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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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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odam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9월 14일 (월) 10:2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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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Fiat)
피아트(Fiat)

피아트(Fiat)는 피아트 크라이슬러(Fiat Chrysler) 회사에 소속된 이탈리아의 자동차 브랜드이다. 2014년 미국의 크라이슬러 회사를 인수하여, 피아트 크라이슬러 회사가 되었다.

개요

피아트는 피아트 크라이슬러의 자동차 브랜드이다. 1899년 조반니 아넬리(Giovanni Agnelli)를 포함하는 투자자들의 무리에 의해 설립되었다. 피아트의 계열사로는 페라리, 마세라티, 알파로메오, 란치아 등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 4월 아시아자동차에 의해 소형차 124가 시판되어 1973년까지 생산되었고, 이후 1979년 기아자동차에 의해 중형차 132도 시판되었지만, 1981년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생산이 중단되어 단종되었다. 이후 대한민국에 피아트 판다, 란치아 브랜드 등이 런칭하였지만 인기를 끌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크라이슬러를 완전히 인수한 이후, 2013년 1월 크라이슬러의 네트워크를 통해 피아트가 대한민국에 다시 진출하였다. 하지만 2017년 9월 지프의 인기와 판매 부진으로 수입이 중단되었다. 미국에서는 전륜구동 소형 해치백인 피아트 500 시리즈만 판매 중이다. 대한민국에는 피아트 500 시리즈와 크라이슬러 산하 닷지 브랜드의 크로스오버인 닷지 저니를 피아트 버전으로 출시한 프리몬트도 대한민국에 출시되었으나, 2014년에 판매 부진으로 수입이 중단되었고, 대신 2016년에 피아트 500X가 들어왔다. 이후 크라이슬러를 자본 제휴하기 시작하여 자회사로 편입하였다.[1] 피아트 브랜드 자동차는 세계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가장 큰 생산국은 브라질이다. 아르헨티나, 폴란드, 멕시코에 공장을 두고 있으며, 다른 국가에서 자사 제품의 라이센스 제조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피아트는 9개의 '올해의 유럽 자동차 상'을 비롯해 많은 국제적인 상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 일산화탄소(CO) 최하위권에 랭크되었다.[2]

역사

1899년 7월 11일, 조반니 아넬리는 피아트 S.p.A의 창립 멤버 일원이 되었다. 최초의 피아트 공장은 1900년에 35명의 직원이 24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면서 문을 열었다. 1903년 피아트는 첫 트럭을 생산하고, 적은 이익을 내고 135대의 자동차를 생산했다. 그리고 1906년에는 생산량이 1,149대로 늘어나게 되었다. 1908년 피아트 자동차가 최초로 미국에 수출되었다. 같은 해 최초의 피아트 항공기 엔진이 생산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피아트 택시는 유럽에서 인기를 끌게 된다. 피아트는 1908년 미국에 피아트 오토모빌 코퍼레이션을 설립한 뒤 승용차는 물론 상용차, 선박, 엔진, 트럭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갔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피아트는 모든 공장을 연합군의 항공기, 엔진, 기관총, 트럭, 구급차를 공급하는 데 바쳐야 했다. 1917년 미국의 전쟁 진입과 동시에 미국의 규제가 심해지면서 공장이 폐쇄됐다. 전쟁 후, 피아트는 첫 번째 트랙터인 702를 선보였다. 1920년대 초까지 피아트는 이탈리아에서 80%의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었다.[2] 1922년에는 당시 유럽 최대 규모로 레이싱카도 시험 주행 할 수 있는 링고토 공장이 문을 열어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1939년 피아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육군과 레지아 항공, 그리고 후에 독일군을 위해 군용 기계와 차량을 만들었다. 또한 사보이아-마르체티스(Savoia-Marchettis)와 함께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항공기 중 하나였던 피아트 CR.42와 경전차, 장갑차를 만들었다. 1950년대 자동차 산업이 호황을 맞으면서 피아트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농기계, 항공기 등 사업 영역을 무한 확장해 나갔다. 1951년 이탈리아 첫 제트기인 G80을 만들어낸 것도 피아트이다. 1984년 알파로메오, 1993년 마세라티를 인수하며 대중차에서 슈퍼카를 아우르는 라인업을 보유하게 되었다. 질주하던 피아트는 1990년대 위기를 맞는다. 장기 불황으로 경영이 악화됐고, 급기야 2003년 아넬리 가문 경영자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2004년에는 부도 위기까지 내몰리게 되지만 새로운 최고경영자 세르지오 마르치오네(Sergio Marchionne)가 등장하며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 마르치오네는 강력한 구조 조정으로 불과 2년 만에 회사를 정상화했다. 이후 신진 디자이너를 대거 영입해 신차 푼토를 출시하고 2007년에는 브라보를 선보이며 다시 부활했다. 2009년에는 크라이슬러의 우량 자산을 인수하며 기존 이탈리아 감성이 깃든 소형차에 고성능 SUV까지 완벽한 라인업을 완비하며 재도약 발판을 마련했다.[3] 2014년 1월 29일, 피아트 그룹(Fiat Group)의 전 소유주였던 피아트 S.p.A.가 2014년 말 이전에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새로운 지주회사 피아트 크라이슬러 자동차(FCA)에 합병될 예정이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피아트 크라이슬러 자동차가 피아트 그룹의 새로운 소유주가 되었다. 2014년 8월 1일, 피아트 S.p.A.는 합병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주주 승인을 받았으며, 이는 2014년 10월 12일 시행되었다.

주요 인물

조반니 아넬리(Giovanni Agnelli)

조반니 아넬리

생애

1866년 피에몬트주 피네롤로 부근의 작은 마을 빌라 페로사(Villar Perosa)에서 태어났다, 아직도 아넬리 가문의 주요 거처와 매장지가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는 빌라 페로사의 시장이었는데, 조반니가 겨우 다섯 살이었을 때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반니는 토리노의 콜레지오 산 주세페에서 공부한 후 1893년까지 군 생활을 시작했고, 빌라 페로사로 돌아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895년에 시장이 되었다. 아그넬리는 당시 말 없는 마차의 발명 소식을 듣고 즉시 그의 공학과 기업가적 기술을 이용할 기회를 보았다. 1898년, 그는 말 없는 마차 프로젝트를 위해 투자자들을 찾고 있던 브리케라시오의 이매뉴얼 카케라노 백작을 만나게 된다.

사업 경력

1899년 7월 11일, 조반니는 '파브리카 이탈리아나 디 오토모빌리 토리노'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1년 후, 그는 피아트의 상무이사를 맡고 1920년에 회장이 되었다. 최초의 피아트 공장은 1900년에 35명의 직원이 24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면서 문을 열게 되었다. 피아트는 창립 초기부터 엔지니어링 직원들의 재능과 창의성으로 유명한 상태였다. 1903년까지 피아트는 135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며 적은 이익을 냈지만, 1906년 1,149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그 후 피아트는 밀라노 증권거래소를 통해 주식을 공매도했다. 조반니는 보유 주식에 추가할 수 있는 모든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조반니는 1917년 유럽으로 미국의 원조를 운송하는 금융업자 리카르도 구알리노(Riccardo Gualino)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에 있는 해양 회사와 조선 회사에 투자했다. 미국의 해양 상사는 석탄을 수출했고, 국제 조선 회사는 동력화된 선박을 만들었다. 이 회사들은 전쟁이 끝났을 때 전쟁 수요를 충족하도록 구성되었기 때문에 실패했지만, 소유주에서 큰 이익을 돌려주었다. 조반니와 구알리노는 1918년 초 크레도 이탈리아노(Credito Italiano)를 인수하려고 시도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은행 이사회에 합류하게 된다. 조반니는 1917년부터 1926년까지 구알리노의 회사인 SNIA SpA의 부사장으로 지냈다. 1920년대 초 SNIA는 인공 섬유 섬유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1920년 구알리노와 조반니는 개인은행 장 드 페넥스(Jean de Fernex)의 자본화에 참여하여 라 스탬파(La Stampa)의 발행인인 알프레도 프라사티(Alfredo Frassati)의 지분 3분의 1을 사들였다. 구알리노와 조반니는 밀라노, 제노바, 토리노를 고속철도와 연결하자는 제안을 제시했고 시멘트, 자동차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들의 파트너십은 1926년경 구알리노의 프랑스 자동차 산업 투자로 인해 깨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피아트는 이탈리아 산업 기업 중 30위에서 3위로 뛰어올랐다. 피아트가 설립된 지 4년 만에 최초의 포드 공장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1906년 브로드웨이 맨해튼에 미국 최초의 피아트 자동차 딜러점이 설립되었다. 조반니는 1923년에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피아트에 대한 변함없는 집중력을 유지했고, 피아트를 국제무대로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에도 피아트와 함께 하다가, 전쟁이 끝난 1945년에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세르지오 마르치오네(Sergio Marchionne)
생애

1952년 이탈리아 아브루초 치에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스트리아의 카라비니에르에서 아내를 만났다. 마르치오네의 할아버지 지아코모 주콘(Giacomo Zuccon)은 1943년 9월 이스트리아 바반 인근에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인들에게 살해당했고, 같은 해 삼촌 주세페 주콘(Giuseppe Zuccon)은 나치에 의해 살해당했다. 1945년 이 지역이 유고슬라비아군에 점령당하자 마르치오네의 부모는 아브루초 치에티로 이주했다.

13살에 가족과 함께 친척들이 거주하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 토론토로 이민을 갔다. 캐나다 시민권과 이탈리아 시민권을 동시에 소지한 그는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마르치오네는 캐나다 공인 회계사(FCGA), 법정 변호사, 온타리오 주 공인 회계사였다.

마르치오네는 토론토 대학교에서 철학 학부 과정을 마치기 전에 세인트 미카엘 대학교에 입학했다. 또한 윈저 대학교에서 상업 학사(1979년)와 경영학 석사(1985)를 취득하기 전, 요크 대학교의 오스구드 홀 로스쿨(1983)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월시 칼리지(2013년)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각주

참고 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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