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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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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3월 13일 (월) 04:04 판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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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臺灣)
타베이시
신베이시
가우슝시
타이중시

대만(臺灣)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대만섬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또는 국가의 명칭이다. 대만섬에 성립된 국가의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이지만, 주로 '대만'이라고 부른다. 중국어 또는 영어로는 타이완(Taiwan, tái wān)이라고 부른다. 별칭은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이란 뜻을 가리키는 '포르모사'(Formosa)이다. 수도는 타이베이이며 주요 도시는 신베이시, 가오슝, 타이중, 타이난타오위안 등이 있다.

대만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 푸젠성과 마주하고 있는 나라로 중국 본토에서 약 150㎞ 떨어져 있다. 1885년 하나의 성(省)으로 독립하였고, 청일전쟁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었으며, 1949년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 패배한 국민당장제스 정권이 이전해 와 성립된 국가이다.

중화민국은 2,37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며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국가들 중 하나이며, 유엔(UN)에 소속되지 않은 국가들 중에서는 높은 규모의 경제를 갖고 있다. 중화민국은 수출 중심의 산업화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21번째로 거대한 경제 규모를 자랑한다. 주로 철강, 기계공업, 전기업, 화학 공업과 제조업 등이 주력 분야이며, 1인당 GDP는 세계 15위 정도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또한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의 자유도, 교육, 복지, 인간 개발 지수를 가지고 있다.

개요

대만은 현존하는 아시아의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1912년 건국을 선포한 이후 100년이 넘는 장수 공화국이 되었다. 대만의 헌법상 영토는 중국 대륙을 포함하나,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게 패배하여 국민당이 대만으로 정부를 옮긴 '국부천대' 이후 실효 지배 영토는 대만 섬과 그 부속 도서를 포함한 36,197 ㎢에 국한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대만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공산당의 미승인단체로 간주하여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만의 국체를 인정하지 않는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이후부터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입각, 대만을 자국의 일개 지방으로 간주하여 이를 부정하는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20세기 후반 냉전이 해소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적 입지가 상향됨에 따라 대한민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가 중화민국(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인정한 상태이다. 때문에 현재 대만은 유엔 비회원국, 미승인국이며 수교 국가는 "14"개 남짓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대만은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려는 제1세계 국가들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특별한 외교상의 대우를 받으며, 대만 관계법 및 대만 동맹 보호법과 같은 미국과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는 한편, 중국에 의해 일부 권리 행사를 방해받고 있음에도 여타 미승인국가들과는 달리 사실상의 주권국가로 인정되고 있다.

국가 상징

국호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이며, 자국 내에서는 타이완이라고 부른다. 중국이라는 명칭은 이전에는 사용하였으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또 영어로는 Republic of China, 약칭은 ROC이다. 1971년에는 중화민국이 UN 회원국 지위를 버린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부르는 빈도가 훨씬 많아지면서, 통상적으로는 중화민국의 현재 남아있는 영토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명을 따서 타이완이라고 부르는 일이 더 흔해졌다. 과거 냉전시절 미국이나 대한민국 등 친서방 국가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공(中共, Communist China)과 구분하기 위하여 자유중국(自由中國, Free China) 또는 중국이라고도 불렀으나 탈냉전 이후부터는 빈도가 감소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며 중화민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83년 6월 26일, 덩샤오핑 이론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대만 특별행정구(中華人民共和國台灣特别行政區)라는 이름을 제시하였고, 대만 지구를 홍콩, 마카오와 같은 자국의 특별행정구처럼 간주하고 있다. 이런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력에 의하여, 중화민국은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中華臺北 또는 中華台北)라는 별칭을 1980년대부터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나 국제기구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단, 세계 무역 기구(WTO)에서 중화민국의 가맹 명칭은 대만·펑후·진먼·마쭈 개별관세영역(臺灣·澎湖·金門·馬祖 個別關稅領域; Separate Customs Territory of Taiwan, Penghu, Kinmen and Matsu; 台澎金馬個別關稅領域)이다.

2008년 6월 4일, 어우훙롄(歐鴻煉) 중화민국 외교부장은 국제기구 등에서의 '중화 타이베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반면 중화민국 감찰원에서는 중화민국 행정원의 정부 문서에서 '대만'의 사용 빈도가 높아진 것을 지적하였으며 '중화민국'이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차이잉원 행정부 시대 이후에는 중화민국 대만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도입하였다.

중화민국에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 쓰는 국가기호는 TW이다.

국기

대만 국기

대만의 국기는 청천백일만지홍기이다. 국기이자 해군기이다.

중국 국민당의 깃발, 즉 당기(黨旗)인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에서 비롯되었다. 기(旗)를 붙이지 않고 靑天白日滿地紅(청천백일만지홍)이라고만 해도 역시 중화민국의 국기를 뜻한다. 또 편의상 청천백일기라고도 부르지만, 앞서 밝혔듯이 엄밀히 말해서 청천백일기는 중화민국 국기 좌측 상단의 캔턴(canton) 부분에 해당하는, 푸른 색 바탕의 하얀 해를 도안으로 하는 깃발을 가리키는 말이다. 청천백일기는 중국 국민당의 당기이고, 대만 해군 함수기(艦首旗, naval jack)로도 쓰이는 깃발이다.

1992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인식하는 현대의 한국인들은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그냥 '대만 깃발'이고 오성홍기가 '중국 깃발'인 것으로만 알고 있겠지만, 사실 이쪽이 중국 입장에서 역사적 정통성이 있는 깃발이다. 신해혁명, 장제스의 북벌, 중일전쟁, 국공내전 등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1949년에 만들어진 오성홍기가 아니라 이 깃발 아래에서 겪었다.

이름이 아주 직관적이다.

  • 청천(靑天): 푸른 하늘. 좌상단의 푸른 영역
  • 백일(白日): 흰 태양. 푸른 영역 가운데 태양 무늬
  • 만지홍(滿地紅): 꽉 차게 붉은 땅. 배경 붉은색.

청천백일만지홍기는 청천백일기를 좌측 상단에 놓고 나머지 부분은 붉은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인 민족, 민생, 민권을 상징하는 색깔인 파란색, 빨간색, 흰색으로 구성되어있다. 파란색은 삼민주의의 민족 그리고 자유를, 빨간색은 삼민주의의 민생 그리고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사람들의 피와 박애를, 흰색은 삼민주의의 민권 그리고 평등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또한 하얀 태양의 12갈래는 24시간 쉬지 않고 강해지자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뜻을 상징한다.

국장

대만 국휘

중화민국의 국장은 국휘(國徽)라 부르며 청천백일만지홍기에도 있는 청천백일(靑天白日)을 사용한다.

대만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인 중국 국민당을 상징하는 청천백일기 및 휘장과는 도안이 약간 다르다. 중국 국민당 당휘는 흰 태양의 햇살 문양의 크기에 정확히 맞춰 원형으로 잘라낸 형태라면, 중화민국의 국장은 햇살에서 바깥 쪽으로 여유를 두어 원형으로 잘라낸 형태며 연원은 당휘와 같다.

이외에 대만군과 정부 상징으로서 국장 다음으로 자주 쓰이는 매화 문장이 있다. 매화의 다섯 갈래 꽃잎은 오권분립을 상징하며, 총통부 및 행정각부(원)의 상징에 들어간다. 이외에 매화문이 응용된 문양이 육해공군의 부대마크, 지방행정기구의 기와 휘장, 관무서(關務署; 관세청) 휘장, 국도(國道) 표지, 중화 타이베이 기와 휘장 등에 포함되어 있다.

국가

국가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 국가(中華民國國歌)'이며, 비공식적으로 가사 첫 행을 따서 '삼민주의가(三民主義歌)'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민정부 시절부터 국가로 지정되었으며 지금까지 여전히 국가로 이어져오고 있다.

작사자는 쑨원이다. 1924년에 쑨원이 광저우에 있었던 황푸군관학교에서 한 연설 내용을 48자로 요약한 것이다. 다만 이 연설문 자체는 쑨원 본인이 쓴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을 작사자로 넣는 게 맞을 수도 있다. 물론 요약자도 따로 있고. 요약한 사람은 네 명인데, 각각 후한민(胡漢民), 다이지타오(戴季陶), 랴오중카이(廖仲愷), 사오위안충(邵元沖)이다.

1928년에 작곡가 청마오윈(程懋筠)이 이 가사에 곡을 붙였고 이 노래는 중국국민당 당가로 사용되었다. 1930년에 장제스가 중화민국의 국가로 지정하였다. 대만 정부가 내놓는 공식 자료에는 청마오윈 작곡, 쑨원 작사, 장제스 지정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공식 자료에는 최초로 이 곡을 불러서 녹음한 가수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이후 국부천대 이후인 현 대만에서도 쭉 사용되고 있다.

지리

지도

동아시아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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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

대만 지형
대만 최고봉 위산(玉山)

대만은 동아시아에 속하며,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의 교차점에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동중국해한반도, 오키나와와 동쪽으로는 약 110km 떨어진 곳에 오키나와 제도의 요나구니섬과 태평양을, 서쪽으로는 대만해협과 중국 대륙을 바라보고 있다. 대만해협의 평균 거리는 약 200km이지만, 가장 좁은 지점은 대만 신주현(新竹縣)에서 푸지엔성 핑탄섬(福建省平潭島)까지 약 130km이다. 남서쪽으로는 남해와 광둥성(廣東省) 해안까지 연결된다. 남쪽으로는 바시해협(Bashi Channel)을 사이에 두고 필리핀과 접해 있다.

대만 본섬의 총면적은 36,188㎢이며 남북의 길이는 394km이다. 남북이 좁고 길게 뻗어 있기 때문에 고구마 지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이며, 산지, 언덕, 분지, 고원, 평원 등이 주를 이룬다. 산지와 언덕의 비율이 전체 면적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대만 섬의 중앙산맥을 중심으로 산맥이 남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대만의 산맥은 유라시아판과 필리핀해판의 충돌로 인해 만들어졌으며, 주로 북동쪽이 높고 남서쪽이 낮다. 주요 산맥은 크게 중앙산맥(中央山脈), 슈에산산맥(雪山山脈), 위산산맥(玉山山脈), 아리산산맥(阿里山山脈), 해안산맥(海岸山脈), 지아리산산맥(加里山山脈)으로 나뉜다. 중앙산맥은 대만의 지붕이라고 불릴 만큼 대만에서 가장 길고 큰 산맥이다. 북쪽의 쑤아오(蘇澳)부터 남쪽의 어롼곶(鵝鑾鼻)까지 대만섬을 관통하는 330km의 길이를 자랑한다. 슈에산산맥은 대만 북서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산댜오자오(三貂角)에서 남쪽으로는 줘수이강(濁水溪) 까지의 180km 길이로 뻗어있다. 위산산맥은 중앙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줘수이강과 슈에산산맥, 남쪽으로는 가오슝시의 경계까지 놓여있다. 아리산산맥은 위산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줘수이강 상류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는 정원강(曾文溪) 상류까지 다다른다. 해안산맥은 화롄강 하구에서 남쪽으로 타이동까지 약 148km에 달해 뻗어있는 산맥으로 북쪽보다 남쪽이 더 높다. 지아리산 산맥은 슈에산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비토우쟈오(鼻頭角)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는 난터우현(南投縣)과 줘수이강 상류까지 뻗어있는 180km 길이의 산맥이다. 과거에는 슈에산산맥의 지파로 생각했으나, 지질이 슈에산산맥과 다르고 아리산 산맥과 비슷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따로 분류하고 있다.

대만은 강우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하천망이 잘 발달해 있다. 중앙산맥이 본섬 중부에서도 약간 동쪽에 위치해 있어 대부분의 강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나간다. 가장 긴 강은 줘수이강이며 가장 폭이 넓은 강은 남부의 가오핑강(高屏溪)이다. 면적과 길이가 모두 세 번째인 강은 북부지역의 단수이강(淡水河)이고 이 밖에도 크고 작은 강들이 있다. 대만에는 자연산 호수가 많지 않으며, 가장 큰 호수는 르웨탄호(日月潭)이다. 그 밖에도 운석 충돌로 만들어진 지아밍호(嘉明湖)가 있다. 대만은 가파른 지형을 지녔기 때문에 홍수와 가뭄에 취약했다. 저수지와 댐을 건설해 물 공급을 해결하였다. 쩡원댐(曾文水庫)이 가장 크며, 그 밖에도 약 100여개가 넘는 저수지이 있다.

대만은 네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다양한 해안지형을 가지고 있다. 북부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해안은 수심이 매우 깊다. 북부 해안은 대개 암석으로 되어 있고, 동쪽으로 향하면서 가파른 경사가 있는 단층해안으로 바뀐다. 동부 해안은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데 50km만 떨어져도 수심 4,000m에 달할 만큼 매우 깊다. 남쪽으로는 필리핀과 사이에 있는 바시 해협이 있는데, 폭이 약 300km이고 깊이는 약 3000m에 달한다. 이 해안은 주로 산호초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다보면 수심이 5000m까지 향하는 남중국해와 만나기도 한다. 그러다 서쪽의 대만해협은 사면의 바다 중 제일 얕은 편이며 평균 수심 60m이기 때문에 서부 해안은 모래, 석호, 진흙 등으로 구성된다.

토지이용

대만은 국토의 3분의 2 이상이 산지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산지를 덮고 있는 산림지역은 68.5%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중앙산맥이 자리한 중앙부와 경사가 급해 토지이용이 불가능한 동부 해안에 넓게 분포한다. 대만의 식생 종류는 고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대나무, 야자수, 열대 상록수 등은 저지대에서 자라고 아열대 상록수림은 고도 600m에서 1,800m 사이에 분포한다. 그 위로 1,800m에서 2,400m까지는 활엽수가 주로 발견되고 2,400m 이상부터는 침엽수림이 자리한다. 본섬 이외의 작은 섬들에서는 바람이 강해 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다.

도시지역과 농업지역은 각각 9.9%, 13.2%에 불과하고 본섬의 서부 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한편 동부 해안에 위치한 좁고 긴 열곡은 주로 농경지로 활용하고 있다.

대만은 화산 기원의 섬이기 때문에 토양의 생산력은 풍부한 편이다. 그러나 폭우와 장기간의 관개로 인해 생산력이 많이 저하되어 이모작을 위해서는 반드시 비료가 필요하다.

기후

국토 면적에 비해 높은 고도는 대만의 기후를 다양하게 만든다. 남부의 해안가는 열대기후를 보이는 반면 북부와 중부 지역은 아열대기후에 속하고 또 중부의 산지 지역은 온대 기후가 나타난다. 대만 동쪽을 흐르는 따뜻한 쿠로시오해류가 온화한 기후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고 연평균 기온은 북부지역은 22℃, 남부지역은 24℃ 정도이다.

5월부터 9월까지 약 5개월간 지속되는 여름은 매우 덥고 습하며 낮 기온이 35℃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여름 중 가장 더운 7월의 평균 기온은 28℃에 달한다. 반면, 12월부터 2월까지 지속되는 겨울은 짧고 평균 12~16℃ 정도로 온화하다. 눈은 겨울에 중부의 고산지대에만 약간 내릴 뿐이다.

대만은 연중 강수량이 많아 연간 약 2,600mm의 강수량을 기록한다. 일반적으로 고도가 더 높은 중앙의 산지와 동부 지역이 더 많은 비를 경험하지만, 계절풍에 따라 그 분포는 달라진다. 겨울에는 남동풍이 불어 북부 지역은 꾸준히 비가 내리지만 중부와 남부 지역은 대부분 화창하다. 하지만 여름에는 계절풍의 방향이 바뀌어 이와 반대 상황이 펼쳐진다.

또 대만은 태평양에서 발생하는 태풍의 주요 경로이기 때문에 태풍이 자주 지나간다. 태풍 시즌은 6월에서 9월에 평균 7~8회 찾아오며, 해안과 높은 산들이 함께 있는 지형 때문에 강한 비가 내린다. 본섬 이외 연안 섬들의 기후는 중국 남동부 해안의 기후와 비슷하다.

재해 및 환경문제

대만은 서쪽과 북쪽의 양쯔판(Yangtze Plate), 북동쪽의 오키나와판(Okinawa Plate), 동쪽과 남쪽의 필리핀변동대(Philippine Mobile Belt) 사이에 위치해 있어 큰 지진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평균적으로 매년 100회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고 약 5~10년에 한번 정도 강진이 발생한다. 대표적인 지진 피해 사례 첫째는 1999년 9월 21일 난터우현 지지진(集集)을 진앙지로 한 규모 7.7의 강진이 있다. 일명 '921 대지진', '지지 대지진'이라고 하는데 2415명 사망, 29명 실종, 11305명 부상 등 인명 피해와 당시 3647억 대만 달러(NTD)의 재산 피해가 있었다. 다음으로 2016년 2월 6일 가오슝시 메이눙구를 진앙지로 한 6.6 규모의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지진은 가오슝에서 일어났지만 인접한 타이난시의 피해가 컸다. 1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17층 규모의 빌딩이 무너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2018년 2월 6일에는 화리엔에서 규모 6.4의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화리엔의 호텔, 건물, 병원 등이 무너지거나 피해를 입었다. 17명이 사망하였으며, 280명의 부상자, 88명 이상의 실종자들이 생겼다. 이후 8개월 뒤 2018년 10월 화리엔에서는 6.0 규모와 5.7 규모의 지진이 더 일어났다.

그 밖에도 대만에서는 높은 인구밀도와 집중된 공업지대로 환경오염 문제도 겪고 있다. 20세기 후반 대만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공장과 늘어나는 차량으로 대기오염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1987년 행정원에 환경보호청이 설립되면서 무연 휘발유 사용을 의무화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도시의 주요 교통수단인 오토바이는 대기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다. 또 공장 폐수 및 미처리 하수의 수질오염, 원자력 발전 및 방사성 핵폐기물 처분 문제, 산성비 등이 주요 환경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1995년부터 대만 시민사회는 이러한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다양한 환경보호 캠페인 운동을 벌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후 변화로 인한 대만의 평균 기온은 지난 100년 동안 1.4도가 상승하였는데, 이는 전 세계 평균 기온 상승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이에 정부는 2005년 탄소 배출량 수치를 기준으로 2030년까지 20%, 2050년까지 50%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역사

대만의 역사(臺灣의 歷史)가 문헌상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624년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대만섬(臺灣島)에 진출하여 점거하면서부터이다. 물론, 그 전에도 대만 원주민들이 정주, 생활하여 왔다. 다만, 한족(漢族)이 본격적으로 대만에 이주한 것은 유럽인들이 대만섬을 점거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이전까지 대만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원주민(原主民)들의 섬이었다.

따라서, 대만의 역사는 크게 16세기 이전 시기, 네덜란드 식민지 시기, 정씨 왕조 시기, 청나라 시기, 일본제국 식민지 시기, 중화민국 시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16세기 이전

대만은 구석기시대 말기(5만년전 ~ 1만년전)에 이미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에 사람이 거주하였다는 증거는 명확한 편인데, 이 시대의 유물들은 말레이계 원주민이 남긴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진수가 지은 《삼국지》에서 오나라가 종종 이주(夷洲)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고 이 때 위온과 제갈직을 시켜 백성을 징발해 오기도 했다. 《수서》에는 "유구국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건안군(建安郡)(현재의 푸젠성)의 동쪽이며, 배로 5일을 가야 이른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중국측 학자들은 이를 대륙과 대만 사이의 교류 증거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주(夷洲)나 류구국(流求國)이 대만을 지칭하는지 확실치 않고 《수서》의 류구국(流求國)은 류구국(琉球國,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보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1360년에 원나라는 펑후 제도(澎湖)에 순검사(巡檢司)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복건의 천주(泉州)에 예속시켜 통치하였다. 이것이 대만 지역(대만섬 서쪽의 "펑후 제도"에 한정된 것임)이 중국의 행정구역에 포함된 최초의 기록이다.

1590년에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인들이 대만섬에 내렸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 때, 포루투갈 선원들이 초록으로 덮인 대만섬을 보고 "포르투갈어: Ilha Formosa"("아름다운 섬"이란 뜻)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대만섬을 "포르모사"라고 부르곤 한다.

16세기까지 대만섬에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원주민들이 섬 전역에 널리 분포하여 거주하였으며, 한족 이주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인 17세기부터 유럽 상인들이 앞다투어 대만으로 찾아 들어오면서 한족(漢族)들의 대만 이주도 시작되었다.

대두 왕국

대두 왕국(중국어 간체자: 大肚王国)은 평포족(平埔族) 중 파포라족(巴布拉族), 바브자족(貓霧捒族), 파제흐족(巴則海族), 호아냐족(洪雅族)이 16세기 중엽(1540년대)에 세운 과족군집왕국(跨族群準王國)으로 모든 부락의 대표로써 대두번왕(大肚番王)을 선출했다. 이 부족연맹의 국가는 청나라 옹정제까지 이어가다 1732년에 사라지게 된다.

네덜란드 시대

명나라와 정나라 설립자 정성공

162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먼저 펑후제도에 다다르게 되었다. 펑후를 중심으로 교역을 넓혀보려던 네덜란드를 명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펑후전쟁(澎湖之戰)으로 명나라는 네덜란드를 펑후에서 내쫓았다. 네덜란드는 펑후와 마주보고 있던 대만 본섬의 안핑(安平)지역(현재 타이난, 臺南市)에 정착해 젤란디아 요새(Fort Zeelandia, 안핑구바오)와 소규모 거주지를 세웠다. 1626년에는 스페인이 현재의 지룽과 단수이 지역에 정착해 식민정부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필리핀 내란으로 인해 스페인이 대만 북부 지역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며 네덜란드가 스페인이 점령한 북부지역까지 진출, 젤란디아 요새를 식민수도로 결정하였다.

1642년부터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대만을 관할하며 중국으로부터 비단, 도자기 및 약재를 수입한 후 일본 및 네덜란드로 재수출하였다. 1644년 만주족이 명나라를 침입하여 중국 대륙이 혼란스럽자 푸젠성 남부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대만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중국인에 대한 중과세 정책에 항의한 중국 이주민들이 1652년 봉기하였고,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 1662년 청나라 지배에 항거하며 명나라 재건을 도모하던 정성공(鄭成功)이 등장하면서 네덜란드 잔류세력을 물리치고 안핑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정씨왕국

정씨왕국은 1662년(남명 건평)에 정성공(鄭成功)의 군대가 대만에서 네덜란드의 군대를 몰아내면서 시작되었다.

명나라는 1644년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서 멸망하였지만, 명나라 황제의 유신(遺臣)들은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를 내걸고 청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정성공은 그 지도자 중 하나였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대만해협에서 무역업과 해적 행위로 큰 돈을 번 해상 모험가였는데, 정지룡이 일본에서 장사를 하면서 일본의 다가와 시치자에몬의 딸과 혼인하여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정성공이다.

정성공은 청나라 군대와 9개월 간의 싸움 끝에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대만으로 쫓기게 되었다. 1661년 정성공은 대만섬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하여 1662년 2월 1일 네덜란드 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대만섬에서의 철수와 대만섬의 모든 권리 이양을 약속받은 정성공은 대만섬 역사상 최초로 한족 정권을 수립하였다.

정성공은 대만을 청나라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아 통치할 목적으로 명경(明京)을 세워 동도(중국어 간체자: 东都, 정체자: 東都, '동쪽의 수도')라 칭하고, 펑후 제도를 포함한 대만의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자기 휘하의 군인들과 함께 대만으로 온 푸젠성 주민들을 섬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중국 본토를 수복하고 필리핀에서 에스파냐인을 몰아내어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1662년 6월에 정성공이 병으로 급사하자, 그의 아들 정경이 뒤를 이었다. 정경은 1664년에 동도를 동녕이라고 개명하여 동녕왕국의 왕으로 올랐고, 정성공의 반청 유지를 받들어 대륙에서 일어나는 복명 운동에 가담하였다. 특히 삼번의 난에 적극 동조하여 한때 푸젠성의 일부 지역을 공격하여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씨 정권이 정성공의 손자에게 넘어가면서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청 정부는 뇌물을 이용해 이러한 내부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정성공으로부터 시작한 정씨 일가의 3대(代)에 이은 대만 통치는 21년 만인 1683년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정씨왕국의 통치시기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정씨 정권과 상업협정을 맺으려 했는데, 당시 영국인들은 동녕왕국을 '대만 정씨왕국'(台灣鄭氏王國) 또는 '명경왕국'(明京王國)이라 칭하였다.

강희대만여도(康熙台湾舆图)는 청조시대 대만의 산천·교통·군사·사회 등 생활을 묘사하였다.

청조시대

청나라는 대만을 복속시킨 후 푸젠성의 관할 아래 두었다. 청나라의 병합 이후 중국 대륙에서 대만섬으로 이주하는 한족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그 대부분은 대만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푸젠성 남부와 광둥성 동부 출신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공식적으로 대만 이민을 금지했으나, 실효성이 없어 1732년에 이민 제한을 해제하였다. 현재 대만 주민의 약 85%를 차지하는 한족계 본성인(本省人)은 대부분 이 시기에 대만에 이주한 한족의 후손들로, 오늘날에도 해당 지역의 방언인 민남어 또는 객가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한다.

청조 시대의 이민 초기에는 여성의 도항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남녀비가 치우쳐 한족과 평포족 간의 통혼이 빈번히 이루어졌고 청의 관청에서는 조직적으로 대만 원주민에게 성씨나 가계도, 족보 등을 주어 한화(漢化)를 권장함으로써, 섬의 평지에 한족들과 섞여 살던 평포족은 한족과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는 고산족과는 달리 평포족은 대만 원주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만은 주로 농업과 무역으로 발전했으며, 1858년 청나라가 제2차 아편 전쟁에 패하여 톈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대만에서도 타이난의 안핑 항(安平港)과 지룽 항(基隆港)이 개항되었다.

1874년에 일본 제국에 의해 모란사 사건이 일어났고, 청불 전쟁(1884 - 1885)시기에는 프랑스 함대가 대만 북부의 공략을 꾀했다. 이에 청나라는 대만 방위를 위해 류명전(劉銘傳)을 파견했다. 종래 푸젠성에 속하고 있던 대만이 푸젠대만 성으로 승격되어 1887년부터 시행[4]에 들어갔는데, 류명전은 초대 대만 순무(臺灣巡撫, 지방장관)가 되어 대만 전역의 실효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근대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충분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고 대만은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일본통치 시대

1911년 대만이 포함된 일본 지도

1895년 4월 17일,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섬과 펑후 제도는 일제에 할양되었다. 일제는 대만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50년간 대만 주민들을 식민지배했다.

일제는 식민지배 초기 대만에 대하여 일본 본토와는 다른 식민지법을 적용하다가 1922년부터는 일본과 같은 법제도를 적용하면서 동화정책을 폈다. 이러한 동화정책은 법제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식민지의 "일본화"를 꾀하는 정책이었다. 일제는 식민지배과정에서 대만의 철도나 도로 등 기반시설과 교육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이러한 일제의 대만 개발은 궁극적으로는 대만에 대한 일제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고 대만을 류큐(오키나와현)와 같이 일본의 완전한 일부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에 의한 이러한 일련의 정책의 영향과 잔재는 오늘날에도 대만에 많이 남아 있다.

1936년 2·26 사건 이후 일제는 총력전 체제화를 진행하였고 대만 총독부 역시 이른바 황민화 정책에 따른 동화정책을 강화하여 대만 내에서 중국어 신문을 금지하고 대만사람들에 대하여 일본어 사용과 창씨 개명을 강요했다. 또 일제 육군과 해군에 대한 지원병 제도를 도입해 대만 주민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식민 지배 초기에 대만주민들은 일본 제국에 맞서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895년에는 대만 민주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등 식민지배 초기에는 일제에 대한 조직적 무장투쟁에 나섰으나, 1915년 타파니 사건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항일 무장투쟁은 약화되었다. 1930년에는 대만섬 중부에서 원주민족인 타이야 족에 의한 항일 봉기 사건인 우셔 사건이 발생했다.

중화민국 시대

장제스(蔣介石)는 1925년부터 1975년 사망할 때까지 국민당의 지도자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대만을 연합국에 양도한 후 중국 국민당이 인수하게 되었다. 대만 사람들은 초기에는 국민정부를 환영하였으나 이들의 부패와 고압적인 태도에 점차 불만이 많아지게 되었다. 1947년 2월 28일 담배를 팔던 노파가 담배를 강제 몰수한 공무원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폭행을 당하게 되면서 이 쌓였던 불만들이 분출하게 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이 불만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본성인들과 외성인들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1949년 국민당은 대만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988년 해제될 때까지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전쟁에 대비한 '비상체제'에 도입하게 되었다.

1960년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대만경제부흥정책을 실시하여 연간 평균 9.3%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연합(UN)에 가입하게 되면서 대만은 UN에서 나가게 되었으며, 연이어 미국과 일본과 단교하게 되었다. 1975년에는 장제스가 사망하였고, 뒤를 이은 장징궈(蔣經國) 총통은 계엄령을 철폐하고 대만을 개방하는 정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1988년 장징궈 총통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 경제정책 및 민주화 정책은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이어받았다. 1989년 복수정당을 허용하였고, 1992년 최초 입법원 직선, 1994년 대만 타이베이 시장 직선, 1996년 최초의 총통 직선 등 민주화를 진정시켰다. 2000년에는 대만 최초로 야당 민주진보당의 주석인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당선됨으로써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천 총통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한 쪽에 한 나라씩 존재한다는 '일변일국(一邊一國)' 정책을 발표하며 탈중국화와 대만 의식의 국가화 작업을 실시해나갔다. 그러다 2008년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당선되면서 다시 중국과의 교류를 진전시켰다. 갑작스러운 중국과의 교류 확대는 대만 청년들과 사회운동의 반발을 샀고, 이는 2014년 3월 해바라기 운동(太陽花 學生運動)으로 이어졌다. 11월의 선거에서 국민당이 참패하며 2016년 다시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주석의 총통 당선까지 연결되었다. 차이잉원 정부는 중국 의존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남아시아,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신남향정책'을 추진하며, 미국, 일본과의 관계도 개선하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정치

대만총통 집무실

대만은 중화권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된 국가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중국이나 싱가포르와 같이 중국국민당 치하 일당독재국가였지만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걸쳐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현재 대만은 동아시아권에서 한국, 일본, 몽골과 함께 민주주의가 정착한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2021년 민주주의 지수에서 세계 8위를 기록하면서 아시아 국가중 최고순위를 기록했다.

중화민국의 정부는 입법원, 행정원, 사법원, 감찰원, 고시원으로 나뉘는 오권분립체제를 취하고 있다. 중화민국 정부는 중화민국의 헌법과 삼민주의에 기반을 하여 세워져있고, '국민을 위한 민주 공화국으로서 국민에 의하여 통치되며 오로지 국민을 위한다'라는 강령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정부는 크게 5개의 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국가 정책을 펴고 내각의 역할을 하는 행정원, 법률을 투표하고 의결하는 국회의 기능을 하는 입법원, 재판과 법률 문제를 처리하는 법원의 기능을 하는 사법원, 관리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고시원, 공무원들의 부패를 감시하고 청렴을 보장하는 감찰원이 바로 그 것이다.

헌법

중화민국이 대륙을 통치할 적에는 헌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헌법은 1947년 12월 25일부터야 공식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으나, 1948년부터 1987년까지는 계엄령이 선포되어 헌법 대부분은 제대로 힘을 내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점차 정치 지형이 바뀌었고, 1990년대에는 드디어 민주화 운동이 빛을 발하여 다당제를 채택한 민주정으로 탈바꿈하였다.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의 중화민국은 점차 헌법도 개정하였는데, 당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등 국민당 독재 합리화를 위한 조항을 폐지하고, 대륙기에 만들어진 법 조항들을 다시 구분하여 바꾸고 실질적인 상황에 맞게 바꾼 것이다.

총통

차이잉원 대만 총통

중화민국의 최고 군 통수권자이자 국가수반은 총통이다. 임기 4년의 중임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되며 부총통과 함께 내각을 경영한다. 총통은 5개의 원들에 대한 책임과 권한이 있으며, 행정원의 각료들을 임명하여 내각을 꾸릴 수 있다. 특히 행정원장은 행정원의 최고 공직자로, 장관들을 통수하고 정책 형성에 관여한다.

입법원과 행정원장

현재 중화민국의 국회 격의 기관은 입법원이다. 총 113석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이중 73석이 지역구에서 선출되며 34석은 모두 정당에 대한 지지도를 기반으로 한 비례대표제를 통하여 뽑힌다. 국회의원들은 4년의 임기를 가지고 있다. 국민대회가 본디 1949년부터 국회의 기능을 하고 있었으나, 2005년에 스스로 폐지를 한 이후부터는 입법원에 입법 기능을 모두 나누어 넘겨주었다.

행정원장은 총통이 지명하며, 입법원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입법원은 대신 총통의 허가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으며, 행정원장도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또한 입법원의 다수당과 여당이 다른 여소야대 형국에는 제대로 국정이 굴러가지 않는 경우가 잦은데, 가장 대표적인 예로 2000년에 민주진보당이 이끄는 천수이볜 총리가 당선되었을 때에 국회 다수당인 국민당과 불화가 쌓여 수많은 법안들이 제대로 통과되지 못하였다. 역사적으로 중화민국은 1인 독재 치하를 오래 겪었기 때문에, 헌법에도 총통의 행정권이 제대로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행정 기능이 거의 총통에게 집중되어 있고 행정원장도 총통에 비하면 권력이 그다지 강하지 못하다.

사법원

중화민국 사법원은 중화민국의 최고 사법 중추이다. 헌법을 해석하고 그 외의 법령과 조치들도 모두 사법원에서 해석하며 판사들을 임명하고 공공 질서를 확립하는 기능을 한다. 사법원장과 부원장, 그리고 13명의 법관들이 대법원을 이룬다. 그들은 총통에 의하여 지명되어 임명되며, 입법원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가장 상위 법원인 대법원은 여러 민사, 형사 법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1명의 부장판사와 4명의 보조 판사들로 이루어져있다. 1993년에 헌법재판소가 따로 설립되어 헌법과 관련된 문제들을 판결하였으며, 정당들의 활동을 규제하고 민주화의 속도를 앞당기도록 하였다. 배심원 판결은 존재하지 않으나, 공정하고 공개된 재판에 대한 권리는 법에 의하여 보호된다. 다심제가 진행되어 한 사건들을 여러 판사들이 판결하는 경우가 있다. 중화민국에서는 사형수들을 줄이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형제가 존속되고 있다. 2005년과 2009년 사이, 사형 실시는 멈추었다. 허나 2006년의 조사에 의하면 여전히 80%에 달하는 국민들이 사형제 존속을 원한다고 한다.

감찰원과 고시원

감찰원은 행정원을 감시하는 반부패 기관이다. 주로 국정 감사를 진행하며, 유럽연합의 유럽회계감사원이나 미국의 미국회계감사원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고시원은 주로 공무원들을 선발하고 평가하는 기관이다. 그 역사는 왕조기 과거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깊은 기관이며, 유럽의 공무원선발사무소나 미국의 미국연방인사관리처와 그 성격이 비슷하다.

정당

중국 본토와 대만섬과의 긴장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 '대만 독립'을 외치는 모든 정치적 세력들을 위협하고 있기에 이같은 긴장은 늦춰질 새가 보이지 않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현재 일국양제의 원칙을 기반으로 양안을 통일하려 하고 있으며, 특히 중화민국 정부 측에서 독립을 주장할 때마다 무력을 기반으로 한 강제 통일 방안도 포기하고 있지 않다.

현재 대만의 정치 상황은 중국 본토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크게 2개의 진영으로 나뉘어있다. 스스로를 중국 대륙의 합법 정부로 규정, 중국 본토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통일을 추구하는 쪽은 범람연맹으로 칭하고, 중국국민당과 친민당, 신당 등이 속해있다. 그 반대파인 범록연맹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사실을 거부하며, 독립적인 국가로 자국을 규정하고 외교적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자 한다. 범록연맹은 크게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을 완전히 다른 국가로 보고 있으며, 민주진보당 등의 정당들로 구성되어 있다. 2007년에 당시 집권여당이던 민주진보당은 본토와 다른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명을 '대만'으로 보편적으로 본래의 국명이던 '중화민국'과 함께 쓰이도록 추진하였다. 천수이볜 전 총통은 '대만'은 이미 독립적, 주권적인 국가'라는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중화민국이 곧 대만이라고 주장하였다. 리덩후이 전 총통 또한 이전에는 국민당에 속해있었지만 대만 독립 운동에 약간씩 뜻을 같이하고 있다.

범록연맹은 주로 일국의 개념을 지지하며, 중국 대륙에는 오직 한 합법정부만이 존재하며 그 정부가 바로 현재 대만섬으로 도피한 중화민국 정부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재통일을 추진하고 있다. 범록연맹파의 정당들은 주로 중국 본토 간에 걸려있는 제재들을 풀고 무역을 재개하는 것을 지지한다. 다만 곧바로 현재의 재통일을 지지하지는 않으며, 사실상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마잉주 전 총통은 그의 재임 기간 동안은 통일이 없을 것이라 공언하기도 하였다. 2009년에도 범록연맹은 주로 경제적인 교류를 통하여 중국본토와의 관계를 선화하고자 하였다.가진다.

국방

중화민국 헌법 제 20조의 규정에 의해 중화민국에서는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으므로, 만 19세 이상의 남자에게는 12개월간의 병역 의무가 주어져왔으나, 2010년부터 모병제 전환을 시작하여 2019년부터 모병제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1993년 출생자까지는 복무기간이 1년인 징병대상이었으며, 1994년 이후 출생자는 4개월의 군사훈련(기초군사훈련 2개월, 군사특기 교육 2개월)만 받았다.

국군인 중화민국 국군은 정규군 약 30만 명, 예비역으로 약 350만 명의 병력을 포함하며, 정규군은 육군 20만 명, 해군 4만 5,000명, 공군 4만 5,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기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침공을 대비해 수는 적으나 CM11 전차나 키드급 구축함, F-16 전투기, AH-64 아파치,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 등 최신 무기로 무장해있다. 또한 중화민국 육군은 미국으로부터 M1 에이브럼스 전차를 도입받기로 결정했다. 정부를 대만으로 이전한 이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군사적 대립으로 인하여 중화민국 국군은 최신예 개인 화기, 군용기, 군용선 등을 운용하고 있으며, 2019년의 국방 예산은 GDP의 2.16%에 상당하는 3460억 뉴 대만 달러, 즉 12조 6500억 대한민국 원에 이른다.

중화민국 국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지는 중국 연안의 진먼현과 롄장현이다.

미국과의 단교 이후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이 폐기되고 중화민국 주둔 미군이 철수했지만, 미국은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을 제정하여 첨단 무기를 판매하고 군사훈련에 미군을 참관시키는 등 군사협력관계를 간접적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다.

종교적 또는 개인의 비폭력주의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는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심사를 거쳐서 허용하고 있으며, 현재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양로원 등의 사회 복지 시설에서의 사회 봉사로 군복무를 대체하도록 하되, 합숙 생활을 하도록 하고 있다.

외교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공식적인 외교 관계 수립에 있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중 하나를 택일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중인 미국과 일본 등은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중화민국과의 교류 관계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중화민국은 아프리카(에스와티니) 1개국, 유럽(바디칸 시국) 1개국, 오세아니아(마셜 제도, 나우루, 팔라우, 투발루) 4개국, 중남미(벨리즈, 콰테말라, 온두라스, 아이티, 세인트키츠 네비스,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파라과이) 8개국의 총 14개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나라 이름이 기울이기로 된 것은 대만 현지에 대사관이 설립된 국가를 나타낸다.)

타이베이 대표부

중화인민공화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한 국가 중, 중화민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국가에 타이베이 대표부 등 중화민국 대사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를 설치하여 영사, 경제, 문화 교류, 관광 진흥등의 업무를 수행하게끔 하고 있다. 이에 상호주의 원칙으로 타이베이 대표부가 설립된 국가들은 미국재대만협회 등 주 중화민국 대사관의 역할을 하는 기관을 타이베이에 설치하여 상호 교류 중이다.

국제 기구 참여

중화인민공화국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기구들 모두에서 중화민국의 참여를 거부하고 있으며, 참여를 허락한다 하여도 국가 단위의 참여로 취급하여주지 않는다. 중화민국은 현재 다양한 명칭으로 세계무역기구,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아시아 개발은행 등에 가입하여 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 등 국제 민간 기구에서도 중화민국의 이름으로 참여하는 기구는 극히 적으며, 대부분 차이니스 타이베이 등의 호칭으로 국제 민간 기구에 참여하고 있다.

중화민국은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중국 대륙의 대표권을 넘겨준 이후부터 국제 연합에서 탈퇴하며 회원국 지위를 잃었다. 이로 인해 중화민국에서 국민투표가 벌어지는 등 국제 연합 재가입을 희망하는 사회 기류가 일부 형성되어있다.

외교 문제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센카쿠 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화민국은 센카쿠 열도가 이란현 터우청진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남중국해에 위치한 스프래틀리 군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화민국은 그 중 특히 중저우 암초와 이투아바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 지역을 가오슝시 치진구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만 문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대만 문제에 처해 있다. 이 문제의 원인은 국공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9년 전쟁에서 패배한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으로 후퇴하여 타이베이로 이전하였고, 1980년대까지 무력을 통한 대륙 재탈환을 위한 준비를 계속하였다. 그 후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제7함대를 대만에 파견하고 1954년에는 중화민국과 공동 방어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한 1979년에 파기되었고 그 이후에는 대만 관계법이 대신하고 있다.

서로 다른 체제로 인해 상호 간에는 어느 정도 불신이 존재하며, 중화민국은 자신들이 대륙을 재탈환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중국국민당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제3차 국공합작을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반면, 민주진보당은 실지수복을 포기하고 대만만의 독자적인 국가로 전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주진보당을 중심으로 주장된 대만 독립 운동은 타국의 지배에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 건너 온 중화민국 정부의 국명, 국기, 국가 등을 변경하여 중국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성격이라고 정의된다.

2000년대 이후 민주진보당의 집권에 따라 대만의 독립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이 행해졌으나, 2008년에 중국국민당의 마잉주가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일시 중단되었다. 다만 2016년 민주진보당 출신 차이잉원 총통 취임 이후 관련 정책 재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한관계

1948년 8월 외교 관계를 수립한 후 대만 총통 장제스가 한국을 방문하고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하는 등 수교관계를 유지해왔으나, 1992년 8월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한 후 단교하였다. 1993년 비공식 관계를 설정한 후 대사관이 아닌 대표부가 상주하게 되었다. 2004년에는 한·대만 민간항공협정 체결로 항공기 운항이 재개되면서 인적교류가 늘어났다. 2019년 기준 한국과 대만에 각각 10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등으로 교류가 활발하다. 한국 교민의 약 75%가 대만 북부지역인 타이베이, 신베이 등에 거주하고 있다. 대만 내 한국학교는 2개(타이베이와 가오슝)가 있다.

교역·투자

대만과 공식적 외교관계가 단절된 이후에도 양국 간 교역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한국은 대만의 5번째로 큰 교역 상대국으로 전체 교역에서 5.63%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2019년). 대만은 한국의 6번째 교역국으로 총 무역액의 3%를 차지한다. 2019년에 대만은 한국에 169억 달러를 수출하였고, 177억 달러를 수입하였다. 반도체 부문에서 한국은 대만의 4위 수출국(7%), 2위 수입국(14%)이다. 대만의 한국에 대한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 등 전기기기 및 부품(64%), 광물성 연료, 기계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전기기기 및 부품(54%), 기계, 유기화합물, 광물성 연료, 철강 등이다.

대만의 한국에 대한 투자는 총 2억 2천만 달러 규모, 한국의 대만에 대한 투자는 3,653만 달러이다. 대만의 한국에 대한 주요 투자 부문은 전자부품 제조, 금융 및 보험, 제약 등이며, 한국의 대만에 대한 주요 투자 부문은 도·소매업, 정보·통신·방송업 등 서비스업 등이다(2019년).

대한 관계 현안

대만에서 한국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한류의 역할이 상당했다. 대만의 한류는 여전히 대만-한국 관계, 특히 대만-한국의 문화교류에 중요하다. 주요 대만 한류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한류의 시작 한국 가수들이 대만에 처음 진출한 시기는 1980년대 말~1990년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김완선, 클론 등 한국의 대중가요는 주목을 받았지만, 이미 일본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대만 방송 시장에 유행 중이었기 때문에 1994년 처음 대만에 방송된 한국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인기리에 방영되지 못하였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를 겪으며, 많은 대만 사람들이 유리한 환율을 이용해 한국 제품들을 수입하였으며, 한국의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 한류의 발전 2000년 GTV가 수입한 이영애 주연의 《불꽃》은 대만 시청자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으며 한국드라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이후 송혜교, 송승헌 주연의 《가을 동화》, 2004년에 수입된 이영애 주연의 《대장금》 등이 방영되며 점점 한국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대장금》의 파급효과로, 1992년 단교로 사라졌던 대만-한국 직항노선이 2004년 다시 운행하게 되었다.

◎ 한류의 확산 《대장금》 방영 이후 한동안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은 감소하다가 2008년 슈퍼주니어의 앨범이 주목받으며 다시 한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한류가 다른 시기와 비교해 주목할만한 점은 아이돌 가수들을 중심으로 대만에 콘서트나 팬미팅을 대규모로 개최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 드라마들도 꾸준히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대만 문화부 통계에 따르면 2015년의 한국드라마의 방영 점유율 24.03%이 중국 대륙(26.29%)을 제외하고 일본드라마(6.39%)나 홍콩드라마(1.76%)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 드라마가 대만에서 인기있는 요인으로는 부부 문제, 자식 교육, 고부갈등 등 가족 드라마, 드라마의 현대적 배경, 주인공의 패션 등이 꼽힌다. 이러한 한류의 확산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대만인들이 늘어났으며, 한국 음식, 가전제품, 화장품, 관광, 유학, 워킹홀리데이 등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행정구역

대만의 행정구역 지도

1949년 이후로 중화민국 정부는 자국의 영토를 크게 실효 지배 지역인 대만 지구와 '미수복 지역'인 대륙 지구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1991년 5월 1일 헌법을 개정해 정부 실효 통치 국토를 "자유 지구"라고 이름 붙이고, 헌법의 적용 지역을 "자유 지구"로 한정하고 있다. 대만 지구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실효 통치 지역인 대만섬과 펑후, 행정구역상 푸젠 성에 속하는 진먼, 마쭈 등의 섬들이 포함된다. 중화민국은 국내를 성(省)과 직할시(直轄市)로 구분하여 각각 지방 정부를 두고 있다. 다만 1949년 이후 중앙정부의 통치 구역과 대만 성 정부의 통치 구역이 거의 겹치게 되었기 때문에 성 정부의 기능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현재도 성 정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중앙 정부가 직접 현(縣)을 관할한다.

6개 직할시
2개 성
  • 푸젠성 ※1996년 1월 15일에 성정부 기능을 정지
  • 대만성 ※1998년 12월 20일에 성정부 기능을 정지
강역

중화민국은 1912년 기준 청나라의 공식적인 영토를 자국의 국토로 규정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11,418,174km²이다. 그에 반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면적은 9,596,960km2, 대만섬만의 면적은 35,195 km²이다. 중화민국은 공식적으로는 실지(失地)인 중국 대륙을 포함한 국토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계속 주장해오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국경획정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륙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실효 통치 지역이 아니지만 중화민국의 영토로 간주되는 중국 본토, 몽골, 투바 공화국 등이 포함된다.

경제

뉴타이베이
타이베이 101과 타이베이 난산 플라자

대만은 2019년 세계무역기구(WTO) 기준으로 17위의 수출국이다. 대만은 세계적인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강국으로 전자제품, 특히 반도체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대만 행정원 주계총처 통계에 따르면, 대만은 2020년 기준 3.12%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등 매년 2~3%의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있다. 대만의 1인당 명목 GDP는 2021년 기준 32,123달러로 세계 29위, 1인당 실질 GDP는 59,398달러로 세계 13위에 해당한다.

대만의 지역별 1인당 소득은 남쪽보다는 북쪽이, 동쪽보다는 서쪽이 높은 경향이 있다. 2016년 통계에 따르면 대만 북부의 총생산 GDP는 17.6조신 대만 달러(New Taiwan dollar, NTD)로 전체 GDP의 약 56.1%를 차지하였으며, 중부지역은 21.7%, 남부지역은 21.3%, 동부지역은 0.7%였다. 2016년 대만 지역별 1인당 소득은 타이베이시, 신주시, 롄장현, 신베이시, 타오위안시, 타이중시, 신주현, 펑후현, 자이시, 지룽시 순이었으며 특히 타이베이, 신주, 신베이시, 타오위안시의 소득은 전체 대만 소득을 윗돌 정도로 대만의 경제 활동이 대만 북부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만은 과거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하여 한국, 홍콩, 싱가포르 등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만 경제의 특징은 수출주도의 산업화 및 높은 중소기업 비율이다. 우선, 대만 경제는 해외 수출을 통해서 성장해왔다. 대만의 연간 GDP 중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50%에 달한다. 수출의존도가 높은만큼 세계경제 변화에 민감한 편이다. 한 예로 2009년의 세계경제위기 상황에서 대만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률(-1.61%)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대만 경제는 또한 과거 '삼민주의 균부사상(均富思想)'을 기초로 '중소기업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를 육성해왔다. 2019년 기준으로 대만에는 1,491,420개의 중소기업이 있는데 이는 전체 사업체의 97.65%에 해당하며, 대만 전체 고용인력의 78.73%가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이 대만의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7년에는 78%였으나, 현재 전체 수출 규모의 13.42% 수준(2019년)으로 감소하였다. 한편,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으며, 대만 전체 수출의 35.5%(2020년)를 차지하고 있다.

산업구조

타이베이의 네이후(內湖區) 공업단지

2019년 대만의 산업별 GDP 구성 비율을 보면 농업 1.8%, 공업 35.8%, 서비스업 62.4%이다. 생산 라인의 중국 등 해외 이전으로 대만 내 공업 비중은 감소하는 추세다. 공업 비중이 줄어든 반면, 대만의 서비스업 비중은 1988년 50%를 넘은 이후 현재 60%대를 유지하고 있다. 농업 등 1차산업 비중은 이농현상 및 인구 고령화로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대만의 주력 사업은 광학제품, 전자부품, 컴퓨터 제조업, 통신업, IT서비스업 등의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이다. 지역별로 보면 북부에는 대만의 실리콘밸리인 신주공업단지를 중심으로 하는 첨단과학기술, 중부에는 공작·정밀기계 및 경공업, 남부에는 철강, 석유화학 등 중공업 분야 대기업이 포진하고 있다. 제조업 10대 기업 중 8개가 전자제품 및 부품 제조업체로, 세계적 전자업체의 브랜드 제품을 위탁 생산하는 OEM 업체가 많다. 대표적인 업체로는 2016년에 일본의 세계적 전자제품 회사인 샤프를 인수하기도 했던 폭스콘(홍하이 정밀공업), 신주현 신주과학단지에 위치한 세계 1위의 반도체 파운드리 생산 업체인 TSMC가 있다.

대만 정부는 최근 정보통신기술 산업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 최근 6대 핵심전략산업(①사물인터넷·인공지능 ②정보 보안 ③바이오·의료 기술 ④방위·항공우주산업 ⑤신재생에너지 ⑥민생 필수품)을 선정하기도 했다.

소득·분배

대만의 1인당 명목 GDP는 32,123$(2021년 기준)로 세계 29위이며, 구매력평가(PPP) 기준 GDP는 59,398$로 세계 13위이다. 대만은 최근 10년 간 연평균 1.4% 수준의 낮은 임금 인상률을 보였는데, 동시에 물가 상승률 또한 0~1%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소득 격차와 관련하여 대만 정부 통계에 따르면, 가구당 가처분소득은 2017년 기준 평균 1,018,941NTD(36,690.58$)로 나타났다. 가구 5분위당 소득은 각각 하위 20%의 경우 338,278NTD(12180.9$), 상위 20%의 경우 2,052,850NTD(73920.13$)로 나타나서 6배 가량 차이가 났다. 1980년대 상위 20%의 가처분소득이 하위 20%의 4배 수준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만의 지니계수는 1980년대 말 0.3을 넘어선 이후 현재 0.337을 기록하고 있다.

성별에 따른 시간당 남녀 평균 임금 차이를 보면,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가 2010년의 17.1%에서 2020년에는 14% 차이로 좁혀졌다.

농업

농업은 대만섬 서해안의 비옥한 평야 지역에서 주로 발달했다. 전체 토지의 24%가 곡물 재배에 적합하다. 쌀과 사탕수수의 수확량이 많으며, 그 밖에 옥수수, 고구마, 아스파라거스, 버섯류, 콩, 땅콩, 차, 바나나, 파인애플, 감귤류 등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최근 일본 등의 국가로의 농산물 수출이 증가하고 있다. 가축으로는 돼지, 소나 물소(이전에는 농경용), 양, 산양, 닭, 오리 등이 상업용으로 사육되고 있다. 국토의 약 60%가 삼림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목재는 그리 풍부하지 않다. 주로 오크, 개잎갈나무, 대나무, 코늄(Conium), 등, Rattan) 등이 산출(産出)되지만, 수요의 대부분은 수입재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어업은 근해어업과 원양어업이 전체 어획고의 80%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연안어업과 양식업이다. 고등어와 다랑어의 어획량이 많다.

IT 산업

대만은 IT 산업이 발달하고 각종 컴퓨터 부품 회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메인보드 시장은 대만 소재 회사들이 꽉 잡고 있는데, ASUS, GIGABYTE, MSI 등 3대 메이저는 물론, ASRock, BIOSTAR, ECS, Foxconn, Jetway 등등이 모두 대만 소재 회사다. 그 외에도 ACER, BenQ, 라이트온, 그리고 폰 제조사로 유명한 HTC, 칩셋 전문 제조사 Realtek을 비롯한 수많은 하드웨어 제조사들이 있다. 또한 NAS로 유명한 SynologyQNAP도 대만 회사이다. 대만에 있는 회사는 아니지만 세계 외장 그래픽 카드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NVIDIA도 대만 사람인 젠슨 황(Jen-Hsun Huang)이 미국으로 건너가 세운 회사이며, AMD의 구원자 리사 수도 대만 출신. 거기에다 지금은 AMD에 합병된 라데온 시리즈로 유명한 ATI도 대만인이 만든 회사이기도 하고 스크롤 휠이 탑재된 마우스를 최초로 상용화한 KYE systems도 대만 회사이다.

하지만 메인보드는 인식과는 달리 노동집약적 측면이 강하고 반도체에 비하면 마진률도 처참하기 그지없는 분야다 보니 생각보다 부가가치를 많이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저 메인보드 3대 기업들의 규모도 생각보다 작은 편. 정작 대만에서 메인보드 분야보다도 더 강력한 경쟁력과 높은 부가가치를 가진 것은 반도체 파운드리나 IT 완제품 ODM 및 OEM으로, 이쪽 분야를 대만이 꽉 잡고 있다고 보면 된다. 실제 대만 시가총액의 1~2위는 각각 TSMCFoxconn으로 위의 메인보드 주력 기업들을 합한 것조차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훨씬 금액규모가 크다. 또한 TSMC의 시가총액은 후술하겠지만 다른 대만 기업들과 넘사벽이다.

세계 최대의 독립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인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를 보자면 시가총액은 2020년 7월 초 한화 기준 400조원을 돌파했고 당시기준 인텔은 물론 삼성전자조차 추월한 것이다. 이 파운드리의 업체의 주요고객은 AMD(ATI), NVIDIA, VIA, 브로드컴, Apple 같은 '팹리스' 기업들. 고객의 대부분이 세계적인 회사들이다. 파운드리 산업은 과거에도 의외의 알짜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종의 하청 취급에 반도체 산업에 있어 IDM이 대세였던 과거에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산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서는 그야말로 완전히 반도체 업계의 슈퍼 을이 되버린 상황. 이 TSMC의 사정에 따라 신형 CPU나 신형 그래픽카드의 출시 자체에 차질이 생기거나, 가격이 널뛰기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2010년에도 TSMC가 엔비디아의 주문을 우선하여 AMD-ATI가 준비하던 28나노 공정의 신형 그래픽카드 계획이 틀어져 버린 사례가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공공의 적 취급하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만큼은 매출 1위일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긴 하지만 역시 다들 대기업이 아니라서 대기업에게 시장을 빼앗기거나 대기업끼리 손잡거나 하면 줄줄이 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대기업이 대만 중소기업들을 다 눌러버린다면 세계 전자 시장에 차질이 오므로 몇몇 컴덕후들은 쓸데없이 거대해지는 대기업들을 까기도 한다. 2011년 초에 일어난 IBM과 삼성전자의 협력도 이런 식으로 까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앞 문단도 옛 말이지 현재에 와서 슈퍼을이 된 TSMC에게 내로라하는 원청 대기업들이 '제발 최신 공정으로 저희것부터 빨리 양산해주세요'라고 해야 할 상황이다. 괜히 2021년 기준 현재 반도체 관련업계 시가총액 1위를 달성한게 아니다. 수 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 시가총액에 비빌정도는 아니었고, 인텔과는 시가총액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지만 상당기간 동안 그보다 낮았다. 그리고 현재도 매출이나 이익으로는 반도체 업계 1위는 전혀 아니지만, 거물급 팹리스들이 죄다 주문을 넣고 있고, 파운드리 자체가 리스크는 낮은 반면 수익성은 높을수 밖에 없어진 꿀단지 산업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업계 최고인 TSMC의 발전가능성도 높다고 시장이 판단한 결과 시가총액이 폭등했다. 삼성전자도 그나마 뒤늦게라도 파운드리 산업에도 뛰어들었고 점유율 상 세계 2위까지는 올라섰지만, 워낙 TSMC가 파운드리에서 갖는 위상이 높고 경쟁력이 높아 50% 전후의 점유율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삼성전자는 2021년에도 20%의 벽을 쉽사리 넘지 못하고 약간 정체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위탁생산(EMS)의 경우 Apple의 iPhone 위탁생산 및 세계 최대 전자제품 OEM 기업으로 유명한 Foxconn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페가트론, 위스트론, 컴팔, 콴타 컴퓨터 등이 있으며 전 세계 노트북 컴퓨터의 80% 이상을 이들이 제조한다. 다만 이 분야는 TSMC처럼 슈퍼 을 행세도 불가능한, 그냥 노동집약 100%라고 말할 수 있는 분야라 TSMC와 비교하면 마진률이 바닥을 기는 편이다. Foxconn의 경우 영업이익률이 3~5% 정도인데, 저 정도만 해도 이상할 정도로 높은 영업이익률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으며, 다른 기업들의 경우 1~2% 정도가 고작이다. 이들 기업 모두 대만 본토 생산은 진작에 접은 지 오래이며, 대륙에 진출해서 세운 공장에서 제조하고 있다. 인건비 절감으로 대표되는 경영효율화 말고는 승부할 게 마땅치 않은 분야이다 보니 공장 노동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블랙기업이 대다수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중국의 임금과 노동환경 수준이 점차 올라가면서 이들도 베트남, 인도 등 인건비가 더 저렴한 지역으로 공장을 다시 옮기는 추세다.

IMF 사태로 실직자가 된 대한민국 기술자들을 대거 스카웃해서 관련 기술이 폭발적으로 진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계 AP 점유율 2위인 미디어텍도 대만의 반도체 개발, 설계 회사며 세계에서 메인보드를 비롯한 각종 주요 부품을 독점적으로 생산하고 있어서 IT 부문의 국가경쟁력은 1위인 미국에 이어 2위이며, 1999년 IT부문 국가경쟁력 집계 시작이후 2위에서 높아진 적도, 낮아진 적도 없다.

반도체 회사 중 하나인 VIA의 경우 1990년대 말에 인텔의 실수를 틈타 맹공격을 퍼부었던 회사다. 하지만 인텔이 제동을 걸면서 현재는 버로우.

디스플레이 산업의 주요 생산국가 중 하나로 홍하이 그룹의 계열사인 이노룩스나 에이서의 자회사로 시작한 AUO 등이 있다. 최근 몇 년간 각국 LCD 산업의 치킨 레이스로 2011년 대부분의 회사가 적자로 허덕이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샤프-홍하이, 소니-AUO 처럼 일본 업체와 손을 잡고 있다.

소프트웨어 회사들 중에서는 컴퓨터용 DVD/블루레이 재생 프로그램인 PowerDVD로 잘 알려진 사이버링크(Cyberlink)가 유명하다. 사이버링크는 2010년대 들어서 네로 버닝 롬 및 코렐의 이지CD 크리에이터같은 기존의 레코딩 프로그램을 강력하게 위협하는 Power2Go를 내놓아 확대하고 있으며, 2015년 현재 CD/DVD/블루레이 라이터를 사면 대부분 별 말 없으면 파워투고를 번들 레코딩 프로그램으로 제공하고 있다.

최근에는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이 급부상함에 따라 고민이 커지고 있다. 중국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면서 대만의 기술자들을 고임금으로 대거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이유로 대만의 임금은 오랜 기간동안 정체를 겪다보니 중국에서 대만보다 높은 연봉을 제시해주는 것도 가능하고,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시작한 기술자들이 그렇듯 "중국에서 반도체 시작해서 잘 되면 거대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한몫 한다. '대만과 중국의 반도체 대부'로 불리는 장루징(張汝京)이 이끄는 칭다오 신언그룹(芯恩集團)도 대만 반도체 인력을 대거 흡수해, 1/3 이상의 인력이 대만 엔지니어로 구성돼 있다. 최근 중국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량멍쑹 삼성전자 전 부사장도 대만 출신 과학기술자이다.

가전분야는 국산이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으며, 주로 일본, 한국, 중국제 가전제품이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대만 가전제품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SONY이며, 그 다음은 삼성전자이다. 가전의 대표주자인 TV 시장의 경우 소니가 20% 초반의 점유율로 1위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삼성·LG전자, 파나소닉이 10%대 초반의 점유율로 2위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 밖에 다퉁, 벤큐, 치메이 등 대만 내수 브랜드와 중국 브랜드가 나머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금융업

제조업과 더불어서 대만 경제를 이끄는 최종보스들이다. 대한민국/경제의 주요 비판점이 금융산업의 낮은 경쟁력인데, 대만은 금융업의 경쟁력이 굉장히 높다. 그러나 최근 메가뱅크의 부재가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중.

지방의 작은 손해보험사로 출발해 초대형 종합금융그룹으로 성장한 푸본금융그룹, 대한민국의 동양증권을 인수하여 유안타증권을 만든 유안타금융그룹, 증권사로 출발해 중화권 전체 최대 투자은행이었던 타이신금융그룹 등이 유명하다. 국내 은행으로는 타이완은행이 입지가 탄탄하다. 대만의 제1금융권 시중은행은 미국의 시중은행과 비슷해 각 지방 별로 대형은행과 중소형 은행들이 난립한 구조를 띄고 있다. 지방은행이 상당히 많다.

이 중 푸본금융그룹은 골프와 테니스를 좋아한다면 반드시 듣게 될 이름인데, 골프, 테니스 분야에서 메이저 세계 선수권 대회의 주 후원사이다. 푸본그룹은 2019년 현재 푸본현대생명으로 한국에도 진출했다.

오토바이, 자동차

일본과 아주 유사하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오토바이가 국민 교통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점은 모두가 잘 알고 있고, 대만도 오토바이 분야에서는 무시 못 할 노하우를 가진 국가다. 최근 국내에도 폭풍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SYM, KYMCO 바이크들이 바로 대만 출신이다. 다만 대만에선 스쿠터가 전체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레플리카나 네이키드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대만도 운전면허가 한국처럼 1종 보통에 해당하는 면허를 따면 125cc 미만 스쿠터에 대해 따로 면허를 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은 오랫동안 독자 브랜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해외 브랜드(주로 포드, 닛산 등) 차량의 OEM 생산과 부품 산업이 주를 이룬다. 2019년 현재 대만 최대 자동차 제조 기업은 1947년 설립된 화태기차(和泰汽車, Hotai motor) 그룹으로 도요타 자동차의 OEM생산을 하고 있다. 도요타 뿐만 아니라 일본 브랜드의 자동차가 OEM방식으로 제조/판매되고 있다. 택시의 대부분은 토요타 코롤라일 정도(참고로 일본 택시는 모두 '크라운' 이다). 2009년 닛산 자동차 OEM 생산 기업인 위룽(Yulon)그룹이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 브랜드인 럭스젠(Luxgen)을 런칭했다.

자전거

일본이 시마노를 바탕으로 구동계 시장을 장악했다면, 대만은 프레임시장의 절대강자이다.

오토바이처럼 자전거 업계도 대만계 회사가 휘어잡고있다. 가장 큰 생산기업으로는 자이언트, 그 뒤로 메리다가 있으며 유럽, 미국 자전거 회사도 극소수의 상위 모델만 자국에서 생산하고 나머지 생산은 위 기업들에게 맡긴다. 이 두 기업에서 전 세계 자전거 프레임의 60% 가량을 생산하며, 그 중 90% 가량을 자이언트에서 생산할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대한민국, 일본, 중국 등 인접국들과 경쟁하며 쌓아올린 알루미늄 금형 및 탄소섬유 제작기술 덕에 품질 역시 매우 뛰어난 축에 속한다. 한국의 고가 브랜드인 첼로도 메리다에서 만들고 있다. 특히 이 두 기업 모두 단순히 OEM만 하는게 아니라 자사 브랜드로도 자전거를 판매하고 있는데, 워낙 규모가 크다보니 국내에서의 부품 수급이 용이하고 가격 역시 매우 저렴한 축에 속한다.

에너지·자원

대만의 천연자원으로는 자철석·황철석·구리·금 등이 소량으로 채굴되고 장석·석회석·활석·백운석·고령토 등이 다량으로 생산된다. 석유·천연가스·석탄 등이 생산되기는 하나 매장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료와 광물을 수입한다.

대만은 에너지의 97.8%(2018년)를 해외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전체 에너지 자원 소비는 석유(48%), 석탄(29%), 천연가스(15%), 원자력에너지(5%), 바이오매스 및 폐기물을 이용한 에너지(1.13%), 수력발전 등 그 밖의 재생에너지(0.64%) 순이다. 대만에서 전기는 석탄(45%), 천연가스(35.7%), 원자력(11.2%), 재생에너지(5.4%)로부터 생산된다(2020년). 대만은 2개의 원자로를 폐쇄했고, 현재 4개의 원자로를 운영하고 있다. 대만 정부는 2025년까지 원자력 발전의 비중을 낮추고 신재생에너지 발전(풍력, 태양광발전 등)을 20%까지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MICE산업

타이베이 세계무역센터에서 하는 컴퓨텍스 타이베이가 중화민국을 대표하는 대규모 산업 전시회이다. 컴퓨텍스 타이베이는 아시아 최대의 IT 분야 전시회로 성장했다. 중화민국 국가 영상에도 나온다.

행사는 좋은 걸 키웠지만 정작 전시장은 매우 부족하다. 난강전람관은 2019년 드디어 확장해서 75,600㎡이 되었으나 한국의 KINTEX(108,556㎡)보다 작다. 타이베이 세계무역센터는 서울특별시의 COEX와 비슷한 규모이다.

무역

대만의 주요 무역 상대국은 중국, 미국, 일본, 싱가포르, 대한민국(2020년 상반기)이다. 특히 중국(홍콩 포함)의 수출 비중이 42.33%로 가장 높다. 하지만 (蔡英文) 총통 집권 이후 양안관계가 냉각되었고, 2018년 이후 미중 무역분쟁 격화 등으로 시장 다변화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하여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국가들과 경제협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특히 신흥시장인 동남아 및 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협력을 강화하는 '신남향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 컴퓨터 부품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반도체, 반도체 제조장비 등의 전자제품, 원유, 석유가스, 석탄와 같은 에너지 자원이다. 2002년 1월 1일에 '대만, 진먼, 펑후, 마주 개별관세영역(Separate Customs Territory of Taiwan, Penghu, Kinmen, and Matsu)'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였다.

대만 고속철도

교통 및 통신

대만은 국토의 중앙 남북을 가로지르는 중앙산맥의 영향으로 주요 교통로는 인구 밀집 지역인 서부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만에는 도시 간 이동을 위한 고속도로, 철도, 항공편이 잘 갖춰져 있다. 고속도로는 타이베이와 가오슝을 잇는 중산고속도로(1978년 완공)를 시작으로 현재 1,050.2km에 달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철도는 총 2,025km(2015년)가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2007년부터 타이베이와 가오슝을 잇는 고속철도가 개통되어 서부 지역 주요 도시들을 빠르게 연결하고 있다. 항공편은 중화항공, 에바항공 등 9개의 국내 항공사가 운행되고 있으며, 대만섬 내의 노선 이외에 펑후제도, 진먼섬, 마주 열도 등 도서 지역을 연결하는 노선이 운행되고 있다. 국제선 공항으로는 타오위안과 가오슝 국제공항이 있으며, 공항 이용 승객은 총 5,186만명으로 국제선 이용자가 3,616만명, 양안 노선 이용자가 1,182만명이다(2015년). 타이베이 및 가오슝 등 대도시에서는 교통난 해소를 위해서 지하철(MRT)을 건설, 현재 운행 중이다.

인문사회

인구

2023년 1월 기준 인구는 23,301,968명이다. CIA의 World Factbook을 바탕으로 한 2016년의 출산율은 1.12명으로, 도시 국가를 제외한 전세계 최저 출산율이었다.

인구밀도 순위가 도시 국가를 제외하고 세계 2위일 만큼 매우 높다. 1위는 방글라데시인데 방글라데시는 국토 대부분이 평야 지대인 반면, 대만은 한국 이상으로 국토 대부분이 험준한 산지이기 때문에 가용 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전세계 최고다.

인구의 2%는 한족이 대만에 진출하기 전부터 살고 있었던 다양한 대만 원주민들이며, 나머지 98%는 한족이다. 이들 중 중국 푸젠성에서 이주한 사람 70%와 객가(客家)인 14%를 묶어 본성인(本省人)이라고 하며, 나머지 14%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외성인(外省人)이라고 한다.

이렇게 복잡한 사정 때문에 '대만 원주민 = 대만인', '외성인 = 한족', '본성인 = 대만인 = 대만 원주민'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외성인과 본성인은 한족이며, 대만 원주민은 한족이 아니다. '대만 원주민(臺灣原住民, Taiwanese Aborigines)'은 한족인 본성인과 구별되며, 이들은 본래 대만 섬에서 기원한 민족으로 한족이 아니다.

타이베이와 신베이 등 북부 지역은 외성인 비율이 높고, 가오슝과 타이난 등 남부 지역은 본성인 비율이 높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율의 차이일 뿐, 대만 어느 동네에 가나 인구 과반 이상은 본성인이다. 하카인은 신주시, 먀오리 등 중북부 지방에서 주류를 이루며 대만 원주민은 동부 지역에서 높은 인구밀도를 보인다.

중화인민공화국에 사는 소수민족은 대부분 대만에도 살고 있다. 그러나 대만 원주민 외의 소수민족은 사실상 한족으로 잡힌다. 그리고 명나라나 청나라 시절에 대만으로 온 사람의 후손이면 본성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만으로 건너온 사람의 후손이면 외성인으로 간주한다.

대부분의 인구가 평야 지대인 대만 서부에 몰려 있어 상당히 편중된 인구분포와 높은 인구밀도를 보인다.

동부는 해발 3,000m급 산이 수두룩하여 평야가 좁아 교통이 불편하기에 거주 인구가 150만 명이 채 안 된다. 그래서 도서부를 제외한 2,0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모두 대만 서부에 몰려 있다.

대만에도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미국인, 일본인, 몽골인, 그 외에도 베트남인, 인도네시아인, 태국인들도 대만에 거주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처럼 전 세계에서 드물게 일반적인 외국인을 상대로 한 귀화 제도가 없는 나라이다. 영주권만 발급한다. 물론 대만인과 결혼해서 대만에 거주하는 경우는 예외다.

대만도 한국, 일본, 홍콩과 함께 심각한 저출산 국가이다. 2010년에 0.895명이 된 적 있다. 2020년은 0.99명이었다가 그 이듬해(2021년)에는 0.92명을 기록했다. 1990년대까지는 출산율이 1.6~1.7명대를 유지했으나, 2000년대부터 세계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1950년대에 7명대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걸 생각하면 상전벽해. 2020년에는 전후 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감소했다.

지역별로는 과학단지가 있는 신주시가 출산율이 높고, 자이현이 노인 인구가 많다.

언어

언어 사용과 역사가 복잡한 사회이다. 표준중국어를 포함한 중국 계통의 언어들이 주류를 이루고,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한 다양한 원주민 원어들이 존재한다.

표준중국어가 공용어 역할을 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국어(中華民國國語)라고 불린다. 기본 문자는 전통 한자인 정체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 한자와 대체로 같으나 형태가 다른 표준자형이 일부 존재한다. 중국 대륙과 문자는 다르지만 입말은 보통화와 거의 동일한데, 실은 보통화가 중화민국 국어를 일부 수정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남북한과 다르게 양안 사이에선 드라마, 영화, 음악 등 대중 문화가 상당히 공유되고 있다.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옮겨간 이후 대륙에서 쓰는 말과 차이가 어느 정도 생겼는데, 자세한 내용은 표준중국어/대만 항목을 참고하자. 발음 기호의 경우 중국 대륙에서는 한어병음을 사용하지만 대만에선 국어를 학교에서 배울 때 주음부호(이른바 '보포모포')를 사용한다.

표준중국어를 국어라고 부르지만 정작 대만에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국부천대 이후에서야 국민당이 펼친 강력한 국어 보급 정책으로 인해 표준중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만의 기존 한족 주민들은 비관화권 지역인 푸젠성 출신이었고, 대륙에서 건너온 상당수의 외성인들도 관화가 아닌 다른 중국어 방언을 구사했었다. 오늘날 대만인 절대다수가 표준중국어를 구사할 줄 알고, 화자 비율로 치면 중국 대륙의 보통화 화자 비율보다 높다.

이념 대립이 심했던 냉전기 시절에는 한국에서 대만식 중국어를 가르쳤지만 현재는 수요로 인해 99.99% 중국 대륙식 표준중국어를 교육하고 있다. 일단 한국 시장에선 대만식 중국어 교재나 사전을 구하기가 힘들다. 굳이 노력하자면, 대륙식 중국어를 배운 후 대만 드라마나 책을 보며 특징들을 알아서 공부하거나 대만에서 출판하는 한국어판 교재를 구입해서 배우는 것이다. 한국인이 듣기에 대만식 중국어가 발음이 깔끔하고 얼화 현상도 없어서 대륙식 중국어보다 알아듣기 쉽다는 평이 있는 반면, 권설음(zh, ch, sh)의 발음이 부정확해서 어색하다는 평이 공존한다. 당장 중화권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데, 대만식 억양이 대륙보다 억세지 않고 예쁘게 들린다는 이들도 많고 오히려 남방 중국어와 비슷하게 발음이 불확실해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중국어의 특성상 지역 차이가 원래 크고, 특히 대만은 민남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독특한 사투리가 생긴 것이다. 해당 사투리를 대만의 표준어와 구분하기 위해 대만 국어라고 부른다.

민남어(閩南語, Bân-lâm-gí/-gú)는 중국 민어의 한 갈래지만 표준중국어 및 다른 중국 방언과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대만 사람 대다수의 모어이므로 대만어(台語, Tâi-gí/-gú)라고 흔히 불린다. 다른 민남어 방언들과는 유사해서 중국 대륙의 민남어 화자들과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다만 일본 통치의 영향으로 상당히 많은 일본어 어휘를 흡수한 것이 특징이다. 대만 지명에도 일본어의 흔적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끼라이(奇萊) → 가렌(花蓮: 화롄), 따까우(打狗) → 다카오(高雄: 가오슝)이 있다. 대만어는 대체로 구어로만 사용하는데, 백화문 전통이 약하고 글말은 표준중국어로만 쓰기 때문이다. 대만어를 표기해야 할 때는 한자 대신 로마자 표기법인 백화자(白話字, Pe̍h-ōe-jī)를 사용한다.

과거 국민당 독재 시절에는 학교에서 대만어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등 탄압을 받았지만 민주화 이래 언어 사용이 다시 자유로워졌고 현재는 학교에서 현지 언어 교과목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 대만어 이외의 민 방언으로는 진먼 현에서 쓰이는 샤먼어(廈門語)와 롄장 현에서 쓰이는 민둥어(閩東語) 계열의 마쭈어(馬祖話)가 있다. 샤먼어는 일제 지배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일본어 영향이 매우 적다.

객가어도 중국어 방언 중 하나이다. 대만어와 마찬가지로 표준중국어와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건 물론 대만어와도 불가능하다. 대략 인구의 10%가 객가어를 모어로 가지고 있다. 대만어라고 부르지 않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한족 본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대만어 화자들에게 밀려 살아야 했다. 지금도 객가인 절반 가량이 표준중국어와 더불어 대만어도 할 줄 안다고 한다.

대만 원주민들도 민족마다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이 언어들을 대만 제어라고 총칭한다. 대만 제어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한다. 다만 한족 사회가 주류이기에 절대다수가 표준중국어를 구사한다.

대체로 표준중국어는 북부/동부, 대만어는 서부/남부에서 우세하단 인식이 있는데, 실은 둘다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타이베이시를 포함한 수도권에도 대만어 화자들이 매우 많은 반면, 남부의 가오슝시와 중부의 타이중시에서도 표준중국어가 흔히 들린다. 결론은 지역보단 생활 영역에 따라 언어 사용이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다. 공적 활동이나 직장에선 표준중국어를 쓰고 일상 생활에선 편한대로 각자 방언이나 표준중국어를 사용하는 양상이다. 모어로 치면 대만어 화자 수가 압도적으로 높지만, 젊은 세대일수록 오히려 표준중국어에 더 능숙하다.

대만어에 남게 된 일본어 어휘가 대만의 표준중국어로도 어느 정도 유입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과 같다.

  • 아저씨, 아줌마를 '오지상'(歐吉桑), '오바상'(歐吧桑)이라고 부른다. 대만 드라마에서 종종 들을 수 있다.
  • 운전사를 '운짱'(運將)이라고 부른다. 예전 한국에서도 쓰였던 단어다.
  • 도시락을 일본어 '벤토'(弁当, 정체자로 辨當)의 발음만 고친 '볜당'(便當)이라고 부른다.
  • 으뜸, 제일이라는 뜻으로 '이치방'(一番)의 발음을 빌려 '이지방'(一級棒)이란 단어를 만들어 쓴다.

욕설로는 머리에 콘크리트만 들어찼다는 뜻으로 '아타마 콩구리'가 널리 쓰이고, 젊은 사람들도 알아들을 정도다.

이렇게 다양한 언어를 쓰는 나라라서 대만 철로관리국 열차에서는 '표준 중국어 - 대만어 - 객가어' 순으로 방송을 하고, 시간상 아예 영어 안내방송조차 하지 않는다. 심지어 새마을호급에 해당하는 쯔창하오나 타로코호까지도 영어가 안 나오니, 관광지가 아닌 곳으로 열차를 타고 갈 경우 방송을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대만도 다른 나라들처럼 가장 중요한 외국어는 영어이다. 일본이나 중화인민공화국 등이 비교적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의 영향을 고루 받은 반면 대만은 한국처럼 미국을 통해 영어를 수용한 역사 때문에 미국식 영어가 대세이며, 한때 미어(美語, 미국어/미국말)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일본어 역시 역사적인 이유로 주요 외국어이다. 대만일치시기 시절 교육을 통해 적잖은 대만의 지식인들이 일본어를 쓸 줄 알았고, 일본과의 교류도 많다보니 일본어 표기도 볼 수 있다. 또 이란 현의 일부 마을에 한해 이란크레올이라는 일본어 크레올이 쓰인다.

한국어 역시 문화적 영향력 덕에 배우려는 사람이 꽤 있다. 2010년대에 들어 한류가 인기를 끌면서 '오빠', '언니'도 음차된 형태로 쓰이고 있다.

2019년 라이칭더 대만 행정원장의 주도로 영어를 제2 공용어로 만들 법안이 통과했다는 내용이 한국 뉴스에도 보도됐는데, 시행은 안 되었다. 다만 2030년을 목표로 대만을 표준중국어-영어 이중언어 사회로 만들겠다는 정책은 유지하고 있다. 과연 결과는 어떨지 주시해 볼 만하다.

대만에서 중국의 권위주의에 대항해 대만어를 사용할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대만 정부가 고산족들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고산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고산족들의 언어 수업을 실시하기로 했지만, 표준중국어를 외래어(!)로 표기해 논란이 일어났다.

교육

대만의 현재 교육시스템은 교육부가 담당하며, 12년의 국민교육시스템이다. 12년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편성되어 있다. 1964년부터 중학교까지 의무 교육으로 지정하였고, 2015년부터 고등학교도 무상교육을 검토하고 있다. 1952년 42%에 달하던 비문해율은 의무교육의 확충으로 2016년 약 1.21%까지 줄어들었다. 중학교에서는 인문·상업 교육을 동시에 실시하며 중학교 졸업자는 상급학교(인문계와 상업계로 분류)에 진학하기 위해 시험에 응시해야 한다. 대만의 고등학교는 인문교육 및 상업교육으로 나뉘며 상업교육은 3년제, 5년제, 기타 직업교육프로그램으로 나뉜다. 1996년부터는 인문교육과 상업교육을 통합한 시험 고등학교도 운영 중이다.

대만의 대학교육은 4년제 일반대학, 단과 및 전문대학(2년제, 5년제), 법학과-건축-수의학과는 5년, 치대-의대는 6년제이다. 단과 및 전문대학 졸업자는 4년제 대학에 편입이 가능하다. 새 학기가 9월에 시작하기 때문에, 대학 입학고사는 7월에 실시된다. 대만에서는 국립대 선호도가 높으며, 대만의 대학 진학률은 약 50%에 달한다. 또한 사회교육법에 의거해 각종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성인들을 위한 다양한 교과과정을 운영 중에 있다.

종교

대만 헌법 제13조에 따르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고, 제 7조에 따르면 중화민국은 남녀·종교·종족·계급·당파와 관련 없이 법적으로 평등을 보장받고 있다. 2020년 내정부 통계에 따르면 대만에서 민간신앙을 믿는 비율이 43.8%, 불교 21.2%, 기독교 5.8%, 이슬람교 1%, 유대교 1%, 힌두교 1%, 기타종교 15.5%이고, 무종교의 비율도 13.7%에 달한다. 대체적으로 불교와 민간신앙을 믿는 비율이 과반수 이상이다.

대만 불교는 대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난인(閩南人)들의 불교 신앙에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관세음보살을 모신 사찰이 많은 편이다. 일본 통치시기에는 일본국가신도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대만 불교의 힘이 이미 상당했기 때문에 오히려 대만 불교와 일본 불교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조동종(曺洞宗), 일연종(日蓮宗), 정토종(淨土宗) 등이 전파, 결합되었다. 이후 외성인들이 대만에 들어오면서 티베트불교 등 중국 대륙 각 성의 불교 종파들이 전해졌다. 지금 대만 불교는 정토종과 선종의 영향이 가장 크며, 포광산(佛光山), 파구산(法鼓山), 중타이산(中台山), 츠지(慈濟)의 4개 교단의 규모가 가장 크다.

대만에서 도교는 중국에서 전래되었고, 이후 민간신앙과 결합하였다. 중국의 도교는 교리를 중요시 하는 북방의 전진교와 남방의 세습제 정일교로 나뉘는데, 대만의 초기 도교는 남방의 푸젠성에서 전래된 정일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대만에 이주하면서의 가장 큰 과제가 물살이 거센 대만해협을 건너는 것이었기 때문에 도교와 생사운명을 담당하는 천공(天公), 해상신 마주(媽祖), 농업을 주관하는 토지공(土地公) 등을 한 사당에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후 도교의 도사나 법사를 초청하여 민간 의례를 주관하게 하였다.

대만의 기독교는 개신교와 천주교로 구분된다. 먼저 개신교가 17세기 중엽 스페인과 네덜란드 선교사들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하지만 대만에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후 19세기 후반 캐나다 장로회 소속 선교사 맥케이(Mackay, 1844~1901)가 의료와 결합한 기독교 선교를 펼치면서 대만 기독교 장로회가 시작되었다. 현재 대만 기독교 장로회는 대만 기독교 조직 중 가장 영향력이 있으며, 신도수는 약 20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외성인들을 통해서 중국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천주교는 19세기 중엽 청 정부의 톈진조약으로 대만이 개방되면서 전파되었다. 1859년 스페인 명도회(明道會)가 로마 교황청의 지시에 따라 필리핀의 신부 두 명을 대만에 파견한 것이 그 시초이다. 1862년 대만 최초의 성당인 성모당을 지었고, 1928년 전금천주당(前金天主堂)으로 재건되었다.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대만 총독부의 압박을 받았으나 전쟁 후 그 지위를 되찾았다. 천주교 신도는 전체 인구의 약 1%도 되지 않지만 대학, 병원, 진료소, 요양원 등의 사회복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정성공의 대만 통치 시기에 정성공의 수하에 있던 이슬람교 신자들에게서 전해왔다고 알려졌으나 일본 통치시기 이슬람교는 가장 큰 박해를 받아 전파되지 못하였다. 이후 외성인들 중 약 2천명의 이슬람교도가 '회교청년회'를 만들었고, 이슬람 사원(청진사, 淸眞寺)를 만들게 되었다. 대만의 청진사는 주로 대만 북부에 위치해 있다. 1950~60년대 대만이 중동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이슬람교도들이 방문하게 되었지만, 1980년대 단교하면서 이슬람이 다시 쇠퇴하였다. 1980년대 이후 들어온 인도네시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이 증가하면서 이슬람의 교세는 다시 일정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 밖에도 대만 원주민들이 오랫동안 믿어온 정령신앙이 있다. 정령신앙은 천지만물, 자연현상, 조상영혼 등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원주민들의 종교 활동은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이는 종교적 제의 뿐 아니라 병 치료, 점괘, 해몽 등도 포함된다. 이후 일본통치시기 원주민들이 일본 총독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이들의 정령신앙은 기독교와 결합하였다.

언론 및 미디어

대만의 언론은 계엄시기 엄격한 통제를 받다가 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급격히 성장하였다. 과거 출판물 통제의 법적 근거가 되었던 출판법은 1999년 폐지되었다. 먼저 통신사를 살펴보면, 2020년 기준 약 2천여 개가 존재하며 대표적인 통신사로는 중앙통신사(CNA), 화교통신사, 군사신문통신사(MNA), 중국경제통신사, 자유신문사 등이 있다. 신문사는 1988년 규제가 완화된 후 31개에서 200여 개로 늘어났다. 신문지면도 32~40면으로 확대되었다. 대표적인 신문사로는 《중국시보》, 《연합보》, 《자유시보》, 《빈과일보》, 《The China Post》, 《Taiwan News》, 《Taipei Times》 등이 있다. 잡지는 1천여 개의 업체에서 약 600여 종이 발간되고 있다. 잡지사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전통적인 잡지사들이 폐간되고 있는 추세라 외국 유명 잡지사와의 합작도 강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잡지로는 《신신문주간 新新聞週刊》, 《천하 天下》, 《일주간 一週刊》 등이 있다.

방송은 시청자들의 다양한 수요 증가로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 특히 유선방송과 위성방송이 성장하고 있다. 대만 정부는 법제를 통해 방송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한편 이 산업의 무분멸한 팽창 및 독점화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라디오는 1993년 33개에서 2020년 170여 개의 방송국으로 증가하였다. 주요 라디오 방송사로는 중국광보공사(BCC), 중앙광보전대(RTI) 등이 있다. 공중파 방송은 1990년대 이후 케이블 TV의 급성장으로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1993년 정부는 유선전시법을 만들어 케이블 TV를 규제하고 독점화를 금지하고 있다. 무선방송사는 대만전시공사(TTV, 1962년 개국), 중국전시공사(CTV, 1969년 개국). 중화전시대(CTS, 1971년 개국), 민간전민전시대(FTV, 1997년 개국), 공공전시대(PTS, 1998년 개국) 등이 있으며 대표적 유선방송사로는 무선위성전시대(TVBS), 팔대전시대(GTV), 동삼전시대(ETTV)가 있다.

문화

대만의 문화는 중국 각 지역에서 이주해 온 한족 외성인들의 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중국 전 지역의 전통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재한 화교, 홍콩인, 중국계 싱가포르인 등 중화민국 본적 화교들의 영향도 받았다.

그리고 여기에 푸젠, 광둥 출신의 한족 본성인, 객가, 대만 원주민들의 문화가 이루어져 있으며 일치시기에 유입된 일본 문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입된 미국 문화의 영향력도 있어서 중화권이지만 중국 본토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대만인들은 자신들이 중화권 전역의 전통 문화를 계승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당시 장제스의 전통 문화 사랑으로 인해 국부천대 당시 문화재, 고서, 미술품 등을 타이베이로 공수한 것, 정체자 고수 원칙, 쿵더청 영입, 중화문명부흥운동 실시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에 21세기 초반에 들어서 타이커(臺客)라는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샌들을 신고 빈랑 열매를 질겅거리는 전형적인 도시 대만인의 이미지가 하나의 문화적 상징이 된 것. 또 대만어로 된 노래나 영화도 예전에 비해서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즉 대만 문화는 중국 전통 문화 보존을 통해 '정통적인 중국'을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 지역 내 한족 본성인들과 대만 원주민들의 문화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노력이 공존하는 모습이며 미국, 일본에서 유입되는 일본 문화, 미국 문화의 영향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장제스 정부는 대만을 통치하면서 일본 통치의 잔재를 벗어나기 위해 중국어(mandarin) 교육을 실시하고 중국 문화 부흥 운동을 촉진하였다. 특히 문학에서 반공주의와 고향문학을 강조하였는데, 여기서 '고향'이란 중국 대륙을 뜻한다. 반면, 중국대륙에 '고향'이라는 의식이 옅은 본성인들을 중심으로 현재 살고 있는 대만섬을 중심으로 문학을 해야 한다는 '향토문학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후 1970년대 후반에는 무엇이 '고향'인가를 놓고 향토문학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회화 분야에서는 1950년대 중국 문화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수묵화가 육성되었다. 한편으로는 일본 통치시기부터 발전해오던 서구 회화 기술이 있었다. 1970년 향토운동이 회화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회화 스타일은 더 전위예술 형태로 변모하였다. 영화 분야에서도 대다수의 본성인이 구사하는 민난어 영화는 탄압되었고, 대규모의 중국어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내용은 반공주의를 담고 있었다. 그러다 홍콩 영화 등이 대만에서 인기를 끌면서 대만 영화산업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1980년대부터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새로운 경향(new wave)의 감독들이 등장하였다. 한 때 잠시 할리우드 영화 수입으로 대만 영화계가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대만 본토화 운동의 영향으로 대만 내부의 원주민, 환경운동 등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다.

가요 분야도 영화 분야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되었다. 장제스 정부는 국어 교육의 일환으로 민난어 노래를 금지하였다. 중국의 대표적인 오페라인 경극이나 국어 노래, 반공주의와 애국적인 노래 등을 선호하였다. 이에 민간에서는 홍콩에서 수입된 팝송이나 미국 음악이 유행하였다. 1970년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의 노래를 부르자'는 운동이 펼쳐지며 캠퍼스 노래가 유행하였다. 이후 일본 노래의 영향, 나이트 클럽 문화, 록 음악의 영향으로 반정부적인 가사를 펑크한 멜로디에 맞춰 부르는 불법 음반도 유행하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장혜매 등 대만 원주민 출신 가수들도 등장하여 대만 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음악

중화민국의 고전 음악 문화는 매우 발전되어 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조링린이나 칭운후와 같은 피아니스트, 우한과 같은 지휘자들이 유명하다.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등려군, 장후이메이, 채의림, 저우제룬 등의 가수가 활약하였다. 2010년대 이후 쯔위와 라이관린 등 대한민국으로 진출하여 활동하는 중화민국 가수도 있다.

식생활

대만 음식은 '대만 요리'라고 부르며 대만섬에 이주해 온 다양한 족군들을 통해 여러 식문화들이 혼합된 특징을 갖는다. 처음 대만 원주민들의 각 부족이 가지고 있는 음식 문화가 네덜란드와 스페인 통치 시기, 민난인(閩南人)과 객가인 문화, 일본 통치 시기를 거쳐 혼합되었다. 특히 장제스 정부와 함께 온 대만의 외성인들은 중국 각 성(省)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장제스 정부를 지나며 대만에는 중국 각 성의 음식들도 함께 맛볼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만에는 과일이 많이 나기 때문에 과일 요리는 곁들이는 것이 특징이며, 종교 특성 때문에 채식을 하는 사람이 많아 채식 요리도 종종 볼 수 있다. 대만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해산물 요리도 발달되어 있으며 일본 조리법의 영향을 받아 해산물 전채 요리를 차갑게 먹는 것이 특징이다. 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의 요리가 시거나 달콤한 맛을 띈다.

기념일과 명절

대만에서 1년 중 가장 중요한 명절은 춘절이다. 춘절은 음력 12월 30일부터 1월 5일까지이며, 평소에 떨어져 지냈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명절이다. 새해 맞이 대청소를 하고 차례를 지내며 빨간 봉투에 세뱃돈을 주고받는다. 섣달 그믐날 밤새기(守歲), 춘련(春聯) 붙이기, 용춤과 사자춤, 폭죽 터뜨리기 등의 독특한 관습도 있다.

음력 1월 15일은 원소절(元宵)이라고 부른다. 원소절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날 동그란 모양처럼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리길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새알 모양의 탕위안(元宵 또는 湯圓)을 먹기 때문이다. 또한 초롱을 이용한 수수께끼 놀이(燈謎)를 한다는 의미에서 등절(燈節), 작은 설(小過年), 상원(上元)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양력 4월 5일은 '성묘하는 날'로 조상의 묘를 찾아가 손질하고 보살피며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청명이다. 청명절에는 룬빙(潤餅)을 먹는다. 단오는 음력 5월 5일인데 액막이를 하는 날로, 대만 사람들은 이날 웅황을 뿌리고 쑥과 창포를 벽에 걸며 액운을 쫓는 향주머니를 만든다. 애국시인 굴원(屈原)을 기리기 위해, 룽저우(龍舟, 용선) 경기를 하고 쫑즈(粽子)를 먹는다.

중원절은 음력 7월 15일로 외롭고 배고픈 귀신들과 조상을 위해 육류와 어류로 음식을 마련해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중원절에 지내는 제사를 푸두(普渡)라고 부른다.

중추절은 음력 8월 15일로 달에 제사를 지내며 풍년을 기원하는 명절이다. 둥근 달이 원만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대만 사람들은 타지에 지내다가도 이날만큼은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고 달에게 소원을 빈다. 중추절 음식으로는 월병(月餅) 과 유자가 있다. 이외에도 대만에는 주요 지역별로 지역의 특색을 담은 다양한 문화축제가 열린다.

관광

대만의 중심지 타이베이시에는 여러 볼거리들이 많다. 만약 전통적인 타이베이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과 중정기념당, 국부기념관역, 국립대만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 좋다. 먼저 국립고궁박물원은 장제스가 대만으로 건너올 때 고궁에 있었던 여러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약 60만 8천점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정기념당은 장제스를 기념한 전시관이며, 국부기념관은 쑨원을 기념한 곳이다. 두 군데 모두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 매시 정각에 의장대 교대식이 열린다. 국립대만박물관은 대만섬의 생태계와 인류사를 다룬 박물관이다.

현대적인 볼거리를 원한다면 타이베이101이라고도 부르는 타이베이금융센터와 광화상장(光華商場), 난강전람관에 가보면 좋다. 타이베이 101은 2021년 현재 세계적인 마천루로 꼽히며 매년 12월 31일에 불꽃놀이가 열린다. 광화상장은 각종 IT제품을 판매하는 시장이며, 난강전람관에서는 각종 전람회가 열린다.

타이베이시의 자연환경을 느끼고 싶다면 타이베이동물원에 있는 마오콩 곤돌라를 타 보거나 샹산에 올라가도 좋다. 밤에는 타이베이 시내의 여러 야시장들이 열리는데 닝샤야시장(寧夏夜市), 스린야시장(士林夜市), 라오허제 야시장(饒河街觀光夜市) 등이 유명하다.

대만 남부에 위치한 타이난시와 가오슝시는 각각 대만섬의 역사와 현재를 볼 수 있는 여러 관광지들이 있다. 먼저 타이난의 안핑구바오(安平古堡)는 17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세운 젤란디아 요새(Fort Zeelandia)를 말한다. 대만 츠칸러우(赤嵌樓) 역시 네덜란드인이 새운 요새로 프로방시아 요새(Fort Provintia)라고도 불렸으며, 정성공이 네덜란드인을 몰아낸 후에는 행정기관으로 사용하였다. 가오슝에는 가오슝85다러우(高雄85大楼)와 전람관이 볼만 하다. 가오슝의 구시가지는 시즈완(西子灣)이라고 하는데, 영국대사관이 있던 곳이다.

대만 동부의 화리엔과 타이동에 가면 원주민 부락들을 접할 수 있으며, 타이루거 국가공원(太魯閣國家公園)이 유명하다. 대만 중부의 구족문화촌에도 대만 원주민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다. 대만섬 밖으로는 진먼섬이 관광지로 유명하다. 청나라 시대 역사 유적뿐 아니라 일본 통치나 문화대혁명을 겪지 않아 푸젠성 민난 지역의 생활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진먼고량주와 포탄 파편으로 만든 칼이 이 지역 특산품이다.

스포츠

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는 야구, 축구, 농구, 배구, 태권도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야구를 살펴보면 야구는 대만 최고의 인기 스포츠이다. 일본 통치 시기만 하더라도 대만 사람들이 야구를 일본인의 스포츠라고 하며 배척하였지만, 문화동화 정책을 통해 야구가 대만 사람들의 일상에도 스며들었다. 그러다 1931년 대만의 자이농림학교(嘉義農林學校) 야구단이 일본고교야구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대만에 야구열품이 불기 시작하였다. 당시 자이농림학교 야구단에는 대만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2014년 영화 《KANO》로도 제작되었다.

장제스의 국민정부 시기에는 야구가 일본의 잔재라고 해서 억압을 받고 축구와 농구가 육성되었다. 그런데 1968년 타이둥의 한 초등학교 야구팀이 일본 대표에게 대승을 거두며 장제스 정권은 야구를 중국과 차별화할 스포츠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또한 야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미국과 우호관계를 더 맺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대만의 청소년 야구는 아시아 최강이었으며, 리틀야구 월드시리즈에서 17번이나 우승을 차지하였다. 야구가 인기종목이라 1989년 프로리그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대만 출신 야구 유망주들은 일본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다.

축구는 1960년대까지 대만의 인기 운동 종목이었다. 그러나 1970년 들어 중국과의 정치적 문제로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 축출되었으며 국제축구대회에 참가가 제한되었다. 1989년에 다시 AFC로 복귀하였지만 이미 대만 축구 경기 수가 줄어들어서 실력이 퇴보하였다. 1989년 타이베이 중산축구전용구장을 만들며 축구에 대한 부흥을 이루려 하였지만, 실패 해 2008년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2017년 대만 축구 프리미어 리그(Taiwan Football Premier League)가 출범하면서 다시 축구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있다.

농구도 장제스 정부에서 적극 육성한 스포츠 항목 중 하나이다. 올림픽경기대회 본선에도 출전하였으며, 1959년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에서 13 출전국 중 4위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잠시 쇠퇴하였다가 2010년대부터 농구의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세미프로리그인 SBL(Super Basketball League)에 5개 구단이 참여하고 있다. 2020년 새로운 프로리그인 PLG가 출범하였다. 대만 여자농구는 아시아의 강호이며 2004년 WSBL이 4개 팀으로 운영되고 있다.

배구도 대만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지닌 스포츠다. 배구 리그로는 2004년에 출범한 TVL(Top Volleyball Leauge)가 있다. 남자부와 여자부 각각 4개 구단이 참여하며 지역연고 없이 몇몇 도시를 순회하며 경기가 치뤄진다.

그 밖에 태권도가 인기 있는 운동 종목이며, 2004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된 제28회 올림픽경기대회 금메달리스트 천스쉰 선수의 영향이 컸다. 아시아경기대회 태권도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주변지도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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