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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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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Mazda Motor Corporation, マツダ株式会社)
마쓰다(Mazda Motor Corporation, マツダ株式会社)

마쓰다(Mazda Motor Corporation, マツダ株式会社)는 일본의 자동차 브랜드이다.

개요

마쓰다는 자동차 및 부품의 제조·판매사업의 자동차 브랜드이다. 본사 소재지는 히로시마현 아키군 후츄마치 신지 3-1이다. 2019년도 전 세계 판매대수는 142만 대이다. 로터리 엔진을 탑재한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던 것 외에 로드스터의 2인승 소형 오픈 스포츠카 생산 누계 세계 제일로 기네스 세계 기록의 인정을 받고 있다.[1] 1991년에는 일본 메이커로서는 첫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의 종합 우승을 거뒀다.[2] 2000년대 이후, 주행 성능과 디자인을 특색으로 한 자동차 만들기에 특화한 전략을 전략을 세워 향후에는 고객과의 사이에 강한 유대를 가진 프리미엄 브랜드를 목표로 하고 있다.[3][4] 1979년 이래 포드와의 제휴 관계가 길어, 1996년 5월에는 포드의 산하에 들어가 플랫폼이나 생산 시설 공유가 진행되었지만, 리먼·쇼크 이후 포드의 경영이 악화된 적도 있어, 2015년 9월에 완전하게 그룹으로부터 독립했다.[5] 2015년 5월에는 도요타 자동차와 중장기적인 제휴 관계를 맺는 것을 발표하고, 2017년 8월에는 업무자본 제휴를 맺기로 합의했다.[6] 서로 500억 엔씩 주식을 취득해 토요타가 마쓰다의 제2위 대주주가 되었다.[7] THS-Ⅱ의 공급이나, 전기자동차개발 회사와 북미 공장의 공동 설립 등, 양 회사는 급속히 거리를 좁혔다. 2018년 5월에는 일본내 생산 누계 5000만대를 달성했다. 일본 메이커에서는 토요타, 닛산의 뒤를 이어 3번째 기록이다. 창업은 1920년 코르크를 생산하는 동양(東洋) 코르크 공업 주식회사로 시작했다. 1927년부터 동양 공업 주식회사를 정식 회사명으로 했지만 1984년에 브랜드명에 맞추어 마쓰다 주식회사로 개칭했다. 영어 표기는 MAZDA이다. 사실상의 창업자인 마츠다 쥬지로의 성과 자혜, 이성, 조화의 신을 의미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프라 마스다(Ahura Mazdā)를 따서, 자동차 산업의 광명이 되기를 바라며 붙여졌다.[8]

역사

1920
1920년 1월 30일, 히로시마시 나카지마 신마치 10번지에 마츠다의 시작이 되는 동양 코르크 공업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키요타니(清谷) 상회라고 하는 1890년 설립한 코르크의 제조 및 판매를 하는 기업의 경영이 악화되어 주된 융자원이었던 히로시마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융자의 회수와 사업의 존속을 도모하는 방책으로서 개인경영에서 회사조직으로 고치는 형태로 설립된 회사였다. 설립에는 당시의 히로시마의 주요한 재계인이 참가해, 초대 사장에는 히로시마 저축은행장인 가이즈카 신파치가 취임했다. 그러나 가이즈카가 사임을 신청하고 다음해인 1921년 3월, 이사 중 유일하게 경영을 알고있던 마츠다 시게지로가 코르크 마개를 제조할 때에 나오는 쓰레기 코르크에 주목해 히로시마 고등 공업학교와의 연구에서 가열 제법에 의한 압착 코르크판을 상품화해 폐재로부터 부가가치가 높은 코르크 제품의 제조에 성공한다. 해군으로부터 대량의 수주를 얻어 실적을 회복해, 도쿄나 오사카에도 출장소를 마련해 적극적인 경영을 시작했다. 그러나 1923년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으로 도쿄 출장소의 많은 외상매출금의 회수가 불가하게 되어 경영에 큰 타격을 받았다. 전부터 마츠다 시게지로와 친분이 있던 히질 콘체른 총수의 노구치 준으로부터의 융자로 파산은 피했지만, 직원의 반을 해고하는 사태에까지 몰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1925년 12월의 심야의 화재로 인해 코르크 공장이 전소되어 버린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마츠다 시게지로는 코르크 사업에서 자신이 자랑으로 여기는 기계 사업에의 진출을 결심한다. 구레 해군 공창장의 고도 타쿠오에게 지원을 의뢰해 일본 제강소를 통한 주문을 받아낸다. 자금면에서는 노구치가 보증인이 되어 게이비(藝備)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다. 1927년에는 회사명을 동양 공업 주식회사로 개칭했다. 1928년 초부터 일본제강소나 우품조선소등의 하청공장으로서 해군관계의 병기나 기계, 부품의 제조를 시작한 동양공업은 같은 해 10월에 히로 해군공장의 지정공장에, 다음해인 1929년 1월에 치세보 해군공장 및 구레 해군공장의 지정공장이 되어, 항공기의 엔진이나 프로펠러, 군함의 정밀기계등을 수주를 얻었다. 1929년 8월에는 해군성 구매 명부에 등록되어 제2차 하청에서 각 해군 공장의 제1차 하청 공장의 지위를 확립했다.
1930
동양공업은 군공장의 하청형태로 기계사업에 진출했지만 군으로부터의 주문은 소량 다품종이어서 양산을 통한 비용절감을 꾀하기 어렵다는 고민이 있었다. 독자적인 제품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마츠다 시게지로는 최종적인 목표를 자동차 제조에 두면서도 우선은 오토바이에서 손을 대기로 해 1929년부터 개발에 들어가 1930년에 30대로 판매를 시작했다. 1930년에는 삼륜 트럭의 개발에 착수했다. 오토바이에서 바로 사륜자동차 제조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미와트럭으로 실적을 쌓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또, 히로시마시 요시시마쵸의 공장이 비좁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2020년 기준 본사 소재지인 히로시마현 아키군 후츄쵸의 토지를 취득했다. 마츠다 시게지로의 장남인 마츠다 쓰네지가 레이아웃을 담당하여 미와트럭을 중심으로 설계된 신공장이 완성되었다. 코르크 제품과 기계공업 사업의 중심이었던 동양공업에게 미와트럭 시장의 진출은 미지수였기 때문에, 노구치의 알선으로 동양공업이 생산하는 미와트럭을 미츠비시상사가 총판으로 하는 계약을 맺었다. 1931년 10월, 후츄의 신공장에서 삼륜 트럭의 마츠다호 DA형의 생산을 개시했다. 군수경기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던 차에, 지금까지의 삼륜 트럭에는 없는 후퇴 기어나, 커브를 부드럽게 돌 수 있도록 후륜에 디퍼렌셜 기어를 장비한 DA형은 미츠비시 상사의 전국적인 판매망과 함께 호평을 받았다. 개량형 DB형을 발매한 다음해인 1932년에는 국내 시장 점유율 25%를 획득했다. 매출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마쓰다호는 해외에도 수출되었다. 1935년 10월 한반도에서 대규모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던 노구치로부터 의뢰를 받아 개발한 착암기를 처음으로 납입하고 1929년부터 사내용으로 제조하고 있던 공작기계의 외판도 시작했다. 1936년에는 미츠비시상사와의 판매 계약을 해지해, 오토 삼륜은 동양 공업의 직매제로 판매되었다. 이 무렵에는 삼륜 트럭의 다음 상품으로 사륜 자동차의 검토를 시작했다. 1936년 이사회에서 소형 4륜자동차의 제조가 결의되어 영국의 오스틴7을 구입하여 연구를 개시했다. 게다가 독일차의 오펠 37년식이나 영국의 MG37년식을 구입하고 최신의 프레스기를 비롯한 각종 설비도 미국에서 매입한다. 1940년에는 소형 4륜자동차의 시작차를 완성시켜 생산체제도 정비되고 있었지만 이 무렵 이미 동양공업은 군사체제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생산은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1940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 내 조직이 총력전 체제로 재편성되어 가는 가운데 동양 공업은 육군 고쿠라 공창으로부터 38식 보병총과 92식 기병총의 생산을 통보받았다. 자동차야말로 전시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며 거절했지만 인정받지 못해 연말에는 부품생산이 시작되었다. 1938년 1월에는 군수공업동원법에 의해 육해군 공동 관리 공장으로 지정되어 군부의 직접 관리를 받게 되었다. 육군대신에 의한 보병총 생산 명령을 받은 동양 공업은 1940년에 99식 단소총의 조립을 시작해 공장이 완성된 다음해인 1941년부터는 본격 생산을 개시했다. 오 해군공창에서는 폭탄, 수뢰, 신관 등의 제조 명령을 받았다. 군국주의의 흐름이 군수품 확보로 작용하는 가운데, 민생용품 생산은 압박을 받아 상공성에 의해 삼륜트럭 생산은 동양공업, 발동기제조(현 다이하츠공업), 일본 내연기로 세 회사에만 허가되었다. 그러나 그 후 삼륜 트럭의 생산이 일시중지 되는 등 생산 대수가 극도로 침체되었다. 1943년 10월에는 삼륜 트럭의 생산 대수는 제로가 되어 종전까지 삼륜 트럭 부문은 실질적으로 기능을 정지했다. 1943년의 상반기에는 전시금융금고가 동양공업주를 취득하여 일본질소비료에 이은 제2위의 대주주가 되었고, 또한 같은 해 하반기에 일본질소비료가 보유한 주식을 전시금융금고에 양도함으로써 자본면에서도 보다 강한 전시통제 하에 놓였다. 다음해인 1944년 1월, 병기 증산을 목적으로 전년에 시공된 군수회사법에 근거해 동양 공업은 군으로부터 군수 회사로 지정되어 군수성 중국 군수 관리부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같은 달에는 일질콘체른 총수이자 이사인 노구치 준이 사망하면서 같은 해 5월까지 일본질소비료계의 임원이 경영진에서 떠났으며 동양공업과 일본질소비료의 제휴는 종료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우치야마코르크공업과 공동출자로 동양코르크를 설립하여 조업인 코르크제조사업을 분리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동양공업이 8556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일본 내 최고 수준의 군수업체가 되었으며, 전쟁 중에 제조한 소총은 누계 58만5646정에 달했다. 1945년 8월 6일 미군에 의해 히로시마 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사이쿠초(현 나카구 오오테마치) 상공에서 폭발했다.폭심지에서 5.3km 떨어진 토요공업은 폭풍에 의해 약간의 건물이 붕괴되어 일부 공장의 지붕이 날아오르거나 대부분의 유리창이 깨지는 피해를 입었지만 전체적으로 손해는 경미하고 기계설비는 거의 흠이 없어 잔존했다. 그러나 현 당국의 명령에 의해 츠루미초(현 나카구 츠루미초)에서 건물 소개 작업에 동원되었던 73명을 포함하여 합계 119명의 사원이 목숨을 잃고 부상자는 335명에 달했다. 동양공업부속의원(현 마츠다병원)은 히로시마시의 부상자가 가장 넓은 길을 동쪽으로 향해 피난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의료기관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사태로 동양공업의 식당이나 기숙사도 의료품을 포함한 모든 물자의 문을 열고 총출동하여 구호에 임했다. 그러나 부상자는 차례로 사망해 가고, 회사 운동장에서는 연일 희생자의 사체에 기름을 끼얹어 화장이 이루어졌다. 1945년 8월 15일 동양공업은 생산을 완전하게 정지한 채 종전을 맞이했다. 기업의 존속도 알 수 없고 사내에 불안이 감도는 가운데 동양 공업은 삼륜 트럭의 생산 재개를 결정해 1945년 9월에 쿠루메시의 브리지스톤의 공장을 방문하는 등 준비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GHQ로부터도 군수 공장의 민수 생산 전환의 허가가 나옴에 따라, 종전으로부터 4개월 후에는 생산을 재개해, 마츠다호 GA형 10대를 완성시켰다. 부흥이 본격화된 1950년 무렵이 되면서 시장에서는 보다 큰 적재 능력을 가진 삼륜트럭이 요구되어 1950년 9월, 동양 공업은 업계 최초로 1톤의 적재 능력을 가진 마쓰다호 CT형을 발매한다. 1951년에 삼륜 트럭에 대한 차체 사이즈나 배기량의 제한이 철폐된 것을 받아 동년에 4.8미터의 롱 보디를 가지는 CTL형을 발매해, 다음 해인 1952년에는 2톤적 CTL형도 등장시켰다.토요 공업의 삼륜 트럭의 매출은 1949년부터 1954년까지의 사이에 1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1950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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