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정도전(鄭道傳)은 조선전기 지경연예문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며 학자이다.
개요
- 정도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문신 겸 학자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방원과 정치투쟁에서 살해되었다. 저서에《삼봉집》, 《경제문감》등이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어 사은 겸 정조사(謝恩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1395년 정총(鄭摠) 등과 《고려국사(高麗國史) 》 37권을 찬진했으며, 지방행정 방법을 기술한 《감사요약》을 만들었다. 13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驛站)을 신설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피살되었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삼봉집(三峰集)》,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 등이 있다. 그 밖의 작품에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이 있다.[1]
- 정도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유학자, 혁명가이다. 본관은 봉화이다.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부패 정치와 이에 기생하는 불교를 비판하였고, 성리학(신유학) 이념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인 조선 왕조 성립에 공헌을 하였다. 정도전은 1342년 경상도 구성 성저마을(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2동 431번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1347년에서 1348년까지 그 자신의 선향과 본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1년간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 시대 형부상서 직위를 지낸 정운경 선생이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 산원 우연 선생의 딸이다. 고려 시대 시절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이성계, 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2]
- 정도전은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그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해 의론(議論)이 정연했다 한다.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經濟議論)』 · 『감사요약(監司要約)』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金宗瑞) 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 병법에 관한 것으로 『팔진36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 ·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 · 『강무도(講武圖)』 · 『진법(陣法)』 등이 있다. 의서(醫書)로는 『진맥도결(胗脈圖訣)』, 역산서(曆算書)로서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와 『상명태을제산법(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다. 그는 또 많은 악사(樂詞)를 지어 <문덕곡> · <몽금척> · <수보록> · <납씨곡 納氏曲> · <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 시절과 삼각산 · 부평 · 김포 · 영주 등지에서의 방랑 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전해지고 있다.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동시에, 당시의 부곡(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되었다. 그 후 1791년(정조 15) 누락된 것을 수습해 재간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3]
- 정도전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유학자, 사상가, 혁명가이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적 사상에 입각한 조선 건국 작업을 이끈 개국공신 중 한 명이었다. 조선에서 그의 직위는 종1품 판삼사사에 머물렀으나 그를 신임한 강력한 뒷배인 이성계의 지지하에 권력을 지닌 총신이었다. 그러나 표전문 사건으로 명나라 홍무제의 노여움을 사 조선과 명나라 양국 간의 외교 분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사병 혁파를 시행하였고, 이후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에게 살해당했다. 대표 저서로는 《불씨잡변》이 있으며, 이를 통해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다만 불심이 지극했던 태조 이성계가 불교를 숭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 했던 것을 보면, 불교 자체보다도 당시 고려 사회를 타락시킨 부패한 불교 세력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에서 정적인 이방원에게 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생을 마감했다.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끌려가기 전에 '침실 안에서 단검을 쥐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물론 실록 기록에서는 '단검을 쥐었어도 소심한 모습으로 걸어나왔다'고 하고 '곧 이방원의 종자 소근의 호통을 듣고 단검을 버린 뒤 끌려 나와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는 기록으로 이어지지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사람이 단검을 왜 쥐고 있었는지는 의문. 이 기록도 정도전이 끝까지 저항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으며 최후의 비굴한 모습은 정도전을 비하하기 위한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4]
정도전의 생애
- 정도전은 1342년 고려 충혜왕 3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출생한 곳은 충청도 단양이다. 장성하여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당시 동문으로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있었다. 1362년(공민왕 11)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363년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친 상(喪)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권신(權愼),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파 권문세족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정도전은 친명(親明)정책을 주장하였다가 친원파에게 공격을 받아 회진현(會津縣, 현 전라남도 나주)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 1383년 함경도 함주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 그의 막료가 되었다. 1384년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가 명나라로 가게 되자 그의 추천으로 서장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1385년 성균제주(成均祭酒), 이듬해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趙浚)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1389년(창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책록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경연지사(經延知事)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삼사부사(三司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 1390년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391년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13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정도전의 업적
- 조선 건국의 이념 정립. 정도전은 조선 건국 이념을 정립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유교적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정도전은 조선의 이상적 정치 체제를 구상하며, 유교적 통치와 덕치(德治)를 강조했다. 이를 통해, 조선이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 경제 및 법제도 정비. 정도전은 경제 제도와 법 제도의 정비에도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조선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전반적인 국가 시스템을 재구성했고, 과전법(科田法)과 같은 농민 기반의 세제 시스템을 확립하여 조선 경제의 안정성을 기했다. 과전법은 국토를 농업 기반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제도로, 관리들에게 토지를 분배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려 했다. 또한, 그는 사법 제도를 정비하고, 법과 질서를 강화하려 노력했다. 이는 후에 조선의 법률 체계를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정치적 기반 마련과 왕권 강화. 정도전은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이성계의 즉위 직후,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도전은 청백리제를 확립하고, 부패를 방지하며, 관료제를 강화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특히 정도전은 조선의 정치 조직과 제도를 설계하면서 왕권의 절대화를 목표로 했고, 이성계가 왕권을 확립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는 삼봉 정도전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며, 조선 왕조의 체제를 보다 공고히 하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확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정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정치적 비전과 개혁적인 노력은 후에 조선의 안정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그가 후에 왕권 강화를 지나치게 추진하면서 일부 충돌이 있었으나, 그의 업적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삼봉정도전시비
- 삼봉정도전시비(三峰鄭道傳詩碑)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종묘공원에 있는 정도전의 시비이다. 조선왕조의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을 기리는 시비(詩碑)이다. 1995년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해 종묘 창엽문 바깥의 종묘공원 동쪽 끝에 세웠다. 시비에는 새로 건설된 수도 한양의 풍수지리적인 이점을 소개하고 한양에서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이 영위되기를 노래한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와 정도전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정도전선생 사당
- 정도전선생 사당(鄭道傳先生 祠堂)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189에 있는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정도전(鄭道傳)을 모신 사당이다. 1986년 3월 5일 평택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은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이자 학자로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다. 1394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집필, 편찬하여 조선 법제의 근본을 이루었다. 군사, 외교, 행정, 역사, 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참수되었다. 그의 사당은 1912년 봉화 정씨 문중에서 건립하여 1930년 당시의 종가터에 옮겨 세웠으며 1970년 중개축하였다. 사당 5칸, 외삼문(外三門) 3칸, 홍살문(紅-門, 紅箭門) 3칸으로 맞배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사당 안에는 그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삼봉기념관
- 삼봉기념관(三峰紀念館)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있는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국비를 포함한 총 10억 원의 경비를 들여 건립한 건축면적 148.7m²의 전통한옥 건물로, 2004년 11월 24일 개관하였다. 기념관에는 경기도유형문화유산 제132호로 지정된 삼봉집목판과 시문·문집 등의 유물들이 보관·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위에는 정도전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문헌사(文憲祠; 평택시향토유적 제2호)가 있다. 정도전의 후손들인 봉화정씨 집성촌이 있는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산대마을에 있다.
진신도팔경시
-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는 조선 초기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시조(時調).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새로 건설된 수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기리기 위해 쓴 시조이다. 한양의 풍수지리적인 이점을 소개하고, 굳건한 도성과 수도를 방위하는 군사들을 묘사하며, 이곳에서의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노래하고 있다. 정도전은 조준(趙浚)·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여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된 인물로,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당시 서울의 설계를 맡아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하였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정도전〉, 《위키백과》
- 〈정도전〉, 《나무위키》
- 〈정도전(鄭道傳,1342~1398)〉, 《두산백과》
- 〈정도전 (鄭道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겨울라기, 〈정도전 업적 세가지〉, 《네이버블로그》, 2024-11-05
- 양긍정, 〈정도전 업적과 정몽주, 이방원 고려 신하들과의 관계〉, 《네이버블로그》, 2024-11-02
- 행복한상상, 〈도담삼봉 주차장 입장료 석문 정도전 이야기〉, 《네이버블로그》, 2024-10-17
- 편가여 단장, 〈서울근교 경기도 여행 가볼만한곳 정도전 유적지〉, 《네이버블로그》, 2024-08-23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