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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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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빌
아르빌 위치

아르빌(아랍어: اربيل, 쿠르드어: ھەولێر 영어: Arbil) 또는 에르빌(Erbil)은 이라크 아르빌주주도이자 쿠르디스탄 자치국의 수도이다. 인구는 약 120만명으로 이라크 전체에서는 바그다드, 바스라, 모술에 이어 4번째로 큰 도시이다.[1]

개요[편집]

아르빌은 이라크 북쪽, 모술 남동쪽 약 80km 지점에 위치한다. 아르빌의 역사는 적어도 기원전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람이 살고 있는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후르리인들이 최초로 도시를 세웠고 북부 메소포타미아로 영역을 넓혀갔다. 그 후로, 아르빌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아바스 왕조,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아왔다. 시내 서북쪽에 아르빌 국제공항이 위치해 있으며, 남쪽으로 90여 km 떨어진 키르쿠크를 통해 바그다드와 철도로 통한다. 티그리스강에서 얻는 수자원이 풍부하고 농산물이 많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 지방의 중심이었고 현재도 이라크 최대의 밀을 생산하는 지역이다. 파르티아 왕조의 왕릉이 많은 것으로 보아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아바스 왕조시대에도 상당히 번창하였으며, 폐허가 된 성채 아래 평원에는 아름다운 미나데(이슬람교 사원의 첨탑)가 남아 있다. 도시 중앙에는 고대의 아르빌 요새가 있다. 특히 중동판 아크로폴리스로 볼 수 있는 시타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인간이 거주한 도시로 201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2]

어원[편집]

아르빌이라는 이름은 수메르의 성서에 “위쪽에 있는 도시”라는 뜻을 가진 우르빌룸(Urbilum) 혹은 우르벨룸(Urbelun)의 형태로 나온다.

기후[편집]

아르빌은 길고 매우 더운 여름과 온화한 겨울을 지닌 더운 여름 지중해성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Csa)를 가지고 있다. 여름은 건조하며 6월에서 9월 사이에는 강수량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겨울은 보통 습하고 가끔 홍수가 나며 1월이 가장 습한 달이다. 2021년 12월 17일 폭우로 해당 지역에 폭발성 홍수가 발생하여 14명이 사망했다.[3]

역사[편집]

고대[편집]

메소포타미아 문명기에 아르빌은 고대 셈계 언어로 '4개의 신'이란 뜻인 아르빌루로 불렸고 아카드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기원전 2150년, 도시는 아카드 제국을 무너뜨린 구티족에게 정복되었고 기원전 2050년부터는 아시리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비록 기원전 2040년경에는 우르 제3왕조의 아마르 신에게 함락되었지만 수복된 이후로 수도인 앗수르, 바빌론과 함께 아시리아의 핵심 도시 중 하나였다. 도시의 수호신인 이슈타르는 아시리아의 주요 신 중 하나였다. 아르빌루는 아시리아가 자그로스 산맥 넘어 동쪽으로 원정할 때 그 거점이 되어 주었는데, 아슈르바니팔 대왕은 엘람 원정 동안 머문 예시가 있다. 기원전 605년, 아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린 메디아의 퀴악세르스는 니네베 함락을 도와준 이란계 사르가트 부족을 이 일대로 이주시켰다. 기원전 547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대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정복한 후 그곳에 앗수라 사트라프를 설치하였다. 아르빌루는 그 치소가 되었다.

기원전 331년, 아르빌에서 서쪽으로 100여 km 떨어진 평원에서 아케메네스 왕조의 운명을 가른 가우가멜라 전투가 벌어졌다. 마케도니아 군에게 패배한 다리우스 3세는 이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이후 자그로스산맥을 넘어 엑바타나(하마단)로 향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 도시는 그리스식 명칭인 아르벨라로 불렸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파르티아 제국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북부에는 여러 토착 왕국들이 세워졌는데, 그중엔 아시리아인들이 아르벨라를 수도로 건국한 아디아베네 왕국이 있었다. 1세기경 그곳의 왕모(王母)이던 헬레나는 유대교로 개종하고 그녀의 아들들은 예루살렘에서 로마와 싸우기도 하였다. 파르티아의 왕릉이 위치했을 만큼 그와 밀접한 관계였던 아디아베네 왕국은 트라야누스의 메소포타미아 원정 시에 아르벨라가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로마군은 195년과 216년에 아르벨라를 점령하였고 이때 파르티아 왕릉군이 도굴되었다. 이후 약화된 파르티아는 사산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한편, 104년 주교구가 설치되며 세를 불리기 시작한 그리스도교는 4세기 무렵 아시리아인들 사이에서 다수가 되었다. 그러자 조로아스터교 국가인 사산 제국에 의해 340년을 시작으로 박해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아시리아인들은 그리스도교 제국인 로마 진영에 가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기독교도인 총독은 순교자가 되었다. 이후 니시비스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 학교를 세우자 그 영향으로 521년, 아르벨라에도 학교가 세워졌다.

중세[편집]

그렇게 200여년이 흐른 후, 아르벨라는 이슬람 제국군에게 정복되었다. 이때부터 아랍/쿠르드 계열의 무슬림 인구가 유입되었는데 8세기 무렵 아르빌을 중심으로 인근 지방에 5개의 주교구가 추가적으로 설치되는 등 기독교 세는 한동안 유지되었다. 메소포타미의 토착 다신교 역시 10세기 무렵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0세기 말엽 아바스 왕조가 분열되며 무주공산의 시대가 도래하자 아르빌은 쿠르드족의 한 일파인 하다바니 부족이 세습적으로 지배하였다. 하다바니는 살라흐 앗 딘의 출신 부족이기도 하다. 그러던 12세기, 도시는 장기 왕조의 영토가 되었고 튀르크인 총독이 통치하였는데 세습되며 베그테긴 왕조로 불리게 되었다. 12세기 말엽, 그 통치자였던 무자파르 앗 딘은 자발적으로 아이유브 왕조에 복속하였고 그 대가로 살라흐 앗 딘의 매부가 되었다.

평화를 누리던 아르빌은 13세기 초엽 쿠르드인 역사가 이븐 알 무스타우피가 활동하는 등 문화적으로 번영하였다. 1233년 아르빌은 세력을 회복한 아바스 왕조의 영토가 되었으나 곧바로 1237년 몽골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도시 대부분이 약탈당했으나 시타델은 함락되지 않았다. 1258년,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아르빌의 튀르크 총독은 항복하였다. 그러나 쿠르드 군대는 저항하였고 6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이듬해 아르빌은 함락되었다. 훌라구는 아시리아인 기독교도를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몽골군과 함께 유입된 시리아 정교회의 교회가 세워졌다. 한편 이때 상류층 무슬림들은 시리아로 망명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몽골을 피해 맘루크 왕조로 망명하여 다마스쿠스의 카디(재판관)를 역임한 이븐 할리칸이 있다.

그리스도교도들의 중흥기는 14세기 초엽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 기존 이슬람 국가들을 능가하는 탄압 정책을 펴며 종식되었다. 이에 아시리아인들은 시타델로 피신하였는데 1310년 총독의 요구에도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쿠르드인들과의 충돌이 벌어졌고, 7월 1일 튀르크계 대주교의 중재 시도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선택한 기독교도 수천 명이 학살되었다. 남은 아시리아 거주민들은 1397년 티무르에게 도시가 함락될 때에 학살을 겪었다. 수난을 겪던 아시리아인들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오스만 지도부는 사파비 제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시타델을 요새화하였다. 1743년, 아르빌은 60여 년의 포위 끝에 나디르 샤에게 함락당하였다. 1862년에는 쿠드르 인 귀족이 아르빌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현대[편집]

20세기 초엽, 1차 대전 당시 아시리아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은 영국의 도움으로 오스만 군대를 축출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약속과 달리 위임통치를 하며 자치권을 제한하였고 이후 이라크에 소속되었다. 1970년, 사담 후세인의 허가 하에 아르빌은 쿠르디스탄의 수도가 되었다. 걸프전으로 후세인 정권이 흔들리자 쿠르디스탄의 자치권은 증대되었는데, 이에 두 파벌이 생겨 내전을 벌였다. 1996년 쿠르디스탄 민주당 (KDP)가 이라크 정부의 도움으로 아르빌을 점령하자 쿠르디스탄 애국 연합(PUK)은 쿠르디스탄 제2의 도시인 술라이마니야에 따로 정부를 차렸다.

2003년 10월, 이라크 전쟁이 벌어지고 아르빌에는 미군이 주둔하였고 이후 2004년과 2005년에 테러가 일어나 각각 110명과 60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다만 그후로는 안정을 찾았고 2007년부터 '인간이 가장 오래 연속적으로 산 도시'라는 기록을 지키기 위해 1가구만 제외하고 시타델의 8백여 가구를 소개시키고 복원에 착수하였다. 2010년대 들어 ISIS가 발흥하자 피난민들이 몰리기도 하였지만 현재는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평화유지군이 잠깐 주둔한 바 있다. 원래 한국군이 주둔하려고 하던 곳은 키르쿠크였지만 최대한 교전 지역을 피하려던 노무현 정권의 의도에 따라 여기로 변경된 것이며, 주둔 기간동안 지뢰제거와 기반시설 재건 등 현지인 친화 정책을 중점으로 활동해 현지인의 84%가 철수를 반대했을 정도로 이라크 파병부대 중 가장 만족도가 높았던 부대기도 했다. 당시 노무현을 무조건 비난하던 조선일보는 키르쿠크가 안전하다느니 기자가 직접 가봐서 취재했다고 사진을 찍고 노무현 정권이 과장한다라고 기사를 냈다가 한겨레에게 키르쿠크는 위험지역인데 터무니없는 기사라고 비난당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은 이 점에서 제대로 파악했다.

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상당히 안전한 편에 속하는 도시가 되었다. 시내에는 쿠르디스탄 국기를 자주 내걸며, 꽤 번화한 도시 모습을 갖추고 있다.[4][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아르빌〉, 《위키백과》
  2. 아르빌(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Erbil", Wikipedia
  4. 에르빌〉, 《요다위키》
  5. 아르빌〉,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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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국가와 지역
아나톨리아 국가
레반트 국가
남캅카스 국가
아라비아 도시
페르시아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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