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지도) |
|||
40번째 줄: | 40번째 줄: | ||
{{지도|시라즈}} | {{지도|시라즈}} | ||
{{다단2 | {{다단2 | ||
+ | |{{중앙이란 행정 지도}} | ||
|{{이란 행정 지도}} | |{{이란 행정 지도}} | ||
− | |||
}} | }} | ||
2024년 7월 8일 (월) 16:39 기준 최신판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시라즈(영어: Shiraz, 페르시아어: شیراز) 또는 쉬라즈는 이란의 5번째로 인구 밀집된 도시이며 파르스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약 200만 명이고 이란의 남서부에 위치하며 루드카네예 호쉬크강(rudkhaneye khoshk)이 계절에 따라서 흐른다. 시라즈의 기후는 좋은 편이며 1000년 이상 지역의 교역 중심이었다.[1]
개요[편집]
시라즈는 이란 남부지방을 대표하는 대도시이며 자그로스산맥의 동부 해발고도 1,585m 지점에 위치한다. 테헤란~부시르 고속도로가 지나는 농업생산의 중심지이다. 곡물 이외에 포도주, 장미향수, 융단 등을 산출하며 시멘트, 석유화학 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일명 ‘장미의 도시’라고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젠드왕조 시대에 정비된 바자르가 남아 있다. 도시에 대한 초기의 문헌에는 티리지스로 표기되었는데, 기원전 2000년경의 엘람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다. 7세기에 아랍인이 정복한 후부터 알려졌으며, 1393년에 티무르령이 되고서부터 시인 사디와 하페즈가 등장하여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또 18세기 말에는 카자르왕조의 수도로서 부흥하여 지방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몽골의 침략 때에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이란 최대의 바킬 사원과 이란 최고의 시성 하페즈, 사디, 커주 케르마니의 묘소를 비롯하여 사적이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시라즈는 유대와 기독교 공동체를 지녔으며, 공예 기술은 삼각 설계의 모자이크, 은식기, 카펫 등의 작업으로 구성된다. 중동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쇼핑몰로 알려진 페르시안 걸프가 개장해 운영중이다. 북동 50km 지점에 있는 페르세폴리스(페르시아 왕궁의 유적)와 함께 국내외로부터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시라즈는 이란의 남쪽과 파르스주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도시는 해발 1,500m의 자그로스산맥 기슭의 녹색 평야에 지어졌다. 시라즈는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800km 떨어져 있다. 계절에 따라 흐르는 드라이 리버(Dry River)는 도시의 북부를 지나 마할루 호수로 흘러 들어간다. 1920년 당시, 이 지역에는 참나무 숲이 있었다.
시라즈에는 상당한 수의 정원이 있다. 도시의 인구 증가로 인해, 이 정원들 중 많은 것들이 새로운 개발에 양보하기 위해 사라질지도 모른다. 비록 이 정원들을 보존하기 위해 지방 자치 단체에 의해 몇몇 조치들이 취해졌지만, 많은 불법적인 개발들은 여전히 이 정원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시라즈의 기후는 뚜렷한 사계절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반건조 기후로 분류되지만 더운 반건조 기후에는 조금 미치지 못한다. 여름은 7월 평균 최고 기온이 37.9°C로 더운 편이다. 겨울은 서늘하며, 12월과 1월에는 평균 낮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 매년 약 320mm(13인치)의 비가 내리는데, 거의 전적으로 겨울철에 내리지만 1965년 1월과 2004년 12월 한 달에 이만큼 많은 비가 내렸다. 1965년 7월부터 1966년 6월까지 82.9mm의 적은 비가 내렸다. 가가장 비가 많이 내린 해는 1955/1956년으로 857.2mm에 달했지만 1959년 이래로 1995/1996년과 2004/2005년에 각각 590mm 정도가 최고였다. 시라즈는 고도가 높고 위도가 낮아 여름철 자외선 지수가 매우 높아 일조량이 많아 더욱 악화된다.
상대적으로 건조한 기후임에도 불구하고, 극한 날씨는 드문 경우가 아니다. 2019년 3월 25일, 폭우로 인한 갑작스런 홍수로 인해 19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최고 기록 온도는 2022년 7월 3일 43.4°C, 최저 기록 온도는 1973년 1월 5일 –14.0°C였다.[3]
역사[편집]
비록 서기 7세기 말 이전에 시라즈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1933년 이후의 고고학적 발견물은 거의 없으며, 시라즈의 지역 또는 인근이 일찍이 기원전 6세기에 이슬람 이전 시대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동쪽으로 바름에 델라크, 북서쪽으로 구임의 부조, 그리고 동쪽으로 카스르에 아부 나스르와 파한데시의 사산 요새 유적 등 수많은 하크하마니쉬와 사산 시대 유적들이 도시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현재의 시라즈는 693년 칼리프의 동쪽 절반의 우마이야드 총독, 알하자즈 이븐 유수프 또는 무함마드 이븐 카심의 친척인 무함마드 이븐 타카피에 의해 설립 또는 복구되었다. 아랍 무슬림 군대는 640년에서 653년 사이에 그들의 수비대 마을 바스라에서 시작된 몇 차례의 원정으로 시라즈가 위치한 파르스의 더 넓은 지역을 정복했고, 특히 641년에 시라즈 주변의 가까운 지역을 점령했다. 이 지역에는 아랍인들에게 공물을 바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요새들이 있었다. 사산인들은 653년 아랍인들이 시라즈 평원이 아랍의 야영지로 이용되던 중에 격전을 벌여 점령할 때까지 파르스의 수도인 이스타흐르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이스타흐르가 사산 제국과 조로아스터교 종교와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아랍인들은 인근 시라즈에 경쟁 문화와 행정의 중심지를 설립하려고 했다. 따라서, 693년에 처음 설립되었을 때, 이 도시는 이스파한보다 훨씬 더 크게 계획되었다.
이마드 알다울라 알리 이븐 부야가 통치하던 이란 부야 왕조는 933년 사파리 왕조를 몰아내고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아두드 알다울라 파나 쿠스로우'가 949년에서 983년 사이에 파르스를 점령하고 통치했으며, 압바스 왕조의 본거지인 이라크를 추가했다. 977년에 시라즈에 근거지를 둔 그의 영지들에 아바스 왕조는 이후 시라즈에 근거지를 둔 왕조의 꼭두각시 국가가 되었다. 시라즈는 파르스의 가장 크고 번영한 도시이자 칼리프 왕국의 중요한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 발전했다. 아두드 알다울라는 큰 도서관, 병원 및 여러 모스크, 바자회, 카라반세라이, 궁전 및 정원을 도시에 지었고, 그 남쪽에는 974년에 그의 군대를 위한 요새화된 캠프를 세웠다.
1504년, 시라즈는 사파비드 왕조의 창시자인 이스마일 1세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다. 사파비드 제국 (1501–1722) 내내 시라즈는 지방의 수도로 남아 있었고 샤 압바스 1세 통치하에 파르스의 총독이었던 이맘 촐리 칸은 제국의 수도인 이스파한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과 같은 양식으로 많은 궁전들과 화려한 건물들을 지었다. 사파비 왕조가 멸망한 후, 시라즈는 아프간인들의 습격과 나데르 샤에 대한 총독의 반란으로 악화된 쇠퇴기를 겪었고, 시라즈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도시는 수개월 동안 포위당했고 결국에는 약탈당했다. 1747년 나데르 샤가 살해될 당시 도시의 역사적 건물은 대부분 훼손되거나 폐허가 됐고, 인구는 16세기에 그 4분의 1 수준인 5만 명으로 떨어졌다.
1910년 유대인들이 무슬림 소녀를 의식적으로 살해했다는 거짓 소문 이후 유대인 구역의 포그롬이 시작되었다. 폭동 과정에서 유대인 12명이 살해되고 50여명이 다쳤으며, 시라즈의 유대인 6천여 명이 전 재산을 빼앗겼다.
팔라비 왕조 동안, 시라즈는 다시 주목의 중심이 되었다. 사디와 하피즈와 같은 시인들의 무덤과 같은 많은 중요한 명소들이 건설되었고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시라즈는 큰 산업적, 종교적 또는 전략적 중요성이 없었으며 행정 중심지가 되었지만 이란 혁명 이후 인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증가했다.[4]
시라즈대학교[편집]
시라즈대학교(Shiraz University)는 이란 파르스주의 시라즈에 있는 공립 종합대학교이다. 1946년 의공학기술대학으로 처음 설립됐다. 과거 팔레비대학교로 널리 알려졌었다. 학술조직은 15개 학부로 이루어져 있다. 200여 개의 학사과정과 300여 개의 석사과정, 150여 개의 박사과정을 제공한다. 이 대학교는 이란에서 미국의 고등교육 시스템을 모델로 한 유일한 교육기관이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발전해왔다. 캠퍼스가 이란 대학 중 두 번째로 크다. 과거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설계한 일본계 미국인 건축가 야마자키 미노루(山岐實)가 캠퍼스를 설계했다. 캠퍼스 내 에람(Eram)식물원은 1372년에 조성된 페르시아 정원으로 정교한 건물과 함께 시라즈 최고의 관광지 중 하나다. 시라즈에는 고대 무덤, 모스크 등 많은 유적지가 있다. 다수의 유대 교회와 두 개의 기독교 교회도 있다. 시라즈대학교는 학점 부여에 매우 엄격해 샤리프공과대학이나 테헤란대학교 등 다른 이란의 대학에 비해 학생 성적의 평균이 낮기로 유명하다. 특히 토목 · 전기 · 기계공학에서 낮은 평균 학점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대학평가기관 QS의 2023년 세계대학순위에서 세계 751-800위권, 아시아 대학 중 160위를 기록했다. 2023년 타임스고등교육(THE)의 세계대학평가에서는 세계 801-1000위권, 아시아 대학 중에서는 251-300위권에 포함됐다. 2023년 유에스뉴스&월드리포트의 글로벌대학순위에서 세계 821위, 아시아 대학 중 208위, 이란 대학 가운데 12위로 평가됐다. 2023년 세계대학순위센터(CWUR)의 평가순위는 세계 922위, 이란 대학 중 9위를 기록했다. 2023년 에듀랭크(EduRank)의 평가에서는 세계 1147위, 아시아 대학 중 282위, 이란 대학 가운데 12위로 나타났다.
시라즈대학교는 1946년 4년제 과정으로 설립된 의과학 분야의 전문가 양성을 목표로 하는 기술대학이다. 처음에는 고등보건교육원(High Institute of Health)으로 불리다가 1950년에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1953년 간호대학(Namazi School of Nursing)과 농학 · 문리대학(Colleges of Agriculture and Arts and Sciences)이 설립됐다. 1954년 공과대학(College of Engineering)과 수의과대학(College of Veterinary Medicine)이 추가되면서 이 학교는 대학교 지위로 승격됐고, 당시 팔레비 왕조의 이름을 따서 팔레비대학교(Pahlavi University)로 명명됐다. 1960년 이란의 왕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게이로드 한웰 총장을 초청해 이란의 고등교육기관을 점검토록 요청했다. 한웰은 이에 응해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고, 팔레비 왕은 이후 펜실베이니아대가 팔레비대학교를 미국식 고등교육을 바탕으로 이란에서 유일한 기관으로 바꾸는 것을 이란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펜실베이니아대는 팔레비대학교의 많은 학과와 기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력을 갖게 됐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출신의 많은 교수진들이 시라즈로 파견돼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하게 됐고, 광범위한 교류 프로그램이 실행됐다. 한웰 총장은 팔레비대학에 대한 도움을 인정받아 후일 시라즈대학에서 명예학위를 수여받았다. 1969년 대학원과 전자대학(College of Electronics), 1970년 치의학대학(Dental School), 1977년 법학대학(Colleges of Law)과 교육대학(Colleges of Education) 등이 추가로 설립됐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후 모든 대학에서 급격한 변화가 이어졌다. 팔레비대학교의 명칭은 즉시 시라즈대학교(Shiraz University)로 변경됐다. 1980~1987년 이란 문화대혁명으로 모든 대학이 3년간 문을 닫았다.[5]
지도[편집]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