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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샤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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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샤와르
페샤와르 위치

페샤와르(우르두어: پشاور, 파슈토어: پېښور, 영어: Peshawar)는 파키스탄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주의 주도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인 카이바르(Khaibar) 고개의 동쪽 50km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이다. 파키스탄 제6의 도시로, 인구는 약 200만 명이다.[1]

개요

페샤와르는 파키스탄 북서부에 위치한 아프간의 주민족인 파슈툰족의 주요 도시로,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약 40km 떨어져 있다.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주의 주도이며, 한때 연방 직할 부족 지역의 주도이기도 했다. 카이버 고개 동쪽에 위치한 넓은 지역인 페샤와르 계곡에 위치한 페샤와르의 기록된 역사는 적어도 기원전 53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역사적으로는 남아시아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카이베르 고개 길목에 위치하여 쿠샨 왕조와 두라니 왕조 등의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페샤와르 지역은 기원전 2세기에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왕 에우크라티데스에 의해 합병되었으며, 2세기에는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이 푸르샤푸라에 수도를 두었다. 불교가 융성했던 이곳은 998년에 터키계 무슬림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슬람화되었고, 16세기에는 무굴 제국의 악바르에 의해 '변경 도시'라는 뜻의 페샤와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1838년 시크 왕국에 점령되었으며, 1849년 제2차 시크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페샤와르에는 아프간 난민 수용소가 세워졌고, 무자헤딘 그룹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도 파키스탄 내 파슈툰족의 문화적 수도 역할을 한다. 아프간 전쟁 이후 50만이 넘는 파슈툰 난민이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하였고, 파키스탄 내 중국 자본이 투자한 4대 경제 특구 중 하나가 설치되어 가구, 식품, 대리석 등의 2차 산업이 발달하였다. 서쪽의 카이베르 고개와 동쪽의 카불강 사이의 평원에 자리한 시가지는 중발라 히사르를 중심으로 동남쪽의 구도심과 서북쪽의 신도심으로 나뉜다. 구도심은 복잡한 골목과 바자르(시장)으로 얽혀 있으며, 모하바트 칸 모스크와 고르카트리 카라반사라이 등의 유적이 있다. 서부 페샤와르의 신도심은 일명 대학도시로 유명하다. 1912년에 세워진 이슬라미아 대학을 시작으로 페샤와르 대학, 아바스얀 대학, 간다라 대학, 쿠루투바 대학, 카이베르 의대, 사르하드 과기대 등 7개의 공립대와 10개의 사립대학이 있다. 2005년에는 여성의 고등 교육을 위한 샤히드 베나지르 부토 여대가 개교하였다.[2]

어원

페샤와르는 페르시아어로 '고지대의 요새'란 뜻이라고 하며, 파슈토어로는 페콰와르(Pekhawar) 또는 페샤와르(Peshawar)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옛 이름은 푸루샤푸라인데, 산스크리트어로 푸루샤푸라(Purushapura)는 '인간의 도시'란 뜻으로 페샤와르가 이것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지리 및 기후

페샤와르는 페샤와르 계곡의 넓은 평야에 위치해 있으며, 세 면이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펀자브 평야로 열려 있다. 이 도시는 일반적으로 간다라 평야로 알려진 계곡의 평탄한 기저에 위치해 있다.

페샤와르는 현지 스텝 기후의 영향을 받아 매우 더운 반건조 기후(Köppen BSh)를 특징으로 하며, 여름은 매우 덥고 길며 겨울은 짧고 온화하거나 서늘하다. 페샤와르의 겨울은 11월에 시작하여 3월 말에 끝나지만, 때때로 4월 중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여름은 5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이다. 가장 더운 달의 평균 최고 여름 기온은 40°C(104°F)를 넘으며, 평균 최저 기온은 25°C(77°F)이다. 가장 추운 달의 평균 최저 기온은 4°C(39°F)이며, 최고 기온은 18.3°C(64.9°F)이다.[3]

역사

페샤와르는 기원전 5세기 무렵 산스크리트어의 푸루샤푸라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오랜 역사 동안 많은 제국과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그 유구한 역사 동안 대도시로 번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단일 수도가 되지는 못하고 보통 계절 수도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326년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점령당해 마케도니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대왕의 사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간다라 양식이 발달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을 격파하고 일대를 장악한 마우리아 제국은 푸루샤푸라에서 수도 파탈리푸트라(파트나)까지 이어지는 왕의 길을 놓았고, 이는 현대의 그랜드 트렁크 로드로 이어지며 페샤와르 협곡은 2천 년간 간다라 지방의 교통 중심지로 남았다.

마우리아 제국이 쇠퇴하자, 기원전 190년 박트리아에 이어 인도-그리스 왕국이 지배했다. 다시 서기 1세기에는 수레나스 가문의 인도-파르티아 왕국령이 되었고, 그 초대 군주인 곤도파레스는 46년에 타크 이 바티 사원을 건립했다. 반세기 후에는 쿠샨 제국의 초대 군주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점령했다. 그의 손자인 카니슈카 1세의 치세인 128년경에는 여름 수도 카피사(바그람)와 함께 겨울 수도가 되었고, 전자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다. 당시 푸루샤푸라의 인구는 12만에 이르렀고, 세계 10대 도시 중 하나였다고 한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카니슈카 대왕은 시내에 카니슈카 마하비하라 사원을 세웠고, 사후에는 역대 최대 규모의 불탑 중 하나인 카니슈카 스투파가 건립되었다.

232년 바수데바 1세의 사후 쿠샨 제국은 쇠퇴하였고, 260년경 페샤와르 협곡을 침공한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는 마히비하라 사원과 카니슈카 스투파를 비롯한 불교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파괴했다. 이후 카니슈카 3세가 일대를 수복했으나, 점령당하고 또 점령당하는 기구한 운명은 끝나지 않아 5세기 초엽에는 백흉노(에프탈)가 침공하여 재건되던 도시를 다시 파괴했다. 연이은 전란으로 아프간 방면으로의 교역로가 막히며 푸루샤푸라를 비롯한 간다라 지역은 경제적으로 크게 쇠퇴했다. 그러나 카니슈카 스투파는 에프탈 군주에 의해 석조 기단 위에 목조로 재건되어 5세기 중국의 구법승 법현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 칭송했다.

520년경 간다라를 방문한 구법승 송운은 에프탈이 카피사의 군주와 대립하고 있다고 저술하였다. 한 세기 후인 630년, 카피사의 승리 이후 푸루샤푸라를 방문한 현장은 위대한 도시와 불교 기념물들이 유적으로 변한 것을 개탄하였다. 그가 저술한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당시 폐허가 된 도시는 오직 1천 가구만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소수의 승려들이 사원의 유적에 남아 있었다. 한편 푸루샤푸라는 중국 기록에서 불루사(弗樓沙) 혹은 포루사포루(布路沙布邏)로 비교적 정확히 표기되었다. 7세기 중반에는 카불의 힌두 샤히가 이 지역을 지배하였고, 10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알 마수디는 이 도시를 파라샤와르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축약되어 페샤와르가 되었다. 그 무렵부터 딜라자크 파슈툰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987년, 가즈니 왕조의 세북테킨이 카불 협곡을 장악한 후 힌두 샤히는 페샤와르로 천도하였다. 가즈니의 술탄 마흐무드는 1001년 남하하여 페샤와르 전투에서 힌두 샤히의 자야팔라를 격파하고 이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후 마흐무드는 페샤와르를 지나 16차례 인도를 원정하여 북인도 전역의 이슬람 정복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가즈니 왕조의 지배에도 이슬람화는 천천히 진행되었고, 12세기까지만 해도 페샤와르는 힌두 나트 판티 요기들의 거점으로, 이들은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에 영향을 주었다. 1179년경 구르 제국의 무함마드 고리가 페샤와르를 점령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186년 라호르까지 함락하여 가즈니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구르 제국은 곧 호라즘 왕조에 의해 멸망하였고, 후자는 다시 몽골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13세기 전반 아프간 지역의 도시들과 함께 몽골에 의해 파괴되었던 도시는 14세기 들어 델리 술탄 왕조에 의해 재건되었다. 15-16세기에는 파슈툰 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현재까지 인구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515년에는 파슈툰 부족들 중 고랴켈과 카쉬켈이 페샤와르 인근 마르단에서 기존 딜라자크 부족을 인더스 동안으로 몰아내었다. 1526년 바부르가 로디 왕조를 격파하며 일대는 무굴 제국령이 되었다. 바부르는 도시를 베그람이라 명명하였고 옛 성채를 재건하여 발라 히사르라 불렀다. 또한 그는 이곳을 바탕으로 인근 파슈툰 부족들을 공격해 복속시켰다. 그후 16세기 중반 무굴 제국 하에 교역이 안정화되며 일대는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1586년 발라 히사르의 화재 시에 낙타 천마리 분량의 물품이 소실되었던 것이 이를 반증한다.

바야지드 피르 로샨이 파슈툰 인들을 조직하여 벌인 로샤니 반란 시에 도시는 1587년까지 포위당하였고, 이를 진압한 악바르 대제는 베그람을 다시 페샤와르로 명명하였다. 그후 일대는 안정을 되찾았고, 여러 건축 사업이 이어졌다. 17세기 샤 자한의 치세에 카불 초독을 지낸 모하바트 칸 빈 알리 마르단 칸은 페샤와르에 샬리마르 정원에 이어 1630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붙힌 모스크를 세웠다. 1667년 이번에는 유수프자이 부족이 봉기하여 인더스 동안의 아톡에서 무굴 군과 맞섰고, 1672년에는 아프리디 부족이 봉기하여 카이베르 고개의 무굴 주둔군을 학살하고 통행을 막아버렸다. 분노한 아우랑제브 황제는 1674년 데칸 전선에서 돌아와 친히 반란을 진압하고 일대를 평정하였다.

1857년 세포이 항쟁 시에도 4천의 현지인 수비대는 유혈 충돌 없이 순순히 무장해제되었다. 1869년 영국 당국은 기존 도시의 서쪽에 군대 주둔지를 세워 대아프간 전초기지로 활용하였다. 동시에 시크 지배기에 훼손된 모하바트 칸 모스크의 재건과 인도 주요부와의 철도 건설이 이루어졌다. 한편 과거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은 아프간에게 개입하지 않는다면 페샤와르를 할양하겠다 제안하기도 하였으나 아프간 측이 무력 침공을 택하며 무산되었고, 결국 1893년에는 인도 제국의 외무상 모티머 듀런드가 주도한 듀랜드 라인이 그어져 페샤와르와 카이베르 고개는 아프간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1887년 빅토리아 여왕의 쥬빌리(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페샤와르에는 커닝험 시계탑이 세워졌고, 1906년에는 그녀를 기리는 빅토리아 홀이 세워져 현재 페샤와르 박물관으로 활용 중이다. 1901년 에드워즈 칼리지, 1913년의 이슬라미아 칼리지 등의 고등 교육 기관이 세워졌다.

독립 전야인 1946년부터 페샤와르 일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간디와 함께 힌두-무슬림 단일 국가를 주장하다 테러를 당하기도 했던 가파르 칸은 인도-파키스탄 분할이 현실로 다가오자 그 7주 전인 1947년 6월, 반누에서 쿠다이 키드맛가르를 포함한 지방 의회를 소집하여 파슈툰 민족국가인 파슈투니스탄 수립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이는 영국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고, 가파르 칸은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 모두에서 비난을 받았다. 결국 가파르 칸과 인도 통합파 및 파슈툰 분리파의 부재 하에 다시 열린 지방 의회에서 북서 변경주는 파키스탄에 가입하였고, 1948년 2월 독립 후 제헌의회에서 가파르 칸은 충성 서약을 하며 모하마드 알리 진나와 화해를 모색했으나 각종 이간질로 결렬되었다. 그해 5월, 가파르 칸은 첫 야당인 파키스탄 아자드 당을 조직하였으나 이내 혐의도 없이 가택 연금에 처해졌고 그의 지지자들은 밥바라 학살 등의 탄압을 당하였다.

인도-파키스탄 분할 후 폐샤와르의 힌디어 사용자이자 경제권을 쥐고 있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주민들 대부분이 떠나버렸다. 1950년대까지 페샤와르 구도심에는 16개의 문을 지닌 성벽이 남아있었다. 1960년대 페샤와르는 소련을 감시하기 위한 미국 첩보기구 CIA의 기지로 활용되었고, 페샤와르에서 발진한 미국 정찰기가 소련에 의해 격추되기도 하였다. 60-70년대에는 이국적인 문화를 갈구하던 히피들이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어진 소련-아프간 전쟁 시에 페샤와르를 포함한 북서 변경주에는 매달 10만의 아프간 난민이 유입되었고, 그중 1/4가 페샤와르 일대에 정착하였다. 이러한 난민촌을 중심으로 CIA가 지원한 무자헤딘 훈련소가 세워졌다.

21세기 들어 페샤와르는 다른 북서부 도시들과 함께 파키스탄 탈레반 (TTP)의 테러에 시달리게 되었다. 2010년에만 111건의 테러가 벌어졌고, 2013년에는 시내 교회에 대한 자살 폭탄 테러가 있었다. 비록 파키스탄 정부의 자르브 에 아즈브 작전으로 테러의 숫자 자체는 2014년 18건으로 줄었지만, 12월 군 부설 사립학교에 대한 테러로 153명의 학생들이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다. 또한 쉬아 모스크에 대한 공격으로 수십명이 사망하고 2백여명이 부상당하며 사망자 수 자체는 2014년에 최대였다. 이후로 큰 사건이 없다가 2022년 3월 쉬아 모스크에서 테러가 터져 60여명이 사망하였다. 2023년 1월 30일, 경찰본부 주변에 위치한 모스크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101명이 사망하고 22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4]

지도

동영상

각주

  1. 페샤와르〉, 《위키백과》
  2. 페샤와르〉, 《나무위키》
  3. "Peshawar", Wikipedia
  4. 페샤와르〉, 《요다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남아시아 같이 보기

남아시아 국가
인도 도시
남아시아 도시
남아시아 지리
남아시아 문화
남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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