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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8일 (수) 21: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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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단스크(폴란드어: Gdańsk, 카슈브어: Gduńsk, 라틴어: Gedanum)는 폴란드 북부 발트해에 면한 포모르스키에주의 항구도시이다. 인구는 약 48만 명이며 포모르스키에주의 주도이자 최대도시이다. 독일어 이름인 단치히(독일어: Danzig, 라틴어: Dantiscum, 문화어: 단찌히)로 잘 알려져 있다.[1]
개요
그단스크는 원래 비스와강의 하항(河港)이었기 때문에 시가지의 중심부와 항만시설의 일부는 하구에서 3km 거슬러 올라간 위치에 있고, 하구부에 새로 건설된 항구는 노비포르트(Nowy Port:새 항구)라고 한다. 그단스크는 소포트 및 그디니아와 함께 세 도시(Tri-City, Trójmiasto, 트로이미아스토)라는 하나의 대도시를 형성한다. 그단스크는 한때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폴란드의 도시였다. 따라서 자체 정부, 예산, 군대 및 정치적 지위를 가졌다. 구시가는 한자 동맹의 일부로 발트해에서 거래한 상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건축은 암스테르담의 건축과 매우 유사하다. 10세기에 무역항으로 개발되어 12세기 이래 독일 상인이 이주해왔으며 1224년 독일의 도시권을 획득하였고, 1361년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에 가맹하여 동부 유럽의 주요항구로 번영하였다. 1793년 프로이센령(領)이 되었다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자유시가 되었다. 39년 독일이 병합을 요구하면서 폴란드에 침입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원인을 만들었으며, 45년까지 독일이 점령하다가 종전 후 폴란드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항만시설의 60%가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북서쪽 15km의 지점에 있는 그디니아항(港)과 더불어 통일적인 계획하에 항만시설을 정비하여 근대적인 항구로 부활하였다. 따라서 그단스크와 그디니아 및 중간에 위치한 소포트 등 세 도시는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어서 트로이미아스토(Trójmiasto:세 도시)라고 하기도 한다. 1980년대에 "연대자유노조"가 그단스크에서 나타났으며 1989년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붕괴를 가져 왔다. 그단스크는 현재 폴란드의 무역항이라기 보다는 항구를 가지지 못한 동부 유럽 제국의 수출입 문호의 구실을 하고 있다. 주로 코크스, 석탄, 시멘트를 수출하고 철광석, 목화, 양털 등을 수입하고 있다. 한편 조선, 야금, 기계, 화학, 식품가공 등의 공업도 발달하였다. 공과, 의과, 교육 등 대학이 있고 해양관계의 연구, 교육시설은 그디니아에 집중되어 있다. 그단스크는 현재 중요한 관광, 교육 및 산업 중심지이다. 문화예술 방면으로는 그단스크 셰익스피어 극장, 2차 세계대전 박물관, 폴란드 발틱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1260년 시작된 유서깊은 성도미니크 축제가 유명하다. 2014년에는 민주화에 기여한 자유연대 운동의 역사를 기리는 박물관을 겸한 유럽연대 센터가 그단스크에 개관했다.[2]
역사
그단스크의 가장 오래된 요새는 폴란드 최초의 왕조인 피아스트 왕조의 창시자 미에슈코 1세(930~992)가 서기 980년경 이 지역 원주민들을 굴복시키고 쌓았다. 997년에는 성(聖)아달베르트가 폴란드왕 볼레스와프 1세를 대리해 주민들에게 가톨릭교 세례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1138년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3세는 유언을 통해 왕국을 아들들이 나누어 지배하도록 했다. 폴란드는 작은 공국들로 갈라졌다. 그단스크는 포메렐리아 공작령에 속하게 되었다. 1235년에는 도시 자치권을 획득하였으며, 당시 인구는 약 2,000명이었다.
그러나 1308년 독일의 튜튼 기사단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그단스크를 점령, 식민지화함으로써 자치권을 잃었다. 원래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출범한 튜튼 기사단은 원정이 끝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그단스크 항구를 중심으로 발트해 연안 무역을 장악함으로써 국가 못지않은 세력을 누렸다. 폴란드 왕국은 1343년 칼리시(Kalisz) 조약을 통해 그단스크를 포함한 포메라니아 지방을 튜튼 기사단에게 임대료를 받고 조차해 주었다.
튜튼 기사단 치하에서 그단스크는 급속한 경제발전과 도시화를 이루었다. 독일계 · 유대계 주민이 대거 이주해왔으며, 1361년에는 한자동맹(독일 북부 도시들의 연맹으로 발트해 연안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음)에 공식 가입해 더욱 번창할 발판을 마련했다. 밀을 비롯한 곡물과 목재 · 타르 등이 그단스크를 중심으로 활발히 거래되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이 정한 도시법과 과중한 세금 때문에 시민들의 불만도 누적되었다. 1409년 폴란드는 튜튼 기사단을 영토 북부에서 쫓아내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튜튼 기사단의 지배에 염증을 느끼던 그단스크 시민들은 폴란드를 지지했다.
1410년 7월 9일 폴란드군 3만 명과 튜튼 기사단 2만 명이 맞붙은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군이 승리했다. 덕분에 그단스크는 잠시 폴란드 직접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1411년 폴란드가 다시 이 지역을 튜튼 기사단에 대여하는 바람에 원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단스크는 1440년 튜튼 기사단에 맞서 결성된 프러시아 연합에 참여했다. 프러시아 연합은 폴란드 왕국과 동맹을 맺고 튜튼 기사단과 13년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1457년 폴란드의 승리로 끝났고, 그단스크는 폴란드 왕국으로부터 특권을 가진 자치도시 자격을 부여받았다. 1466년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이 맺은 제2차 토룬 조약을 통해 그단스크는 ‘폴란드 왕국에 속하는 프러시아’로서 자치권을 재확인받았다.
이로써 그단스크는 독일 튜튼 기사단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게다가 기존 한자동맹 도시들에 더해 폴란드 왕국 시장에도 참여하게 됨으로써 한층 번창하게 되었다. 이후 찾아온 16~17세기는 그단스크의 황금기로 불린다.
주민 다수는 독일계였으나 폴란드계, 유대계, 네덜란드계 주민들도 많았고 스코틀랜드 난민들도 받아들였다.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그단스크의 중산층 시민 다수가 루터파 또는 칼뱅파로 개종했지만 기존 가톨릭 신자들과 극한 대립이 빚어지지는 않았다. 당시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맹왕국의 분위기는 민족, 종교, 종파에 상당히 관용적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들어 그단스크는 잇따른 전쟁 등으로 점차 피폐해졌다. 1734년 폴란드 계승전쟁 와중에 벌어진 그단스크 포위전 때 러시아에 점령당하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그단스크가 속한 폴란드 · 리투아니아 왕국은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주변 3개국에게 3차례에 걸쳐 국토를 분할당하고 결국 멸망했다.
세 나라는 1772년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여 폴란드 왕국 영토의 30%를 나눠 가지는 분할조약에 합의했다. 1793년에는 러시아가 폴란드 영토의 동쪽을, 프로이센이 서쪽 비엘코폴스카 지역을 빼앗아가는 2차 분할이 이루어졌다. 그단스크는 2차 분할의 결과로 프로이센 지배하로 넘어갔다.
프로이센은 그단스크의 도시명을 ‘단치히’로 바꾸었다. 1795년 폴란드의 나머지 영토 중 바르샤바는 프로이센이, 크라쿠프는 오스트리아가, 빌르노 지역은 러시아가 점유하는 3차 분할이 시행되면서 한때 유럽 초강대국이었던 폴란드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1807~1814년의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그단스크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 프랑스 황제에 의해 자치권을 가진 ‘자유도시 단치히’로 독립에 가까운 자치권을 누렸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열린 빈 회의(1814~1815)의 결과 다시 프로이센에 병합되었다. 프로이센은 그단스크를 서프로이센 단치히 지방의 중심도시로 삼고 독일에의 동화정책을 강력히 시행했다.
1871년 독일이 통일되자 그단스크는 독일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종결됐다. 전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 덕분에 폴란드는 1795년 주변 강국들에 의한 3차 국토 분할로 나라를 잃은 후 123년 만에 독립을 이루었다.
독립한 폴란드는 당초 그단스크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단스크의 주민 다수는 독일계였다. 결국 베르사유 조약은 그단스크를 국제연맹이 보호하는 ‘단치히 자유도시’로 규정하고 독자적인 헌법과 정부, 의회를 갖고, 별도 화폐를 발행하도록 허용했다. 다만 외교권은 폴란드가 행사하도록 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물론, 그단스크의 다수 독일계 주민들도 베르사유 조약에 불만을 품었다. 이는 후에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자신들이 영유권을 주장하던 그단스크를 가장 먼저 공격하는 보복 조치로 귀결된다. 1923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그단스크 인구 33만 5,921명 중 폴란드 계통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주민은 7,896명이었다.
1920년에 국제 연맹에 의해 창설된 자유시였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단치히 자유시(독일어: Freie Stadt Danzig, 폴란드어: Wolne Miasto Gdańsk)가 되었다. 본래 독일 제국 서프로이센의 주도였으나,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령에서 떨어져 나갔다. 고유의 기, 문장, 찬가, 독자적인 화폐(100페니히=1굴덴)를 가지고 있었다. 1924년부터 냉동고, 식용유 제조공장, 철도, 조선소 등이 건설되어 발트해 유수(有數)의 항구로 발전하였다.
1933년부터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자유시 의회를 장악하였고, 유대인에 대한 탄압 정책이 시행되었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가 단치히 반환을 구실로 폴란드 침공을 감행하며 단치히 자유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폴란드 침공이 일어나자마자 단치히 의회는 나치 독일에 합병을 선언하였다. 단치히 자유시에 있던 폴란드인 민간인들은 우체국 등지에서 항전을 끝까지 벌이다가 결국 총살당했다. 한편 그단스크에 있던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 반도에서는 거기 주둔하던 폴란드군 205명이 일주일 동안이나 독일군에게 맞서 싸웠다. 이들은 우체국 직원들과는 달리 현역 군인 신분이었기에 총살당하지 않았다.
폴란드 침공 이후 단치히는 독일이 장악하였다. 독일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자 자유시는 소멸되었다. 199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귄터 그라스의 대표작 양철북의 배경이 된 도시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군과의 뒤이은 전투 끝에 1945년 들어 시가지와 항만 시설이 모두 파괴되었다. 소련군은 이 도시를 점령하였고, 종전 후 단치히는 폴란드령으로 귀속되어 남아있던 종래의 독일인 주민은 모두 추방되어 현재에 이른다. 파괴된 시가지, 항만시설, 공장 등은 전후 복구되었다.
1947년 폴란드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이후 44년간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존속했다. 소련은 발트해 연안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덕분에 그단스크는 항만이 대대적으로 정비되고 조선소 3곳이 건설되는 등 폴란드 조선 · 해운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단스크에서는 1970년 12월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 발포로 수십 명이 사망했고, 이 시위 때문에 폴란드 공산주의 지도자 브와디스와프 고무카는 실각했다.
1989년 2월 6일부터 4월 5일까지 폴란드의 집권 인민공화국 정부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 간에 원탁회의가 개최됐다. 회의 결과 맺어진 ‘국민화해 협정’으로 양원제 의회와 대통령제 실시, 자유선거제와 정치단체 합법화 등이 이루어졌다. 폴란드는 1989년 9월 7일 법적으로 민주화되어 폴란드공화국으로 바뀌었다. 민주화 이후 그단스크는 폴란드 북부의 산업 · 물류 중심도시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그단스크 조선소는 한국, 중국, 일본과의 치열한 조선업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현재 파산 위기에 놓여있다. 최근에는 무역항이라기 보다는 바다와 인접하지 못한 중앙유럽 국가들의 수출입 문호 역할을 하고있다.[3]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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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그단스크〉, 《위키백과》
- 〈그단스크〉, 《요다위키》
- 〈그단스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동유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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