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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0일 (목) 00:01 판
아다나(Adana)는 터키 아다나주의 주도로 튀르키예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서쪽으로는 니으데 주와 메르신 주, 북쪽으로는 카이세리 주, 동쪽으로는 카흐라만마라쉬 주와 오스마니예 주, 남동쪽으로는 하타이 주와 접하며, 콘야 주와 가지안테프 주와도 인접하지는 않지만 매우 가깝다.
대부분의 터키인에게 아다나는 케바브, 살감, 코튼, 오렌지와 매우 더운 기후를 의미한다. 아다나는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에 언급되지만 지리적인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주 튀르키예 미군과 NATO 소속 NATO군의 공군 기지인 인칠릭 공군 기지가 아다나 주변에 있다. 이즈미르 공군 기지와 같이 튀르키예군과 같이 사용하는 공용 기지이며, 주요 임무는 러시아군의 지중해 남하 차단 및 이란 견제이다. 걸프 전쟁 - 이라크 전쟁 - 테러와의 전쟁 당시에는 영국군과 스페인군 육군 방공 부대가 같이 주둔했었다.
대형 교량과 도로, 정부 청사와 관개 시설 등의 건설로 아다나와 킬리키아는 영역의 가장 개발된 무역 중심이 되었다.
개요
- 행정 단위: 튀르키예 아나도 주 주도
- 면적: 1,945km²
- 인구: 1,810,646명(2022년)
- 지역어: 튀르키예어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www.adana.bel.tr/
역사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언급된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다. 히타이트 시대에는 고대왕국인 키주와트나의 지배를 받았다. 히타이트 신화에 따르면 이름의 유래는 우레신인 하닷(Hadad, 또는 Adad)으로, 비를 뿌려 이 지역에 풍요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히타이트인들은 이 도시에 '우루 아다니야(하닷의 땅)'이라는 이름을 븥여주었다.
로마 시대에는 지리적으로 키프로스 북쪽 해안의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잇는 유일한 통로인 킬리키아 문과 가까웠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동쪽으로 가는 군사들의 경유지 역할을 했다.
중세 시대에는 7세기에 이슬람 제국에게 정복된 이후 사라센 제국의 영토였다가 10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 셀주크 제국, 아르메니아 왕국, 맘루크 왕조 등 소유주가 자주 바뀌었다. 본래 동쪽 20km 지점의 모프수에스티아 (마미스트라)가 인구 20만을 자랑하며 일대의 중심 도시였지만, 13-14세기 맘루크 왕조의 침공으로 파괴되며 아다나가 대신 발전하였다. 15세기 들어 아다나는 튀르크계 라마잔 왕조의 수도로 번영하였고,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오스만 제국 시절까지 아르메니아인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근의 가지안테프, 메르신, 오스마니예와 더불어 추쿠르오바 문화권이라 불릴만큼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현재에도 아르메니아계 튀르키예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무슬림이다. 아타튀르크 시절에도 아다나는 서부 아르메니아인의 중심지라 불릴정도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아타튀르크가 이 도시를 방문했을때, "여러분도 이 땅에 사는 튀르키예인이며 모두가 평등한 국민입니다." 라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공화인민당을 비롯한 케말주의 정당들을 지지하는 텃밭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민족주의행동당의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다.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의 피해를 입었다.
지리
지중해 북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킬리키아 평야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타우루스 산맥(Taurus Mountains)의 남동쪽에 위치한 비교적 넓고 평평하고 비옥한 땅이다 .서쪽으로는 니으데 주와 메르신 주, 북쪽으로는 카이세리 주, 동쪽으로는 카흐라만마라쉬 주와 오스마니예 주, 남동쪽으로는 하타이 주와 접하며, 콘야 주와 가지안테프 주와도 인접하지는 않지만 매우 가깝다. 도시 중앙에 지중해로 흐르는 세이한 강(Seyhan nehri)이 통과한다. 그리고 강의 상류에는 수력 발전, 농업 용도로 사용되는 세이한 댐이 있다.
기후는 더운 여름 지중해성 기후와 건조한 여름 아열대 기후를 가지고 있다. 겨울은 온화하고 습하고 서리는 거의 매년 겨울 밤에 가끔 발생하지만 눈이 내리는 경우는 매우 적다. 여름은 길고, 덥다. 폭염 동안 온도는 40°C(104.0°F)에 도달하거나 초과한다.
경제
오스만 시대 곡물 및 면화 생산의 주요 중심지였던 아다나는 터키 최초의 산업화 도시 중 하나였으며 현재는 가장 경제적으로 발전한 도시 중 하나이다. 1800년대 중반까지 중규모 무역 도시였던 이 도시는 주요 면화 공급업체인 미국이 남북 전쟁에 휘말린 이후 유럽 상인들을 끌어 모았다. 킬리키아 농부들은 처음으로 농산물을 수출하고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 거의 대부분 목화를 가공하는 공장이 이곳에서 운영되기 시작했지만 도시 사업의 대부분을 운영했던 아르메니아인의 대량 학살 이후 1915년에 대부분이 폐쇄되었고 경제는 거의 정지 상태에 이르렀다. 공화국의 도래는 폐쇄된 공장이 재가동되고 국유공장이 문을 열면서 산업화를 가속화했다. 1950년대에는 세이한댐의 건설과 농업기술의 발달로 농업생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따라서 대규모 산업이 성장했다. 이 기간 동안 서비스 산업, 특히 은행업이 발전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급속한 경제 성장이 지속되었고 영화 제작자들이 이 지역에 매력을 느꼈다.
터키 경제를 중앙 집중화하기 위해 당시 총리 Turgut Özal이 채택한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거의 모든 Adana 기반 기업이 본사를 이스탄불로 이전했다. 목화 재배량이 감소하면서 제조 원료 비용이 상승했고, 도시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공장 폐쇄의 물결이 일었다. 젊은 전문가들은 도시를 떠났다. Özal과 유사한 정부의 신자유주의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인해 2002년 이후 아다나로부터의 금융 및 인적 자본 이탈이 계속 증가했다. 2010년에 이 도시의 실업률은 19.1%라는 기록을 세웠다. 20 년간의 침체 이후 아다나의 경제는 관광, 서비스 산업, 도소매 부문에 대한 투자로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도시는 지역 중심지로 재편되고 있다.
문화
아다나 중심지에는 200년경에 로마인들이 세운 돌다리(Taş köprü), 대모스크, 시계탑 등 관광지가 있으며 아다나 국제 영화제(Uluslararası Adana Film Festivali)가 유명하다. 이 시기에는 외국에서도 사람들이 와서 북적인다.
그리고 케밥 종류가운데 다짐육을 양념해서 꼬치에 꿰어 굽는 아다나 케밥의 원조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에 아다나에 순전히 먹기위해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음식 솜씨도 튀르키예에서 음식 맛있기로 유명한 가지안테프를 비롯한 남동부 지방과 가깝기 때문에 맛도 좋고 물가도 저렴한 도시라 가격도 싸다. 또한 시으르단(Şırdan)이라고 불리는 양 창자에 양념한 쌀밥과 고기 부속부위들을 넣고 푹 삶은 요리의 원조도 아다나인데, 생긴 모양이 범상치 않아서 유명하다. 시으르단과 비슷하게 양이나 소의 창자에 쌀밥을 채워넣고 찐 뭄바르(Mumbar)도 유명한데, 카흐라만마라쉬를 비롯한 인근지역에서도 많이 먹는 음식이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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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아나톨리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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