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르만샤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케르만샤(영어: Kermanshah, 페르시아어: کرمانشاه, 쿠르드어: کرماشان)는 이란 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케르만샤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105만 명, 해발 고도는 1,350m이다.[1]
개요[편집]
케르만샤는 이란 서부, 자그로스산맥의 분지, 크루디스탄 지방에 있는 도시이다. 하마단에서 서쪽으로 160km,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525km, 이라크 국경에서 약 1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대륙성 기후를 띤다. 이란 중부에 있는 도시 케르만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도시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쿠르드인으로, 케르만샤는 이란에서 가장 큰 쿠르드어 사용 도시이다. 지명은 이란 동부 지역인 '케르만의 왕'이란 뜻인데, 황제 즉위 이전 케르만의 왕(분봉왕)을 지낸 사산 제국의 바흐람 3세에서 유래되었다. 사산 조의 바흐람 4세(Bahrām Ⅳ, 재위 388~399)가 창건했다고 한다. 고대에는 하마단과 티그리스강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에 인접한 대상도시였다. 비록 1979년 이란 혁명 직후 '샤'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도시는 가흐라만샤흐르로, 동명의 주는 바크타란으로 개명되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페르시아 민족주의가 치솟으며 원래 이름으로 돌아왔다. 케르만샤는 곡물, 쌀, 채소, 과일, 유류 종자를 생산하는 이란의 서부 농업 중심지 중 하나이지만, 케르만샤는 상당히 중요한 산업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도시 교외에는 256개 이상의 제조 시설이 있는 두 개의 산업 센터가 있다. 이러한 산업에는 석유화학 정제, 섬유 제조, 식품 가공, 카펫 제조, 설탕 정제, 전기 장비와 공구 생산이 포함된다. 최근 이라크 의 변화 이후 , 케르만샤는 이란 의 주요 수입 및 수출 관문 중 하나가 되었다. 1932년 영국 기업이 설립한 케르만샤 정유회사(KORC)는 도시의 주요 산업 중 하나다. 1972년에 설립된 라지대학은 이란 서부에서 두 번째 대학이었고 케르만샤주와 서부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고등교육 기관이다. 근교에 있는 사산조의 유적 타크 이 부스탄으로 유명하다. 시아파 무슬림이 가장 많으며 그다음으로는 아시리아 동방교회, 바하이교, 유대교, 아르메니아 정교회 신자가 많다. 도시 자체에도 볼거리가 많고, 동쪽으로 20km 떨어진 베히스툰에도 유적이 즐비하다. 케르만샤의 명소로는 코네 다리, 베히스툰 비문, 타그보스탄, 아나히타 사원, 디나바르, 간지 다레, 에사크완드 암석 무덤, 소르크 데흐 무덤, 말렉 무덤, 훌완, 메디안 다크메(다르바드, 사네), 파라브 동굴, 도아슈카프트 동굴, 테키에 모벤 알몰크 도칸 다부드 비문, 사르 폴-에-자하브, 타그 에 가라, 파타그 고개, 사라브 닐루파르, 구리 갈레 동굴, 카제 바로크의 집, 치야자니 타페, 베히스툰 단지의 헤라클레스 동상, 에마드 알 돌레 모스크, 테키에 비글라르베이기, 사냥꾼 동굴, 케르만샤의 자메 모스크, 고딘 테페, 파르티아의 고타르제스 2세의 옅은 부조가 있다.[2]
기후[편집]
케르만샤는 자그로스산맥의 근접성에 크게 영향을 받는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습한 대륙성 기후(Dsa)에 접한 더운 여름 지중해성 기후(Csa)로 분류된다. 도시의 고도와 서풍에 노출된 위치로 인해 강수량이 약간 높지만(테헤란의 두 배 이상) 동시에 특히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여름에 엄청난 일중 온도 변화가 발생하여 낮 동안 매우 더워진다. 케르만샤는 겨울이 다소 춥고 가을과 봄에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다. 겨울에는 적어도 2주 동안 눈이 덮여 있다. 기록된 최고 기온은 1998년 7월 13일 44.1°C이고 기록된 최저 기온은 1974년 2월 6일 –27.0°C이다.
역사[편집]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다수 거주하였고, 인근 산지에서 여러 유적이 확인되었다. 인근 지역에서는 이란의 첫 네안데르탈인 유구와 기원전 9800년 경으로 비정된 주거 유적 역시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부터 현 도시 위치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헬레니즘기 조각이 남아있다. 케르만샤 동 북동쪽 7km에 있는 선사시대의 유구 1959~60년에 브레이드우드 등에 의해서 조사되어 기원전 6000년경으로 생각되는 신석기 시대의 계절적인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초기의 채문토기와 함께 많은 토우가 발견되었고 특히 두 다리를 앞으로 뻗친 자세의 여성상은 ‘테페 사라브의 비너스’라고 불리며 테헤란 고고박물관과 시카고 대학 오리엔트 연구소에 소장되었다.
이란의 설화에 의하면 피쉬다드 왕조의 3대 왕 타흐무라스가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기원전후 무렵부터 일대에는 '산악 이란인', 즉 쿠르드 인들이 거주하였고 226년 사산 제국의 첫 샤한샤 아르다시르 1세가 자그로스 산지를 토벌한 후 현지 쿠르드 왕공인 메디아의 카이우스에게 케르만샤 지배권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시작된 카이유스 왕조는 사산 제국의 제후국으로써 150여년간 유지되다가 380년 아르다시르 2세에 의해 폐지되고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아르다시르 2세는 도시의 구석 산지에 타케 보스탄 부조를 새겨 병합을 기념하였고, 이후의 황제들도 이어서 부조를 추가하였다. 서늘한 고산 기후 덕에 샤한샤들의 여름 요양지로 선정된 케르만샤는 4세기 말부터 번영하기 시작하였고, 바흐람 4세(재위 388 ~ 399년)는 번영하는 도시에 자신이 왕자 시절에 지니던 '케르만의 샤' 군호를 하사하였다. 서부 이란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이던 케르만샤는 640년 이슬람 제국군에게 점령된 후 중소 도시로 전락하였다. 11세기 셀주크 제국기에 도시는 재차 문화, 상업의 중심으로써 재기할 수 있었고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와 셀주크 조의 하마단 사이의 거점으로써 칼리파와 술탄 간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사파비 왕조기에 도시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대비하여 요새화되었다. 그럼에도 1723-29년과 1731-32년 오스만군에게 점령되었다. 이후 성립된 카자르 왕조의 파스 알리 샤는 오스만군이 재차 케르만샤를 공격해오자 격퇴하였다. 20세기 초엽 카자르 조의 쇠퇴를 틈타 1914년 러시아 제국, 1915년 오스만 제국이 도시를 점령하였고 오스만군은 1917년에야 영국의 압력으로 철수하였다. 카자르 조 말엽 케르만샤는 이란 입법 혁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팔라비 조 시기에는 공화주의 운동의 중심 중 하나였다. 20세기 후반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에 가까웠던 까닭에 케르만샤는 폭격에 시달려 큰 피해를 입었고 21세기 들어서까지 흔적이 남아있다.[3]
베히스툰 비문[편집]
베히스툰 비문(비시툰 또는 비수툰, 현대 페르시아어: بیستون ; 고대 페르시아어: 바가스타나 "신의 땅")은 이란의 케르만샤주의 케르만샤 북부, 베히스툰산에 위치한 다리우스 1세 시대의 다국어 비문이다. 비문은 같은 글의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의 세가지 설형 문자로 기록된 세가지 버전을 포함한다. 영국의 군장교 헨리 롤린슨은 1835년과 1843년 두 부분으로 전사시켰다. 롤린슨은 1838년 고대 페르시아 설형문자를 번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엘람어와 바빌로니아어 글은 롤린슨과 다른 이들에 의해 1843년 이후에 번역되었다. 바빌로니아어는 아카드어의 후기 형태로, 둘 다 셈어이다. 그 후 이 비문은 실질적으로 로제타석과 같은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은 고대의 글 해독에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가 되었다. 비문은 거의 높이가 150m에 폭이 100m의 석회암 절벽에 있다. 해당 절벽은 바빌로니아와 메디아의 수도 바빌론과 엑바타나를 잇는 고대 도로에 있다. 여기는 접근하기 어렵게 아래의 산측이 제거되었는데 완성 후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대 페르시아어 글은 5칼럼에 414줄로 되어있다. 엘람어 글은 8칼럼에 593줄 분량이며, 바빌로니아어 글은 112줄이다. 2006년 비소툰 유적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4]
타크이부스탄[편집]
타크이부스탄은 이란의 서부 케르만샤 교외 약 9km 지점에 있는 사산왕조 시대의 유적이다. 타크이부스탄은 ‘정원의 아치’라는 뜻이며, 우물물이 솟구쳐 나오는 암산 기슭에 정원과 연못이 있는 파라다이스를 건설하여, 풍양의 여신 아나히타를 봉안하였다. 연못에 면한 암벽에는 아치형의 동굴이 있고 사산왕조 중기에서 후기의 왕 아르다시르 2세, 샤푸르 3세, 호스로 2세의 세 종류의 부조(浮彫)가 남아 있다. 특히 호스로 2세(재위 590∼628)의 부조는 호화스러워, 높이 9m, 깊이 6m의 동굴의 정면에 왕의 승마상과 그 위쪽에는 왕이 신의 축복을 받고 있는 상(像), 좌우의 벽에는 왕의 수렵도가 새겨져 있고, 입구의 양쪽에는 생명의 나무의 부조장식이 있다. 부근에는 당시 궁전을 건축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석제주두 2개와 파손된 왕의 상이 있으며 건축유적도 발견되고 있다.[5]
도아시카프트 동굴[편집]
도아시카프트 동굴(Do-Ashkaft Cave)은 이란 타케보스탄(Taq-e Bostan) 인근의 케르만샤(Kermanshah) 북쪽, 해발 1600m 높이에 자리한 중석기 시대 동굴 유적지이다. 남쪽으로 난 동굴의 입구에서 쿠헤스탄(Kuhestan) 국립공원이 내려다 보인다. 1999년 F. 비글라리(F. Biglari)와 S. 헤이다리(S. Heydari)라는 두 명의 이란 연구자들에 의해 발견된 뒤 4년 동안의 표본수집으로 중석기 시대의 유물이 다량 수집되었다. 이들 유물들을 통해 동굴에 살았던 구석기 시대 무스테리안(Mousterian)기 사람들이 동굴 주변의 암석을 갖고 도구를 만들었다는 것이 파악되었다.[6]
지도[편집]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케르만샤〉, 《위키백과》
- 〈베히스툰 비문〉, 《위키백과》
- "Kermanshah", Wikipedia
- 〈케르만샤〉, 《요다위키》
- 〈타크이부스탄〉, 《네이버 지식백과》
- 〈도아시카프트 동굴〉,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서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