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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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필리핀어: Maynila 마이닐라, 영어: Manila, 스페인어: Manila)는 필리핀 루손섬 남서부에 있는 필리핀의 수도이다. 면적은 약 38km², 인구는 약 184만 명이다. 메트로마닐라(영어: Metro Manila)의 총면적은 638㎢, 인구는 1,348만 명으로 서울보다 조금 크다. 공식 명칭은 마닐라시(City of Manila)이다.[1]
목차
개요
마닐라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항만으로 일컬어지는 마닐라만에 임한 항구도시로, 시가지는 파시그강을 끼고 그 남북으로 펼쳐진다. 북쪽에 비옥한 중부 루손 평야를, 남쪽에 남부 루손의 화산성 저지를 끼고 있다. 1571년 에스파냐 총독 레가스피가 점령한 이후 에스파냐의 식민지 지배의 근거지가 되었고, 그 후 19세기 중엽까지 마닐라는 ‘동양의 진주’로서 에스파냐의 대아시아무역 거점이 되고 극동에서의 가톨릭 권력의 중추가 되기도 하였다. 당초에는 파시그강 하구 남안에 건설된 성곽도시 인트라무로스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 필리핀인, 중국인이 취락을 형성했던 비교적 작은 도시로 성벽 안에 총독부, 가톨릭 각파 교단본부, 교회, 상관 등이 있고, 에스파냐인은 대개 그 안에 거주하였다. 1834년 마닐라항이 개항된 뒤 점차 국제무역이 성해지고 시가지도 확장되어 19세기 말에는 인구 2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1898년 미국, 에스파냐 전쟁의 결과 미국령이 된 뒤,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거점으로서 항만시설의 근대화, 도시계획의 실시, 전기, 가스, 수도 등의 시설이 이루어져 식민지 특유의 단일 거대도시로서 발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에 점령되어 시가지의 80%가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복구되었다. 필리핀이 독립한 뒤 1948년 북쪽에 인접한 케손시티로 수도가 옮겨졌으나, 1975년 11월 마닐라, 케손 등 수도권 4개 시와 인접지역을 통합한 메트로마닐라(Metropolitan Manila)가 발족하여 다시 수도가 되었다. 마닐라는 필리핀제도 각지의 수출용 농작물, 즉 코코넛, 마닐라삼, 사탕수수, 잎담배 등을 모아 정제, 가공한 뒤 수출하는 가공업이 발달해 있다. 또한, 코코야자유 제조, 제당, 정미 등을 비롯하여 면직물, 양조, 고무, 레더, 담배, 페인트 등 제조공업이 성하여 필리핀 공업생산의 53%를 차지한다. 근래 공업화 추진정책에 따라 동부 교외에 새로운 공업지대가 건설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많은 학생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찾는 대표적인 어학연수지이다. 북쪽에는 비옥한 중부 루손 평야를, 남쪽에는 남부 루손의 화산성 저지를 끼고 있다. 동양 최고의 대학인 산토토마스 대학(1611년 설립), 필리핀 최고의 대학인 필리핀 국립대학과 아테네오 대학, 미리암 대학 등을 비롯한 교육 기관이 케손 시티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옛 총독 관저이자 현재의 대통령 관저인 말라카냥궁(1863년 건립)은 산미겔 지구에 있다. 파시그강 좌안의 인트라무로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가 심하여, 허물어지다 남은 성벽이 겨우 옛모습을 알게 할 정도이다. 그 남쪽으로 이어지는 에르미타 지구, 말라테 지구는 관청가, 호텔 거리로 리잘 공원과 해안을 낀 아름다운 로하스 대로가 남쪽으로 달린다. 그 동쪽의 파코 지구, 산타아나 지구는 중류층의 주택가이다. 마닐라항은 파시그강 하구를 사이에 두고 북향과 남향으로 나뉘며, 내항선과 외항선이 접안한다.[2]
지리 및 기후
마닐라는 루손섬의 서쪽 해안, 마닐라만의 동쪽 해안, 아시아 본토로부터 1,3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닐라가 위치한 보호 항구는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항구로 평가받고 있다. 파시그강은 도시의 한 가운데를 흐르며, 북쪽과 남쪽으로 나눈다. 도시의 중심부에 건설된 지역의 전체적인 등급은 자연 지형의 자연적인 평탄성과 비교적 일치하며 일반적으로 약간의 차이만 보인다.
마닐라의 거의 대부분은 파시그강의 물과 마닐라만에서 매립된 땅에 의해 만들어진 선사시대의 충적층 위에 자리잡고 있다.마닐라의 땅은 인간의 개입에 의해 크게 변화되어 왔으며, 20세기 초중반 이래로 해안가를 따라 상당한 토지 개간이 이루어졌다. 도시의 지형의 자연적인 변화 중 일부는 평준화되었다.
쾨펜 기후 분류 체계에 따르면 마닐라는 열대 몬순 기후(쾨펜 암)를 가지고 있으며, 열대 사바나 기후(쾨펜 아우)와 밀접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필리핀의 나머지 지역과 함께, 마닐라는 완전히 열대지방에 놓여있다. 적도와 가깝다는 것은 기온이 일년내내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낮 동안에는 기온이 19°C 이하 또는 39°C 이상으로 거의 내려가지 않는다. 극한 기온은 1914년 1월 11일 14.5°C에서 1915년 5월 7일 38.6°C까지 온도의 극치를 기록했다.[3]
역사
스페인 식민지 시대
16세기 스페인인들이 오기 이전부터 파시그강 유역에 주거지가 있었으며, 마닐라에 접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현대 마닐라 지역은 말레이족의 마을이 존재하고 있었고, 중국인 등이 활발하게 내항하여 교역하고 있었다. 동양에 스페인의 거점을 구축하고자 초대 총독으로 필리핀을 방문한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마닐라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하고, 이곳을 점령하여 기지화하려고 했다. 레가스피는 1570년 선발대를 파견하여 마닐라를 점령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1571년 직접 마닐라를 점령했다. 레가스피가 점령한 날인 5월 19일은 성 포텐시아나 성인의 축일이었기 때문에, 포텐시아나를 필리핀의 수호 성인으로 삼았다.
레가스피가 세운 최초의 마닐라 시는 산 안토니오, 산 프란 카를로스, 산 가브리엘, 산 루이스 네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며, 관청과 성당과 중앙광장,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이나 군사 시설, 숙소 등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현재의 인트라무로스 지역이다.
중국인들은 스페인인의 점령으로 교역에 지장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제거를 노렸다. 초기 마닐라는 중국 남부 지역의 해적 두목으로 추정되는 림 아혼의 습격 또는 그 밖의 화재 등에 의해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다.
16세기 말 이 지역을 방문한 예수회의 안토니오 세데뇨는 건축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지휘에 따라 마닐라의 재건과 요새화를 진행시켜 인트라무로스라는 마닐라의 성벽 지역이 정비되었다. 인트라무로스 내부에는 일반 건축물과 함께 마닐라 대성당, 산토도밍고 교회 등 많은 빼어난 교회가 건설되었지만,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되었다. 건설 당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건축물인 산 아우구스틴 교회는 ‘필리핀 바로크 양식 교회군’으로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중국인들은 여전히 아시아 경제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닐라에서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인트라무로스 밖에 중국인 거리를 조성하고 살면서 스페인인들과 거래를 했다. 스페인인과 중국인은 때로는 적대하면서도 공존하는 관계를 지속했다. 마닐라는 이렇게 필리핀, 스페인, 중국이 섞인 다민족 도시라는 독특한 특성을 형성하게 된다.
스페인 시대 ~ 미국 시대
1762년에 일시적으로 마닐라가 영국군에 의해 점령 되었으나, 1764년에 협정이 맺어져 다시 스페인 관할로 편입되게 된다. 이 무렵 인트라무로스는 완성된 견고한 요새 도시로 동양의 거점 도시가 되어 있었다.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마닐라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게 되자 마닐라는 한층 발전하여, 인트라무로스 외부의 지역도 발달하게 되었다.
스페인이 강국의 지위를 상실한 이후에도 필리핀과 마닐라는 스페인의 지배 하에 계속 있었지만, 19세기가 되면서 필리핀 지식인들 사이에서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호세 리잘(José Rizal)의 계몽 운동과 카티푸난의 군사 행동으로 필리핀 독립이 진전되는 듯 하였지만,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을 통해 마닐라의 스페인 함대가 미국 함대에게 통렬히 격파되면서 필리핀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허사가 되었다. 전후 파리 조약에 따라 필리핀은 미국 영토로 편입 되었다. 일부 투사들은 더욱 더 격렬한 저항을 했지만, 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필리핀이 완전히 미국령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미국 점령 하의 마닐라에서는 동양 침략의 거점으로 정비가 이루어졌으며, 인트라무로스의 구도를 유지하면서 도시를 현대화하는 방법으로 인프라 정비가 진행되었다. 유명한 마닐라 호텔도 미국 통치 시대에 건설되었다. 1935년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가 필리핀 군사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마닐라에 주재하고 나중에 "필리핀 군 원수"라는 칭호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한 동안, 미군들은 마닐라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모든 군사 시설은 1941년 12월 24일까지 철거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마닐라를 더 이상의 죽음과 파괴를 막기 위해 개방 도시로 선언했지만, 일본 전투기들은 도시를 계속 폭격했다. 일본군은 1942년 1월 2일 마닐라를 점령했다.
1945년 2월 3일부터 3월 3일까지 마닐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극장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장소 중 하나였다. 일본 해군 소장 이와부치 산지의 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일본군은 약 10만 명의 필리핀 민간인을 살해하고 2월에 여성들을 대량 강간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마닐라는 강력한 폭격에 시달렸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두 번째로 가장 파괴된 도시가 되었다. 마닐라는 미군과 필리핀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독립 후
전쟁이 끝난 후 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마닐라 시청, 입법동(현 국립미술관), 마닐라 우체국 등의 건물이 재건축되고 도로 등 기반시설이 정비됐다. 1948년, 엘피디오 퀴리노 대통령은 필리핀 정부의 소재지를 마닐라 북동쪽 교외와 들판에 있는 새로운 수도인 케손시로 옮겼다. 케손시는 1939년 마누엘 L 대통령의 행정부 때 설립되었다. 이 조치로 인해 정부 센터가 루네타에 위치하도록 한 번햄 계획의 모든 이행이 종료되었다.
1952년 아르세니오 라크손이 마닐라의 첫 시장으로 선출되면서, 마닐라는 전쟁 이전의 별명인 "동양의 진주"를 되찾게 되었다. 1950년대 라크손의 임기가 끝난 후, 마닐라는 1960년대 대부분 안토니오 비예가스가 이끌었다. 라몬 바가싱은 1972년부터 1986년까지 피플 파워 혁명(People Power Revolution)까지 시장이었다.
1975년 11월 7일 대통령령 제824호 제정과 함께 메트로마닐라가 통합된 단위로 탄생하였다. 이 지역은 4개의 도시와 13개의 인접한 마을을 포함하여 별도의 지역 정부 단위로 이루어졌다. 1976년 6월 24일, 마르코스 대통령은 마닐라가 스페인 시대 이래로 정부의 소재지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이유로 필리핀의 수도로 복원했다.[4]
관광
마닐라는 역사가 짧은 도시는 아니고 비록 기록이 소략하기는 하지만 이미 스페인인들이 오기 전 중세시절에도 톤도 왕국의 수도가 위치해 있었기에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후 16세기에 스페인의 지배 하에 놓이면서 유럽, 특히 이베리아 반도풍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시가지가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이 때 역사성이 있는 유적들 또한 상당수 파괴되었으며, 파시그강 좌안의 인트라무로스 내부만으로 따지자면 성벽과 요새, 산 어거스틴 성당만이 살아남았다.
마닐라가 결코 역사가 짧은 도시가 아님에도 필리핀 고유의 문화를 느끼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평으로, 오히려 마닐라보다는 고급 휴양 리조트들을 내세워 휴양과 관광을 겸할 수 있는 필리핀 최초의 도시인 세부가 더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다만 세부는 스페인이 세부를 점령한 1565년부터 1571년까지 약 7년간 스페인의 식민본부로서 기능하였고, 마닐라는 1571년부터 스페인이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미국에 통치권을 넘기는 1898년까지 약 328년간 스페인의 식민본부인 필리핀 도독령이 위치했던 곳이기 때문에 도시의 역사적 중요성 및 유적지의 질과 양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트라무로스 성벽 내에 남은 산 어거스틴 성당은 필리핀의 바로크 양식 교회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말라카냥 궁전 또한 인기 관광지 중 하나이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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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동남아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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