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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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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카트 시기
오만의 술탄이 거주하는 알 알람 궁전
오만 의회 건물
술탄 카부스 항구

베이루트(아랍어: بيروت , 프랑스어: Beyrouth)는 레바논수도이며, 베이루트주의 중심지이자 레바논 최대의 도시다. 지중해 동부 레바논 해안선 중앙에 있는 해안도시로 레바논의 주요 산업, 상업 및 서비스업의 필수시설이 위치하며 문화의 중심지다. 1975년 내전 발생 이전까지 중동 지역에서 가장 서구화된 도시로 '중동의 파리'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주민은 크리스트교도(마론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가톨릭교, 가톨릭교, 개신교), 이슬람교도(수니파, 시아파, 또 드루즈파) 등 소수종교로 나뉘어 있고 중동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다양한 도시의 하나이다. 베이루트 유태인의 대부분은 1975년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으로 이주했고, 현재는 뉴욕 시의 브루클린지구에 사는 사람이 눈에 띄고 있다. 베이루트는 레바논 내전 때에 분열해, 이슬람교도의 서부와 크리스트교도의 동부로 분할되었다.

베이루트는 레바논에서는 상업, 은행업 및 금융의 중심지이며,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 비즈니스 컴퓨터 대학교, 하가지안 대학교, 레바논 대학교, 아메리칸 레바논 대학교, 아메리칸 과학기술 대학교, 베이루트 아랍 대학교 등 21개의 대학이 있다.

베이루트 국제공항이 있다. 2009년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의 개최지이다.

개요

  • 행정 단위: 레바논 수도
  • 면적: 20km²
  • 인구: 433,249명 (2017년)
  • 지역어: 아랍어, 프랑스어
  • 시장: Jamal Itani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www.beirut.gov.lb/

역사

  • 레바논은 기원전 3000년 경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초기 베이루트는 페니키아어 혹은 가나안어로 우물을 의미하는 '비로트(bī'rōt)'라고 명명되었다.
  • 기원전 14세기 당시 비루타(Biruta)로 알려진 페니키아 베이루트의 암무니라(Ammunira) 왕이 이집트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에게 보낸 세 통의 서한(설형문자 서판)에서 최초로 그 이름이 발견되었다.
  • 기원전 140년 셀레우코스 왕조디오도투스 트리폰(Diodotus Tryphon)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을 받은 더욱 체계적 도시로 재건되었다.
  • 기원전 64년 베이루트는 로마제국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에 의해 정복당하고 로마군이 들어오면서 도시는 급속도로 로마화 되었다.
로마화된 베이루트는 당시'베리투스(Berytus)'로 명명되었다. 베리투스는 비단과 포도주 생산의 무역 중심지였으며 라틴문학의 중심지였다. 또한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두 율법학자인 율피안(Ulpian)과 파파니안(Papanian)은 페니키아 출신이었으며 533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베리투스의 법학교를 3대 공식 법학교 중 하나로 인정하였다.
  • 635년 베이루트는 아랍 무슬림들에게 정복되었다.
  • 12~13세기 십자군의 정복과 살라흐 앗딘(Salah ad-Din, 1138~1193)의 영토 탈환을 겪었다.
  •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 19세기 베이루트는 기독교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수의 개종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선교사들이 설립한 현대식 학교로 인해 베이루트는 아랍 지역의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에 더해 개신교와 로마가톨릭교회 선교사들이 도입한 인쇄기는 베이루트의 출판사업을 촉진했다. 책은 아랍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로 출판되었고, 1900년까지 베이루트는 아랍 저널리즘의 선봉에 있었다. 지식인 계급은 아랍 문화유산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 1894년, 프랑스 기술자들이 베이루트에 현대적 항구를 건설하였다.
  • 1907년에는 레바논을 가로질러 다마스쿠스(Damascus)와 알레포(Aleppo)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면서 대부분의 무역은 베이루트 항에서 프랑스 선박을 통해 옮겨졌다.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붕괴하면서 프랑스는 베이루트와 시리아 지역을 위임통치하게 되었다.
  • 1975년 레바논 내전으로 베이루트는 다수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서부 베이루트와 다수 기독교인이 거주하는 동부 베이루트로 양분화되었다. 그 중간에는 그린라인(Green line)을 형성해 양측 민병대의 통제 하에 지속적 총격전이 이루어졌다. 결국, 베이루트 도시 중심은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황폐해졌다.
  • 1982년에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도시는 한 번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베이루트 도심, 그중에서도 특급호텔들이 몰린 해변가는 전략적 요충지가 돼서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 1990년 전쟁이 끝나고 내전으로 황폐해진 베이루트 시내를 재건하기 위해 솔리데르(Solidere)라는 주식회사가 1994년 민관 협력의 형태로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당시 총리인 라피크 하리리(Rafiq Hariri, 1944~2005 / 재위 1992~1998, 2000~2004)의 국가 재건 비전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솔리데르가 재건한 상징적 건축물들과 세금 인센티브는 외국 투자를 유치하여 국가 경제 회복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전쟁 중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베이루트 시내의 로마제국부터 맘루크, 오스만프랑스 시대의 역사를 지닌 건물들이 파괴되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 2005년 라피크 하리리 총리가 차량 폭탄 테러로 암살된 사건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 2006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하였다. 남부 레바논 지역뿐만 아니라 베이루트의 남부 교외 지역의 시아파 밀집 지역에도 이루어져 베이루트 지역 또한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 2015년 쓰레기 처리장 문제를 정부가 해결하지 못해 대베이루트(Greater Beirut) 지역에 쓰레기 처리가 중단되어 일명 '쓰레기 대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 2020년 8월에는 베이루트 항구에서 대규모 폭발이 발생하여 베이루트 항구 붕괴와 함께 인근 거주지역에도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220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6,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최대 150억 달러가 넘는 손실이 발생했다.

지리

베이루트 대도시권(Beirut Governorate)은 레바논에서 지중해 방향으로 서쪽으로 뻗어 있는 반도 모양으로, 레바논산맥을 하나의 변으로 삼각형의 모양을 한 형태가 되어 있다. 이는 지중해 바다로 돌출된 두 언덕인 아슈라피에(Achrafieh)와 무사이트베(Mousaytbeh), 그리고 그 아래로 북쪽의 칼브강(Nahr al Kalb)에서 다무르강(Nahr al Damour)까지 이어지는 좁은 해안가 평야 지대 전체를 포함한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베이루트강이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기후를 보인다. 겨울철에는 온난하고 비가 많이 내리며, 평균기온이 14℃ 내외다. 여름철에는 다소 덥고 건조하며, 평균기온은 28℃ 내외지만 최고기온이 40℃에 육박하는 경우가 많다. 연평균 강우량은 800mm 내외로 주로 겨울에 내린다.

행정구역

베이루트시는 12개 구역으로 나뉜다.

지도

동영상

참고자료

서아시아 같이 보기

아라비아 국가
페르시아 국가와 지역
아나톨리아 국가
레반트 국가
남캅카스 국가
아라비아 도시
페르시아 도시
아나톨리아 도시
레반트 도시
남캅카스 도시
서아시아 문화
서아시아 지리
서아시아 바다
캅카스 지리
서아시아 주변 지역
서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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