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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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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Henry Ford)
포드(FORD)

헨리 포드(Henry Ford)는 미국의 자동차 회사인 포드(Ford)의 창업자이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중산층이 소비할 수 있는 승용차를 개발하여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개척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13년에 조립라인 생산방식 포드시스템(Ford System)을 확립하였으며, 1914년에 고효율 및 고임금과 저판가의 사업방침을 구축하여 그 시대 획기적인 사업방식을 업계에 보여주었다. 글로벌을 대상으로 소비자중심주의가 평화의 관건적인 요인이라 주장하였으며, 소지자중심주의를 실천하고자 추진한 체계적인 원가절감의 노력은 여러기술과 사업분야에서 프랜차이즈와 같은 혁신들을 일으킨 인물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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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헨리 포드는 1863년 7월 30일 미국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디어번에서 출생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농부였지만, 헨리포드는 농사일보다 기계나 공학에 더 관심을 갖고 자랐다. 어린나이부터 토머스 에디슨 같은 발명가나 유명한 과학자인 패러데이를 존경하며 자신만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진로에 대해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5살의 어린 나이에 가출을 한 헨리 포드는 다른 마을에서 기계공이 되었다. 그곳에서 공장의 업무 과정을 단순하게 고쳐 작업의 능률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필요 인력을 줄일 수 있는 기획안을 내놓았다. 그의 방식에 따르면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을 받고 공장은 대규모 생산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어 큰 효율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일자리를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한 노동자들의 반대로 공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1890년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의 회사에서 기술책임자로 근무하며 자동차를 제작하게 되었다. 1899년에 헨리 포드는 경주용 자동차를 제작에 몰두하기 위해 에디슨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1903년 그는 석탄 딜러였던 알렉산더 맬컴슨(Alexander Malcomson)과 함께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회사인 포드이다.[2]

헨리 포드가 창안한 컨베이어 벨트 기반의 자동화 생산 시스템 덕분에 1908년부터 1927년까지 포드T형은 20여 년 동안 1,500만 대가량을 판매했다. 헨리 포드가 창안한 이 시스템은 자동차 1대를 조립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평균 750분에서 93분으로 단축시켰다. 또한, 1908년에 60분에 1대에서 1914년에는 24초에 1대가 만들어질 정도로 단축되었다. 헨리 포드의 경영원리 철학은 4개의 봉사원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미래에 대한 공포와 과거에 대한 존경을 버릴 것, 경쟁을 위주로 일하지 말 것, 봉사가 이윤에 선행할 것, 값싸게 제조하여 값싸게 팔 것 등이다. 이렇듯 자동차의 가격은 일반 노동자나 서민들이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해야 한다는 헨리 포드의 철학에 기반하여 가격은 기존의 판매되던 자동차의 절반이 되지 않는 금액으로 판매되다. 이후, 헨리 포드는 모델T를 통하여 벌어드린 자본으로 공장을 세우고, 숙련공들에게 1일 8시간 노동에 주 5일 근무와 최저 임금 5달러라는 파격적인 근무 조건을 제시했다. 이는 하루 10시간에서 12시간을 근무하고 1달러를 받던 노동자에게는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헨리 포드는 극심한 반대주의자였으며, 자신만의 철학이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치즘을 창시한 히틀러에게 공개적으로 호감을 표현하곤 했고, 자신의 반유대주의를 담은 '국제 유대인(The International Jew)'이라는 책을 읽기도 했다. 노동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제공한다고 생각하던 헨리 포드는 그 노동자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것에 용납하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수익만을 중시한 나머지 인명을 경시했던 결정도 여러 차례 드러나 물의를 빚은 바 있다.[3]

약력[편집]

  • 1863년 07월 30일 : 미국 미시간주에서 출생
  • 1890년 : 에디슨 조명 회사에서 근무
  • 1903년 : 포드자동차 회사 설립, 포드 모델A 출시
  • 1908년 : 포드 모델T 출시
  • 1913년 : 컨베이어 벨트 도입
  • 1919년 : 아들인 에드셀 포드(Edsel Ford)가 포드 회사 사장으로 취임
  • 1922년 : 링컨 자동차 회사 인수, 독일 히틀러의 나치당에 정치자금을 기부
  • 1927년 : 모델T 1,500만대 판매 돌파
  • 1941년 : 포드 회사 노조 설립 승인
  • 1943년 : 아들이 암으로 사망하여 다시 포드 회장직에 취임(81세)
  • 1945년 : 은퇴
  • 1947년 04월 07일 : 별세(85세)

주요 활동[편집]

포드 모델T[편집]

포드 모델 T

모델T는 포드 회사에서 1908년 9월 27일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차종이다. 또한 "미국의 자동차 시대를 열다"(put America on wheels)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끈 역사적인 자동차 모델이다. 1900년대 초 자동차란 사치품이자, 소수의 부유층만이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헨리 포드는 "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이 운전이든 정비든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동차입니다. 현대 기술을 총동원하여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고의 성능과 재질을 가진 차를 만들겠습니다. 그 가격은 어지간한 봉급 생활자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쌉니다." 라며 모델T 자동차를 광고했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좋지 못했는데, 자동차는 부유층이 소유하는만큼 개인적 취향에 따라 이것저것 선택하여 자신의 부를 과시하느라 그 가격이 비쌀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모델을 계속 제작하던 포드 자동차 회사는 마침내 1908년 9월 27일 역사적인 모델 T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피케트 공장(Piquette Plant)에서 생산을 시작하게 된다. 대중들의 부정적인 예상과는 달리 모델T는 자동차 사상 최초로 연간 판매량 1만 대를 돌파했다. 이후, 1911년에 3만대를, 1913년에는 10만대를 기록했으며, 더 나아가 유럽과 호주에서도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 판매량을 수치로 나타냈을 때 전 세계의 자동차 100대 중에 68대가 포드의 모델T인 수준이었다. 모델 T는 1927년 5월 26일까지 18년반 사이에 15,007,033대가 판매되었다. 이후 후속 차종인 모델 A로 대체되었다.[4]

2012년 2월에 영국 데일리메일이 공개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톱10'에서 포드 모델 T는 약 1650만대로 8위에 올랐다. 이외로 1위는 도요타 코롤라가 3750만 대, 2위는 3500만 대를 판매한 포드의 F 시리즈, 3위는 2750만 대로 폭스바겐의 골프가 차지했다. 뒤이어 4위는 폭스바겐의 비틀이 2350만 대, 5위는 포드의 에스코트가 2000만 대, 6위는 혼다 시빅이 1850만 대, 7위는 혼다 어코드로 1750만 대이다. 그리고 포드 모델 T를 뒤이어 9위는 폭스바겐의 파사트로 1550만 대, 10위는 쉐보레 임팔라로 1400만 대를 판매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10위까지의 순위가 매겨졌다.[5]

포드 시스템[편집]

15세기부터 체인 버킷을 사용하여 부피가 큰 물체를 운반한 버킷 컨베이어는 중요한 기술 혁신이었다. 그리고 단순한 기계를 발전시킨 것이 바로 컨베이어 벨트다. 1,700년대 초에는 평평한 나무 판자 위에 물건을 올려 운반하거나 광산업에서 광물을 운반하는 용도로 컨베이어 벨트가 사용되었다. 이후 벨트에 사용된 가죽이나 무명을 고무로 교체하고, 기계적인 요소들이 적용되어 기능이 더 발전하게 되었다. 헨리 포드는 1913년부터 포드 공장에 컨베이어 벨트를 사용해 생산라인을 구축했다. 이를 적용한 첫 모델이 바로 포드의 모델T 차량으로 원가절감에 성공하여 기록적인 매출성장률을 달성하였다. 게다가 부품의 규격을 통일화하여 부품의 집중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고, 부품 생산에서도 대량생산 체제를 실현시켰다. 포드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컨베이어 벨트뿐만 아니라 이동조립법도 있는데, 이동조립법이란 일에 사람을 가져가는 대신 사람에게로 일을 가져가는 생산 시스템 기법이다. 즉, 노동자 앞에 부품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통과하면 각 노동자는 제자리에서 일정한 속도로 작업에 임하는 생산 시스템을 뜻한다. 한번의 멈춤 없이 계속되는 생산 시스템이라는 의미로 플로 작업 시스템(flow production system)과 컨베이어 시스템(conveyor system)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헨리 포드가 확립한 포드 시스템은 대량생산을 통해 자동차 산업의 혁명을 실현시켰으며 효율적인 표준을 만들어냈다. 포드 시스템은 많은 공장에서 채택되어 적용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급진적인 발전을 야기시켰다.[6]

자동차의 대중화 선도[편집]

헨리 포드는 "자동차는 더이상 상류층만을 위한 고급품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누구나 자동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시대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대중들이 값싼 가격에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도록 포드 시스템을 구축하고 1913년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된 조립라인을 공장에 설치하여 생산 공정의 표준화와 단순화를 실현시켰다. 이를 통해 이전에는 노동자 한 사람당 연간 자동차 3대를 생산했다면 1911년에는 19대를 생산해 낼 수 있었고, 이후에는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자동차가 만들어졌으며, 1914년에는 24초당 1대를 생산해냈다. 자동차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포드 회사 노동자의 임금은 올라가고 모델T 자동차의 가격은 대중들이 구매할 수 있을 만큼 가격이 내려가게 되었다. 이로써 헨리 포드는 소수의 부유층들의 전유물이던 자동차는 모델T 자동차를 구매하는 대중들에 의해 자동차의 대중화를 선도했다.[2]

헨리 포드 박물관[편집]

헨리 포드 박물관(Henry Ford Museum)은 헨리 포드가 1929년에 학생과 학자들을 위해 세운 역사 박물관으로 미국 자동차의 발상지인 미시건주 디어본에 위치해 있다. 이 박물관은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기념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50주년을 맞이한 1929년 헨리 포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포드 공장 인근에 에디슨 학교를 설립했다. 1932년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었으며, 1947년 헨리 포드가 세상을 떠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헨리 포드 박물관으로 그 명칭이 변경된 것이 바로 헨리 포드 박물관의 시작이다. 2004년부터 헨리 포드 아카데미와 벤슨 포드 연구센터, 그린필드 민속마을 체험장 등이 추가로 설립되면서 현재의 복합문화단지가 탄생했다. 헨리 포드 박물관은 연간 160만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방문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박물관 내에는 헨리 포드와 관련된 물건뿐 아니라, 포드의 경쟁사인 GM, 크라이슬러의 차량은 물론 기차, 항공기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운송수단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7]

각주[편집]

  1. 헨리 포드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헨리_포드
  2. 2.0 2.1 헨리 포드 지식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7658&cid=59014&categoryId=59014
  3. 이건한 기자, 〈(IT인물열전) 단순하고 값싸게, 더 많이. ‘헨리 포드’〉, 《테크월드》, 2020-04-17
  4. 포드 모델 T - https://ko.wikipedia.org/wiki/포드_모델_T
  5. 김민화 기자, 〈(포토)`베스트셀링 카` 포드 모델 T〉, 《이데일리》, 2012-02-03
  6. 포드시스템 지식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8266&cid=40942&categoryId=31912
  7. 권용주 기자, 〈(기획)자동차 마니아 사로잡는 박물관은?〉, 《오토타임즈》, 2015-05-31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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