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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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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木手)
형틀목수
프레이머
한옥목수
내장목수
선박목수

목수(木手)는 주로 목조 건축물의 건축 · 수리를 하는 장인이다. 현재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기 위한 형틀을 제작하기도 한다. 주로 망치, 못, 톱, 대패 등을 이용하여 나무를 가공하는 일을 한다.

개요[편집]

목수는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각종 가구 및 도구를 만드는 직업 또는 사람을 말한다. 작은 의미로는 나무만을 가공하는 사람이지만, 큰 의미로는 나무 이외의 건축도 포함한다. 집을 짓는 목수의 경우 건축기사 같은 개념이다.

역사[편집]

이름의 어원[편집]

영어에서의 목수를 일컫는 Carpenter는 고대 라틴어에서 Carpentrius, 그 이후 프랑스어의 Carpentier에서 파생되었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간단하게 나무목(木)자에 손수(手)자를 붙여서 목수라고 일컫는다. 옛날에는 가구나 창호를 만드는 사람은 소목수 또는 소목장, 집을 짓는 사람은 대목수 또는 대목장이라고 일컬었으나, 현재는 전통목공 외에는 쓰이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일본에서는 집짓는 목수는 다이쿠(大工), 전통가구나 목공예를 하는 목수는 사시모노시((指物師, さしものし)라고 일컫는다.

직업의 유래[편집]

나무는 세계 각지에 서식하는 식물로, 인류가 돌 다음으로 도구로 쓰기 시작해 철기 시대가 열린 현대까지도 콘크리트, 시멘트, , 과 함께 문명의 기반을 다지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소재 중 하나다. 본격적으로 이용된건 구석기 시대 후반, 돌도끼나 돌창을 위한 자루로 쓰였다. 건축용으로는 40만 년 전에 프랑스의 라자 동굴(grotte du lazaret)안에서 발견된 나무뼈대에 가죽을 덧댄 텐트가, 중석기시대부터는 목재를 활용해 활이나 화살 등의 도구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목재와 석재를 적절히 활용하여 요새로서 성이나 성벽을 만들었다.

신석기시대부터는 농경과 정착이 시작되어 나무가지와 두꺼운 나무를 엮어 움집을 만들었지만, 나무는 유기물이라 오랜 시간이 흐르면 썩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유적이나 유물은 드물다.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목건축 유적은 기원전 5천년 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독일의 참나무 우물터로, 다른 유적은 나무가지와 나무를 묶어서 엮는 수준이었던 데 비해 이 유적은 장부와 홈을 정교하게 파서 결합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계급과 직업이 분화되지 않아, 목수라는 별도의 직업이 있던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가내수공업으로서 주거나 의식주 등의 생계를 위해 목공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중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일부지역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신전이나 건축물 등이 발견되는데, 그리 흔한 광경은 아니었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농경생활이 시작되고 잉여농산물이 생기자 식량생산 외에 다른일에 종사하는 직업과 계급이 분화되었는데, 전문적인 목수와 건축가도 이 때 등장하였다. 건축물도 단순한 움막을 떠나서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의 주거지와 궁전, 요새, 신전 등이 생겨났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무기를 비롯 각종 정교한 기구와 도구들이 생겨났다. 기원전 32세기 경의 이집트에서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인류 최초의 도 사용되었다.

이 때의 전업목수는 주로 지배계층의 수요를 채우기 위하여 정교한 도구나 가구, 가령 식탁이나 책장, 그 밖에 목조각이나 장식등을 만들었고, 이 밖에도 성곽, 요새, 신전, 저택같은 건물들을 지을 때 동원되는 등 일종의 전문직 종사자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귀족이나 왕족은 아니었지만, 고대 이집트에서 목수는 서민(농민)들보다 소득도 높았고, 작업에 필요한 연장을 그 당시에는 귀족이나 전사들의 무기에나 쓰이던 청동으로 만들어 쓸 정도로 부유했으며 사회적으로도 꽤 대우받았다. 이들은 톱과 끌, 망치, 보우 드릴 등을 사용하였고, 나무 뿐만 아니라 원시적인 합판과 널판지도 사용하였다. 이집트의 목수들은 당시 이집트의 일반 서민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일을 하였는데, 하루에 8시간 일을 하고 10일 중 이틀은 쉬었으며, 별도의 작업장을 가지고 주문을 받고 물건을 생산하거나 용역을 제공하는 식으로 계약을 맺기도 했고, 파라오 직속으로 영구히 일하기도 했다. 파라오의 무덤에 안치될 장식품과 가구를 만드는 일은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졌고, 부장품과 가구, 건축까지 통괄 및 숙달된 장인급 목수는 보통 파라오를 위해 일했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있는 것처럼 이집트 신화에서는 수공인과 장인들을 수호하고 상징하는 신으로써 멤피스의 '프타'가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서주(西周)시대에는 목수, 목수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공인(특히 청동기 주조와 관련된)이 왕과 봉신들이 쓸 수공예품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다. 목수의 경우 가구와 특히 수레나 전차등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는데, 시대상황상 그리고 이집트와 달리 공인들은 주로 왕과 분묘가 있는 수도와 왕경 주변의 각 왕족과 귀족이 소유한 공방에서 일을 하였고, 신분 역시 귀족이나 왕족에게 매여있다 보니 귀족들끼리 공인들을 사고 판 기록도 존재한다.

동주(東周)시대에 들어서고, 춘추전국시대가 되자 중국 전토가 각국으로 나뉘고 각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자, 도시내에 수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이 무렵부터 목수를 비롯한 공인들이 귀족뿐만이 아니라 각국의 군수물자와 물품 생산 그리고 각 지역의 물류이동과 거래를 위한 상품 및 공예품 생산을 위해서 일하기 시작했다. 단 사회적으로는 전쟁을 위한 인구 및 병력의 확보 및 증가, 이를 위한 식량생산으로서 농업을 중히 여기고 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생기는 분위기여서 공인은 일반적인 서민인 농민보다 천시받는 분위기였다. 톱을 발명했다는 공수반도 이시대 노나라에서 활동했다.

전국시대의 각국 중에서도 진의 뒤를 이은 조(趙),위(魏),한(韓)은 유통과 상업이 발달하여 도시에 위치한 공방이 주로 상인들의 거래와 유통을 위한 공산품 생산에 집중하는 식이었지만, 진(秦)나라에서는 아예 거의 모든 공인이 왕실과 국가의 필수품과 군수물자생산에 총동원되고, 이를 위해 상세한 호적조사가 이뤄지는 등 좋게 말하면 국영 기능인 내지는 공무원이고, 나쁘게 말하면 공인을 비롯한 전 백성이 나라의 노역에 묶여있었다. 이런 추세는 진이 전국을 통일한 뒤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세워진 이후에도 유지되었고, 목공예품 생산 외에 건물을 지을 때에도 종종 작업반장이나 기술노동이 필요한 때마다 노역을 제공하는 식이었다. 주로 기술이 없는 고된 육체 노동은 죄수나 노예, 서민들이 하고, 목수는 물품을 생산하거나, 기술업무나 작업지시를 하는 식이었다.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목수들의 사회적 처지가 그리 좋지 않았는데, 그리스 사회에서 목수를 포함한 수공인들은 노예신분이었다. 그러다가 로마시대에 이르러서야 그나마 장인급 목수나 건축가는 적어도 노예가 아닌 평민계급이 되었다.

로마시대에는 콜레기아(collegia)라는 일종의 길드조직이 있어서 목수의 직업교육 예컨데, 기초적인 건축용 수학과 목공 및 건축기술을 가르쳤으며, 작업 중 부상자나, 혹은 병에 걸려 일을 못하는 사람, 정년퇴임자 등을 관리하고 생계를 지원해주었다. 대부분의 목수들이 콜레기아에 등록되었으며, 노예제 사회였던 로마에서 자유민이 되고 싶은 노예들이 콜레기아에서 목수장인이 되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 당시의 목수들은 대게 평민계급의 장인급 목수이거나, 아니면 노예였다. 목공용 수공구는 당시에는 비쌌기 때문에 귀하게 여겼고, 공방에서 일하는 목수들은 주로 자신들의 작업장에서 같은 목수끼리 일하거나 소수의 견습생만 들여서 일을 하였다. 장인급 목수가 그나마 평민인 것 외에는 숙련자와 비숙련자를 사회적 혹은 의식적으로 인식 및 구분은 하고 있었으리라 추정은 되지만 제도적으로 더 체계적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나 그리스때와 마찬가지로 건축목공과 수공예로써 목공이 구분되지 않아 로마시대의 목수들은 작게는 목조각과 가구에서부터 콘크리트나 석공, 아치 등의 종합건축은 물론 마차나 차륜을 만드는 일까지 담당하였고, 다른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에 6시간 정도를 일하였다. 기록으로는 5년마다 행하는 인구조사때 직업을 표기하였고, 기원전 1세기 로마 건축가 비트리비우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건축용 목공기술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에서는 전염병과 잦은 전란 등 사회적 혼란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또 런던이나 알렉산드리아 등의 대도시가 파괴되거나 버려지는 등의 이유로 로마시대에 축적된 공학과 건축기술들 상당수와 함께 목공기술들도 소실되었다. 동시에 로마라는 강력한 제국이 사라지고, 봉건시대가 도래하자 지역영주들과 왕들이 자신의 봉토와 영지를 가꾸는데 혈안이 되고, 또 종교계의 위세에 교회를 중심으로 한 경제력 확보나 세력권 형성이 잦아졌다.

영주와 교회, 왕들은 자신들의 요새와, 궁전, 성, 교회나 성당이나 그밖에 여러 건축물이나 수공예품이나 무기등을 만들고 공급하기 위해서 목수를 비롯한 수공인들의 확보에 기를 썼는데, 그때문에 이때 목수들은 다른 농민이나 평민들과 달리 영주의 성안에서 거주했고, 수공인들의 조합으로써 길드가 생겨나, 로마시대 콜레기아(collegia)보다 막강한 조직력을 과시하였다. 한편 로마의 콜레기아는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에서 고스란히 살아서 전해질 수 있었는데, 서유럽의 길드가 기술자들 간의 자치단체에 가까웠다면, 비잔틴 제국의 콜레기아는 중앙 정부의 행정장관에게 통제를 받으며, 세금확보 등에 이용되는 어용기관이었다.

중세 서유럽의 목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었는데, 애초에 이들의 협동조직이었던 길드에서 장인이 수공인을 양성할 때에, 자기 자식이나 인맥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인원을 선발하여 수년에 걸친 도제과정으로 기술을 전수해줬기 때문이다. 또 길드의 장인에게 자녀를 제자로 맡기려면, 가족이 꽤 비싼 돈을 지불해야 됐다.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여 유럽에 인쇄술이 전래되고, 15세기에는 목공용 서적도 발행되었지만, 여전히 길드를 비롯하여 목공인들은 주로 자기 수련생을 두고 도제방식으로 제자를 길러냈으며, 이런 도제문화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서야 점차 줄어든다.

중국에서는 전한 말기부터 국가의 재정능력과 통제력이 약화되고 반대로 지방호족이 득세하면서 정부에서조차 국영수공업을 유지하거나 목수를 유지하는 것보다 민간수공인들에게 돈이나 곡식을 주고 일을 맡기는 것을 선호함에 따라 이시기부터 목수들도 정해준 물품을 제작하여 왕실이나 호족들에게 팔거나, 또는 국영공사가 있을 때면, 정해진 일수나 월수에 따라 용역을 제공하고 곡식과 화폐로 급여를 받기 시작했다. 다만 일이 고정적으로 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농사를 겸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가, 송대에 이르러서야 전업목수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원,명,청을 거치며 지역별로 특산품이나 수공품을 특화하여 시장에다 내다파는 일이 잦아지고, 전업 수공업자와 상인도 늘어남에 따라 수공업자로써 전업목수도 숫자가 늘어났다.

19세기 무렵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또 기계식 목공도구들이 개발 및 도입되면서 목수들도 큰 변화를 맞는다. 특히 쇠못의 대량생산이 결정적이었다. 과거에는 쇠못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건축물의 목재뼈대를 만들거나 가구를 만들 때는 주로 장부에 홈을 파서 끼워 맞추어 제작하였는데, 이는 숙련된 목수들만 할 수 있는 꽤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에는 나무에 박는 규격화된 쇠못이 대량생산되면서, 굳이 장부에 홈을 파지 않고도 못을 이용할 수 있었고, 또 원형톱날이 발명되어, 기계동력으로 두꺼운 목재도 쉽게 자를 수 있게 되었다.

기계화 제재소에서 가공된 판재와 못만 이용하면, 장인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간단한 가구나 수공예품을 만들 수 있게되었고, 또 건축계에서는 이러한 기술혁신에 힘입어 더 단순한 방법으로 집을 지을 수 있는 경량목 구조공법이 미국에서 발명되면서, 소수 장인들의 비효율적인 수공업에 의존하던 목공 길드는 점차 사라져가고 현대적인 노동자로서 목수와, 목수 노동조합이 등장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이나 정부로부터 지원 받는 직업전문학교가 생겨나고, 목공기술 역시나 인맥이나 소득 자산과 상관없이 누구든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현대에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직업전문학교 등에 입학하면 교육을 받고 목수가 될 수 있으며, 그밖에도 과거 도제제도처럼 누군가에게 교육을 받으며 일을하며 직업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그 외에 1880년에는 영국에서 목수 노동조합이 생겨나, 목수노조 주도로 일일 근로시간 8시간 정착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오늘날 노동법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한국[편집]

《삼국사기》 '직관지'에 나타난 궁정 수공업 관청의 직제 가운데 밥상, 책상, 의자 따위를 만드는 곳을 '궤개전'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신라 시대에는 목수들의 일이 분업화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름도 따로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신라의 목공 기술은 백제보다 뒤떨어져서, 선덕여왕이 국내 최대의 목탑인 황룡사 9층탑을 세울 때는 백제의 목수인 아비지를 초빙하였다. 또, 백제인의 뛰어난 기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졌으며,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라고 자랑하는 호류사도 백제인들이 건너가서 세운 것이다.

일의 내용을 나타내는 목업이라는 이름이 기술자를 가리키는 목수로 바뀐 것은 조선 시대 초기의 일로, 1460년(세조 5년)에 제정된 체아직(遞兒職:현직이 없는 문무관에게 주는 벼슬) 규정에 목수 100명이 '선공감'에 배속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이 명칭은 공식 문서에서는 곧 사라졌다. 1471년(성종 2년)에 완성,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목장이라고 씌어 있으며, 조선 시대 말기에 편찬된 《대전회통》에도 같은 이름으로 적혀 있다. 《경국대전》에 실린 목장의 수를 보면 중앙 정부에 딸린 이른바 경공장이 74명이고, 지방 관아에 소속된 외공장은 356명이다.[1]

조선 시대 초기 목수와 소목장의 대우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1461년(세조 6년)의 체아직제에 따르면 목수에게는 '전사'(典事 정7품)와 '부전사'(副典事 정8품) 각 1명과 '급사'(給事 종8품)와 '부급사'(副給事 종9품) 각 2명씩을 배정하였다. 그러나 소목장에게는 단지 부급사 1명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궁궐과 같은 큰 건물을 짓거나 고칠 때는 목수가 벼슬도 받았다.

1447년(세종 29년) 서울의 숭례문을 고칠 때 총책임자인 대목은 정5품, 우변목수와 좌변목수는 종7품의 직위를 받았으며, 1479년(성종 10년) 개축 공사 때는 대목이 어모장군으로서 정3품의 당하관이었다. ‘도편수(우두머리 목수)는 정승감이어야 한다.’는 우리 속담은 이러한 데서도 연유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 후기에는 목수의 기술이 더욱 더 세분, 전문화되었다. 철종 때 이루어진 《인정전중수의궤》에 따르면 이 공사에는 도편수와 부편수 아래 정현편수, 공도편수, 연목편수 등이 참가하였다. 도편수는 공사 전체를 주관하고, 부편수는 그를 보좌하며, 정현편수는 지붕의 기울기나 기둥 및 보의 크기와 간격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공도편수는 공포를 짜고, 연목편수는 서까래를 거는 일을 맡았다. 이 밖에 수장 일을 하는 수장편수, 단청장이인 단청화사, 조각장인 조각편수, 자귀장이인 선장소임, 톱장이인 기거편수, 가칠장이인 가칠편수, 석수장이인 석수편수, 대장장이인 야장편수, 나막신장이인 목혜편수 등이 협조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작업과정에 따라 역할구분은 되었지만, 정작 <의궤>상에 나오는 임금액을 살펴보면, 실질임금 측면에서 아무 기술이 없는 비숙련공과 기술이 있는 숙련공의 임금액수가 거의 같은 등 조선시대 기능을 가진 사람에 대한 경제적 대우는 없거나 거의 미미한 수준이라는 연구결과가 계속 나오는 실정이다.[2] 물론 공식적으로 기록된 임금외에도 별도의 수입이나 보너스가 더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자료가 없어 확신할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에는 건축/가구/창호등에 종사하는 목수들의 직업군을 일괄 조사하여 기술과 경력을 체계적으로 증명해주는 공적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정확한 소득을 파악하여 소득세를 부과하고, 각지의 기술자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장인이나 대공급 기술자는 십장이라고 하여, 십장 증명서를 발급하여 배부하였으나, 해방이 되고 나서 제도가 없어졌다. 이 시대에는 일제의 관공서나 창고 건물을 짓기 위해 일본인 목수의 유입이 두드러졌는데, 현재도 그 영향으로 목수들이 쓰는 목공공구인 수공 톱과 대패가 거의 대부분 일본식이고, 최초의 무형문화재 한옥목수인 배희한 목수 역시 일본인 밑에서 처음 일을 배웠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 목공기술 장인에 대한 자격증 배부는 오히려 일제강점기보다 지지부진하며, 한옥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장인급 기술자에 대한 자격증명이나 대우는 조금 부진한 편이다. 분야별 직업학교가 있지만, 일을 하면서 배우는 직업교육도 존재하며, 비중도 낮지 않다. 한옥계에서는 장인급 기능공을 무형문화재 제도나, 문화재수리 자격증 등을 발급하여 관리하나, 그밖의 다른 기능공들에게 별도의 자격증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도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몇몇 분야 목수들은 고용보험에 가입치 않고 임금을 현금이나 계좌 이체 등으로 지급받아 정확하게 통계에 잡히지 않으며, 소득세를 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회에서의 인식은 조금 미묘한데, 돈을 많이 번다는 인식이 있는가 하면, 분야를 막론하고 목수를 과거의 공장에 다니던 비숙련노동자나 건설현장 일용 노동자 등과 동일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구분[편집]

건축[편집]

형틀목수[편집]

공식명칭으로 형틀공, 혹은 거푸집 목수등으로도 불리며, 영어명으로는 Concrete Form Carpenter라고 쓰거나, Concrete Form Worker등으로 부른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기초 뼈대나 토목작업을 하기 위한 콘크리트 기초를 만들 때 필요한 거푸집, 즉 형틀을 만드는 목수들을 통칭한다. 규격화된 형틀이 없을 당시에는 콘크리트를 부을 형틀을 모조리 목재로 직접 만들었으나, 현재는 이를 위한 규격형틀(예를 들어유로폼)들이 개발되어 규격폼을 조립하는 일이 주가 된다. 아직도 계단이나 지붕 등 복잡한 공간등에는 목재를 많이 사용하지만, 규격폼이 개발된 이후에는 쇠나 플라스틱으로 된 형틀을 더 많이 다루다보니 나무랑 조금 멀어진 감도 있다.

그밖에 위험한 건설현장에서 일할 뿐더러 자재의 무게가 많이 나가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일에 속하며 인원이 모자라 급여가 높은 편이다. 토목공사부터 해서 교량이나 교각 각종 건축분야에서 콘크리트는 널리 쓰이고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 외국과 달리 주택이나 상가에도 대부분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많기 때문에, 건설현장에서 인원 수요가 가장 많다. 한국에서는 보통 건설현장에서 목수라고 하면 형틀목수인 경우가 많다.

프레이머[편집]

영어권 현지에서는 Framing carpenter 나 Framer로 일컬으며, 구체적으로는 미국식 경량목 구조 주택의 목골조(木骨組)를 만드는 목수를 뜻한다. 한국에서는 딱히 구분지어 부르는 명칭이 없다보니 그냥 두루뭉실하게 목조주택 목수라고 일컫는다. 다만, 목조주택이라는 명칭이 한옥까지 포괄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어미가 부정확하다. 일본에서는 경량목구조나 중목구조 가리지 않고 집짓는 목수는 다 大工이라고 부른다.

국내에서는 최근에 단독주택을 중심으로 경량목 구조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다양한 공간과 모양을 만들기 쉽고, 건축비용이나 시간이 철근 콘크리트조보다 비교적 적게 소요되고, 다른 부수작업을 하기도 편리하다 보니 소규모 건축회사들이 실력을 뽐내어 건축대전이나 잡지 등에 홍보하는 일이 늘었다. 한국에서는 매해 1만 채 가량이 계속 지어지고 있다.

국제적으로 보면, 미국, 영국, 유럽, 일본, 호주 등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택은 목재로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그중 미국식의 경량목구조(light weight wood frame)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만들기 쉽고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저 지역에서는 가장 흔한 목수 직군 중 하나다.

팀버프레이머[편집]

중목구조 혹은 팀버프레임 구조 건물을 만드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에서는 미국식 경량목, 중목을 구분치 않고 집짓는 목수는 다 다이쿠(大工)라고 부른다. 유럽이나 북미, 오세아니아 등지에서는 경량목 구조를 시공하는 사람과 구분지어 이렇게 부른다. 구조가 비교적 복잡하고, 목재를 가공하는데도 시간이 비교적 더 걸리기 때문에 시공비용이 비싸고 배워야 할 것도 많은 직업이다. 유럽이나 북미에서 팀버프레임 시공자는 국내의 한옥목수와 비슷한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다.

작업방식도 지역이나 회사마다 저마다 약간씩 다른데, 일본의 경우 일반주택을 지을 때 쓰는 재래공법에는 공장에서 미리 가공하는 프리컷(Pre-Cut)을 도입하였고[5], 중목구조 시공자들은 보통 미리 만들어진 목재를 현장에서 조립하는데, 잘 안맞으면 끌이나 톱등으로 조금씩 더 다듬고, 거대한 나무 망치를 들고 때려서 끼는 일이 이들의 주업이다.

독일이나 북미 등에서도 이런 공장가공을 선호하기도 하나, 북미에서는 비교적 수요가 그리 많지 않고, 있더라도 소득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찾기 때문에 지역공방에서 목수들이 수작업을 하기도 한다.

한옥목수[편집]

한국에서 목수를 부르는 전통적인 이름은, 대목장, 소목장, 도편수 등이 있다. 대목장과 도편수는 단순히 목수가 아니라 설계부터 자재 조달, 시공, 감리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한옥 건설의 총괄 책임자를 뜻하고, 소목장은 보통 창호와 가구등을 짜는 목수를 일컫는다. 도편수와 대목장은 전통적으로 수십 년에 걸친 도제식 교육과 현장 경험을 통해 전승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대목장들에게 관직이 주어졌으며[6], 조선 초에는 이들에게 주어진 최고 관직이 정5품으로 기록되었다.

현재에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 전통건축학과에서 한옥을 배우고, 전국 각지에 사설 및 국립 한옥학교 등이 있어서 한옥의 제조공정을 배우고 한옥목수가 될 수 있다. 팀버프레이머와 마찬가지로 목재를 가공하고 조립하는데에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 현장에서는 주로 목재를 가공하는 치목작업과 현장에서 조립하는 일을 하나, 최근에는 인접국가인 일본의 영향과 세계적인 추세에 힘입어 기계화 자동 공정이 도입되어, 공장에서 가공된 부재를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웃인 일본과 달리 한옥은 시장이 작아 일반 민중이 접하기 어렵고 가격이 비싼 탓에 주택으로 지어지는 것은 드물고, 한옥목수들은 주로 사찰과 같은 관용이나 공용 및 상업용 건축물을 짓는다.

내장목수[편집]

영어명으로는 Interior carpenter, Finish Carpenter. 국내에서는 인테리어 목수라고도 한다. 주로 하는 일은 건물 내부의 인테리어, 유리섬유나 석고보드등의 단열재를 설치하거나 천정을 만들거나, 바닥에 걸레받이와 천정의 몰딩을 설치하거나, 집기, 방문등을 설치 및 제작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과거 한국의 소목장도 창호와 가구를 제작하는 사람들을 일컬었다. 인테리어를 담당하기 때문에 주로 건물 실내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으나 바깥 데크나 상가 작업을 하다보면 외부작업도 하는 편이다.

선박목수(조선공)[편집]

과거에는 주로 선박이 목재였기 때문에, 조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 동시에 일종의 목수들이었다. 그러나 고대때부터 집을 짓는 사람과 가구를 만드는 사람을 똑같이 목수로 취급하였어도, 조선공 만큼은 별개로 취급했다. 애초에 현재 목재선박을 만드는 장인을 조선공이나,선목장이라고 부르고, 영어권에서도 전통목선 제조업자는 Ship's carpenter라는 명칭보다, Shipbuilder나 Shipwright로 더 많이 부르는 편이다. 어찌됐던 19세기 이후 철선의 등장으로 현재는 화물이나 여객의 목적으로 운용되는 함선은 대부분 금속으로 만드므로, 목공인으로써 조선공은 이제 요트와 곤돌라 혹은 레저용 범선을 만드는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해외에서는 레저용 목선에 대한 수요가 있어 몇몇 목선박 제조 공방이나 공장등이 존재하나, 국내에서는 범선 제작은 요원하고, 그나마 레저용 선박을 만드는 요트업체에서조차 선박을 유리섬유나 철제로 만드는 일이 더 많아, 목조선박을 만드는 조선공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통한선 복원 및 제조등에는 국내에서 단지 두 업체 '㈜)전통한선복원연구소'와 '㈜청해진조선해양'이 있고, 서구식 목조선박 제조회사로는 '㈜올리버선박'이 있다. 개중 올리버 선박에서는 올리버선박학교를 설립하여 선박교육을 진행한다. 그밖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도 전통한선 복원 사업을 진행하며, 문화재청 자체적으로 목선박 전문인력을 몇몇 고용한 상황이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조직도 목선박은 시장규모가 한옥보다 현저하게 작다보니 문화재청 고용 공무원 외에는 급여와 근로여건이 현재 공개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가구목수[편집]

말그대로 가구를 제작하는 장인이다. 영어로 Carpenter라고 하면 가리키는 직군이 많기 때문에 Cabinet maker라고 부르기도 한다. 건축물에 쓰이는 목재가 보통 덩치가 크고 잘 자라는 침엽수 위주인데 비해, 가구는 활엽수와 침엽수를 가리지않고 취향이나 목적에 맞게 쓰기 때문에 다루는 목재가 가장 다양하다.

영업의 형태에 따라서 공방이나 공장에서 고객(혹은 고객사)으로부터 주문 된 가구를 제작하여 배송하는 가구목수들이 있는가 하면, 주택이나 상가에 가구를 설치하는 쪽에 주력하는 가구목수도 있고, 이 둘 모두를 겸하는 가구목수도 있다.

주문된 가구를 제작한다 함은, 장롱, 서랍장, TV받침대, 책꽂이, 책상, 식탁 등 "이동가능한" 가구들을 주로 의미한다. 반면, 설치하는 가구는 신발장, 붙박이장, 싱크대, 주방 수납장, 고정선반, 등 가구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이동이 어려운 가구들을 주로 의미한다.

가정용으로 쓰이는 가구로는 원목의 선호도가 높고, 반대로 상가, 사무실, 공장 등에서는 MDF나 합판등이 많이 사용된다.

홍익대학교를 비롯하여 각 대학별로 가구디자인 학과가 설치되어 있는데다가, 미술계열 진학생들이 가구나 인테리어 쪽에 관심이 많아 매해 일정한 수의 인재 및 인력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목공 DIY열풍이 불면서 독창적인 디자인의 원목 가구에 관심이 높아져 다른 일을 하고싶어 가구업에 뛰어드는 사람도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인력수급이 넘쳐나는 상황이다 보니 근로여건은 목수 중에서 제일 안좋다.

목수의 일당[편집]

반장급 35만원 ~ 40만원

반장은 현장에서 오야지를 칭하는 말로 공구나 인원을 데리고 공사를 책임지는 목수 업체의 사장을 말한다. 도상비 (장비대) 목수장비 일절 (슬라이딩 컷팅기, 콤프레샤, 루터기, 마르노꼬 (원형톱다이) 따로 받는다. 설계도면을 볼 수 있어야한다. 어떤 결정을 했을때 책임질 수 있는 목수팀에 리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전국 1만명 목수 중에 10% 미만 이다.

숙련공, 20만원 ~ 25만원

기공은 지역이나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목수일을 한지 5년이상 경과한 사람을 기공으로 인정한다. 개인차가 있어 10년이상 일을 해도 조공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인테리어 목공에 대해서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

조공, 기공 15만원 ~ 18만원

숙련공분들은 조공분들과 같이 현장에 있으면 일이 꼬이기 때문에 잡다한 나르는 일부터 간단한 일들을 맡기시면서 제자로 키운다. 결국 팀에서 주기나름 이다.

초보자 10만원

일의 습득기간과 기존의 경험에 따라 플러스 마이너스 2만원 정도의 차이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회초년생의 경우 8만원을 받을 수 도 있고 경량의 기공이 일을 접고 목수일을 배우는 경우에는 초보자라 해도 12만원 정도의 일당이 지급되기도 한다.

목수업체에서 통용되는 일당과는 열외로 일반 소비자나 개인이 근로자 대기소에서 목수 기공을 불러서 일을 의뢰하는 경우 25만원의 정도의 일당이 산정된다.

25만원은 사람만 가는 경우에 해당되는 일당이고 공구와 차량이 동원되면 35만원 ~ 40만원 정도의 일당이 산정된다.

업종에 따라 일당 상승이 느린 업종이 있고 빠른 업종이 있는데 인테리어 목수 일당은 해마다 만원정도 꾸준히 상승해왔다.목수 일당은 대기업 직장인보다 높다. 월간 22일 풀타임으로 목수으로 일하게 되면 월급으로 따지면 660만원 정도된다.

목수 개인의 일의 욕심에 따라 성수기때에는 월 800~900만원 벌 수도 있고 비수기 때에는 400~600만원정도 정도 받을 수 있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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