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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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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r0313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0월 26일 (월) 17:0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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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Mazda Motor Corporation, マツダ株式会社)
마쓰다(Mazda Motor Corporation, マツダ株式会社)

마쓰다(Mazda Motor Corporation, マツダ株式会社)는 일본의 자동차 브랜드이다.

개요

마쓰다는 자동차 및 부품의 제조·판매사업의 자동차 브랜드이다. 본사 소재지는 히로시마현 아키군 후츄마치 신지 3-1이다. 2019년도 전 세계 판매대수는 142만 대이다. 로터리 엔진을 탑재한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던 것 외에 로드스터의 2인승 소형 오픈 스포츠카 생산 누계 세계 제일로 기네스 세계 기록의 인정을 받고 있다.[1] 1991년에는 일본 메이커로서는 첫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의 종합 우승을 거뒀다.[2] 2000년대 이후, 주행 성능과 디자인을 특색으로 한 자동차 만들기에 특화한 전략을 전략을 세워 향후에는 고객과의 사이에 강한 유대를 가진 프리미엄 브랜드를 목표로 하고 있다.[3][4] 1979년 이래 포드와의 제휴 관계가 길어, 1996년 5월에는 포드의 산하에 들어가 플랫폼이나 생산 시설 공유가 진행되었지만, 리먼·쇼크 이후 포드의 경영이 악화된 적도 있어, 2015년 9월에 완전하게 그룹으로부터 독립했다.[5] 2015년 5월에는 도요타 자동차와 중장기적인 제휴 관계를 맺는 것을 발표하고, 2017년 8월에는 업무자본 제휴를 맺기로 합의했다.[6] 서로 500억 엔씩 주식을 취득해 토요타가 마쓰다의 제2위 대주주가 되었다.[7] THS-Ⅱ의 공급이나, 전기자동차개발 회사와 북미 공장의 공동 설립 등, 양 회사는 급속히 거리를 좁혔다. 2018년 5월에는 일본내 생산 누계 5000만대를 달성했다. 일본 메이커에서는 토요타, 닛산의 뒤를 이어 3번째 기록이다. 창업은 1920년 코르크를 생산하는 동양(東洋) 코르크 공업 주식회사로 시작했다. 1927년부터 동양 공업 주식회사를 정식 회사명으로 했지만 1984년에 브랜드명에 맞추어 마쓰다 주식회사로 개칭했다. 영어 표기는 MAZDA이다. 사실상의 창업자인 마츠다 쥬지로의 성과 자혜, 이성, 조화의 신을 의미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프라 마스다(Ahura Mazdā)를 따서, 자동차 산업의 광명이 되기를 바라며 붙여졌다.[8]

역사

1920
1920년 1월 30일, 히로시마시 나카지마 신마치 10번지에 마츠다의 시작이 되는 동양 코르크 공업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키요타니(清谷) 상회라고 하는 1890년 설립한 코르크의 제조 및 판매를 하는 기업의 경영이 악화되어 주된 융자원이었던 히로시마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융자의 회수와 사업의 존속을 도모하는 방책으로서 개인경영에서 회사조직으로 고치는 형태로 설립된 회사였다. 설립에는 당시의 히로시마의 주요한 재계인이 참가해, 초대 사장에는 히로시마 저축은행장인 가이즈카 신파치가 취임했다. 그러나 가이즈카가 사임을 신청하고 다음해인 1921년 3월, 이사 중 유일하게 경영을 알고있던 마츠다 시게지로가 코르크 마개를 제조할 때에 나오는 쓰레기 코르크에 주목해 히로시마 고등 공업학교와의 연구에서 가열 제법에 의한 압착 코르크판을 상품화해 폐재로부터 부가가치가 높은 코르크 제품의 제조에 성공한다. 해군으로부터 대량의 수주를 얻어 실적을 회복해, 도쿄나 오사카에도 출장소를 마련해 적극적인 경영을 시작했다. 그러나 1923년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으로 도쿄 출장소의 많은 외상매출금의 회수가 불가하게 되어 경영에 큰 타격을 받았다. 전부터 마츠다 시게지로와 친분이 있던 히질 콘체른 총수의 노구치 준으로부터의 융자로 파산은 피했지만, 직원의 반을 해고하는 사태에까지 몰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1925년 12월의 심야의 화재로 인해 코르크 공장이 전소되어 버린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마츠다 시게지로는 코르크 사업에서 자신이 자랑으로 여기는 기계 사업에의 진출을 결심한다. 구레 해군 공창장의 고도 타쿠오에게 지원을 의뢰해 일본 제강소를 통한 주문을 받아낸다. 자금면에서는 노구치가 보증인이 되어 게이비(藝備)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다. 1927년에는 회사명을 동양 공업 주식회사로 개칭했다. 1928년 초부터 일본제강소나 우품조선소등의 하청공장으로서 해군관계의 병기나 기계, 부품의 제조를 시작한 동양공업은 같은 해 10월에 히로 해군공장의 지정공장에, 다음해인 1929년 1월에 치세보 해군공장 및 구레 해군공장의 지정공장이 되어, 항공기의 엔진이나 프로펠러, 군함의 정밀기계등을 수주를 얻었다. 1929년 8월에는 해군성 구매 명부에 등록되어 제2차 하청에서 각 해군 공장의 제1차 하청 공장의 지위를 확립했다.
1930
동양공업은 군공장의 하청형태로 기계사업에 진출했지만 군으로부터의 주문은 소량 다품종이어서 양산을 통한 비용절감을 꾀하기 어렵다는 고민이 있었다. 독자적인 제품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마츠다 시게지로는 최종적인 목표를 자동차 제조에 두면서도 우선은 오토바이에서 손을 대기로 해 1929년부터 개발에 들어가 1930년에 30대로 판매를 시작했다. 1930년에는 삼륜 트럭의 개발에 착수했다. 오토바이에서 바로 사륜자동차 제조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미와트럭으로 실적을 쌓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또, 히로시마시 요시시마쵸의 공장이 비좁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2020년 기준 본사 소재지인 히로시마현 아키군 후츄쵸의 토지를 취득했다. 마츠다 시게지로의 장남인 마츠다 쓰네지가 레이아웃을 담당하여 미와트럭을 중심으로 설계된 신공장이 완성되었다. 코르크 제품과 기계공업 사업의 중심이었던 동양공업에게 미와트럭 시장의 진출은 미지수였기 때문에, 노구치의 알선으로 동양공업이 생산하는 미와트럭을 미츠비시상사가 총판으로 하는 계약을 맺었다. 1931년 10월, 후츄의 신공장에서 삼륜 트럭의 마츠다호 DA형의 생산을 개시했다. 군수경기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던 차에, 지금까지의 삼륜 트럭에는 없는 후퇴 기어나, 커브를 부드럽게 돌 수 있도록 후륜에 디퍼렌셜 기어를 장비한 DA형은 미츠비시 상사의 전국적인 판매망과 함께 호평을 받았다. 개량형 DB형을 발매한 다음해인 1932년에는 국내 시장 점유율 25%를 획득했다. 매출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마쓰다호는 해외에도 수출되었다. 1935년 10월 한반도에서 대규모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던 노구치로부터 의뢰를 받아 개발한 착암기를 처음으로 납입하고 1929년부터 사내용으로 제조하고 있던 공작기계의 외판도 시작했다. 1936년에는 미츠비시상사와의 판매 계약을 해지해, 오토 삼륜은 동양 공업의 직매제로 판매되었다. 이 무렵에는 삼륜 트럭의 다음 상품으로 사륜 자동차의 검토를 시작했다. 1936년 이사회에서 소형 4륜자동차의 제조가 결의되어 영국의 오스틴7을 구입하여 연구를 개시했다. 게다가 독일차의 오펠 37년식이나 영국의 MG37년식을 구입하고 최신의 프레스기를 비롯한 각종 설비도 미국에서 매입한다. 1940년에는 소형 4륜자동차의 시작차를 완성시켜 생산체제도 정비되고 있었지만 이 무렵 이미 동양공업은 군사체제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생산은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1940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 내 조직이 총력전 체제로 재편성되어 가는 가운데 동양 공업은 육군 고쿠라 공창으로부터 38식 보병총과 92식 기병총의 생산을 통보받았다. 자동차야말로 전시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며 거절했지만 인정받지 못해 연말에는 부품생산이 시작되었다. 1938년 1월에는 군수공업동원법에 의해 육해군 공동 관리 공장으로 지정되어 군부의 직접 관리를 받게 되었다. 육군대신에 의한 보병총 생산 명령을 받은 동양 공업은 1940년에 99식 단소총의 조립을 시작해 공장이 완성된 다음해인 1941년부터는 본격 생산을 개시했다. 오 해군공창에서는 폭탄, 수뢰, 신관 등의 제조 명령을 받았다. 군국주의의 흐름이 군수품 확보로 작용하는 가운데, 민생용품 생산은 압박을 받아 상공성에 의해 삼륜트럭 생산은 동양공업, 발동기제조(현 다이하츠공업), 일본 내연기로 세 회사에만 허가되었다. 그러나 그 후 삼륜 트럭의 생산이 일시중지 되는 등 생산 대수가 극도로 침체되었다. 1943년 10월에는 삼륜 트럭의 생산 대수는 제로가 되어 종전까지 삼륜 트럭 부문은 실질적으로 기능을 정지했다. 1943년의 상반기에는 전시금융금고가 동양공업주를 취득하여 일본질소비료에 이은 제2위의 대주주가 되었고, 또한 같은 해 하반기에 일본질소비료가 보유한 주식을 전시금융금고에 양도함으로써 자본면에서도 보다 강한 전시통제 하에 놓였다. 다음해인 1944년 1월, 병기 증산을 목적으로 전년에 시공된 군수회사법에 근거해 동양 공업은 군으로부터 군수 회사로 지정되어 군수성 중국 군수 관리부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같은 달에는 일질콘체른 총수이자 이사인 노구치 준이 사망하면서 같은 해 5월까지 일본질소비료계의 임원이 경영진에서 떠났으며 동양공업과 일본질소비료의 제휴는 종료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우치야마코르크공업과 공동출자로 동양코르크를 설립하여 조업인 코르크제조사업을 분리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동양공업이 8556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일본 내 최고 수준의 군수업체가 되었으며, 전쟁 중에 제조한 소총은 누계 58만5646정에 달했다. 1945년 8월 6일 미군에 의해 히로시마 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사이쿠초(현 나카구 오오테마치) 상공에서 폭발했다.폭심지에서 5.3km 떨어진 토요공업은 폭풍에 의해 약간의 건물이 붕괴되어 일부 공장의 지붕이 날아오르거나 대부분의 유리창이 깨지는 피해를 입었지만 전체적으로 손해는 경미하고 기계설비는 거의 흠이 없어 잔존했다. 그러나 현 당국의 명령에 의해 츠루미초(현 나카구 츠루미초)에서 건물 소개 작업에 동원되었던 73명을 포함하여 합계 119명의 사원이 목숨을 잃고 부상자는 335명에 달했다. 동양공업부속의원(현 마츠다병원)은 히로시마시의 부상자가 가장 넓은 길을 동쪽으로 향해 피난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의료기관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사태로 동양공업의 식당이나 기숙사도 의료품을 포함한 모든 물자의 문을 열고 총출동하여 구호에 임했다. 그러나 부상자는 차례로 사망해 가고, 회사 운동장에서는 연일 희생자의 사체에 기름을 끼얹어 화장이 이루어졌다. 1945년 8월 15일 동양공업은 생산을 완전하게 정지한 채 종전을 맞이했다. 기업의 존속도 알 수 없고 사내에 불안이 감도는 가운데 동양 공업은 삼륜 트럭의 생산 재개를 결정해 1945년 9월에 쿠루메시의 브리지스톤의 공장을 방문하는 등 준비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GHQ로부터도 군수 공장의 민수 생산 전환의 허가가 나옴에 따라, 종전으로부터 4개월 후에는 생산을 재개해, 마츠다호 GA형 10대를 완성시켰다. 부흥이 본격화된 1950년 무렵이 되면서 시장에서는 보다 큰 적재 능력을 가진 삼륜트럭이 요구되어 1950년 9월, 동양 공업은 업계 최초로 1톤의 적재 능력을 가진 마쓰다호 CT형을 발매한다. 1951년에 삼륜 트럭에 대한 차체 사이즈나 배기량의 제한이 철폐된 것을 받아 동년에 4.8미터의 롱 보디를 가지는 CTL형을 발매해, 다음 해인 1952년에는 2톤적 CTL형도 등장시켰다.토요 공업의 삼륜 트럭의 매출은 1949년부터 1954년까지의 사이에 1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1950
삼륜 트럭의 대형화와 다양화를 진행시키는 한편 동양 공업은 소형 사륜 트럭의 개발도 병행하고 있었다. 1950년에 동양 공업 최초의 4륜차가 되는 소형 4륜 트럭, CA형을 발매했다. 신개발 공랭엔진을 탑재해, 28만엔의 저가격으로 판매된 CA형이었지만, 1952년까지 35대만으로 생산이 중지되었고, 또 거의 같은 시기에 발매한 소방차의 CF형의 생산 대수도 74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4륜차 시장으로의 진출은 일단 중단되게 되었다. 1951년, 마츠다 시게지로의 장남으로 전무 마츠다 츠네츠구가 사장으로 취임했다. 1956년에는 다시 4륜차의 개발에 착수해, 1958년, 소형 4륜 트럭의 롬퍼를 발매했다. 다음 1959년에는 수냉 엔진을 탑재한 트럭의 D1100형, D1500형을 등장시켰다. 1960년 이후가 되고 나서, 일본의 모터라이제이션은 지금까지의 사업용으로부터 개인용으로 수요가의 변화가 있었고 1955년에 보도된 통상 산업성(현 경제 산업성)의 국민차 구상의 영향도 있어, 후지 중공업(현·SUBARU)의 스바루·360이나 미츠비시중공업의 미츠비시·500 등, 타사에서는 차례차례로 대중 승용차가 발매되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배경으로 동양 공업은 승용차 시장에 피라미드 비전이라고 하는 신차개발 구상을 입안했다. 이것은 국민의 소득계층 분포와 그에 대응하는 승용차의 보유구조를 피라미드형으로 보고 우선은 하층부를 차지하는 대중용 승용차부터 개척해, 국민소득 수준의 향상과 함께 한 단계씩 위의 차격의 차종을 전개해 가는 것으로, 최종적으로는 정점부인 고급차까지를 담당하는 종합 자동차 메이커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 구상에 근거해, 1959년 4월에 경승용차 개발에 착수했고 1960년 4월, 동양 공업 최초로 4륜 승용차, R360 쿠페를 발매했다. 1962년(쇼와 37년)에는 성인 4명이 탈 수 있는 패밀리 카로서 개발한 캐럴 360을 발매한다. 두 차는 대히트를 기록해 1960년부터 1962년까지의 3년간 동양 공업은 도요타 자동차, 닛산 자동차를 누르고 일본 국내 판매 대수 선두로 약진했다.
1960
다음 시장으로서 소형 승용차 내세워 1963년에 파밀리아 밴을 발매해하고 다음 해인 1964년에는 본격적인 패밀리 카로서 개발한 파밀리아 4 도어 세단을 투입했다. 그 후도 2도어, 2도어 스페셜, 패밀리 트럭 등 패밀리 시리즈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1960년부터 3년간에 걸쳐 동양공업은 자동차 생산대수에서 일본 국내 1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삼륜트럭과 경승용차였기 때문에 경영기반은 약하고 기업 규모나 수익부분에서 토요타나 닛산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통상산업성은 가까운 장래의 무역자유화에 대비한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일본 국내 자동차 메이커를 양산차(보통 승용차), 특수 승용차(고급차), 미니카(경차)의 3 그룹으로 통합시킨다는 3그룹 구상을 안고 있으며, 동양공업은 미니카 그룹이었다. 사장인 마츠다 쓰네츠구는 종합 자동차 메이커를 목표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 공업이 미니카 전업 회사가 되면서 합병을 강요당하고 경영권을 잃는 등 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회사의 독립을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마츠다 츠네츠구는 1960년, 독일인 친구로부터, 당시 서독의 NSU사와 펠릭스 반켈 박사가 이끄는 반켈사가 공동 개발한 로터리 엔진(RE)에 대한 리포트와 잡지 기사가 동봉된 편지를 받고 기술 제휴를 맺도록 권유받았다. RE가 자동차 업계 재편을 극복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가 된다고 확신한 마츠다 츠네츠구는 사내의 반대의 소리를 무시하고 기술 제휴를 진행시키는 것을 결단했다. 마츠다 츠네구 후에는, RE의 기술력으로 기업 이미지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나, RE개발의 명목으로 은행으로부터의 융자를 받기 쉬워져, 그 자금으로 통상 산업성 주도의 재편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 개발이나 설비 투자를 강화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있었다. 기술 제휴에 관한 정부의 인가가 내린 1961년 7월, 기술 연수단이 NSU에 파견되어 거기서 일정시간 가동 후에 엔진내 벽면에 발생하는 채터 마크라고 불리는 마모가 양산화를 방해하는 큰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귀국 후에 로터리 엔진 개발 위원회를 열어 NSU로부터 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시작 엔진을 완성했지만 계약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해 실용화에는 실패했다. 1963년 4월, 개발 강화를 위해 로터리 엔진 개발 위원회를 승격시킨 로터리 엔진 연구부를 설치했다. 야마모토 켄이치를 부장으로 총원 47명으로 발족해 다음 해에는 3억엔의 총공비를 들인 전용의 연구실이 준비되었다. 야마모토를 비롯한 개발진은 니혼카본과 공동으로 카본을 침윤시킨 아펙스씰을 개발하는 등 내구성 확보에 성공했다. 1967년 5월, 특허 구입으로부터 6년의 세월과 40억엔 이상의 거액을 들인 프로젝트는 RE탑재차의 코스모 스포츠의 발매로 결실을 맺었다. RE의 압도적인 동력성능과 유려하고 미래적인 디자인을 겸비한 코스모 스포츠는 이미지 리더로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그간 엔진에서 들리는 덜컹덜컹 소리때문에 덜커덩가게(バタンコ屋)라 불리던 세련되지 않은 이미지가 로터리의 마쓰다라는 최첨단 이미지를 대체했다. 기업이미지 향상은 판매증가에도 연결되어 1966년부터 2년간에 4륜차의 생산 대수는 19%나 증가했다. 코스모 스포츠에 이어 패밀리아 로터리 쿠페와 루체로터리 쿠페 등 RE를 탑재한 모델을 출시하고, 1970년에는 패밀리아 로터리 쿠페 등의 대미 수출을 개시하여 염원이었던 미국 시장에 진출하였다.
1970
1970년 동양 공업은 포드, 닛산과 공동으로 일본 자동 변속기(현 쟈트코)를 설립해 포드로부터의 강한 제의를 받아 자본 제휴 교섭에 들어갔다. 마츠다의 소형 트럭을 포드에 공급하는 업무 제휴가 결정되어 본제의 자본 제휴 교섭에 들어가려고 한 때에 사장 마츠다 츠네츠구가 사망한다. 후임에는 장남으로 부사장 마츠다 코헤이(松田耕平)가 취임해 교섭은 계속되었지만, NSU가 토요 공업과 포드의 자본 제휴는 인정할 수 없다고 반대한 데다가 닉슨·쇼크도 겹쳐 교섭은 난항에 빠진다. 서로의 골은 메워지지 않고, 1972년 3월에 교섭은 결렬에 이르렀다. 1970년, 미국에서는 배출 가스 규제를 큰폭으로 강화하는 머스키법이 발효되어 자동차 업계는 전에 없는 기술적 곤란에 직면하고 있었다. 동양공업의 RE는 혼다가 개발한 CVCC 엔진과 함께 이 규제를 달성했고, 제너럴 모터스, 토요타, 닛산도 RE의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마츠다 코헤이는 머지않아 RE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상하고 대규모 설비 증강을 결정했다. 증산 공사에 이어 RE의 새 공장 건설에 착수해 연구 개발비를 포함한 총투자액은 600억엔에 이르렀다. 이전에도 RE차의 판매는 일본 국내외에서 호조로, 특히 주요한 수출처인 미국에서는 1973년에 수출한 대수의 70% ~ 80%를 RE차가 차지할 정도였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10월부터 11월에 걸쳐 석유화학제품의 가격은 40%에서 50% 상승해 자동차 각사는 가격 인상을 실시했다. 같은 해 12월에 일본의 자동차 시장은 전년 동월 대비 75.6%로 대폭적인 침체를 기록했다. 수요의 위축을 받아 타사가 재빨리 감산체제를 갖추는 가운데, 마츠다 고헤이는 오일쇼크에 의한 물자부족은 일과성인 것으로, 구매활동이 자동차로 돌아올 때를 대비해 계속 만들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토요공업은 증산체제를 계속 취했다. 그런데 다음날인 1974년 1월, 미합중국환경보호청(EPA)이 RE는 통상의 엔진에 비해 약 50%정도 많은 가솔린을 소비한다라는 보고를 발표했다. 오일 쇼크와 이 지적의 영향이 겹친 것으로 극도의 판매 부진에 빠져, 일본 국내외에서 안는 재고 대수는 20만대까지 쌓였다. 연구개발비의 증가와 경쟁심화, 다품종 소량생산에 의한 저수익성등이 중첩되었던 점에 오일쇼크가 발생하여, 동양공업의 재무체질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통상 산업성으로부터의 요청을 받아 동양 공업의 경영 실태 조사를 진행시키고 있던 주거래 은행인 스미토모 은행은 이러한 사태를 간과할 수 없게 되어 1974년 10월, 동행 사무 관리 부장 하나오카 신헤이와 스미토모 신탁은행 법인 신탁 부장 나카무라 카즈오 등 4명을 동양 공업에 파견한다. 하나오카와 나카무라 두 사람은 다음 해인 1975년 1월의 주주 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되어, 이 이후 동양 공업의 재건은 스미토모 은행의 주도로 진행되게 되었다. 같은 달 스미토모 은행은 동양 공업의 관리를 전담하는 융자 제 2부를 신설하고 책임자에게는 전무 이소다 이치로, 부장에는 본점 영업부장으로 상무 타츠미 토오가 취임했다. 도쿄 및 오사카 두 지사 등의 토지 건물과 유가 증권 매각, 스미토모 은행을 중심으로 한 협조 융자, 감산 및 재고 일소를 목적으로 한 잉여 인원을 딜러로 파견했다. 미국 판매 회사의 분할과 코스트 컨트롤부 신설에 따른 전사적인 원가 절감 활동 개시라는 대책이 잇달아 있었다. 그러나, 1975년 10월 결산에서는 경상 적자가 173억엔에 달하고 동업 타사의 수뇌로부터 동양 공업은 도산한다라는 담화가 나오는 등, 동양 공업을 둘러싼 환경은 더욱 어려워졌다.



연혁

  • 1920년 01월 - 토요 코르크 공업 주식회사 설립, 본사는 히로시마시 나카지마 신마치 10
  • 1920년 02월 - 초대 사장으로 가이즈카 신파치가 취임
  • 1920년 06월 - 본사 및 공장을 히로시마시 요시시마쵸 234-1에 이전
  • 1921년 03월 - 2대째 사장으로 마츠다 시게지로가 취임
  • 1927년 09월 - 상호를 동양공업주식회사로 변경
  • 1928년 10월 - 광해군공장의 지정 공장이 됨
  • 1929년 01월 - 사세보 해군 공창, 구레 해군 공장의 지정 공장이 됨
  • 1929년 04월 - 공작기계 제작을 개시
  • 1929년 08월 - 해군성의 지정 공장이 됨
  • 1931년 05월 - 본사를 히로시마현 아키군 후추무라지 신지 6047로 이전
  • 1931년 07월 - 미츠비시상사와 삼륜 트럭에 관한 판매 계약을 체결
  • 1931년 10월 - 삼륜 트럭 DA형을 발매
  • 1935년 10월 - 삭암기를 첫 출하
  • 1936년 08월 - 미츠비시상사와 삼륜 트럭에 관한 국내의 판매 계약을 해제
  • 1937년 12월 - 미츠비시상사와 삼륜 트럭 수출에 관한 판매 계약을 해제
  • 1938년 01월 - 군수공업동원법에 근거하여 육해군 공동 관리 공장으로 지정
  • 1941년 07월 - 우치야마 코르크 공업소(현·우치야마 공업)에 코르크 사업의 매각을 결정
  • 1943년 10월 - 공작기계 공장 및 단조 공장이 상공성의 관리 공장으로 지정
  • 1944년 01월 - 병기 및 공작 기계 부문이 육해군의 군수 회사로 지정
  • 1945년 08월 - 히로시마 시에 원자폭탄 투하 시 본사 시설의 일부를 히로시마현에 대여하여 현청의 모든 기능이 설치됨, 같은 달 군수회사 지정 취소를 받음
  • 1946년 05월 - 법원에 건물의 일부를 대여
  • 1946년 08월 - 회사 경리 응급 조치법에 의거해 특별 경리 회사로 지정됨, 공작기계 부문이 배상 공장으로 지정
  • 1946년 12월 - 민간 병기 공장 부문이 배상 공장으로 지정
  • 1948년 07월 - 기업 재건 정비 계획에 근거해 신구 계정의 정비를 완료, 특별 경리회사 지정의 해제
  • 1949년 05월 - 도쿄, 오사카, 나고야의 각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
  • 1950년 06월 - 최초의 소형 사륜트럭 CA형 발매.
  • 1951년 12월 - 3대 사장으로 마쓰다 시게지로의 아들인 마쓰다 쓰네지가 취임
  • 1952년 04월 - 공장의 배상지정 해제
  • 1957년 01월 - 생산누계 20만대 달성
  • 1960년 05월 - 첫 양산형 승용차가 되는 마쓰다 R360 쿠페 출시
  • 1961년 02월 - NSU 및 반켈사와 로터리 엔진에 대한 기술 제휴
  • 1961년 03월 - 한국 넉다운 수출 시작
  • 1962년 03월 - 베르토네와 승용차 설계에 대한 기술 제휴
  • 1963년 01월 - 남아프리카에 녹다운 수출 시작
  • 1963년 03월 - 생산누계 100만대 달성
  • 1965년 01월 - 퍼킨스(영어판)와 디젤 엔진 제조에 관한 기술 제휴[234].
  • 1965년 05월 - 3차 자동차 시험장 완공
  • 1965년 10월 - 동양대교 개통
  • 1966년 11월 - 우품 승용차 전문공장 완공
  • 1967년 03월 - 본격 유럽 수출 시작
  • 1967년 05월 - 첫 로터리 엔진 탑재차 코스모 스포츠 출시
  • 1969년 01월 - 생산누계 300만대 달성
  • 1970년 01월 - 동양공업·닛산자동차·포드와 합작하여 '일본자동변속기주식회사'(현 지야토코) 설립
  • 1970년 04월 - 대미 수출 개시.
  • 1970년 11월 - 마쓰다 쓰네쓰구 사장의 사망에 따라 4대째 사장에 쓰네쓰구의 아들인 마쓰다 고헤이 취임
  • 1971년 02월 - MMA(마쓰다 모터 오브 아메리카) 설립
  • 1972년 11월 - 우품 제2공장 완성
  • 1972년 12월 - 생산누계 500만대 달성
  • 1974년 01월 - 필리핀 현지 조립 개시
  • 1975년 01월 - 코퍼레이트 마크를 제정(동년 4월 발매된 로드페이서부터 사용 개시).동월 태국 현지 조립 개시
  • 1977년 12월 - 5대 사장으로 야마자키 요시키가 취임해 마쓰다 고헤이는 이사회장으로 물러남으로써 동족경영은 종식되었다.
  • 1978년 01월 - 로터리 엔진 차량 생산 누계 100만대 달성
  • 1979년 06월 - 생산누계 1000만대 달성
  • 1979년 11월 - 포드가 지분 24.5%를 사들여 지분 제휴
  • 1981년 12월 - 오토라마 설립
  • 1983년 04월 - 콜롬비아 현지생산 개시
  • 1983년 07월 - 마쓰다스피드를 설립
  • 1983년 09월 - 기아차에 자본 참여
  • 1984년 05월 - 상호를 마쓰다 주식회사로 변경
  • 1984년 10월 - 마쓰다 재단 설립
  • 1984년 11월 - 6대 사장으로 야마모토 겐이치 취임
  • 1985년 01월 - 미국 생산회사 MMUC 설립
  • 1985년 08월 - 승용차 생산 누계 1000만대 달성
  • 1986년 04월 - 로터리 엔진차 생산 누계 150만대 달성
  • 1987년 04월 - 생산누계 2000만대 달성
  • 1987년 06월 - 기술연구소 요코하마 연구소 개설
  • 1987년 12월 - 스즈키와 경차에 대한 생산협력을 발표, 같은 달 7대 사장으로 후루타 도쿠마사가 취임
  • 1988년 05월 - 경영계획 마츠다·이노베이션 계획을 개시같은 달, 미국의 어바인에 연구 개발 거점 마츠다 R&D센터·어바인을 설립.
  • 1988년 10월 - 유럽에 판매회사 MME 설립
  • 1989년 02월 마쓰다아스텍, 토요에이텍 설립
  • 1989년 05월 - 유노스, 오토잠 설립
  • 1989년 07월 - 시트로엥의 수입을 개시
  • 1989년 11월 - 홋카이도 겐부치 내한 자동차 시험장 개설
  • 1990년 04월 - M2 설립
  • 1990년 05월 - 유럽에 연구개발 거점 MRE 설립
  • 1990년 12월 - 생산누계 2500만대 달성
  • 1991년 06월 - 제59회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마쓰다 787B가 종합우승
  • 1991년 11월 - 마쓰다오토를 암피니로 변경
  • 1991년 12월 - 8대 사장으로 와다 요시히로 취임
  • 1992년 02월 - 호후 제2공장 조업 개시
  • 1992년 06월 - 미국 생산회사 MMUC의 사명을 오토 얼라이언스 인터내셔널(AAI)로 개칭하고 포드와의 합작 기업화
  • 1992년 07월 - 오토라마 출자 비율 포드와 균등화
  • 1993년 12월 - 포드와의 신전략적 협력관계 구축 발표
  • 1995년 04월 - 생산누계 3000만대 달성
  • 1995년 11월 - 태국에 포드와 합작으로 오토 얼라이언스 타일랜드(AAT) 설립
  • 1996년 04월 - 암피니점을 마쓰다 암피니점으로 호칭 변경, 유노스점을 마쓰다 암피니점 또는 마쓰다점으로 통합
  • 1996년 05월 - 포드가 출자 비율을 33.4%로 끌어올리다.
  • 1996년 06월 - 9대째 사장으로 포드 출신의 헨리 D.G.월레스가 취임.
  • 1997년 06월 - 신브랜드 심볼 제정(동년 8월 발매된 7대째 카펠라부터 사용 개시).
  • 1997년 10월 - 북미 사업 통합.
  • 1997년 11월 - 10대째 사장으로 제임스·E·밀러가 취임.
  • 1998년 01월 - 사장을 변경.
  • 1998년 05월 - 태국 AAT사에서 양산 개시
  • 1999년 06월 - 미츠비시 자동차와 소형 상용차의 OEM 공급에 합의(후 2011년 9월로서 OEM 공급 해소).
  • 1999년 08월 - 보유 지야토코의 지분 전량을 닛산자동차에 매각
  • 1999년 11월 - 포드와 신형 엔진 시리즈의 공동 개발 및 분업 생산을 발표.
  • 1999년 12월 - 11대째 사장으로 마크·필즈(영어판)가 취임.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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