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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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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노강
시나노강 지도

시나노강(일본어: 信濃川, 영어: Shinano River)은 일본에서 가장 긴 이며 유역별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나가노현 안에서는 지쿠마강(千曲川)이라고 불린다. 히다, 기소, 간토 각 산지에 집수역(集水域)을 가지며, 니가타평야를 함양(涵養)하고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 369km, 유역 면적 1만 2,260km²의 일본 제1의 장류이다.[1]

개요

시나노강은 니가타현(新潟縣)과 나가노현(長野縣)을 연결하는 대동맥으로 일본에서 제일 긴 강이다. 시나노의 의미는 알 수 없는데 시나(참피나무), 시노(조릿대)와 관계가 있다는 설이 있다. 한편 아이누 어로 '큰 강이 있는 들'이라는 뜻의 시아미노(shi-ami-no)에서 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는 수메르 어로 '달의 신'을 뜻하는 신(sin)에서 온 것으로 보아 시나노를 '달의 신(月神)의 나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나가노현, 야마나시현, 사이타마현의 경계에 있는 지치부산지의 고부시가산(甲武信ケ岳)에서 발원하여, 상류에서는 지쿠마강(千曲川)으로 불리면서 나가노현의 사쿠(佐久), 우에다(上田) 분지를 거쳐 나가노분지에서 사이가와강(犀川)과 합류한다. 상류는 지쿠마강(치쿠마강), 사이강으로 나뉘고 나가노현의 각 분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사력(砂礫)의 공급은 적다. 단구가 잘 발달하고 본지류에는 발전소가 많다. 유역 각지에서 관개용수로 이용되고, 또한 오지야(小十谷) 발전소를 비롯하여 전체 수계(水系)에 건설된 발전소의 발전 총량은 일본 제1이다. 지쿠마강과 사이강의 합류점인 가와나카섬(川中島)는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후 북동쪽으로 니가타현에 들어가면 시나노강이라고 이름을 바꾸며 니가타시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1922년에 오코즈 분수로(일본어: 大河津分水路)가 세워져 니가타의 홍수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니가타평야가 곡창 지대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철도 개통 전에는 수운에 이용되어 니가타, 나가오카(長岡) 등의 도시를 발전시켰다.[2]

역사

시나노강은 혼슈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지역의 다른 강들과 함께 이 지역의 지형과 생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원래는 시나노강은 일본 알프스에서 흘러내린 후 일본해로 흘러 들어가기 전에 하구  와 같은 후쿠시마 석호로 곧장 흘러갔다. 수세기 넘게 퇴적물이 하류로 유입되면서 석호 안에 습지가 많은 평야가 형성되어 현재의 에치고 평야가 되었다. 1993년에 제시된 추정치는 강 시스템의 느슨한 침전물의 양을 킬로미터당 400–500 m³로 나타낸다. 우회 수로 건설로 인해 니가타 항구와 바다 사이의 항해 가능한 통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유지 관리가 제한되었다. 그러나 퇴적물의 방향 전환으로 인해 니가타 현 북부 해안은 해마다 평균 9m³만큼 후퇴하고 있다. 영국 아카데미가 후원하는 시나노강 프로젝트는 시나노-치쿠마 강 시스템의 개발을 조사한다. 중조몬 시대(기원전 3500~2500년)의 화염 양식 도자기(Kaendoki)가 사이강과 시나노강이 합류한 인근 니가타 나가오카의 산카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초기 사례들을 일부 발굴했다.

세계의 강과 마찬가지로 시나노강도 귀중한 교통수단을 제공했다. 이 시스템은 또한 물자를 하류로 이동시킬 수 있는 운송수단을 누타루(Nutaru), 니가타(Niigata) 및 지방 항구인 캄바라(Kambara)의 세 항구 중 하나로 이동되는 운송 방법을 제공했다. 이러한 항구의 중요성이나 역할을 상세히 기술하는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지역에서 많은 양의 중세 중국 예술품이 발견되었고, 무로마치 시대극인 미우리가 캄바라에서 설정되어 있어 그 지역적 의미를 알 수 있다. 18세기까지 시나노 제도가 보트 여행에 널리 이용되지 않았다는 일부 역사학자(도카마치 시시 등)의 주장을 불러일으킨 증거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브라이언 골드스미스는 시나노가 실제로 시나노의 헤드워터에서 발견된 동전 호그와 수입 도자기를 포함한 고고학적 발견에 근거한 수인성 무역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혼슈의 주요 내륙 도로 중 하나가 내륙으로 시나노 계곡을 따라 일본 알프스산맥까지 이어졌다. 도로의 위치는 강물이 지역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나타낸다. 지쿠마 계곡은 혼슈 섬을 가로지르는 연결 고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가와나카지마 평야라고 불리는 지쿠마강과 사이강의 합류는 센고쿠시대의 일부로서 16세기 일련의 전투가 벌어진 장소였다. 전투 중 가장 의미 있는 전투는 1561년 10월 18일 다케다 일족과 우에스기 일족 사이에 벌어져 양측에 심각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전투는 문학, 목판 인쇄, 영화에 언급된 일본 군사 역사에 잘 알려져 있다.

시나노강 시스템은 일본 최초의 수력발전소가 이 시스템에 위치하는 등 수력발전 역사가 오래됐다. 1922년 7월 니가타현 시나노강에 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학대를 받고 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 당시 알려졌다. 시나노강 사건에는 1200명의 근로자들이 참여했는데, 이 중 600여 명은 한국인이었으며, 이들은 일본 선봉장들로부터 상습적인 학대를 당했다. 영양실조, 하루 16시간까지 강제 노역,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한 구타 등이 학대였다. 당시 뉴스 기사에서는 공사 도중 100명까지 한국인이 사망했으며, 현지 농민들이 강에 떠내려가는 시신을 목격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사건은 일제의 한국 병합 이후 발생했으며, 재일 한국인 근로자 노동조합의 발전에 일부 책임이 있었다. 1911년 1척, 1938년 2척의 일본 해군 순양함 2척이 지쿠마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40년대 항공모함은 옛 시나노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

유역

지쿠마강은 사이타마현, 야마나시현, 나가노현 경계에 있는 일본 알프스의 고부시산 북동쪽 기슭에 있으며, 부분적으로 치치부 다마 카이 국립공원에 있다. 요치강과 합류하여 대략 북쪽으로 흘러 유강에 합류한 후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나가노시의 산간 유역으로 들어가 마츠모토의 사이강과 호시나강과 합류합니다. 북위 138.25°E ). 그런 다음 지쿠마강은 방향을 바꾸어 나가노에서 북동쪽으로 흘러 니가타현으로 흘러가며 이름이 시나노강으로 변경된다. 시나노강은 오지야와 우오누마 사이의 우오노강과 합류할 때까지 북동쪽으로 계속된다.

우오노강과 합류한 후, 시나노는 고시지 다리와 신에쓰 열차 노선이 교차한 후 산조에 있는 니가타현의 에치고 평야로 흐른다. 에치고 평야에 들어간 후, 그 강은 매우 작은 경사로 때문에 삼각주와 늪지대가 된다.

세키야 배수로는 오코즈 수도 건설 이후 계속된 니가타의 홍수에 대응하여 1960년대에 완성되었다. 이는 홍수 물을 도시에서 멀리 일본해로 직접 방향을 전환하여 홍수를 완화하도록 설계되었다. 강은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니가타시를 약 6km(3.7마일) 동안 흐르다가 최종적으로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시나노강은 1886년에 건설 당시 782m로 일본에서 가장 긴 다리였던 반다이 다리를 포함하여 니가타를 통과하면서 여러 개의 다리가 있다. 1929년 건설돼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현재의 반다이 다리는 길이가 306.9m에 불과하다. 이 역시 오쿠즈 방향 전환 해협에서 강폭이 720m나 되는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시나노 수역의 계절적인 높은 강우량 때문에 니가타 평야의 비옥한 농경지는 3~4년마다 홍수가 나서 농작물 특히 쌀과 마을이 파괴되었다. 지역 주민들이 전환 채널을 구축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교호 시대인 18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다. 1896년 심각한 홍수와 침수로 인해 20세기 초까지 정부 지원이 확보되지 않았다.

10km 길이의 오코즈 수로(大河津分水路, Ōkōzu Bunsuiro) 건설 공사는 1909년에 시작되어 1922년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1927년 수문이 무너지면서 수로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로 바닥의 침식으로 인해 1931년까지 완전히 수리되지 않았다.

우회로 건설로 인해 니가타 평야의 습지가 건조해져 생산량이 늘어났다. 마찬가지로, 건조한 땅 덕분에 지역의 더 많은 인구를 지원할 수 있는 고속도로 및 신칸센 급행 열차 네트워크 와 같은 인프라 건설이 가능해졌다.

원래 강둑 벽의 안전 문제로 인해 1992년에서 2000년 사이에 새로운 둑 벽이 건설되었다. 풍경과 야생동물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제한하기 위해 건설이 계획되었다. 이를 위해 외부에는 자연석을 사용하고 어도를 디자인에 포함시켰다.

오코즈 수로 건설 이후 니가타 지역의 홍수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원래 에도 시대(1700년대~1800년대)에 계획되었던 또 다른 수로가 니가타시의 서부 외곽에 건설되어, 홍수의 위험을 더욱 완화하고 시나노 하구에 염수가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세키야 방면 채널은 원래 니가타현에서 자금을 조달할 예정이었으나, 1964년 니가타 지진으로 인해 더 이상 자금을 조달할 수 없게 되어 국책사업으로 채택되었다.

세키야 전환 채널의 건설은 1968년에 시작되었고 1973년에 길이 1.8km와 폭 240–280 m(790–920 ft)의 수로로 환료되었다. 이 수로는 침전물이 니가타항에서 바다로 곧장 향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체 경로를 제공한다. 이 해협은 에치고선과 국도 402호선이 교차한다.[4]

시나노강 학살 사건

시나노강 학살 사건(일본어: 信濃川虐殺事件)은 1922년 7월 시나노강 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오오쿠라 재벌에 고용된 1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살해된 사건이다. 1922년 7월, 신에츠전력 주식회사(이후 도쿄전등에 흡수)는 시나노강의 지류인 나카쓰강에서 나카쓰강 제1발전소 등 수력발전소 건설을 개시했다. 오오쿠라 재벌이 그 시공사를 맡았다. 모집된 건설인부는 약 1,000명이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인 600명 가량이 조선인이었다. 노동자들은 일본인, 조선인을 막론하고 좁아터진 방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소위 문어방 노동을 하면서 인해전술로 공사를 진행했다. 또한 십장들은 "근무태도가 나태하다" 등의 이유로 인부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학대를 못 견디고 도망을 시도한 노동자들은 시나노강 발전소 공사소에서 오오쿠라 재벌의 십장들에게 살해되어 시나노강에 던져졌다. 노동자들의 시체는 상류에서 하류로 떠내려가 동년 7월 29일 요미우리 신문에 "신원 불명"의 시신 몇 구가 상류에서 흘러왔다는 기사를 처음 보도했다. 살해된 노동자들 중 조선인이 다수였기 때문에 재일본조선노동자상황조사위원회가 결성, 재일 조선인 노동조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동년 11월 동 위원회를 추진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도쿄조선노동동맹이 결성되었다.[5]

지도

동영상

각주

  1. 시나노강〉, 《위키백과》
  2. 시나노강(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信濃川〉, 《フリー百科事典》
  4. 시나노 강〉, 《요다위키》
  5. 시나노강 학살 사건〉,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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