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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카(영어: Zarqa, 아랍어: الزرقاء)는 요르단 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자르카주(Zarqa Governorate)의 주도이다, 인구는 63만 명이며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도시 이름은 아랍어로 "푸르다"를 뜻한다.[1]
개요[편집]
자르카는 요르단 북동쪽의 자르카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암만에서 북동쪽으로 24km 떨어져 있다. 자르카는 1902년 철도 정착역이 건설되면서 도시가 만들어졌다. 1902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인해 체첸인들이 이 지역으로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1905년 4월 10일, 오스만 제국이 체첸인들이 이곳에서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하는 칙령을 발표했고, 그 직후 도시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928년 11월 18일, 요르단 정부에서 자르카 시청을 짓는 칙령을 발표했다. 1926년 트란스요르단의 국경수비대가 설립되면서 영국군에 의해 부대시설이 시내에 지어졌고, 그 때부터 군사도시로 불려지게 된다. 요르단의 아랍 군단이 이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난민이 대거 이주한 후 1949년 국제 적십자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를 세웠다. 자르카에는 3개의 대학이 있으며, 그 중 가장 큰 대학이 하셰미테 대학교이다. 나머지 대학은 알-발카 응용 대학과 자르카 대학이다. 자르카에는 알-자르카 교육 및 투자와 같은 다른 커뮤니티 칼리지와 연구 센터가 있다. 1908년부터 1920년까지 헤자즈 철도는 남쪽으로는 자르카와 암만, 북쪽으로 는 시리아를 연결했다. 자르카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시리아를 연결하는 국제 고속도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암만- 바그다드 국제 고속도로도 이 도시를 통과한다.[2]
기후[편집]
자르카는 추운 반건조 기후(쾨펜 기후 구분 : BSk)를 가지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17.4°C이고, 연간 강수량은 182mm이며, 대부분 겨울철에 내린다. 자르카의 해발 고도는 619m이고, 겨울에는 가끔 눈이 내린다.
역사[편집]
자르카 지역은 기원후 1세기부터 사람이 살았지만, 자르카시는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쟁으로 인해 이주한 체첸 이민자들에 의해 1902년에야 건설되었다. 그들은 자르카강을 따라 정착했다. 당시 헤자즈 철도의 역이 새로운 정착지에 지어졌다. 철도역은 자르카를 중요한 허브로 만들었다. 1905년 4월 10일, 오스만 총독은 체첸 이민자들이 정착한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 후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다. 1928년 11월 18일, 새로운 요르단 정부는 자르카의 첫 번째 시의회를 설립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926년 트랜스 요르단 국경군이 창설된 후 영국군이 이 도시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면서 이 도시는 나중에 '군사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요르단 아랍군단의 본부도 자르카에 있었다.
요르단에서 가장 오래된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인 자르카 캠프는 도시 근처에 있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난민이 대거 이주한 후 1949년 국제 적십자 위원회가 세웠다. 이 캠프는 처음에는 텐트로 구성되었지만 유엔난민기구(United Nations Relief and Works Agency for Palestine Refugees in the Near East, UNRWA)는 결국 이 텐트를 콘크리트로 대체했다. 1990-91년 걸프 전쟁 이후 쿠웨이트 정부가 그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지원한다고 의심하는 2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추방하면서 더 많은 난민이 자르카로 왔다. 추방된 사람의 절반 이상이 자르카나 인근 도시인 루세이파로 갔다.
1970년 검은 9월 분쟁 동안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 구성원들은 비행기 5대를 납치하고, 그 중 3대를 자르카 근처 사막에 있는 비행장인 도슨스 필드에 착륙시켰다.
자르카는 오늘날 많은 팔레스타인 인구를 가진 "소외된" "보수적인" 도시로 여겨진다. 이곳은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거점이며 요르단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적 지부인 야당 이슬람 행동 전선의 많은 지지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도시는 이라크 알카에다의 초대 지도자인 지하디스트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Abu Musab al-Zarqawi)의 거주지였다. 주로 이슬람주의 단체를 위해 시리아 내전에 참전하기 위해 떠난 요르단인의 약 3분의 1이 자르카에서 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요르단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은 수이다.[3]
경제[편집]
자르카는 요르단의 산업 중심지이다. 요르단 공장의 50% 이상이 이곳에 있다. 도시의 산업 성장은 부동산 비용이 낮고 수도인 암만과 가깝기 때문이다.
요르단 경제에 필수적인 여러 시설이 자르카에 있으며, 요르단 유일의 정유 공장도 있다. 자르카 상공 회의소에 따르면, 2011년 요르단의 총수출의 10%가 자르카주에서 나왔으며 5억 1,200만 달러가 넘었다. 가죽과 의류 제품이 자르카 수출의 약 52%를 차지했고, 그다음으로 화학, 농업 및 제약 제품이 뒤를 이었다. 2020년 9월, 자르카 인근 육군 박격포 창고에서 전기 합선으로 대규모 폭발이 발생했다.
하셰미테대학교[편집]
하셰미테대학교(The Hashemite University)는 요르단 자르카주 자르카에 있는 국립 종합대학교이다. 1991년 출범했다. 학술부문은 의학부와 공학부, 자연과학부, 경제 · 경영학부 등 19개 학부로 구성됐으며, 학사와 석박사과정 등에서 80여 개의 교육프로그램이 제공된다. 공학부는 중동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공과대학에 속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3년 QS 세계대학순위에서 세계 1201-1400위권, 아랍지역 대학 가운데 50위를 기록했다. 2023년 타임스고등교육의 세계대학평가에서는 세계 1201-1500위권, 설립 50년 미만 신생대학 가운데 401-500위권에 포함됐다. 2023년 에듀랭크(EduRank)의 세계대학순위에서는 세계 2843위, 아시아 대학 중 890위, 요르단 대학 가운데 4위로 평가됐다.
1991년 칙령으로 자르카주에 자르카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허가됐다. 학교명이 후에 하셰미테대학교로 변경됐다. 하셰미테는 중동의 유력가문인 하심가문으로 여러 왕국의 왕가였으며, 요르단의 하심왕국을 이끈다. 요르단의 정식 국명은 하셰미테요르단왕국이다. 1995년 대학교 수업이 시작됐다. 하셰미테대학교의 캠퍼스는 2005년 4단계로 개발됐으며 자르카 시내 5만km²의 부지에 조성됐다. 캠퍼스 가까이에 두 개의 국제 고속도로가 연결된다. 정문인 서문 방향에서는 수도 암만과 시리아 방향 국제 고속도로가 연결되며, 남문 방향에서는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어진다. 도서관에는 약 25만 점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 아동도서관, 사회복지도서관, 미국학센터 등 특수도서관이 있다. 캠퍼스 내에 수영장과 각종 레크리에이션 시설, 카페 등이 갖춰졌다. 캠퍼스 외부에 여성전용 기숙사가 있으며, 자르카시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인 도심에 있다. 하셰미테대학교의 캠퍼스가 소재한 자르카는 자르카주의 주도이며, 요르단에서 수도 암만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4]
요르단[편집]
요르단(영어: Jordan)은 서아시아에 위치한 입헌 군주국이다. 정식 국호는 요르단 하심 왕국(아랍어: المملكة الأردنيّة الهاشميّة, 영어: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이다. 요르단의 수도는 암만이며, 이라크,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와 국경을 접한다. 약 26km의 해안선이 홍해의 북쪽 아카바만에 접한다. 이 해안선을 끼고 있는 도시 아카바에는 요르단 유일의 항구가 있다. 국토의 서단에 레바논, 안티레바논 두 산맥의 연장이 남북으로 달리고 그 사이 폭 10~20km의 대지구대(大地溝帶)가 있는데 이것이 갈릴리 호수, 사해(死海), 아카바만(灣) 등을 거쳐 아프리카에 이어진다. 지구대의 저변은 평탄하지 않아 헤르몬 산에서 발원한 요르단강이 남쪽으로 흘러 사해에 들어간다. 사해 남쪽에서 지구대가 차츰 높아져 그 10km 남방에서 해면과 같은 고도가 된다. 지구대 동부의 요르단은 표고 500m, 1,000m의 완만한 고원상을 이룬 암석 사막지대이다. 지구대의 서쪽은 지중해성 기후로 하계에는 고온·건조하고, 동계에는 저온·다습하여 500mm 정도의 비가 내린다. 동부는 스텝 사막지대로 강우량이 200mm 미만이다.
요르단의 국명은 요르단 북서부 국경에 위치한 요르단강에서 유래했다. 요르단의 국토는, 약 50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약 1만 년 전(기원전 8천 년경)에는 인류 최고(最古)의 농업이 행해졌다. 서아시아 문명이 발달하자 교역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고, 기원전 13세기경부터는 이집트인이 정착하여 암만에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암몬인의 나라가 있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남부 페트라 유적을 남긴 나바테아 왕국이 발전하였으나, 1세기 ~ 2세기에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7세기에는 이슬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아라비아와 이슬람교가 전파되어 아랍화·이슬람화되었으나, 다마스커스에 자리잡은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여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시리아 지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어, 그 변경으로서 도시 문명도 차츰 쇠퇴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 당시 이 지방을 지배하였던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도망하여 온 체르케스인을 시리아의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 살게 하여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영토에 추가하였으나,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빼앗겼다. 중동 전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인이 대거 유입되었다.[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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