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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포(영어: Aleppo, 아랍어: ﺣﻠﺐ, 문화어: 알레뽀)는 시리아 북부의 도시로 알레포주의 주도이다. 2004년 인구조사에서 213만 명의 인구를 기록하여, 시리아 내전 이전에는 시리아 아랍 공화국은 물론 레반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2021년 인구는 210만 명으로 추산되며 수도 다마스쿠스에 이어 시리아에 두 번째 도시이다.[1]
개요
알레포는 지중해에서 내륙으로 약 120km 떨어진 해발 380m의 고원에 위치한다. 알레포주는 도시 주위의 16,000km²의 면적을 포함하며 인구는 4,393,000명에 달하며 시리아에서 가장 큰 주이다. 고대에는 칼페, 칼리본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리스인들에게는 베로에아, 투르크인에게는 할렙으로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령이었을 때 알렙이 사용되었다. 그 곳은 지중해와 유프라테스강의 사이의 전략적인 지점이다. 초기에는 그곳은 쿠웨이크 강의 양쪽에 넓은 비옥한 계곡의 작은 그룹 위에 건설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과 카이로 다음가는, 제국 제3의 도시였다. 도시의 주요 역할은 교역의 장소이며 그곳이 인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영역 그리고 남쪽의 다마스쿠스에서 오는 교역을 중계한다. 전쟁 이전에 시민의 80%가 수니파 무슬림이었다. 해발고도 400m의 고원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후는 대륙성이지만 살기에 무난하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에 비가 오며, 연강수량은 400mm이다. 이스탄불~바그다드 철도가 통과하고 베이루트, 다마스쿠스와도 철도, 도로로 연결되었으며, 예로부터 동서교통의 요지가 되어 무역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였다. 목화의 대집산지이며, 견직물과 면직물의 제조 및 식품가공, 양모, 담배, 시멘트, 방적 등의 공업이 성하다. 시내에는 시리아대학의 분교를 비롯하여 라스샴라와 마리에서 출토된 유물을 간직한 박물관이 있으며 옛 시가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오리엔트풍의 큰 시장과 12세기에 건조된 비잔틴 시대의 성채가 있다. 이슬람 교회도 많으며 최대의 것은 715년에 건조된 자미자카리야이다. 또 알피르다우스 교회(낙원의 교실)는 시리아의 중세 건축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유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2]
지리 및 기후
알레포는 지중해에서 내륙으로 약 1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해발 380m의 고원에 위치하며, 바브 알하와의 시리아-터키 국경 검문소에서 동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도시는 올리브 나무와 피스타치오 나무가 널리 재배되는 북쪽과 서쪽의 농경지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으로 알레포는 시리아 사막의 건조한 지역에 접근한다. 도시는 현재의 옛 도시 위치에서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세워졌으며, 북쪽의 아인타브 고원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알레포를 거쳐 비옥한 진나스린으로 흘러간다. 알레포의 오래된 도시는 케이크 강의 왼쪽 둑에 놓여있다. 도시는 성(원래 기원전 2천년 전의 신전)이 세워져 있는 중요한 중앙 언덕을 둘러싼 여덟 개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190km² 이상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알레포는 중동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도시 중 하나이다.
알레포는 서늘한 스텝 기후(쾨펜: BSk)를 가지고 있다. 알라위인산맥과 누르산맥 등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이어지는 산맥은 지중해가 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크게 차단한다. 연중 평균 고온과 저온은 23.8°C와 11.1°C이다. 평균 강수량은 329.4mm이다. 강수량의 80% 이상이 10월에서 3월 사이에 발생한다. 겨울마다 한두번 눈이 내리며 평균 습도는 55.7%이다.[3]
역사
알레포는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도시로 꼽힌다. 1986년 유네스코는 알레포의 구시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살라딘이 축조했다는 알레포 성채와 도심의 우마이야 대사원, 9세기에 1만 권의 장서를 소장했다고 전해지는 사이피야 도서관 등 유구하고 동시에 유수한 문화재가 풍부한 것이 그 이유이다. 시타델을 제외하면 과거 도시 유적과 현재 시가지가 거의 겹치기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문헌 자료가 있기 전에는 언제부터 도시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최소한 기원전 5천년 경부터 거주지가 형성되었고 기원전 2500년 경의 엘바 문서에서 '할람'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알레포는 서아시아 문명의 발상지인 자지라와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와 비교적 가까운 관계로 남쪽의 경쟁 도시인 다마스쿠스보다 먼저 도시로 발전하였다.
알레포의 첫 이름은 '할람'이었고 당대에는 셈계 아르미 왕국의 수도였다. 당시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처럼 아르미 왕국 역시 알레포 일대만을 지배하는 도시 국가였는데, 서남쪽으로 40km 떨어진 에블라(텔 마르디크, تل مرديخ)와 친교와 경쟁을 반복하였다. 그러던 기원전 2350년 경 에블라의 왕이 수메르의 키쉬와 연합하여 아르미 군을 격파하였고 스스로 '이그리쉬 할람'(할람을 물리친)을 칭하였다. 이때부터 에블라의 속국이던 아르미 왕국은 전자가 동쪽의 마리와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던 틈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에블라의 재상 이비 스피쉬에게 수도가 함락되며 진압되었다. 이비 스피쉬의 아들 엔지 말리크가 할람의 총독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 수메르를 평정한 아카드 인들이 침공하였고 아르미와 에블라 모두 그에 파괴되었다. 기원전 2290년)이후 에블라 왕국은 복구되었지만 아르미 왕국은 그러지 못하였다.
아카드 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배에 만족하며 돌아가자 도시는 재차 에블라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번엔 3세기간 지배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 할랍에선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폭풍의 신인 하다드 숭배가 번영하였는데고 이로써 할람은 동시에 '하다드의 도시'로도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편 기원전 2154년 구티 인들의 침공으로 아카드 제국이 붕괴된 후 수메르 제국 (우르 제3 왕조)이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하자 에블라 왕국 역시 그에 복속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004년 수메르 제국 역시 붕괴되었고 비슷한 시기 에블라 역시 후르리 인의 침공으로 2왕국이 멸망하고 3왕국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혼란기에 동부 셈족의 일파인 아모리 인이 나타났다. 이들 중 동쪽으로 향한 무리는 고 바빌로니아를 세웠고 서쪽으로 향한 무리는 얌하드를 세웠는데, 후자는 대가뭄 이후 쇠퇴하던 에블라로부터 할랍을 점령하고 이를 수도로 삼았다.
아르파드의 파괴와 함께 다시 일대의 중심지가 된 할랍은 이후 한세기 반동안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기원전 609년, 아시리아-이집트 연합군과 메디아-칼데아 연합군 간의 메기도 전투 및 하란 공방전이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며 아시리아 제국은 20년간의 대전쟁 끝에 멸망하였다. 이때 할랍은 아시리아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카르케미쉬와 가까워 비교적 나중에 신바빌로니아 (칼데아)령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지배는 오래가지 못하였고 70여년 후인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하며 할랍 역시 자동으로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별다른 언급 없이 아람어로 '강 건너편'이란 뜻의 에베르-나리 사트리프 (총독령)에 소속되어 있던 할랍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점령되며 그리스 문명권 하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대왕의 사후 디아도코이의 일원인 셀레우코스 1세는 할랍을 그리스식 도시로 개조하고 본국 마케도니아의 도시 베로이아(Βέροια)의 이름을 붙였다. 베로이아는 기원전 240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중심지가 수메르의 셀레우키아에서 시리아의 안티오크로 이전되며 그 배후 도시로 발전하였다. 다른 그리스 문명권 도시들처럼 불레(βουλή)라고 부르는 귀족들의 평의회에 의해 자치를 누리며 평화롭게 지내던 베로이아는 기원전 88년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대왕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되었고 마침내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가 셀레우코스 조를 멸할 때에 로마령 시리아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어진 약 3세기간의 팍스 로마나 기간동안 로마 총독은 그리스어를 쓰는 귀족층이나 아람어를 쓰는 평민들에게 세금을 제외하면 별 간섭을 하지 않았고 제국의 유럽 부분이 침체기를 겪던 5세기에도 인구 증가가 지속되었다고 한다. 시리아 주에서 베로이아는 안티오크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그러던 3세기 무렵부터 베로이아는 이웃 안티오크와 함께 크리스트교가 주를 이루었다. 문헌상 첫 등장하는 베로이아 주교인 320년경의 성 에우스타시오스는 324년 안티오크의 주교가 되어 니케아 공의회에 참가, 아리우스파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는 330년 안티오크 총회에서 아리우스 주의에 호의적인 사제들에게 간통 혐의로 폐위되었다. 이에 안티오크 시민들이 봉기하려 하였으나 에우스타시오스는 폭력을 만류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하는 모범을 보였다. 한편 시민들은 아리우스파 주교 멜레티오스에 반발하여 니케아 주의 주교를 선출해 대립하였는데 이는 반세기 이상 이어졌다. 그후 432년에 베로이아에선 주교 아카시오스의 주관 하에 성 키릴로스 (치릴로)와 그에 반대하는 동방 주교들 간의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다만 5세기부터 시리아는 단성론이 대세가 되었고 518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칼케돈 주의를 거부한 베로이아 주교를 추방하기도 하였다.
7세기 초반 사산 제국의 점령기를 지나 시리아는 634년부터 라쉬둔 칼리파조의 침공에 직면했다. 그해 남쪽의 다마스쿠스가 점령되었고, 636년엔 에메사(홈스)의 함락과 더불어 야르무크 전투 이후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시리아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마침내 637년 4월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이슬람 제국군은 세 방향으로 흩어져 진군했는데 총사령관 아부 우바이다 아미르는 전임자이자 야전 사령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와 함께 오론테스 강을 따라 북상했다. 6월 칼키스를 손쉽게 접수한 아부 우바이다는 8월 베로이아를 포위했다. 포위는 별다른 공성전없이 2개월간 이어졌고, 마침내 10월 도시가 항복했다. 도시는 헬라스식 '베로이아' 대신 현지 이름인 '할랍'으로 돌아왔다. 그 직후 수비대장 요아킴은 4,0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뒤이어 할랍의 북쪽 거점인 아자즈 점령때 활약했다. 10월 말엽 안티오크 역시 항복하면서 시리아는 이슬람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할랍은 이미 532년을 끝으로 주교에 대한 기록이 전무했음에도 다수의 기독교도들이 거주하며,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를 거쳐 10세기 무렵까지 큰 변화없이 유지되었다. 다만 안티오크와 할랍 사이의 로마 시대 빌라들은 안티오크의 쇠퇴와 무역로의 변화 등을 겪으며 유령도시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할랍은 제국의 중심인 시리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써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그러던 750년, 아바스 조가 우마이야 조를 멸하고 시리아를 장악하자 동쪽에서 온 호라산 군대가 시리아에 대한 군정을 실시했다. 그들의 가혹한 통치에 대해 시리아에선 킨나스린 총독이었던 아불 와르드 마즈자 이븐 알 카우싸르를 필두로 한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발리스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여인들이 희롱당했다는 소식에 봉기한 마즈자는 무아위야 1세의 직계인 아부 무함마드 지야드 앗 수피아니와 합류했다. 할랍에서는 지야드의 조카 알 아바스 이븐 무함마드가 거병했다.
셀주크 제국의 위협에 성공적으로 대처한 마흐무드는 1075년 사망하였다. 그는 막내 아들 샤빕을 후계자로 정했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장남 나스르가 집권하였다. 그해 가을 나스르 휘하 튀르크 용병들은 동로마로부터 만비즈, 파티마 조로부터 라파니야를 수복하였다. 하지만 나스르는 그 대장인 아흐마드 샤를 이드 알 피트르 때에 체포해 감금하였고 직접 알 하디르의 튀르크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도중 활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동생 사비크가 카파르탑의 아미르 알리의 도움을 받아 즉위했는데 다른 동생 와싸브가 바누 킬랍의 지지 하에 반발하며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1080년, 모술-라카 일대를 지배하던 우카일 왕조의 무슬림(샤라프 앗 다울라)이 시민들의 요청으로 할랍에 입성하였다. 사비크는 시타델에서 농성했지만 후원자인 알리의 중재에 부근 작은 영지를 대가로 항복하였다.
장기는 1130년의 홈스 원정 후 부관 사와르에게 할랍을 맡기고 이라크 문제에 집중, 1132년 술탄 마수드를 도와 바그다드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그해 8월 칼리파 군에게 대패한 장기는 홀로 쫓기다가 티그리트의 영주 아이유브에게 구출된다. 이후 칼리파와 동맹한 장기는 1135년 실패한 다마스쿠스 원정의 이듬해에 술탄 마수드를 격파하고 칼리파 알 라시드의 모술 피신을 받아주나 결국 술탄의 협박으로 축출한다. 이라크 대한 야욕을 접기로 한 장기는 1137년 7월, 재차 홈스를 포위하던 중 그 동맹인 트리폴리 백작을 바린 전투에서 격파하고 카파르탑과 마라트 알 누만을 점령하며 '지하드'에 나섰다. 이듬해엔 아르카를 점령하였고 동시에 다마수쿠스 태후와 결혼, 지참금으로 홈스를 얻었다. 1138년 8월 시리아에서 23만 명이 죽은 대지진이 발생, 할랍도 성벽이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1139년 바알벡을 점령한 장기는 이듬해 다마스쿠스를 포위, 아미르를 복속시켰다.
1242년 할랍 북쪽을 약탈했던 몽골군은 1256년 왕공 훌라구 하에 대대적으로 출정하였다. 1258년 2월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함락하였다. 공포를 느낀 유수프는 훌라구에게 사절을 보냈는데 후자는 유수프 본인 출두를 지시하였다. 유수프는 자신 대신 장남 무함마드가 대신 파견되었다. 유수프의 저자세 외교에 분노한 쿠르드 맘루크들이 카라크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카라크의 바이바르스가 팔레스타인을 약탈하고 시리아군을 격파하자 1259년 유수프는 재차 친정에 나서 그를 패배시켰다. 바이바르스는 항복하고 유수프 휘하로 돌아왔는데 그해 말엽 훌라구가 시리아를 침공하며 상황은 급변하였다. 유수프는 이집트 술탄 쿠투즈와 동맹하고 다마스쿠스에 머물렀는데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1260년 초엽 일단의 맘루크들의 그의 암살을 꾀하였고 실패하자 가자로 도주, 유수프의 동생 가지를 술탄으로 옹립하였다.
오스만측 통계에 의하면 술탄 셀림 1세가 점령한 1516년 당시 할랍에는 11,224가구에 5만여 시민이 거주 중이었다. 이후 할랍은 동명의 주(eyalet)의 치소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기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시리아, 이집트, 그리고 사파비 제국을 이어주는 교통로 상에 놓인 할랍은 매우 번영하였고 제국의 제2의 도시로 추산되기도 한다. 시내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활약으로 할랍은 16세기 중반부터 이미 다마스쿠스를 제치고 레반트 일대의 무역 중심지로 떠올랐는데, 이는 1581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설립한 런던 레반트 회사가 18세기 말까지 할랍에 본부를 두고 다마스쿠스에는 오스만 당국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진출하지 않았던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외에 베네치아 공화국(1548년), 프랑스(1562년), 네더란드(1613년) 등 많은 서유럽 국가들이 할랍에 대사관을 세워 무역을 감독하였다. 할랍의 명성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멕베스와 오델로에까지 언급될 정도였다.
18세기 들어 사파비 제국이 붕괴되고 이란의 비단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동시에 그 판매처였던 할랍 역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시리아는 서유럽이 관심을 둘만한 기반 산업이 없었고 18세기 중반 페르시아 카라반이 적어지며 유럽 상인들 역시 도시에 오지 않게 되었다. 18세기 말엽 오스만 제국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며 사막의 베두인들이 도시를 습격하였고 부유했던 할랍은 이들의 주 목적지가 되어 수난을 겪었다. 주변의 농지가 모두 황페화되자 할랍 시민들은 1798년의 기근과 1822년의 지진(이때 시타델의 유적들이 파괴됨), 1823-27년의 콜레라로 40만에 달하던 인구가 19세기 말에는 1/4인 10만도 채 되지 않게 폭락하는 등 고난을 겪었다. 민심도 흉흉해져 1850년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총독이 도주하자 무슬림 군중이 기독교도 구역을 습격해 많은 이들이 살해되고 성당들이 약탈을 겪는 일도 있었다. 결국 오스만 군이 개입하여 5천의 전사자를 내고서야 할랍의 질서가 회복되었다.
19세기 중반 할랍은 인근 목화와 담배 등 신작물 생산을 바탕으로 다시 서유럽 상인들을 끌어들이며 중흥기를 맞았는데, 이는 오래가지 못하여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과 함께 서유럽의 관심을 이집트에 빼앗겼다. 동시에 이집트와의 무역을 책임지는 다마스쿠스가 시리아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였다. 한편 1866년 오스만 제국의 행정 개편으로 할랍은 주(vilayet)의 치소가 되었고 1901년 기준 인구는 11만으로 줄어 있었다.
1차 대전 시기 알레포는 비교적 후방이었으나, 전쟁 막바지인 1918년 10월에 파이살 1세가 이끄는 아랍 반란군이 하루 간의 시가전 끝에 점령하였다. 이때 오스만 육군의 정예인 을드름 부대를 이끌고 할랍에 주둔하던 무스타파 케말은 후퇴 도중 기습을 가해 온 영국-아랍 연합군을 격퇴하며 1차 대전 레반트 전역의 마지막 전투만큼은 승리로 이끌었다.
1920년 9월 프랑스 장군 앙리 구로가 알레프 국을 선언, 할랍은 재차 수도가 되었다. 알레프 국에는 할랍 뿐만 아니라 라카 일대의 평야도 포함되었는데 이는 시리아 아랍 왕국의 저항을 경험한 구로가 할랍과 다마스쿠스와의 연합을 경계하여 일부러 전자를 우대, 식민주의의 기본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를 위한 술책이었다. 이후 1923년 알레프, 다마스쿠스, 알라위국이 합쳐진 시리아 합중국이 세워지는데 수도는 다마스쿠스였고 대통령은 할랍 출신 수브히 바라카트가 임명되었다. 그러다 1925년 시리아 남부에서 대반란이 터지자 프랑스 당국은 알레프국을 분리 독립시키려 투표를 시행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뜻과는 달리 다마스쿠스와의 연합에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고 할랍을 독립시켜 다마스쿠스에 타격을 주려던 시도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다마스쿠스와 함께 시리아로 독립했음에도 이내 두 도시는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다. 다마스쿠스의 국가당(1946년 성립)과 할랍의 인민당(1948년 성립)이 강력히 대립하였고 전자는 이집트, 후자는 이라크와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1할랍 출신의 두 장교들이 연달아 쿠데타를 일으켰고 후자는 이라크와의 합병을 선언하려 하였으나 그해 12월 하마 출신의 장교가 또 정권을 찬탈해 이를 막았다. 이후 1958년 시리아는 오히려 이집트와 합병하였다. 할랍은 이 역시 지지했는데 1960년 다마스쿠스 장교들이 쿠데타로 이를 무산시켜버렸다. 1963년 그 정부를 뒤엎은 바트당과 나세르 주의자들은 할랍 출신이 주류인 후자가 이집트와의 연합을 재추진하려 하자 다시 분란이 일었다. 이에 바트당은 할랍 출신의 아민 알 하피즈를 내세워 분란을 잠재웠으나 1971년 집권한 하페즈 알 아사드는 다마스쿠스 우대 정책으로 할랍의 소외감을 격화시켰고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의 여파로 시리아에도 심각한 파괴 및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곳도 건물이 무너지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4]
경제
내전 전만 해도 알레포는 시리아 최대 도시이자 가장 경제적으로 활발한 도시였고, 2000년대 초엽 내내 시가지가 확장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히자즈, 이집트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써 무역이 발달했다. 현지에서는 직물업 및 수제 비누 제조업이 발달했고, 1885년에는 직물공들을 중심으로 아랍권 최초의 근대적인 상인회가 설립될 정도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오스만 제국 시기 알레포는 코스탄티니예, 카이로 다음 가는 경제 규모를 지닌 도시였다 한다. 근현대에도 제조업이 발달하여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그에 종사했고, 금속 및 석제 가공이 성행했다. 금 가공업은 한때 시리아 전체 생산의 40%를 차지했다. 이슬람주의 반군이 득세하기 전까지는 알코올 음료 제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내전으로 침체되었던 경제는 2022년 7월, 화력 발전소가 일부 가동을 재개하는 등 소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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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서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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