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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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말라(영어: Ramallah, 아랍어: رام الله)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임시 행정 수도로 면적은 16.3km², 인구는 약 4만 명이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청사가 있는 행정 중심지이며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1]
개요[편집]
라말라는 동예루살렘 올드시티에서 15㎞ 남짓 거리다. 남쪽에는 베들레헴, 북쪽에는 나블루스가 있다. 예루살렘 북쪽으로 작은 마을 칼란디아를 지나면 라말라가 위치해 있다. 주민의 대부분은 아랍인이지만,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아랍-이스라엘 분쟁) 이후 이스라엘이 강제로 점령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주요 분쟁 지역이 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계속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반(反) 이스라엘 저항운동인 인티파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가자 지구와 달리 토양이 비옥해 일찍부터 올리브, 무화과, 포도 등 농업이 발달하였다. 요르단강 서안 지역의 경제 중심지로서, 한때는 싼 물가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도 많이 찾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이 격화되면서 차츰 쇠퇴하다가, 1996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면서 임시 행정수도가 되었다. 2005년 8월부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정착촌을 철수하면서 양국 사이의 긴장상태가 완화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분쟁 요소가 남아 있는 곳이다. 교육기관으로는 비르자이트 대학교가 있으며 주 팔레스타인 대한민국 대표사무소가 위치해 있다. 223년 6월 8일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청사가 있는 라말라에 이례적인 공격을 가했다.[2][3]
역사[편집]
라말라 근처에서는 암석을 깎아 만든 고대 무덤이 발견되었다. 발견 지역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텔엔나스베(Tell en-Nasbeh)는 벤야민의 성경에서 나오는 미스바(Mizpah)가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는 고고학 유적지이다. 몇몇 라말라 건물에는 헤롯 대왕(기원전 37~4년)의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석조 건축물이 포함되어 있다. 십자군, 아이유비드 시대와 초기 오스만 시대의 도자기 조각도 발견되었다. 라말라는 1517년 팔레스타인 전역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합병되었다. 1596년 세무 등록부에 등재되었다. 인구는 기독교인 가구 71가구, 무슬림 가구 9가구로 구성되었다. 밀, 보리, 올리브, 포도나무 또는 과수, 염소, 벌통에 대해서는 25%의 고정 세율을 지불했다.
현대의 라말라는 1500년대 중반 하다딘(Haddadins)에 설립되었다. 하다딘은 라말라의 산악 지역에 매력을 느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가 출신인 다른 산악 지역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숲이 우거진 지역은 그의 대장간을 위한 충분한 연료를 공급할 수 있었다. 1838년 미국의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이 이 지역을 방문해 주민들이 그리스 의식의 기독교인이라고 언급했다. 200명의 과세 대상 남성이 있었으며 총인구 800~900명으로 추산했다. 21세기에는 라말라를 세운 하다딘족의 직계 후손들이 미국에 많이 살고 있다. 그 마을은 현재 주로 이슬람교도이지만 여전히 소수 기독교인이 살고 있다.
라말라는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농업 마을로서 극적으로 성장했고, 이 지역 전역에서 더 많은 기독교 거주자들을 끌어들였다. 1700년, 야콥 엘리아스는 당시 성지에 널리 퍼져 있던 기독교 종파인 예루살렘의 동그리스 정교회에 의해 임명된 최초의 라말라 원주민이었다. 19세기 초에 예루살렘 최초의 그리스 정교회가 세워졌다. 이후 1852년, 그리스 정교회 변천교회가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것은 오늘날 라말라에서 유일한 정교회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 또한 19세기에 라말라에 설립됐고 오늘날 라말라에서 두 번째로 큰 기독교 종파를 구성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 요셉 여학교와 남녀공학 알-아흘리야 대학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913년 가톨릭 성가정교회 건축이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팔레스타인에 있는 외국 교회의 활동은 서양의 번영에 대한 인식을 증가시켰다. 남쪽의 라말라와 베들레헴에서는 현지 주민들이 해외에서 경제적 기회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901년, 라말라에서 온 상인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수제 양탄자와 기타 이국적인 상품을 판매했다. 무역의 증가는 라말라 주민들의 생활 수준을 극적으로 향상시켰다. 미국 자동차, 기계화된 농기구, 라디오 그리고 나중에 텔레비전은 상류층 가정의 사치품이 되었다. 로드 주민들이 라말라로 이주하면서 무슬림과 기독교의 균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라말라는 1908년에 현대 도시로 선언되었다. 도시에는 선출된 지방자치단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접한 알비 레(al-Bireh) 마을과의 파트너십 프로젝트도 있었다. 프렌즈 보이 스쿨( Friends Boys School)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임시 병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은 1917년 12월 라말라를 점령했다. 도시는 1920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지정될 때까지 점령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라말라는 1948년까지 영국의 위임 통치 하에 놓였다. 1920년대에 라말라의 경제가 좋아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역 아랍 상류층(주로 토지 소유자와 상인으로 구성됨)은 여러 개의 다층 별장을 짓도록 명령했고 그 중 많은 것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1939년 예루살렘 전기 회사는 라말라에게 전기를 공급했고 그 후 곧 도시의 대부분의 가정은 전선을 연결하게 되었고 영국 당국은 국영 팔레스타인 방송국을 라말라에서 출범시켰고, BBC 회원들은 현지 라디오 직원들에게 아랍어, 히브리어, 영어로 매일 방송하도록 교육시켰다. 나중에 예루살렘 콜링(Jerusalem Calling)으로 개명되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에서는 영국 위임통치에 맞서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라말라는 곧 반란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반군은 영국 위임통치법원에 법적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라말라 인근에 법원을 설립했다.
이스라엘 국가 창설과 그에 따른 분쟁에 이어 요르단은 서안지구(West Bank)라고 명명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했다. 여기에는 라말라도 포함됐다.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1948년부터 1967년까지 요르단 통치 기간 동안 비교적 평화로웠으며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간의 이동 자유를 누렸다. 요르단은 서안 지구를 합병하여 정복한 영토에 국내법을 적용했다. 그러나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팔레스타인 공산당과 기타 사회주의 및 독립 지지 단체를 포함한 불법 정당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1953년까지 라말라의 인구는 두 배로 늘었지만 경제와 기반 시설은 가난한 마을 사람들의 유입을 수용할 수 없었다. 라말라 원주민들은 주로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56년까지 라말라의 원주민 6,000명 중 약 4분의 1이 떠났고 주변 마을과 마을의 아랍인들이 집을 사고 이주자들이 남겨진 땅을 샀다.
1967년 6일 전쟁 동안 이스라엘은 요르단으로부터 라말라를 점령하고 몇 주 후 군사 폐쇄를 단행하고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인구 조사에 등록된 모든 사람에게는 이스라엘 신분증 소지자가 계속 거주할 수 있는 이스라엘 신분증이 주어졌다. 인구 조사 기간 동안 해외에 있었던 사람들은 거주권을 상실했다. 라말라 주민들에게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19년 만에 처음으로 주민들은 이스라엘과 가자지구를 자유롭게 방문하고 그곳에서 무역할 수 있었다. 요르단과 달리 이스라엘은 주민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라말라 주민들은 이스라엘에서 일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지만 이스라엘 시민권과 관련된 권리를 얻지 못했다. 이 도시는 40년 이상 이스라엘 군부의 지배를 받았다.
1981년 설립된 이스라엘민정부(CA)는 여행, 건축, 수출, 수입 허가, 해외 친인척 주재 등 민간 및 일상 업무를 담당했다. 이스라엘민정부는 학교에서 배포하기 위해 요르단어 교과서를 재인쇄했지만 업데이트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민정부는 세금 징수와 토지 몰수를 담당했으며 여기에는 때때로 아랍 마을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가꾸어 온 올리브 과수원을 이스라엘이 압수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이스라엘 인권운동가들에 따르면 베이트 엘(Beit El) 과 프사곳(Psagot) 과 같은 라말라 지역의 유대인 정착촌의 개발은 도시의 확장을 저지되고 주변 아랍 마을과 단절됐다. 반발이 거세지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회원인 라말라 주민들은 투옥되거나 인근 국가로 추방됐다. 1987년 12월, 인티파다로 알려진 민중 봉기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점령에 항의했다.[4][5]
팔레스타인[편집]
팔레스타인(아랍어: فلسطين, Filasṭīn, 영어: State of Palestine), 또는 공식 명칭인 팔레스타인국(아랍어: دولة فلسطين, Dawlat Filasṭīn)은 명목상 주권 국가로 서아시아에서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는 국가이다. 수도는 예루살렘으로 지정했지만, 현재 행정중심지는 라말라이다. 팔레스타인이 주장하고 있는 영토는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요르단강 서안 지구는 이스라엘 및 요르단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가자 지구는 이집트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2023년을 기준으로 5,483,450명이다. 1947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엔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할안을 채택했다. 이 분할안에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형성하며 예루살렘은 국제 공동통치지역으로 설정하기로 되어있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수립된 이후 이웃 아랍 국가들은 다음 날 이스라엘을 침공해 이스라엘 군과 싸웠다. 이후 전팔레스타인 정부가 1948년 9월 22일 아랍 연맹에 의해 창설되었고, 이 정부는 트란스요르단을 제외한 아랍 연맹 전 회원국에게 인정받았다. 정부의 행정구역은 옛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가자 지구에 영토가 한정되어 있었다. 요르단강 서안 지구는 1948년 전쟁 이후 요르단에 귀속되어 있었다.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은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를 병합했다.
1988년 11월 15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수장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알제에서 팔레스타인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오슬로 협정의 A 및 B 구역과 가자 지구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후 가자 지구는 2007년 하마스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가자 지구에서 철수했다. 팔레스타인은 현재 유엔 회원국 136개국으로부터 승인받았으며, 2012년부터 유엔 총회 옵서버가 되어 국가임을 인정받았다. 팔레스타인은 아랍 연맹. 이슬람 협력 기구, G77, 국제 올림픽 위원회, 이슬람 대테러 군사 동맹, 유네스코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의 회원국이다. 팔레스타인 영토의 절대 다수는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93%는 이슬람교 수니파이고, 6%는 기독교 신자이며, 아랍어를 모어로 구사한다. 영어도 사용한다.[6]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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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라말라〉, 《위키백과》
- 〈팔레스타인〉, 《위키백과》
- 〈라말라〉, 《나무위키》
- 〈라말라〉, 《요다위키》
- "Ramallah", Wikipedia
- 이장원 기자, 〈이스라엘군, 서안지구 팔레스타인 라말라 이례적 급습〉, 《아시아투데이》, 2023-06-08
같이 보기[편집]
레반트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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