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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둥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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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둥반도 위치
랴오둥반도
랴오둥반도 지도

랴오둥반도(영어: Liaodong Peninsula, 중국어 간체자: 辽东半岛, 정체자: 遼東半島, liáo dōng bàn dǎo, 한국어: 요동반도)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남부의 반도로 산동반도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반도이다. 황해의 북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보하이만(渤海灣)의 일부분인 랴오둥만(遼東灣), 동쪽으로 서조선만(서한만), 남쪽으로는 산둥성이 있다. 이름은 요하의 동쪽에 위치한 반도라는 의미이다.[1]

개요

랴오둥반도는 중국 랴오닝성 남부, 산동반도와 함께 황해와 보하이해를 가르는 반도이다. 남쪽에는 황해와 서한만이 있고 동으로 한반도와 접한다. 랴오허강과 압록강 사이에서 서남방으로 뻗어 있다. 남서방향으로 하는 해발고도 1,000m급의 첸산산맥을 척량(脊梁)으로 하여 길게 내리뻗은 삼각형의 침강지괴로,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주변에는 창산열도를 비롯한 많은 들이 산재한다. 기후는 둥베이지방에서는 가장 온난다우하여, 기온은 겨울에 -5℃, 여름에 24℃이고, 연강수량은 600∼1,000mm이다. 청 ·일전쟁 후, 1895년의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에 할양(割讓)되었다가 ‘3국간섭’으로 다시 반환되었다. 그 후 남단부의 관동주(關東州)가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가 되었으나 러 ·일전쟁의 결과, 포츠머스조약 및 베이징조약에 의해 관동주는 일본 조차지가 되고,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일본은 만주경략(滿洲經略)에 착수하였다. 일본의 통치는 약 40년 간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조차권(租借權)은 소멸되고 다시 중국 영토로 복귀되었다. 반도 선단부에 있는 다롄(大連)은 둥베이 지방의 문호를 이루는 주요 무역항이고, 뤼순(旅順)에는 해군기지가 있다. 옥수수, 땅콩, 목화, 사과, 채소 등 농업과 어업, 천일제염업이 성하고, 다롄은 중국의 주요 중공업도시의 하나이다.[2][3]

역사

고대에는 고조선이 위치해 있었지만 기원전 3세기에 연나라가 침탈하면서 5호16국시대 까지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러다가 4세기 말 광개토대왕에 의해 완전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소고구려 혹은 발해가 요동 반도 지역을 영유했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 원나라(몽골)로 이어지는 북방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요나라 때에는 흥료국, 대발해로 이어지는 발해 부흥운동이 일어나곤 했다. 원나라에서는 고려 왕족이 심왕에 책봉되며 명목상의 통치자가 되기도 하였다. 14세기 후반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아직 대륙의 주도권을 쥐지 못하던 시기에 공민왕과 이성계가 주도한 제1차 요동정벌로 한민족계 국가에서는 마지막으로 고려가 점령했다가 철수했다. 이후 몽골계 군벌 나하추가 잠시 점령했으나 명나라가 원나라를 몽골 고원으로 밀어내고 북진하면서 명나라 영토가 되었다.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요구에 반발해서 고려 우왕과 최영이 제2차 요동 정벌을 추진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요동 반도의 영유권은 명나라, 청나라로 이어진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이 이곳을 차지했으나 러시아, 독일 제국, 프랑스의 서방 3개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삼국 간섭(1895년 4월 23일)으로 인하여, 요동은 청나라에 다시 반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4년 일본은 다시 이 지역을 강점하였고, 1932년 건국한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은 요동에 중심을 잡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엔 다시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공 내전을 마친 뒤에 이 곳에 랴오닝성을 설치하여 현재에 이른다.[4][5]

한국과의 관계

랴오둥반도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길목에 있다는 점 때문에 한국사 왕조와 중국사 왕조가 서로 빼앗고 빼앗긴 땅이다. 이곳을 처음으로 소유한 나라는 고조선이다. 그러나 완전히 통치했다고 보기 어렵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에 그쳤으며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 역시 이곳을 손에 넣긴 했지만 변경이어서 확실하게 통치하지 못하였다. 이후 등장한 고구려가 3-4세기에 걸쳐 중국 왕조들과 격전을 벌이며 처음으로 요동반도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요동반도의 풍부한 철광과 지리적 이점은 고구려가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크게 일조하였으며 고구려는 요동성과 요동반도 끝의 비사성을 각각 육상과 해상에서 중국을 방어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일시적으로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통치하였으나 698년 건국된 발해가 9세기 선왕 시기에 전성기를 맞아 당나라를 밀어내고 요동반도를 차지하였다. 발해가 고구려만큼 통치력을 행사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8세기 무렵 장문휴가 수군을 동원해 산둥반도의 등주(登州)를 공략한 것을 보면 고구려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지배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 멸망 이후에는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고족의 원나라 등 북방민족들이 차지하였으며 온전히 중국 한족 왕조의 영향력이 확실하게 뿌리내린 것은 명나라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명나라도 17세기 초반 여진족의 후금(청나라)에게 요동을 빼앗기고 이후 멸망하고 만다. 중국 왕조들이 북경에 도읍하기 시작한 이래 요동반도는 해상에서 북경으로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는 요충지로 기능하였으나 동양에서 그만한 해상전력을 보유한 나라는 없었기에 그 기능이 발휘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청이 상대해야 하는 상대는 막강한 영국 해군이었고, 결국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요동반도의 청 요새들은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다.[6]

다롄시

다롄(중국어 간체자: 大连, 정체자: 大連)은 랴오닝성의 도시로, 랴오둥반도 끝에 자리잡은 부동항이다. 역사적으로 랴오둥반도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하얼빈으로 연결되는 남만주 철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1897년 러시아가 항구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발달하였다. 동쪽은 황해, 서쪽은 발해에 접해 있다. 동북쪽은 닝안에 접해 있으며 남쪽은 산둥반도와 바다를 사이두고 있다. 전체 면적은 12,573km²이고 해안선이 618km 이며 700여개의 섬이 있다. 바다 면적은 3만km²이다. 다롄은 냉대 동계 소우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Dwa)와 습윤 대륙성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Dfa)의 사이에 속하며, 연평균 기온은 10℃이다. 연 강수량은 601.9mm, 일조시간은 2733.8시간이다. 봄은 건조하고 비교적 따뜻하며 여름은 습하고 비가 많다. 가을에은 비가 점차적으로 적어지고 서늘하고 겨울은 건조하고 바람이 많다. 중국에서 가장 큰 조선, 내연 기관, 정유, 베어링 관련 17개 업체가 다롄에 위치해있다. 다롄은 목재와 금속을 처리하고 그 구성 성분을 분해하고 합치고 분배하는 일과 관련하여 우수한 위치에 있다. 다롄은 또한 IT와 소프트웨어 산업의 중심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금융과 다른 서비스 산업도 성장하고 있다. 현재 21개의 외국 은행 및 금융 기관들이 다롄에 지사와 대리점을 두고 있다. 전시회 또한 많이 열리고 있다. 다롄에는 STX조선해양의 초대형 조선소 STX다롄이 위치해 있다.[7]

지도

동영상

각주

  1. 랴오둥반도〉, 《위키백과》
  2. 랴오둥반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랴오둥 반도〉, 《요다위키》
  4. 요동반도〉, 《나무위키》
  5. 辽东半岛〉, 《百度百科》
  6. 랴오둥반도〉, 《리브레 위키》
  7. 다롄시〉,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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