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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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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치 시기
케르치 휘장

케르치(우크라이나어: Керч, 러시아어: Керчь, 크림 타타르어: Keriç, 그리스어: Παντικάπαιον Pantikapaion , 독일어: Kertsch, 튀르키예어: Gözleve, 고대 동슬라브어: Кърчевъ)는 크림반도 동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러시아 크림 공화국(사실상) 또는 우크라이나 크림 자치 공화국(국제적인 승인)에 위치한다. 참고로 크림반도는 2014년 이후부터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러시아에 병합되었지만 대다수의 국가와 유엔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개요[편집]

역사[편집]

고대[편집]

도시 근처의 마야크 마을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이 지역은 기원전 17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이미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케르치에서 발견된 많은 유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르미타주 박물관과 지역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지만, 수많은 골동품 조각품, 부조, 청동 및 유리 제품, 도자기 및 보석류는 크림전쟁중 영국군 외과 의사였던 던컨 맥퍼슨(Duncan MacPherson)박사에 의해 1855~1856년에 발굴되었으며 나중에 런던대영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도시로서의 케르치의 역사는 기원전 7세기에 밀레투스(Miletus)의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들이 멜렉 -체스메(Melek-Chesme)강 하구 근처의 미트리 다트 산(Mount Mithridat)에 판티카파에 움(Panticapaeum )이라는 도시 국가를 세웠을때 부터 시작된다. 판티카파에움은 인근 도시들을 정복했고 기원전 480년에는 보스포러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나중에 미트라다테스 6세 에우빠토르(Mithradates VI Eupator)의 통치기간 동안 판티카파에움(Panticapaeum)은 짧은기간 동안 훨씬 더 강력하고 광범위한 폰투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 도시는 대초원과 유럽 사이의 무역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이로 인해 급속도로 성장했다. 주로 곡물, 절인 생선 수출 및 포도주 양조 산업에 종사했다. 게다가 Panticapone은 자체 화페을 발행하였다. 기존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 물의 양이 매우 적은 멜레크체스메강은 보스포러스 왕국 시대에 항해가 가능했고, 바다에서 갤리선을 타고 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민족 구성 측면에서 보면 판티카포네 사람들의 대다수는 스키타이인이고 그 다음이 사르마티아인이다 .

또한 기원전 6세기 전반에 이오니아인들은 판티카폰에서 북동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미르메키온(Myrmekion) 이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이는 오늘날 케르치의 동쪽이다.

서기 1세기에 판티카포네는 동고트족의 침입을 받았으며 375년에 도시는 훈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중세[편집]

세례요한 대성당
예니칼레 요새

6세기부터 판티카포네는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기간 동안 그리스 정교회 보스포러스 교구의 중심지로서 보스포르(Bospor)라는 성이 그곳에 세워졌다. 576년에 판티카폰은 투르크족훈족 부족인 우티굴(Utigul)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7세기에 도시는 하자르족에 의해 점령되었고 "반대"를 의미하는 투르크어 "karşı"의 이름을 따서 케르치(Kerch)라고 명명되었다. 하자르시대 케르치의 주요 관리는 투툰(Tutun) 이었고, 기독교는 이 도시의 주류 신앙이었다. 케르치에 있는 세례요한 대성당은 717년에 건립되었으며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교회이다.

10세기에 하자르족이 쇠퇴하고 키예프루시가 부흥하면서 케르치는 하자르칸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침내 1016년, 하자르칸국은 비잔틴제국과 키예프루시의 공격을 받았다.

10세기부터 케르치는 슬라브족의 영토가 되었다. 케르치는 러시아, 크림반도, 캅카스및 동부 국가의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13세기에는 케르치와 크림반도 전체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 몽골의 지배가 끝난 후, 케르치는 1318년 제노바의 식민지가 되었고 소금 생산과 어업을 전문으로 하는 항구가 되었다.

1475년에 케르치는 오스만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만 통치기간 동안 케르치는 노예 시장이 되었고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케르치는 오랫동안 자포로제 코사크(Zaporizhye Cossacks)의 침략을 받았다.

18~20세기[편집]

아조프해지역에서 러시아인의 힘이 커지는것에 대응하여 오스만제국케르치해협 연안에 예니칼레 요새를 건설하고 1706년에 완공했다. 1771년 러시아 제국은 크림반도에 군대를 파견하고 케르치에 접근했고, 오스만 제국은 쿠츄크 카이나르지 조약에 따라 케르치시와 예니-케일 성은 거의 러시아 영토에 편입되고 크리미아에서 철수했다.

1790년, 표도르 표도로비치 우샤코프(Fyodor Fyodorovich Ushakov)제독 이 지휘하는 러시아 해군은 케르치해협전투에서 터키 함대를 격파했다.

유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케르치는 1821년부터 중요한 무역 및 어항이 되었다. 많은 고고학 박물관과 교육 기관이 있다. 케르치 반도의 풍부한 철광석 자원을 이용하여 1846년에 제철소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1855년 크림 전쟁중에 케르치는 영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19세기말에는 기계공장, 시멘트공장, 통조림공장, 담배공장이 대거 등장했다. 1900년에는 열차가 케르치에 연결되었고, 케르치해협의 항로도 확장되었다. 이때 케르치의 인구는 33,000명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러시아 내전이후 케르치의 도시 상황은 쇠퇴했으나 1920년대부터 회복되기 시작했고, 특히 철광석 채굴과 야금업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이 1939년까지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케르치의 인구는 104,500명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편집]

제2차 세계대전동안 케르치는 소련군와 독일군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치열한 투쟁 끝에 케르치는 1941년 11월 독일군에 점령당했다. 12월 26일, 소련 제302소총병사단은 케르치 남서쪽 모퉁이에 상륙했고, 31일 케르치를 탈환했다. 1942년 독일군은 다시 케르치를 점령했다. 케르치반도 전투에서 소련군은 16만명의 사망되거나 포로되었다. 1943년 10월 31일, 또 다른 소련 해군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고, 케르치는 1944년 4월 11일 소련군에 탈환되었다.

전체적으로 독일 침략자들은 15,000명의 케르치 시민을 살해하고 14,000명을 추가로 추방했다. 뉘른베르크 재판동안 케르치에서 독일군의 범죄에 대한 모든 악랄한 증거가 공개되었다. 전쟁 후 케르치는 <영웅의 도시> 라는 칭호를 받았다.

도시 외곽에 있는 Adzhimushkay 채석장은 침략자들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기지였다(Adzhimushkay 채석장 방어 전투). 수천 명의 군인과 난민이 이곳으로 피신해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지하에서 잠을 잤고, 그들 중 일부는 독일의 독가스 공격으로 사망했다. 오늘날 Adzhimushkay 채석장 부지에는 조국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기타[편집]

주요 산업은 철강·코크스 화학·토마스 인비(燐肥)·기계공업·조선·선박수리·수산물 가공 등이며, 마리우폴 등지에 철광석이 수송된다. 시내에는 해양수산연구소와 야금·광산 관계의 기술전문학교가 있으며, 철도는 케르치 해협을 경유하여 북(北)캅카스와 연결된다. 주변에는 사적(史蹟)이 풍부하고, 로마 시대의 카타콤 등 고대의 무덤이 많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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