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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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체(슬로바키아어: Košice, 라틴어: Cassovia, 독일어: Kaschau, 헝가리어: Kassa, 폴란드어: Koszyce, 루신어: Кошице, 롬어: Kasha)는 슬로바키아에 위치한 도시로 코시체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수도 브라티슬라바 다음으로 제일 많은 24만 명이다. 코시체는 2013년 프랑스 마르세유와 함께 유럽의 문화수도였다.[1]
개요[편집]
코시체는 슬로바키아 동부의 최대 도시로 코시체 지역의 중심지이자 2002년부터 코시체 자치단체의 중심이다. 헝가리 국경 근처 슬로바키아 오레산맥 동쪽을 흐르는 호르나드강에 위치해 있다. 슬로바키아 동부의 경제 문화 중심지로 슬로바키아 헌법재판소, 슬로바키아 국립은행의 지사와 헝가리, 벨기에, 스페인, 러시아, 터키의 영사관이 있으며, 3개 대학, 각종 교구, 많은 박물관, 갤러리, 극장 등이 자리하고 있다. 산업 중심지로서 미국 철강(US Steel) 코시체 제철소는 이곳에서 가장 큰 고용주다. 행정적으로는 코시체 1(중부와 북부), 코시체 2(서남쪽), 코시체 3(동쪽), 코시체 4(남쪽) 등 4구역으로 나눠지고, 다시 22개 자치구로 세분된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슬로바키아 대통령을 지낸 루돌프 슈스터(Rudolf Schuster)는 이곳 출신이다. 이 도시에는 잘 보존된 역사 중심지가 있는데, 슬로바키아 도시 중 가장 크다.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의 건물과 슬로바키아 최대의 교회로 14세기에 지어진 아르누보 양식인 성엘리자베스 대성당 등 문화유산으로 보호되는 건물이 많다. 시내 중심부에는 성미카엘 교회, 성어번 타워, 그리고 네오바로크 국립극장도 있다. 길게 뻗은 중심 도로는 귀족 궁전, 가톨릭 성당, 그리고 주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보행자 구역으로 지정되어 많은 부티크, 카페, 식당들이 번성하고 있다. 유럽 최초로 문장 사용을 허가받은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2]
명칭[편집]
도시에 대한 첫 기록은 1230년에 '빌라 카사(Villa Cassa)'로 쓰인 것이었다. 그 이름은 아마도 슬로바키아어의 자연스런 발전 과정에서 슬라브어의 개인 이름이 Koš(코슈), Koša(코샤) → Košici(코시치, '코시 사람들')→Košice(1382~1383)로 바뀌는 것처럼 부계(父系)를 뜻하는 슬로바키아 접미사 '-ice'가 붙으면서 나왔을 것이다(다른 슬라브 국가에서도 비슷한 방식이 알려져 있다). 라틴어 형태 카소비아(Cassovia)는 15세기에 보편적이었다. 또 다른 이론은 옛 슬로바키아어 Kosa(코사, '숲 속 빈터')가 어원(語源)이며, 현대 슬로바키아어 kosiť(코시트, '수확하다')와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지리 및 기후[편집]
코시체는 해발 206m의 고도에 놓여 있으며 면적은 242.77km²에 이른다. 헝가리로부터 약 20km, 우크라이나에서 약 80km, 폴란드 국경에서 90km 떨어져 있다.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동쪽으로 약 400km 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 약 36km 거리에 있는 프레쇼우와 도시 사슬을 이루고 있다.
코시체는 슬로바키아 오레(Ore)산맥의 동쪽 끝에 있는 코시체 분지의 호르나드강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북서쪽에 있는 치에르나 호라(Čierna hora)산맥과 남서쪽에 있는 볼로우스케 브르치(Volovské vrchy)산맥의 한 부분이다. 이 분지는 동쪽에서 슬란스케 브르치(Slanské vrchy)산맥과 만난다.
코시체는 북부 온대지방에 있어 습한 대륙성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사계절이 뚜렷하다. 강수량은 여름에 많고 겨울엔 적은 편이나 일 년 내내 풍부하고 변화도 심하지 않다. 가장 추운 달은 1월로 평균 기온은 -2.6°C이며, 가장 더운 달은 7월로 평균 기온은 19.3°C이다.[3]
역사[편집]
정착지로서 첫 증거는 구석기시대 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헝가리 마을 카사(Kassa-왕실 마을인 Villa Cassa)에 대한 첫 문헌 자료는 1230년부터 나온다. 1241년 몽골의 침략을 받은 뒤 헝가리 왕 벨라(Béla) 4세는 독일 식민지 주민들을 불러 인구의 공백을 메웠다. 그 도시는 역사적으로 헝가리 왕국의 아바우이(Abauj) 주에 있었다.
도시의 독립적인 정착지로 저지대 카사와 고지대 카사의 두 곳이 있었는데, 13세기에 오늘날의 중앙 도로인 긴 렌즈 형태의 링(ring)을 중심으로 합병했다. 1290년에 처음으로 마을에 특권이 부여되었다. 도시는 농업적으로 부유한 중부 헝가리에서 중부 폴란드로 이어지는 국제 통상로에 있다는 전략적 위치 때문에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그 교역로는 발칸 지역과 아드리아해, 에게해에 이어 발트해까지 연결되는 것이었다.
왕이 수여한 특권들은 수공업, 사업 발전과 함께 도시의 중요성(어퍼헝가리 왕실 소재지)이 커지게 했으며, 강력한 요새를 건설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1307년 이곳에서 최초로 등록된 길드 규제는 헝가리 왕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헝가리 왕실 자유 도시로서 카사(Kassa)는 1312년 강력한 귀족 팔라티네 아마데 아바(Palatine Amadé Aba)가문에 대항하여 벌인 피비린내 나는 로즈고니(Rozgony)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에 왕의 군대를 보강하였다. 1347년 수도 부다(Buda)와 같은 권리를 가진 헝가리 자유 왕실 도시 서열에서 2위가 되었다. 1369년 헝가리의 루이스 1세로부터 독자적인 문장을 받았다. 카사에서 루이스 1세가 소집한 의회는 여성이 헝가리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14세기 말 이 도시의 중요성과 부유함의 정도는 이전에 파괴되었던 성(聖) 엘리자베스 교회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헝가리 왕국에서 가장 큰 성당-엘리자베스 대성당-은 지기스문트(Sigismund) 황제와 교황의 지지를 받았다.
15세기 초부터, 이 도시는 펜타폴리타나[Pentapolitana, 어퍼(Upper) 헝가리에서 가장 중요한 5개 도시인 바르트파(Bártfa), 로츠세(Locse), 카사, 에페르예스(Eperjes), 키스제벤(Kisszeben)의 연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후냐디 마차시(Hunyadi Mátyás) 왕의 통치기간 동안 도시는 중세 때 인구의 정점에 도달했다. 약 1만 명의 주민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카사의 역사는 헝가리 왕좌를 놓고 벌어진 왕가 분쟁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는 대륙 무역의 쇠퇴와 함께 도시를 침체로 몰아넣었다. 바르나(Varna)의 블라디슬라우스(Vladislaus) 3세는 1441년 이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보헤미아에서 온 존 지스카라(John Jiskra)의 용병들은 1449년 타마스 스제켈리(Tamás Székely)의 헝가리군을 격파했다.
폴란드 왕자 존 알버트(John Albert) 1세는 1491년 6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에도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다. 1526년 이 도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존 자폴리야(John Zápolya)는 1536년에 도시를 점령했지만 페르디난트 1세는 1551년에 탈환했다. 1554년, 정착지는 어퍼 헝가리 영토의 중심이 되었다.
1604년 카사에 있는 루터교회를 가톨릭 신자들이 점령했다. 그 후 칼뱅주의자인 스티븐 보츠카이(Stephen Bocskay)는 오스만의 후원을 업고 합스부르크 왕조에 맞선 반란 동안에 카사를 점령했다. 미래의 조지 라코치(George Rákózi) 1세는 군사 사령관으로 그와 합류했다.
합스부르크군의 사령관인 조르지오 바스타(Giorgio Basta)는 도시를 점령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비엔나 조약(1606)에서 카사를 포함한 영토를 돌려주는 대가로 반군은 합스부르크의 마자르(Magyar) 귀족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에 따른 양보를 얻어 오스트리아-터키 평화협정을 중개했다. 스티븐 보츠카이는 1606년 12월 29일 카사에서 죽었고 그곳에 묻혔다.
17세기에 수십 년간 카사는 트란실바니아 왕국의 일부였으므로,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속했으며 터키어로 카샤(Kaşa)라고 불렸다. 1619년 9월 5일, 트란실바니아의 왕자 가브리엘 베들렌(Gabriel Bethlen)은 또 다른 반(反)합스부르크 반란에서 미래의 조지 1세 라코치의 도움으로 카사를 점령했다. 1621년 니콜스부르크 평화협정에 의해 합스부르크는 1606년의 종교적 관용 협정을 회복하고 7개 파르티움(Partium) 국가에 대한 트란실바니아 통치를 인정했다. 베들렌은 1626년 카사(Kassa)에서 캐서린 폰 호엔촐레른과 결혼했다.
1644년 1월 18일, 카사의 의회는 헝가리의 왕자 조지 1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그는 어퍼 헝가리의 전역을 점령하고 브르노(Brno)를 포위한 스웨덴군에 합류하여 비엔나를 상대로 예정된 작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의 명목상 지배자인 오스만 술탄은 그에게 군사작전을 끝내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이득을 얻은 뒤 그렇게 했다. 린츠 조약(1645)에서 합스부르크가 파르티움 7개 지역에 대한 조지의 통치를 인정하자 카사는 다시 트란실바니아로 돌아왔다. 1648년 조지가 사망하자 카사는 다시 합스부르크에 귀속되었다.
카사는 반개혁의 중심이 되었다. 1657년, 레오폴트(Leopold) 1세의 자금으로 예수회에서 인쇄소와 대학을 설립하였다. 1664년 오스트리아-터키 전쟁 말기 바스바르 평화협정(Peace of Vasvár, 1663~1664)은 합스부르크에 스자볼츠스(Szabolcs)와 스자트마르(Szatmár) 지역을 수여하여 카사를 다시 헝가리 왕국 국경 안으로 더 깊숙이 집어넣었다.
1670년대에 합스부르크는 도시 남쪽에 현대식 5각형 요새를 건설하였다. 도시는 1670년대에 쿠루츠(Kuruc) 반군에 의해 여러 차례 포위되었는데, 이들은 합스부르크 황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 지도자들은 1677년 11월 26일 황제의 병사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또 다른 반군 지도자 임레 트호콜리(Imre Thököly)는 1682년에 이 도시를 점령해 카사를 1686년까지 다시 어퍼헝가리를 통치하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게 했다. 오스트리아 야전 사령관 아이네아스 데 카프라라(Aeneas de Caprara)는 1685년 말에 오스만투르크로부터 카사를 되찾았다.
1704~1711년 트란실바니아의 왕자 프란시스 2세 라코치는 코시체를 독립전쟁의 주 근거지로 삼았다. 요새는 1713년에 철거되었다. 오스만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 카사는 합스부르크 '어퍼헝가리 공국'의 중심이었다. 오스만이 에거(Eger)를 점령했기 때문에 카사는 1596년부터 1700년까지 에거 대주교의 거주지였다. 1657년부터 베네딕트 키시디(Benedict Kishdy) 주교가 설립한 역사적인 카사 왕립대학이 있었다. 이 대학은 1777년에 왕립 아카데미로, 19세기에는 법학 아카데미로 바뀌었다. 대학은 1921년 격동의 해에 문을 닫았다.
1711년 반합스부르크 봉기가 끝난 후 승리한 오스트리아군은 오스만군을 남쪽으로 몰아냈고 이 큰 변화는 코시체를 우회하는 새로운 무역로를 만들었다. 이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부유한 중세 도시에서 주로 농업에 의존하는 지방 군사 도시로 변했다.
1710년부터 1711년까지 일어났던 페스트를 기억하기 위해 흘라브나 울리차(Hlavná ulica, '중심 도로')에 있는 이전의 교수대 자리에 1723년 임마쿨라타(Immaculata) 동상이 세워졌다. 도시의 벽은 19세기 초부터 1856년까지 단계적으로 철거되었으며, 성벽의 일부인 '처형자의 요새'만이 남아 있다.
도시는 1802년에 자체 주교좌가 되었다. 도시 주변은 1848년 12월 8일과 1849년 1월 4일 제국 기병대장 프란츠 슐릭(Franz Schlik)이 헝가리군을 격파하면서 다시 전쟁의 현장이 되었다. 도시는 1849년 2월 15일 헝가리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러시아군은 1849년 6월 24일 그들을 다시 몰아냈다.
1828년에는 3개 제조업체와 460개의 공방이 있었다. 최초의 공장은 1840년대에 설립되었다. 1856년에 첫 전보가 도착했고 1860년에 철도가 미스콜츠(Miskolc)까지 연결되었다. 1891년 말이 끄는 전차 선로가 세워지면서 대중교통 체계를 갖추었고, 그 선로는 1914년에 전력화했다. 1906년, 프란시스 2세 라코치의 로도스토(Rodostó) 집이 카사에 재현되었고 그의 유해는 엘리자베스 대성당에 묻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점차 해체되는 동안, 이 도시는 처음에는 코시체에서, 그리고 그보다 앞서 헝가리의 보호 아래 프레쇼우에서 선언된 일시적인 '동부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18년 12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이 도시로 진출하여 새로 설립된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1919년 6월, 코시체는 헝가리의 프롤레타리아 괴뢰 국가인 슬로바키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일부로 다시 점령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1919년 7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해 그 도시를 확보하였고, 이후 1920년 트리아논 조약(Treaty of Trianon)에 따라 유지되었다.
코시체는 1938년부터 1945년 초까지 제1차 비엔나 어워드(1st Vienna Award)로 헝가리에 양도되었다. 1941년 6월 26일, 헝가리 정부가 하루 뒤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는 빌미가 된 미확인 항공기에 의해 폭격당했다.
독일군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코시체의 유대인 1만 2,000명이 추방되었고, 추가로 가축운반차에 실려 강제수용소까지 2,000명이 더 추방되었다. 코시체와 주변 지역에서 추방된 1만 2,000명의 유대인을 기리는 기념 명판이 1992년 전쟁 전 코시체 정교회 시나고그에서 발견되었다.
1945년 1월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고, 소련 적군이 프라하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 동안 복구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 1948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 이 도시는 동유럽권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의 여러 문화기관이 설립되었고 도시 주변에 대규모 주거지가 건설되었다.
이스트 슬로바키아 철공소의 건설과 확장으로 1950년 6만 700명이었던 인구가 1991년 23만 5,000명으로 늘어났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해체되기 전에는 연방에서 다섯째로 큰 도시였다. 체코 연방의 해체와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탄생에 이어 코시체는 전국 2위의 도시가 되어 헌법재판소를 두고 있으며, 1995년부터 코시체 대교구가 자리잡았다.[4]
경제[편집]
코시체는 슬로바키아 국내총생산의 약 9%를 차지한다. 1만3500명의 직원을 거느린 미국 철강(US Steel) 코시체 제철소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고용주이자 전국에서 가장 큰 민간 기업이다.
동부에서 둘째로 큰 기업은 T-시스템스 슬로바키아이다. 2006년 코시체에서 설립된 이래 계속 근거지를 두고 있다. 이 회사는 2016년 말 코시체에서 3,85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어 슬로바키아에서 둘째로 큰 공유 서비스 센터,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큰 15대 고용주 중 하나가 되었다.
성장하는 ICT 분야의 일부로 2007년 교육기관, 정부, 선도적인 IT기업이 함께 주도해 코시체 IT밸리 협회를 설립하였다. 2012년에는 클러스터로 전환되었다. 2018년 이 클러스터는 두 번째로 '클러스터 관리 우수 라벨 골드' 인증을 받았는데, 이는 중부 유럽에서는 최초였다. 또 정보통신 기술 분야에서 인증받은 클러스터 세 곳 중 하나이다.
교통[편집]
대중교통은 코시체 대중교통회사인 도프라우니 포드니크 메스타 코시체(Dopravný podnik mesta Košice)가 관리한다. 대중교통 체계는 현재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891년에 최초의 마차 노선(1914년 전력화)이 운행을 시작했다. 오늘날 버스(1950년대 이후), 전차, 무궤도버스(1993년 이후)가 다니고 있다.
철도역은 슬로바키아 동부의 철도 거점이다. 철도로 프라하, 브라티슬라바, 프레쇼우, 치에르나 나드티소우, 후멘네, 미스콜츠(헝가리), 즈볼렌과 연결된다. 우크라이나로부터 폭넓은 도로가 도시의 남서쪽 제철소로 이어진다. D1 고속도로는 도시를 프레쇼우와 연결시키고 주변에는 더 많은 고속도로와 도로가 계획되고 있다.
코시체 국제공항은 도시의 남쪽에 있다. 공항에서 출발하는 정기 직항로는 런던의 루턴과 스탠스테드(2020년 4월부터) 공항, 비엔나, 바르샤바, 뒤셀도르프, 프라하 등을 오간다. 2008년 59만 919명의 승객이 이용해 가장 번성했고, 그 뒤로 감소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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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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