료를 기념한 한정 모델인 랜서 에볼루션 파이널 에디션이 일본국외의 세단 시장에서 발을 빼게 되었다. 이를 통해 경차(일본 국내만) 및 SUV를 중심으로 라인업을 구성하게 된다. 또, 랜서에볼루션X의 판매 종료로 일본 국내에서 미츠비시 브랜드로 판매되는 승용차가 사라지게 되었다.
- 2016년 : 미합중국 일리노이주 노멀에 있는 공장이 연내 후반에 폐쇄될 것으로 보았다.[12] 사장 아이카와 테츠로가 기자 회견에서 랜서등의 노치백 세단의 개발·생산을 중단하고 파제로는 당분간 현재모델을 계속 생산할 것을 밝혔다.[13] 경차의 공동 개발처인 닛산 자동차의 지적에 의해 연비 측정의 부정 문제가 발각되었다. 대상 4개 차종(eK왜건/eK스페이스/닛산 데이즈/닛산 데이즈 루크스)의 판매정지가 결정됐다. 연비측정 부정문제로 인해 품질관리시스템 규격(ISO9001:2008)의 인증 일시정지처분이 내려졌다. 발행 완료 주식의 34%를 닛산 자동차가 취득해 사실상 산하에 넣을 예정이 발표되었다.[14] 하지만 8월 연비 부정사건 발각 후에도 국토교통성이 지도한 방법을 이용하지 않고 부정한 방법으로 연비 측정한 것이 밝혀진다. 나고야 제작소를 오카자키 제작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10월 20일 닛산 자동차가 미츠비시 자동차의 주식을 34% 보유하는 단독 최대주주가 되어,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일원에 참가했다. 닛산 자동차와의 자본 제휴로 새롭게 미츠비시중공업이 주요 주주로서 공동출자 해(지주회사 「다이아몬드 F.C.파트너스」를 설립), 미츠비시 자동차의 실질 출자 비율을 19.8%로 인하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일본의 축구 클럽인 J리그는 규약 및 클럽 라이센스 교부 규칙에서 동일 기업이 복수의 클럽을 자회사 또는 관련 회사로 하는 크로스 오너십을 금지하고 있다. 미츠비시 자동차의 출자 비율이 인하되었기 때문에, 크로스 오너십 저촉을 피하게 되었다.[15] 12월, 닛산 자동차 회장겸 사장 카를로스·곤이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했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산하에 들어간 관계상, 2019년경부터 닛산 주도 개발의 플랫폼 아키텍쳐 「CMF」를 채용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16]
- 2017년 : 소비자청이 미쓰비시 자동차와 닛산 자동차에 대해 연비 부정문제 및 부당 표시 방지법(경품 표시법)의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조치 명령과 4억8,507만엔의 과징금 납부 명령을 내렸다.[17] 미쓰비시 자동차공업의 연비 부정사건으로 인해 '도로운송차량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해 5월 26일 공포,시행됐으며, 일부 조항은 6월 15일 시행됐다. 개정의 요점으로는 데이터 조작 등 부정수단에 의해 취득된 형식 지정 취소나 벌칙 강화에서, 위반자에 대해 1년 이하의 징역형 또는 300만엔 이하의 벌금형 또는 이들을 병과하거나, 법인에게는 2억엔 이하의 벌금형 강화 등이 포함되었다. 10월, 신브랜드 메세지로서 '당신의 열정을 운전하세요(Drive your Ambition)'을 발표했다.신브랜드 메세지의 변화에 따라 영어 로고의 서체가 변경이 되는 등, 코퍼레이트 로고도 마이너 체인지 되었다.[18]
- 2018년 : 미츠비시상사의 완전 자회사인 MAI 주식회사가, 미츠비시중공업·산하의 익명 조합·미츠비시 도쿄 UFJ 은행등에서 10.76%의 주식을 취득하고, 미츠비시상사의 지분법 적용 관련 회사가 되었다.[19] 오카자키 제작소에 기능 실습 제도로 방문한 필리핀인들에게 계약과 다른 업무에 종사시키고 있었던 것이 발각되었다.[20] 9월, Google과 파트너십을 맺어 2021년부터 차량에 커스터마이즈한 안드로이드 오퍼레이팅 시스템을 탑재한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대시보드로 구글 맵이나 구글 어시스턴트, 구글 플레이등을 이용할 수 있어 iOS 디바이스와도 호환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대표이사 회장인 카를로스 곤이 금융상품거래법 위반 혐의로 도쿄 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에 체포되었다. [21] 이사회에서 카를로스 곤의 대표이사 및 회장의 해직을 결의했다. 차기 주주 총회에서 이사직에서 해임될 예정이다.다이이치다쵸 빌딩 재개발에 따라 무스부 다마치 스테이션 타워 에스로 본사를 이전했다.
- 2019년 : 법무성은 미츠비시 자동차공업의 기능 실습 제도의 부정에 실습 계획 인정을 취소하는 행정 처분을 내렸다. 이 처분으로 2024년까지 5년간 외국인 기능실습생을 받을 수 없게 됐다. 2022년 8월까지의 기간 한정으로 츄오구 긴자 2쵸메에 브랜드 발신 거점 '마이 가든 긴자(MI-Garden GINZA)'를 오픈했다.
2020
- 2020년 : 7월 27일 자회사인 파제로 제조 주식회사(기후현 카모군 사카호리쵸)는 2021년 상반기를 기점으로 모든 차종 생산을 정지하고, 그 후 공장 폐쇄를 발표했다. 이와 동시에 2021년 이후부터 유럽을 위한 상품의 신형차 투입을 차례차례 동결하고,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시장을 위한 상품 투입에 집중시킨다고 발표했다.[22][23]
주요기술
GDI엔진
1997년 일본 미쓰비시자동차가 양산에 성공했다. 일반 엔진의 공기와 연료의 혼합기 질량비는 14.7 대 1인데, 린번엔진의 혼합기 질량비는 최대 22~23 대 1까지 희박하게 할 수 있고, GDI엔진은 25~40 대 1이라는 극히 희박한 혼합기 질량비가 가능하다. 이 엔진은 실린더 안에 세로 방향의 강한 소용돌이를 발생시키는 것이 특징인데, 이 소용돌이는 인젝터에서 분사된 가솔린을 효율적으로 점화플러그 주변으로 모아 혼합기가 완전히 연소될 수 있게 도와준다. 또 노킹을 일으키기 쉬운 플러그 주변에 연료를 직접 분사하면 흡기온도가 기화열에 의해 낮아지므로 혼합기의 충전효율이 높아지고, 압축비도 높아진다. 이렇게 하면, 이론적으로는 가솔린 분사량과 분사 시기, 혼합기 질량비 따위를 폭넓게 조정할 수 있게 되어 정속 주행시의 희박 연소, 출력 향상, 이산화탄소 배출 감소 등의 상반되는 요소를 모두 실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론상으로 이 엔진은 뛰어나지만, 희박 연소 때 여전히 출력이 떨어지고, 실린더 안에 대량으로 발생한 연소 찌꺼기와 카본이 가솔린을 흡수하여 주행거리가 길수록 연비가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실린더 내부를 계속 청소해야 한다.[24]
생산 공장
- 승용차 기술 센터(아이치현 오카자키시) : 승용차의 연구·개발의 거점, 오카자키 테스트 코스.
- 도카치 연구소(홋카이도 가토군 오토후케초) : 신형차 시험주행
- 도쿄 디자인 스튜디오(도쿄도 미나토구) : 본사에 병설되어 있다. 이전에는 관동 미츠비시 자동차 판매 타마 뉴 타운점(도쿄도 타마시)의 근처에 위치했었지만, 본사로 이동하며 디자인 스튜디오는 폐쇄되었고 2016년 폭스바겐의 점포가 건설되고 있다.
- 미즈시마 제작소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 : 전쟁 전의 미츠비시중공업 미즈시마 항공기 제작소이다. 이 때문에 미즈시마 공습에서 주요 공격 목표가 됐다. 제조 차종은 RVR/ASX/아웃랜더 스포츠, eK 왜건/eK 크로스/닛산 데이즈, eK 스페이스/닛산 데이즈 루크스, i-MiEV, 미니 택시 MiEV 등 이다.
- 오카자키 제작소(아이치현 오카자키시) : 승용차의 생산 거점.
- 오카자키 공장 : 아웃랜더, RVR, 이클립스 크로스의 생산.
- 오에 공장(아이치현 나고야시 미나토구) : 전쟁 전후는 같은 부지내의 미츠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현 미츠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 우주 시스템 제작소)의 일부였다. 1970년의 미츠비시 자동차공업 발족과 동시 미츠비시중공업으로부터 독립해, 미츠비시 나고야 제작소 오에 공장이 되지만 2001년에 폐쇄했다. 터 대부분은 다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 우주 시스템 제작소로 변경되어 새 공장이 건설되고 보잉 787의 주 날개 생산거점이 된다. 한편으로 일부는 토치기 후지 산업(현GKN드라이브 라인 토크 테크놀로지)에 임대되어 미츠비시 나고야 공장이 된다. 미츠비시후소오의 버스 생산 라인은 2010년 6월에 폐쇄하였다.[25]
- 교토제작소 - 승용차용 파워트레인의 설계, 생산
- 교토 공장(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 전쟁전의 미츠비시중공업 교토 기기 제작소이다.
- 시가공장 (시가현 후난시)
- 파제로 제조 주식회사(기후현 가모군 사카호리초) : 파제로, 델리카D:5, 1/2t 트럭, 아웃랜더 등을 생산했다.[23]
차종
SU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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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밴
콤팩트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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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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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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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현황
사건사고
성희롱 집단 소송
1996년, 미합중국에서 289명에 대한 성희롱과 파워해러스먼트(power harassment)가 있는데, 미합중국 연방정부기관 고용평등위원회(EECO)가 집단소송을 행했다. 이것에 대해 자사에서 3시간 떨어진 EECO 지부까지, 현지 시장 등 약 3000명이 항의 데모를 실시했다. 전미 여성 기구나 공민권 운동의 지도자등도 강하게 반발하고, 보이콧이나 불매 운동으로 발전해, 미츠비시 자동차공업이 합의금을 지불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2000년, 2004년 리콜 은폐
미츠비시 자동차가 1977년부터 약 23년간에 걸쳐, 10차종 이상의 합계 18건, 약 69만 대에 이르는 교통성 고발이 발각되었다. 내부고발 내용은 비리의 요점을 찔렀으며, 어떻게 조사를 진행해야 하는지, 어디에 자료나 정보가 숨겨져 있는지, 어떻게 은폐 공작을 간파해야 하는지까지 지시하는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품질보증부의 탈의실의 빈 로커를 조사하라', '본사와 오카자키의 정보를 대조하라' 라는, 너무나도 구체적인 정보였다. 운수성에 의하면, 미츠비시 자동차공업은 소비자로부터의 클레임 정보를 본사의 품질보증부에 의해 10단계로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클레임 정보를 운수성에 신고 가능한 정보는 1-3 단계까지 'P마크'를, 운수성에 알려지고 싶지 않은 정보인 4-10 단계에는 은닉의 의미로 'H마크'를 붙여 구분했다. 정기 감사 때는 H마크의 클레임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중관리에 의한 정보구분은 1977년부터 이루어졌으며, 품질정보관리시스템을 도입한 1992년 이후에는 컴퓨터 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로 분류하고 있었다. 또, 리콜 제도가 시행된 30년에 걸쳐 운수성에 결함을 신고하지 않고 소비자에게 연락해 회수,수리하는 「얌체 수리」도 행해지고 있었다. 클레임 정보는 '엔진 관련 부품의 크랭크샤프트의 볼트에 결함이 있어서 엔진이 정지한다', 연료 탱크의 캡이 손상되어 연료가 샌다', RVR의 전동 슬라이드 도어가 고장 난다'등 이었다. 일련의 리콜 은폐로 결함 차량을 방치한 결과, 2000년 6월에는 구마모토 시내에서 브레이크 결함으로 파제로가 승합차를 추돌하여 승합차에 타고 있던 2명이 전치 2주의 사고입는 일이 발생했다. 이 리콜 은폐사건에 책임을 지고, 당시의 대표이사 사장이었던 카와조에 카츠히코가 2000년 8월 28일에 인책사임할 의향을 밝히고 9월 8일의 정식 발표를 거쳐 11월 1일자로 사임했다.[26] 같은 해 8월 27일에는 경시청 교통수사과 등이 도로운송차량법 위반 혐의로 미쓰비시자동차 본사와 오카자키 공장(아이치현) 등 5곳을 가택 수색했다.[27] 도쿄 지방검찰청은 다음 해인 2001년 4월 25일, 1999년의 운수성의 출입검사에서 약 1만 300건의 불량 정보를 숨긴 혐의로, 미츠비시자동차의 우사미 타카시 부사장등을 도로운송차량법 위반, 허위 보고용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부사장등은 5월 8일, 도쿄 간이재판소에서 벌금 20만엔, 법인으로서의 미츠비시자동차도 동일한 40만엔의 약식 명령을 받았다. 국토교통성은 모든 자동차 결함 정보를 공개하도록 요구했지만 1997년 이전의 불량 정보를 계속 은폐하고 클러치 및 허브 결함 대책을 취하지 않았다. 리콜 은폐 사건으로 미츠비시 자동차는 시장의 신뢰를 잃어 판매량이 급감소했다. 최고경영자로 자본제휴처인 다임러크라이슬러에서 롤프 이클로트를 영입해 경영재건을 시도하지만 2002년 대형차량(더 그레이트, 슈퍼그레이트, 에어로버스, 에어로퀸, 에어로스타, 에어로킹 등)의 타이어 탈락사고가 발생하면서 구조상 결함과 추가 리콜 은폐 의혹이 짙게 일고 있다.[28] 2004년에는 2000년의 리콜 은폐를 뛰어넘는 74만대의 리콜 은폐가 발각되어 2004년 4월 22일 미츠비시 자동차공업의 최대 주주였던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재정 지원의 중단을 발표했다. 미츠비시 자동차의 사장이 었던 에크로트가 4월 26일자로 사임했다. 2004년 5월 6일, 대형 트레일러의 타이어 탈락 사고로, 미츠비시후소 전회장 우사미나 전 상무등 7명이 카나가와현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달 27일에 요코하마구 검찰청·요코하마 지방검찰청은 우사미등 5명과 법인으로서의 미츠비시 자공을 기소했다. 게다가 6월 10일에는 다른 사고로 미츠비시의 카와조에 전 사장과 우사미등 전 임원 6명이, 카나가와현 경찰·야마구치현 경찰에 체포되었다.위 사건으로 미츠비시 자동차공업 및 미츠비시후소는 차량 입찰에서 지명 정지와 형식 심사가 엄격해지는 제재 조치를 받았다.[29] 2006년 9월에는 이용자로부터 전해진 오류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신품질정보 시스템의 도입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오류의 원인 규명에 있어서 통계 분석이 신속해지고 판매회사에서 수리의 절차와 견적 조회 등을 가능하게 하여 품질 개선을 신속화하고 있다고 했다.[30] 그러나, 2005년 2월에 파악하고 있던 결함을, 2012년에 국토교통성에 내부 고발될 때까지 리콜하지 않았다. 2016년 4월 20일에는 10·15 모드 연비와 JC08 모드의 연비 위장과 그 후에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본 사건은 형사재판이 되어, 모든 것이 미츠비시자동차 및 미츠비시후소측의 유죄로 확정 판결이 내려졌다.
용접 문제로 인한 리콜
미츠비시 자동차공업은 2020년 5월 14일, 로어암의 용접 문제로 인해 합계 1506대의 파제로 차량의 리콜을 국토 교통성에 신고했다. 대상 차량의 제작기간은 2016년 10월 26일~2018년 2월 26일이다. 불량은 전륜 완충장치의 우측 로어암에서 용접 공정에 부품 고정이 불안정하여 용접 위치가 어긋나고 용접 강도가 떨어지며 그로 인해 제동시 부하에 의해 용접부위가 벗겨져 주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개선조치로서 모든 차량의 우측 로어암을 교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오류 건수는 0건으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2016년 10월 7일~2018년 4월 30일의 기간 동안 교환 수리용 부품으로 출하되어 장착된 차량에 대해서도 동일한 리콜을 실시한다.[31]
5종 리콜
미츠비시 자동차는 9월 3일, 과열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5종의 차에한하여, 국토 교통성에 리콜(회수·무상 수리)을 신고했다. 대상이 되는 것은 미츠비시 미니 택시, 타운 박스, 타운 박스와이드, 닛산 클리퍼, 클리퍼 리오로 2008년 12월 14일부터 2013년 12월 27일까지 제조수량이 45만 6603대이다. 대상차량은 엔진냉각계 라디에이터 챔버(냉각수 내의 기포를 분리하기 위한 장치)의 강도가 부족해 적재상태에서 고속·고회전 운전과 경사로 운전 직후에 엔진정지를 반복하는 주행을 계속할 경우 균열이 발생하여 냉각수가 누출될 수 있다. 문제가 있는 상태로 주행을 계속하면 과열 현상이 발생하고 최악의 경우 엔진이 정지하여 재가동이 불가능해질 우려가 있다. 리콜 대상 차량과 라디에이터 챔버를 확인하고 대책 전품의 경우에는 대책품과 교환하는 개선조치를 취했다. 문제는 349건 발생,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32]
연비조작
과로사 2020년 6월, 미츠비시 자동차에 근무하고 있던 남성 사원(당시 47세)이 2019년 2월에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장시간 노동에 의해 발병한 정신 질환이 원인이었다고 해서, 미타 노동기준 감독서가 산재로 인정한것이 밝혀졌다. 유족의 대리인 변호사에 의하면, 남사원은 1993년에 신규 졸업자로 미츠비시 자동차에 입사했고 엔지니어로서 오랫동안 상품개발에 종사하고 있었다. 2018년 1월부터 경험이 없었던 상품기획부에 배속되어 닛산 자동차와 공동 개발한 경차(eK왜건·eK크로스)의 상품기획을 담당했다. 살고 있던 사원기숙사에서 평일에도 회사의 컴퓨터로 일을 했으며, 휴일에 아내와 딸이 있는 자택에 돌아갔을 때도 근처 도서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양사의 의향을 조정하는 업무에 종사하는 가운데, 사이에 끼여 강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2019년 2월 7일, 남자 직원은 기숙사에서 연탄 자살하였다.[33] 유족으로부터 산업재해 신청을 받아 근로기준감독서가 조사한 결과 숨지기 직전 한 달 잔업시간이 과로사라인 이라 부르는 100시간을 넘은 139시간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남성 사원은 휴일에도 개인 컴퓨터를 사용해 일하는 등, 실제의 노동 시간은 한층 더 길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건강보험조합에서 지급받은 스마트워치 기록에 따르면 사망 전 1개월 중 22일은 수면시간이 6시간도 미치지 못했다.미타 노동 기준 감독서는 남성 사원이 자살한 것은 잔업이 급증하는 한 결과 정신 질환을 발병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해서, 2020년 5월 28 일자로 산업 재해라고 인정했다.[34]
동영상
각주
- ↑ 두산백과, 〈미츠비시 자동차〉, 《네이버 지식백과》
- ↑ 〈アライアンス 2022: 年間100億ユーロのシナジー創出を目指し年間販売台数1,400万台、売上高合計2,400億ドルを見込む〉, 《닛산뉴스룸》, 2017-09-15
- ↑ 佐藤勇二 Wikipedia - https://ja.wikipedia.org/wiki/%E4%BD%90%E8%97%A4%E5%8B%87%E4%BA%8C
- ↑ 4.0 4.1 〈韓国に技術提供した三菱、現代車に劣勢で欧州生産工場閉鎖の“衝撃”〉, 《중앙일보》, 2012-02-27
- ↑ 久保富夫 위키백과 - https://ja.wikipedia.org/wiki/%E4%B9%85%E4%BF%9D%E5%AF%8C%E5%A4%AB
- ↑ 〈ランサーエボリューションVI 「トミー・マキネン エディション」〉, 《미츠비시자동차 기업 공식홈페이지》, 1999-12-10
- ↑ 〈ロルフ・エクロートが社長・CEOに正式就任〉, 《미츠비시자동차 기업 공식홈페이지》, 2002-06-25
- ↑ 〈「モコ」をマイナーチェンジ〉, 《닛산뉴스》, 2004-02-12
- ↑ 〈“クライスラー、三菱自とのエンジン合弁生産を打ち切り”〉, 《로이터》, 2009-09-11
- ↑ 〈[https://www.mitsubishi-motors.com/publish/pressrelease_jp/corporate/2013/news/detaildb05.html ルノー・日産アライアンスと三菱自動車 広範囲に及ぶグローバルな商品・技術における協力関係を検討]〉, 《미츠비시자동차 기업 공식홈페이지》, 2019-11-05
- ↑ 〈ルノー・日産アライアンスと三菱自動車 広範囲に及ぶグローバルな商品・技術における協力関係を検討〉, 《닛산뉴스》, 2013-11-05
- ↑ Chris Bruce, 〈三菱自動車、アメリカにある唯一の工場閉鎖へ 売却先見つからず〉, 《허핑턴포스트》, 2016-07-13
- ↑ 小松哲也, 〈三菱 ランサー 次期車開発取りやめ…相川哲郎社長〉, 《리스폰스》, 2016-02-03
- ↑ 〈[https://www.mitsubishi-motors.com/publish/pressrelease_jp/corporate/2016/news/detailg513.html 日産自動車と三菱自動車、戦略的アライアンスを締結 日産、2,370億円で三菱自動車株34%を取得へ]〉, 《미츠비시자동차 기업 공식홈페이지》, 2016-05-12
- ↑ 〈浦和、一部株式を三菱重工が取得。日産自動車とのクロスオーナーシップ抵触を回避へ〉, 《풋볼채널》, 2016-10-31
- ↑ 〈日産・三菱自、車台を共通化-19年にも新型SUVから〉, 《일간공업신문》, 2016-12-22
- ↑ 〈日産にも措置命令 三菱自燃費不正、対応遅れ指摘〉, 《일본경제신문》, 2017-01-27
- ↑ 〈[https://www.mitsubishi-motors.com/jp/newsrelease/2017/detail5130.html 三菱自動車、次の100年に向けて新ブランド・メッセージ “Drive your Ambition”を策定]〉, 《미츠비시자동차 기업 공식홈페이지》, 2017-10-25
- ↑ 〈MAI株式会社による当社株式に対する公開買付けの結果並びに主要株主及びその他の関係会社の異動に関するお知らせ〉, 《菱自動車工業株式会社》, 2018-03-21
- ↑ 前川浩之、嶋田圭一郎, 〈慣例に引きずられる技能実習生 連携取れぬ現場と法〉, 《아사히신문》, 2018-05-25
- ↑ 〈ゴーン会長ら逮捕 約50億円の報酬過少申告の疑い〉, 《일본경제신문》, 2018-11-19
- ↑ レスポンス編集部, 〈三菱自動車、欧州市場への新型車投入を凍結〉, 《레스폰스》, 2020-07-28
- ↑ 23.0 23.1 三菱自動車工業 위키백과 - https://ja.wikipedia.org/wiki/%E4%B8%89%E8%8F%B1%E8%87%AA%E5%8B%95%E8%BB%8A%E5%B7%A5%E6%A5%AD
- ↑ 두산백과, 〈GDI엔진〉, 《네이버 지식백과》
- ↑ 三菱自動車工業 위키백과 - https://ja.wikipedia.org/wiki/%E4%B8%89%E8%8F%B1%E8%87%AA%E5%8B%95%E8%BB%8A%E5%B7%A5%E6%A5%AD
- ↑ 리스폰스 편집부, 〈リコール隠し引責、三菱河添社長がついに辞任〉, 《리스폰스》, 2000-08-28
- ↑ 리스폰스 편집부, 〈ついに! 三菱リコール隠しで強制捜査〉, 《리스폰스》, 2000-08-28
- ↑ 三菱リコール隠し위키백과 - https://ja.wikipedia.org/wiki/%E4%B8%89%E8%8F%B1%E3%83%AA%E3%82%B3%E3%83%BC%E3%83%AB%E9%9A%A0%E3%81%97
- ↑ 〈三菱ふそうトラック・バス(株)に係る厳格な自動車型式審査の実施について〉, 《国土交通省》, 2004-05-11
- ↑ 〈三菱自動車、新品質情報システムを導入〉, 《미츠비시자동차 기업 공식홈페이지》, 2006-09-11
- ↑ 椿山和雄, 〈三菱自動車、「パジェロ」計1506台をリコール。制動時に走行が不安定になるおそれ〉, 《카워치》, 2020-05-14
- ↑ 纐纈敏也, 〈三菱自動車、ミニキャブ など45万台をリコール オーバーヒートのおそれ〉, 《리스폰스》, 2020-09-03
- ↑ 滝沢卓、岡林佐和, 〈三菱自動車社員自殺、労災と認定 在宅で長時間労働続く〉, 《아사히신문》, 2020-06-17
- ↑ 〈三菱自動車の社員が自殺、長時間残業---在宅勤務が推奨される中で〉, 《레스포스》, 2020-06-18
참고자료
- 미츠비시자동차 기업 공식홈페이지 - http://www.mitsubishi-moto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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