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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저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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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저우만
자오저우만 위치

자오저우만(중국어 간체자: 胶州湾, 정체자: 膠州灣, jiāo zhōu wān, 한국어: 교주만, 영어: Jiaozhou Bay)은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칭다오시에 위치한 으로 길이는 32km, 넓이는 27km, 면적은 362km²이다. 산둥반도 남쪽에 위치하며 황해와 접한다.[1]

개요

자오저우만은 산둥반도 남쪽 연안, 황해로 이어진 만이다. 산둥성 칭다오시 경내에 걸쳐있는 만으로 나팔형 모양이며 예로부터 교주(胶州)에 속하여 이름이 유래되었다. 수역 면적은 353.92㎢, 총해안선 220.02㎞, 동서 폭 25㎞, 남북 길이 32㎞이며 만(湾) 입구는 매우 좁아 약 3㎞이다. 만의 평균 수심은 7m, 최대 수심 64m이며 수심 0~5m의 지역이 52.7%, 20m 이상 지역면적이 5.4%이다. 자오저우만 북부는 지모분지(即墨盆地, 즉묵분지), 서북부는 자오라이평원(胶莱平原, 교래평원)이며 자오저우만으로 주입되는 하천으로는 대고하(大沽河), 이촌하(李村河), 해백하(海泊河), 백사하(白沙河), 양하(洋河), 누산하(楼山河), 흑수하(墨水河), 창락로하(昌乐路河), 항주로하(杭州路河) 등이 있다. 만구(灣口)에는 동쪽에 라오산(嶗山), 서쪽에 링산(靈山) 등 2곶(串)이 돌출하여 만구의 너비가 30∼44 km로 좁고, 만 안은 두루주머니처럼 넓어 천연의 양항(良港)을 이룬다. 따라서 독일, 러시아 등이 일찍이 이곳을 노렸으며, 1898년 독일과 청(淸)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독일에 99년 동안의 조차권이 부여되었고 자오저우만 조차지를 이곳에 설치했다. 그 후 독일은 이곳에 동양 함대의 기지를 설치하고 배후지에는 자오지 철도를 부설하였으며 어촌인 칭다오를 근대적인 도시로 발전시켰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에게 점령되었으나 1922년 중국에 반환되었다. 2011년 6월 30일 중국 공산당 창당 90주년 기념일인 7월 1일을 하루 앞두고 38㎞에 달하는 세계 최장 해상대교인 교주만대교가 개통되었다. 이 다리는 칭다오시 도심과 황다오구(黃島区)를 잇는 해상대교로 왕복 6차선 도로로 6년여에 걸쳐 95억 원(元)을 들여 건설되었다.[2][3]

자오저우완대교

자오저우완대교(Jiaozhou Bay Bridge , 膠州灣大橋, 교주만대교)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황다오를 잇는 교량으로 2005년에 착공하여 2011년 6월 30일 개통하였다. 총길이 41.58㎞로 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 교량이다. 칭다오하이완대교(靑島海灣大橋) 또는 자오저우완콰하이대교(膠州灣跨海大橋)라고도 한다. 중국 산둥성 칭다오시 중심부를 기점으로 자오저우만 해역을 지나 황다오(黃島)까지 연결되는 해상(海上) 교량으로 2007년 5월 본격 공사에 들어가 2011년 6월 30일 개통하였다. 총길이 41.58㎞로 종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 교량이었던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폰차트레인호수를 가로지르는 코즈웨이대교(총길이 38.4㎞)보다 약 3.2㎞ 더 길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교량으로, 홍콩마카오를 잇는 강주아오대교보다도 길며, 무려 인천대교의 두배 길이이다. 이 노선의 개통으로 칭다오시 동 서부 거리가 30km 정도 단축되었다. 너비 35m에 왕복 6차로이며, 중국 최초의 해상 입체교차로로 설계되었다. 대교와 나란히 바다 밑에 길이 9.47㎞의 해저터널도 완공되었다. 총 공사비는 95억 3000만 위안(약 1조 6500억 원)이 소요되었다. 이 다리가 개통되어 하루 약 3만 5000대의 차량이 이용할 것으로 추산되며, 칭다오와 황다오 구간의 운행 거리가 약 30㎞ 단축되어 운행 시간도 기존의 40여 분에서 20여 분으로 단축된다. 또한 칭다오와 중국의 서부 간쑤성 (甘肅省) 란저우(蘭州)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의 기점이 되며,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에서 상하이(上海)까지의 육로 거리가 120㎞ 정도 단축된다.[4]

자오저우만 조차지

키아우초우(중국어 간체자: 胶州湾, 정체자: 膠州灣, 병음: Jiāozhōu Wān, 한국어: 교주만 조차지, Jiaozhou Bay)는 독일 제국이 중국 북부의 산둥성 산둥반도 남해안의 자오저우만에 조차하고 있던 조차지이다. 자오저우(현재의 자오저우 시)의 남쪽으로 하트 모양으로 들어간 자오저우 만의 수면 전역과 만의 입구의 양쪽의 반도가 있는 곳이다. 면적은 552km²이고, 위치는 북위 36도 7부 24. 44초, 동경 120도 14부 44. 3초로 1898년부터 1914년까지 독일 제국의 조차지가 있었던 곳이다. 키아우초우(Kiautschou)란 중국 산둥반도 이남의 만 이름인 자오저우(膠州)를 옮긴 것이다. 서구권에서는 대체로 이 시기의 해당 지역을 '키아우초우'라는 독일식 발음으로 부른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자오저우만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교주만(膠州灣)이라는 표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인다. 독일은 자오저우만 조차지의 행정 중심지로 만 입구 동쪽 반도에 칭다오를 건설했다.

1860년, 프로이센 왕국의 원정 함대가 아시아를 방문하여 자오저우만 주변 지역을 조사하였다. 1861년, 프로이센과 청의 무역 협정이 조인되었다.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1868년부터 1871년까지 중국을 탐험한 뒤, 자오저우만을 이상적인 함대 기지로서 추천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1896년, 당시 독일 동양함대의 사령관이었던 알프 레이트 폰 티르핏트 제독은 이 지역을 개인적으로 조사했다. 독일은 삼국 간섭으로 청나라 중재를 한 러시아 제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중국에서 발판을 구축하는 것이 늦었으므로 다른 열강의 손이 닿지 않은 지역을 물색하여 최종적으로 산둥반도를 주목했다. 1897년 11월 1일, 산둥성 서부의 거야현(현재의 허쩌 시)에서 독일인 선교사 두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거야사건(Juye incident)은 독일 빌헬름 2세 황제에게 독일인 선교사를 보호한다는 침략의 구실을 주었다. 청나라 정부 중앙가 이 사건의 상세하게 파악하기 전에 상하이에 있던 독일 동양함대 사령관 폰 디에데리히(von Diederichs)는 11월 7일에 자오저우만 점령 작전을 명령받았다. 1898년 3월 6일, 독일 제국은 독청 조약을 맺어, 자오저우 만을 99년간 청나라 정부로부터 조차하게 되었다. 이 조차지에는 주변 최대 자오저우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만의 수면 전부와 만을 둘러싼 동서의 반도, 만 내외의 섬들은 조차지가 되었다. 그 주위의 50km 지역은 중립 지대가 되어, 독일군의 자유로운 통행이 전면적으로 허용되어 독일 정부의 승인없이 중국 측이 명령이나 처분을 내릴 수 없게 하였다.

보호령은 독일 함대의 모항이며, 함선의 연료 보급과 이를 위한 석탄 채굴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 해군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장소라는 중요성이 있었으므로, 자오저우 만 조차지는 독일 외무성 식민지국으로서 해군성(Reichsmarineamt)의 관할이 되었다. 조차지의 장은 총독(Gouverneur, 5명의 역대 총독은 모두 해군 장교)으로 해군 대신 티르핏트로부터 직접 임명되었다. 총독은 조차지 내의 군사권과 행정권 모두를 행사할 수 있었다. 군사는 부총독(해군 군령 부장)이 운영하며, 행정은 민정 부장(Zivilkommissar)이 운영했다. 그 외 자오저우 만 조차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관료는 항만·도시 건설부장, 1900년 이후는 고등재판소의 판사, 및 중국문제 부장이었다. 1902년 이후 중국위원회(Chinese committee)도 총독의 자문기관이 되었다. 작은 항구도시였던 자오저우는 상업, 법제도가 정비된 상업항, 칭다오로 발전하였다. 유교국가가 아니던 중국에 독일의 성문화가 침투하여 중국 여성의 대규모 매춘에 부모없는 서양 혼혈아가 양산되었다. 칭다오는 부두나 도크의 사용료, 농산물이나 석탄의 수출로 많은 세입을 얻었다. 자오저우 만 조차지는 독일의 국익과 함대를 정박하는 장소에 지정되었기 때문에, 해군성은 경제나 문화의 발전에 힘을 썼다.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직후, 일본은 독일에 대해, 교주만 조차지를 중국에 반환하도록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최종 기한인 1914년 8월 23일, 일본은 대 독일 선전포고했다. 독일 동양함대는 만의 폐쇄를 우려하여 독일 본국으로 회항하려고 했지만(개전 시에 주력은 이미 칭다오로부터 탈출했다.) 남미의 포클랜드 해전에서 패배했다. 9월 산둥반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교주만을 목표로 육로 독일군과 전투를 계속해 만의 내외에서도 함선끼리의 싸움이 있었다. 10월 31일부터의 칭다오 전투의 결과, 1914년 11월 7일에 교주만은 일본군이 점령했다. 독일 전쟁 개전 직전에 칭다오를 탈출한 경순양함 엠덴의 인도양에서의 활약은 유명하다. 산둥반도를 점령하고 나서, 일본은 위안스카이 북양정부에 대해, 산둥에 대한 독일의 권익을 일본이 계승하고, 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며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21가지 특혜조건을 요구(1915년 1월 18일)하였고, 중국은 이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칭다오는 일본군이 통치했다. 칭다오 수비 군사령부가 1917년 10월까지 군정을 하고, 그 다음은 민정장관이 행정을 실시했다.[5]

지도

동영상

각주

  1. 자오저우만〉, 《위키백과》
  2. 자오저우만(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胶州湾〉, 《百度百科》
  4. 자오저우완대교(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5. 자오저우만 조차지〉,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동아시아 같이 보기

동아시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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