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조각(彫刻, sculpture)은 미술 감상을 목적으로,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만들어진 입체 작품을 의미한다. 미술에서는 입체 표현 방법 중에서 금속이나 돌 같은 단단한 물체를 깎아내는 것만 조각으로 부르고 있다. 반대로 찰흙처럼 부드러운 것을 붙여가면서 모양을 만드는 것은 소조라고 부르며, 조각과 소조를 합쳐서 함께 조소(彫塑)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감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생활 용구로 사용되는 공예품이나 도예품 등 실용성 있는 것들은 제외된다.
조각에 쓰이는 소재는 돌, 나무, 흙(점토, 테라코타), 섬유, 종이, 얼음과 같은 자연물에서부터 석고, 금속(철, 구리 등), 수지(합성수지), 유리, 납 등 인공물을 포함, 여러 재료를 함께 조합하는 작품도 많다.
제작 수법도 조각을 기본으로 하여, 깎고, 붙이고, 용접하고, 부수는 등 여러가지이고 특정 수법으로 치우치는 견해는 없다.
개요[편집]
조각은 다양한 재료를 깎거나 빚어서 3차원의 형상을 만드는 예술이다. 회화와 함께 그 기원을 확실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표현 기법이다. 선사 시대부터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과 같은 작품이 존재했다.
나무, 돌, 금속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입체 형상을 만드는 예술 형태이다. 좁은 의미에서 조각은 단단한 재료를 깎거나 새겨 표현한 것만을 뜻하며, 이는 '조각'이란 용어의 어원과도 관계가 깊다. '조각'의 한자(彫刻)를 들여다보면 깎아내거나 새긴다는 의미가 강하며, 영어명칭(sculpture)의 라틴어 어원은 '스쿨페레(sculpere)'로 역시 톱, 망치, 끌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단단한 재료를 깎거나 쪼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사실 '스쿨페레'에서 파생된 이탈리아어(sculptores)는 르네상스 시기 이전까지만 해도 나무를 조각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데만 사용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 각기 다른 재료와 기법을 사용하는 석조각가(statuarii), 금속조각가(caelatores), 목조각가(sculptores), 점토조각가(fictores), 밀랍조각가(encaustic)를 아울러 'sculptores'로 지칭하기 시작했으며, 이 용어는 곧 조각과 조각가 모두를 뜻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조각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3차원의 공간 속에 만들어진 입체적이고 아름다운 조형예술을 의미하며, 따라서 '조소'(彫塑)와 혼용하여 점토 등 가소성 있는 재료를 빚거나 덧붙여 형상을 만드는 소조, 그리고 소조를 원형으로 하여 청동 등으로 주조한 것까지 포함한다.
시대가 지날수록 조각가는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었을 때를 넘어서는, 더 확장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역사[편집]
조각은 역사가 오래된 예술 형태의 하나로, 회화와 함께 오랫동안 실제 존재하는 대상을 재현하는 재현예술(represenataional art)로 전개되어왔다. 또한 전통적인 조각은 흙으로 빚거나, 청동 주물로 떠내거나, 나무나 대리석을 깎아 제작되었으며, 오랫동안 감상과 순수 미학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닌 실용적이고 종교적인 목적에서 제작되어왔다.
조각을 순수 예술로서 제작하고 전시하고 감상한다는 개념은 비교적 현대에, 서구 문화권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며, 비서구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더 나중에 유입되었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20세기 이후 조각은 비재현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도 제작되었다. 조각의 개념과 형식 확장과 더불어 현대의 여러 조각가들은 전통적인 재료나 기법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인 점토·밀랍·돌·금속·유리·나무·석고 등은 물론 에폭시·아크릴·폴리에스터 등의 산업적 재료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레디메이드 작품 등에서 볼 수 있듯 기성품(found objects) 그 자체가 조각의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조각이 제작되고 존재하는 장소 또한 확장되어, 조각 작품은 건축물이나 전시장을 벗어나 자연 속에, 혹은 자연과 더불어 존재하기도 하며, 과학기술의 발전 등과 함께 더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가고 있다. 또한 설치미술 개념의 도입으로 회화와 조각, 미디어와 같은 장르 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져 가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각은 지속적으로 그 의미와 형태를 확장하고 변모해가고 있다.
고대[편집]
메소포타미아는 돌로도 조각을 했으나, 딱딱하게 굳은 커다란 점토로 조각을 많이 했다. 라마수상이 대표적이다.
고대 이집트는 주로 파라오와 고위층을 모델로 조각을 했기 때문에 굉장히 정형화된 조각상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아케나톤 시절의 대대적인 미술 개혁으로 섬세한 포즈와 모델의 얼굴 표정를 중시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고대 이집트 조각상만의 특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조각상을 제작할 시점에 조각의 모델이 살아있으면 왼발 부분을 앞으로 나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미 죽은 이를 조각할 때는 두 발을 붙인 차렷 자세로 만들었다.
상술한 두 문명의 조각 기술은 이후, 지중해를 건너서 조각 문화의 끝판왕인 고대 그리스에서 결실을 맺게 된다. 미켈란젤로가 경악에 가까운 감탄을 내뱉게 만든 라오콘상은 물론이고, 사모트라케의 니케상은 파손이 서서히 진행됨에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아 우리가 천사라고 부르는 것의 원형이 되었다. 현대 조각가들도 이 시대에 정립된 기법을 그대로 쓰고 있을 정도로, 고대 그리스가 조각사에 끼친 영향은 무척 크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그리스식 조각 기법이 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퍼졌고, 특히 인도에서 변형된 간다라 양식은 멀리 극동까지 전해져 석굴암이란 걸작을 만들어냈다.
헬레니즘 문화를 이어받은 로마도 그리스처럼 조각에 열광했다. 로마 황제들은 광적으로 자신들의 조각상을 만드는데 집착했는데, 군주의 신격화를 위해서 무척이나 위엄 넘치게 만들었다. 물론 사실성을 중요시하던 헬레니즘 조각술의 후계답게 위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애썼고, 후술할 중세 조각의 특징 탓에 로마 황제는 과거의 인물일수록 그 생김새를 파악하기 쉬운 기현상이 발생했다.
동양에서는 많은 불상이 조각으로 만들어졌는데,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 때에 많은 반가사유상과 석탑들이 만들어졌다. 통일신라에서는 석굴암 본존불이 대표적이며, 불상 외에도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의 금강역사 부조 등 불교와 관련된 상이나 무열왕릉의 거북모양 능비, 성덕왕릉이나 김유신묘의 십이지 조각상 등이 남아있다.
페트라 유적이나 이집트 스핑크스 같은 것은 암석을 깎아 만들었지만 수십 미터 크기로 거대하다. 조각품이면서 동시에 건축물. 아시아 여러 지역에는 절벽을 깎아 만든 종교적 조각상이 많다. 이스터 섬 모아이 석상도 유명하다.
중세[편집]
중세 유럽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와 달리, 조각이란 표현 기법이 영 힘을 못 쓰던 때였다. 이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영향이 크다. 둘 다 우상 숭배를 금지했고, 우상 숭배의 주요 방식이었던 조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때문에 조각상의 제작 빈도가 급격히 낮아졌고, 이는 조각가들의 질적 하락과 표현 기법의 단순화를 부르고 말았다.
그 기원은 고대였으나, 중세 시대에도 존속했던 로마 제국의 조각상을 보면 이런 점이 두드러진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각상은 아우구스투스의 것에 비하면 미숙할지언정 그나마 옛 헬레니즘 시절의 정교한 양식을 보이나, 포카스의 조각상은 여러모로 이전 시기의 조각에 비해 표현이 많이 생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전통 교회가 추진한 성상 파괴 운동으로 포카스 이후의 황제들은 조각상을 거의 남기지도 못했다.
그나마 기독교 중, 가톨릭은 조각에 마냥 부정적이지는 않아서 십자고상과 성상의 형태로 계속 이어나가게 했다.
대륙 너머 한반도 지역도 마찬가지로 조각의 기법 면에선 여러모로 고대 시절에서 퇴보를 면치 못했다. 특히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국내 미술사학계에서 졸작이라고 폄하 받기도 했다.
유럽과 다르게 한반도는 기존 종교의 몰락이 아닌 번영으로 이렇게 된 케이스다. 불교가 고위층의 전유물이었던 삼국 시대와 달리, 한국사에서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 시대에는 일반 민중에도 불교가 퍼져 융성했다. 이 여파로 불상 또한 대중화 되었는데, 문제는 일반 민중들은 돈이 없다는 것. 때문에 삼국시대에 쌓아 올린 고급 조각 기술을 자유롭게 쓸 수 없었고, 비용을 적게 들여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도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처럼 해당 지역 민중의 염원을 담아 만들다 보니, 독특한 지역색을 낼 수 있었다.
유럽과 한반도의 조각가들이 죽을 쑤었던 것과는 별개로, 동시대 크메르 제국의 조각가들은 역사상 길이 남을 걸작을 만들어냈다. 크메르 제국인들은 사암을 건축물의 재료로 애용했는데, 퇴적암인 사암은 대리석과 화강암에 비해 물러서 조각이 쉬웠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만의 조각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특히 벽을 깎아서 만든 부조 형식의 조각은 그 정교함에 훗날 정복자로 들어온 프랑스인들조차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외를 표해야만 했다.
근세[편집]
르네상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대다.
이 시기의 조각가들은 그리스-로마 시절의 조각풍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한 영향권을 서서히 잃어감으로써, 그동안 기독교 사회에서 우상 숭배라고 멀리시 된 고대식 조각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귀족들은 열성적으로 조각가들을 후원했으며, 시민들을 세금을 털어 자신들의 도시에 훌륭한 조각상을 하나라도 더 전시하고자 했다.
이 시기의 조각품들은 제작자들이 그토록 동경했던 그리스 시대의 것과 비교했을 때, 질적으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위 사진은 '프란체스코 케이롤로'라는 당시 조각가의 <환멸>이란 작품으로, 언뜻 조각상에 그물을 씌운 것으로 보이지만 저 그물도 조각의 일부다. 심지어 인물 부분과 통짜로 만들어졌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런 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3D 프린터의 발명 이전에는 복제는 어림도 없었다.
대항해 시대가 열림으로써, 앞서 말한 동아시아의 불상과 크메르 제국을 비롯한 남아시아의 힌두교 석상이 서양에 소개된 시기이기도 했다.
근현대[편집]
19세기에 오귀스트 로댕이 비로소 조각을 건축과 분리된 독립적인 미술로 승화시켰다.
20세기 들어와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예술이 조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콘스탄틴 브랑쿠시 등이 이 사조를 이끌었다.
1차 대전 당시의 몇몇 군인들이 참호 속에서 시간 때우기로 전선에 굴러다니는 탄피나 쪼개진 나무 개머리판으로 여러 조각품을 만들었다. 총검으로 새기고, 미친듯이 두들겨서 만들었다고. 대부분 치열했던 전장에 휩쓸려 유실되었지만, 그만큼 희소성이 높아져서 살아남은 것들은 '트렌치 아트'란 이름으로 귀하게 거래되고 있다.
조각의 분류[편집]
20세기 초엽까지 즉 유럽에서 입체파(立體派)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까지는 이른바 입체를 형성하는 소재에 따라서 돌을 사용하면 석조(石彫), 나무를 사용하면 목조(木彫), 찰흙으로 원형(原形)을 만들면 소상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소재에 대한 새로운 재질감과 현대의 복잡한 인간 정서가 교차하여, 조소 표현도 단순히 구상적인 표현에만 한정되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소재의 개발은 단순히 과거 덩어리로서의 입체감 뿐 아니라 질적인 의미가 더해져 입제척인 양감을 넘어 연구되기에 이르렀다. 충실된 덩어리(塊, mass)가 투명한 질로 해방되어 종래의 조형구성의 상식을 넘어서 유동(流動)과 소멸(消滅), 무한(無限)과 연속 등 지난 날 생각할 수 없었던 세계로 사고의 촉수를 뻗치게끔 되었다. 이러한 발전 속에서 단순히 조소를 분류한다는 것은 불가능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편의상 대별(大別)을 시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조소적인 수단에 의한 것
(모델링) 브론즈상(像)·테라코타상(terracotta像)·도상(陶像)·건칠상(乾漆像)·시멘트조상(sement 彫像)
- 조각적인 수단에 의한 것
(카빙 Carving) 목조상(木彫像)·석조상(石彫像)
- 구조적인 수단에 의한 것
(오거나이즈·organize) 금속조각(金屬彫刻)·수지조각(樹脂彫刻)·글라스조각(glass彫刻)·군적조각(群的彫刻)
조각 제작의 아틀리에[편집]
일반적으로 조각 제작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광선이다. 즉 화실(아틀리에)내의 광선의 이동이 심한 곳이나 통풍이 너무 잘 되는 곳 등은 조소 제작에 적합하다고는 할 수 없다. 조소 제작은 특히 광선에 의한 명암의 톤을 대상에서 엄격하게 관찰하여, 면의 방향이나 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도 비교적 변화가 적은 장소를 선택하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이상은 특히 구상적인 형을 만들 경우에 주의할 사항이다. 모든 인간의 노작(勞作)은 필요에서 생긴다. 예술본능도 또한 필요한 노작을 통해 부가되고 고조된다. 우리 근처에 있는 용재(用材)는 어느 시대에나 예술가의 창조적 본능을 자극했다. 근년 조각 소재의 개발과 과학기술의 진보는 제작 그 자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제작자의 태도도 실험적인 태도로 이행하여 온 느낌이다. 아틀리에의 구조와 분위기도 많이 변했다. 극단적인 예로는 아틀리에는 실험화실(實驗畵室)로 또는 공장, 철공장 비슷한 곳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래서 산소용접기, 절단기, 해머(hammer) 등이 비치되어 있기도 하다.
조각예술의 의의[편집]
이미 조각이 우상(偶像)이나 건축장식 등과의 깊은 종속관계에서 벗어나 양괴나 공간을 실감하는 입체조형으로서의 자율성에 대해 오늘날만큼 명확하게 인식된 적은 없었다.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는 각 예술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하여 논쟁을 반복한 기록이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회화론 에서도 회화와 조각을 비교하여 그 장단점을 논술하고 있다. 그 대의를 보면 “화가는 자연이나 원근법이나 명암법의 도움에 의하여 대단히 곤란한 화면에 공간을 표현할 수가 있으나 조각가는 색채의 변화나 성질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그림자(影)와 빛(光)의 문제는 조각에 있어서도 회화에 있어서도 중요하지만, 회화는 언제나 그 그림자와 빛을 자기자신이 지니고 있다. 조각은 투명한 물체를 표현할 수가 없다. 또한 빛이나 반영하는 형, 빛나는 물체, 구름이나 어두움, 자연의 변화무쌍한 현상의 효과를 낼 수가 없다. 조각가는 매우 노동적이고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회화는 보다 정신적이다”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벤베누토 첼리니(Benbenuto Cellini, 1500-1571, 이탈리아)는 조각가답게 다빈치의 말에 반론하고 있다. 그 대의는 "조각은 데생에 기초를 두는 다른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그 이유는 8배나 많이 바라볼 수 있는 장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저마다가 똑같이 아름답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회화는 샘에 비친 영상(映像)에 불과하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들 논쟁에 대하여 미켈란젤로(1475-1564)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이다. 작업의 엄격함이나 분량 등에 의하여 생기는 상위(相違)를 빼고서는 조각과 회화 사이에 아무런 가치의 차이는 없다." 이렇듯 가벼운 논평에서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조각가였음과 동시에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회화는 구상·추상 중 어느 표현형식을 취하건 간에 이미지(心象)의 가상(假象)임에는 틀림없다. 이에 반하여 조각은 실존하는 공간 속에 존재하는 물체로서 자립하는 양괴이며 소재와 기술과 용구(用具)가 공존하는 바탕에서 조각가의 이미지가 구체화 된다. 한편 미술사를 보면 조각이라는 작업이 거의 인체라는 하나의 테마에 바쳐졌음을 알 수 있다(선사시대에는 동물이나 기호가 線彫된 것이 많지만). 인간이 자연과 싸우고 인간의 생과 사의 부조리(不條理)를 생각하게끔 되었다고 간주되는 시대가 되면서, 불변의 구상물로 보일 수 있는 소재에 인체를 파넣고 거기에 어떠한 종류의 의미를 표시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구체적으로 삼차원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고체의 견고함과 감촉 중량 등과 복잡한 창작수속이나 기술적인 저항은 도리어 조각 자체가 갖는 요소이고 숙명이어서 그 사실이 다른 예술과의 상이점이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