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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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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거리의 음악가

음악가(音樂家) 또는 뮤지션(Musician)은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다. 작곡가, 연주가, 지휘자, 성악가, 가수 등이 있다. 음악을 연구하는 인문학자인 음악사학을 연구하는 학자와는 구별된다.

개요[편집]

음악가는 음악을 업으로 삼은 사람을 말한다. "-가(家)" 라는 접미사 자체가 그것을 직업으로 함을 의미한다. 즉 굉장히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용어(umbrella term)이다. 음악가는 다음과 같은 직업들을 포함하는데, 필요한 링크로 이동하여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직업들은 모두 음악이라는 집합에 속해 있으므로 서로 관련성이 크며, 실제로 많은 음악가는 두 개 이상에 동시에 해당되기도 한다. 대중음악의 사례에서는 싱어송라이터가 있고, 클래식 쪽에서는 지휘자가 동시에 연주자이기도 하다.

작사가는 음악가라기보다는 글짓는 작가에 더 가깝고, 안무가나 피겨 스케이트 선수도 음악이 중요하긴 하지만 몸의 움직임이 더 중요한 체육인에 가깝기에 이들은 보통 음악가라고 하지 않는다.

음악가의 종류[편집]

가수(보컬리스트)[편집]

자신의 목소리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 음악 시간 수행평가에도 빠지지 않는 평가 과목 중 하나가 가창 평가다. 음악가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연예인들이 많은 직업이다. 일반 가수뿐만 아니라 성악가, 성우 일부, 국악인 중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 래퍼 모두 장르만 다를 뿐이지 넓게 보면 모두 가수다.

성악가의 경우에는 오페라, 팝페라나 뮤지컬 분야에 많다. 흔히 SATB라 하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구성은 학교나 각종 단체에서 합창 공연을 할 때 자주 편성되므로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하지만, 성악에 필요한 발성 자체는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작곡가[편집]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 음악 시간에 줄곧 배우는 것은 바로크 음악, 고전주의, 낭만주의, 근대 혹은 현대음악의 클래식 작곡가들이지만, 현대에도 뛰어난 실력의 작곡가들이 대중음악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가수를 병행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싱어송라이터. 물론 현대에도 클래식의 전통과 명맥을 따라 작곡하는 목소리로 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김형석이 대표적인 작곡가고, 싱어송라이터에는 김동률이 유명하다.

연주자[편집]

악기를 다루어서 곡을 표현하는 사람. 악사(樂士)라고도 부른다. 영어에서는 그 사람이 전문적으로 다루는 악기 이름 뒤에 -ist 혹은 -er 접미사를 붙여서 단어를 만들고, 국내에서도 그렇게 만들어진 단어를 수입해서 쓰고 있다. 어떤 악기의 프로가 되려면 그에 필요한 교육과정 및 사사를 거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인접한 다른 악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상의 연주가 가능하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지휘자[편집]

주로 관현악단에서 전체 연주를 통일시키고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해석을 음악적 표현에 적용하여 작품을 재창조하는 연주자. 따라서 어찌보면 연주자의 한 종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강마에가 말했듯이 일반 단원들이 자기 악기를 연주한다면 지휘자는 단원들 전체, 즉 오케스트라를 악기로 연주하는 것.

음악가에 대한 인식 변화[편집]

하인 취급받은 음악의 거장들

이름을 한번 쯤은 들어 봤을 음악가들이 활동한 시기에 음악가는 귀족들의 하인 정도 지위였다. 도시나 궁정, 교회에 소속돼 금전적 지원을 받고 봉급은 그들의 능력에 걸맞지 않은 초라한 수준이었다.

고전 시대 클래식 음악의 거장인 바흐는 시 소속 음악가로 활동했고, 말년에 교회 음악가로 일하면서 요즘 관점으로 보면 안정된 고용 위치에 있었지만, 현실은 하인 정도 신분이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는 가난한 생활을 했다. 바흐가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은 것도 사후 아들인 카를 필리프 엠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가 독일 언론을 통해 그를 열심히 알리고 난 다음이었다고 한다.

귀족이나 궁정에 소속된 음악가들은 작곡 활동에서도 여러 제약이 있었다.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든의 삶도 그랬다. 하이든이 여러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에스트라하지 가문에 고용된 궁정음악가로 안정된 활동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든과 후작 사이에 맺은 고용계약서를 보면 하이든에게 불평등한 내용이 많다. 계약에 따르면 하이든에게는 여행의 자유가 없고, 그의 곡은 모두 궁정 소유였으며 궁정에서 원하는 곡을 작곡해야 했다.

귀족의 실내음악에서 부르주아의 공공음악회로

발라드, 록, 포크, 클래식 등 음악을 장르별로 구분하는 현재와 달리, 18세기에는 연주되는 장소에 따라 음악을 구분했다. 교회 음악, 극장 음악, 챔버(실내) 음악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곡이 연주되는 공간이 어디냐에 따라 음악적인 편성이나 어법, 분위기에 차이가 있었다. 교회 음악은 예배뿐 아니라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사용된 음악까지 포함한다. 극장 음악은 연극이나 발레를 공연하던 극장에서 반주로 사용된 음악이다. 18세기의 극장이라고 하면 300명 정도 입장할 수 있는 소규모 극장을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 1000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큰 극장들이 많았다.

교회 음악과 극장 음악은 독립된 공간에서 연주된 반면, 챔버 음악은 개인의 챔버, 곧 방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연주됐다. 왕족의 궁이나 귀족의 저택에 있는 방에서 열리는 음악회에서 연주한 음악이 챔버 음악이고, 이것이 지금 '실내악'이라 부르는 장르의 전신이다.

이처럼 18세기 중반까지 귀족 중심으로 교회, 극장, 그리고 개인의 살롱에서 즐기던 음악 문화가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로 변화한다. 산업혁명으로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층이 나타나면서 공공음악회가 성행하게 된다. 산업혁명 이후 기존의 왕족이나 귀족의 힘이 약해지면서 상대적으로 부르주아 계층이 청중의 다수를 이루게 됐다.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 1747년 작. 극장에서 음악회를 개최한 호스트가 무대 중앙에 앉아있고, 연주자들은 무대 가장자리와 뒤쪽에 자리한다. ⓒ 허효정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는 1747년 루이 15세의 아들이 결혼할 때 열린 음악회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림에 나오는 청중은 모두 초대장을 받아야 공연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연주자들이 무대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와 뒤편에 있다. 무대 중앙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결혼식 주인공과 부모다. 18세기 중반까지 음악회는 이처럼 귀족이 사적으로 개최해 초대받은 사람들만 참가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층이 떠오르면서 재력을 갖춘 이들을 대상으로 한 공공연주회가 시작된다. 18세기 중반에는 사적음악회와 공공음악회가 공존했다.사적콘서트는 초대한 호스트가 음악회의 중심이었다면, 공공음악회는 호스트 없이 연주자가 중심이 되어 진행됐다. 공공음악회가 성행하면서 음악가의 생활도 달라졌다. 귀족 중심 사적음악회가 중심일 때는 귀족을 통한 사적 후원에 따라 생활하던 음악가들이 공공음악회가 들어오면서 대중들이 사는 연주회 티켓 값으로 생활하게 됐다.

부르주아 계층에게 음악이란?

18세기 중반에는 왕족과 귀족, 부르주아가 한자리에 모여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상위 계층과 사귀고 싶은 부르주아들은 음악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사교를 위해 음악회에 참석했다. 부르주아에게 음악은 자신의 교양을 나타내는 척도였다.

18세기 영국 중산층 이야기를 다룬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 다아시가 여자 주인공 엘리자베스에게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피아노는 어느 정도 배웠을 것"이라며 피아노를 쳐보라고 한다. 다아시는 "여성은 음악, 노래, 그림, 춤 등에 대해 다재다능하다는 말이 어울릴 법한 완벽한 지식을 갖추어야 해"라며 피아노가 여성의 교육 수준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귀족이면 나도 태어날 때부터 귀족인 것과 달리, 부르주아는 아버지가 부르주아였다고 해서 나도 계속 부르주아 계층으로 지낸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부르주아는 혈통이 아니라 매너로서 자신이 부르주아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어디에 가서 어떤 말투와 제스처를 쓰고, 어느 정도 교양 수준을 지녔는지 등이 부르주아에게는 중요한 자기표현 수단이었다.

부르주아는 자신보다 높은 계층인 귀족을 향한 동경과, 자신보다 낮은 계층과의 차별화 욕구로 음악이나 미술 등 교양에 관심을 가졌다.

살롱음악회, 문학과 음악의 만남

살롱음악회는 부르주아 사회의 공공음악회다. 산업혁명으로 피아노를 대량 생산하면서 부유한 귀족만 소유하던 피아노를 중하위 계층도 살 수 있게 됐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피아노를 치는 게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았으며 19세기에 이르러 피아노 교육은 부르주아 계층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하농이나 체르니 같은 교습 교재도 이 시기에 출판됐다. 피아노 문화가 확산하면서 부르주아 계층은 공공음악회인 살롱음악회 문화를 형성했다. 귀족만 모이던 챔버음악회와 달리 살롱음악회에는 귀족과 부르주아가 함께 모여 음악을 나눴다.

살롱음악회. ⓒ 이예진

본래 살롱은 문인이 모여 자기 시나 산문 등을 보여주며 감상과 비평을 주고받는 곳이었다. 음악가는 성당이나 교회에서 따로 모였다. 18세기를 넘어 살롱 문화 본격화와 함께 문인 모임과 음악가 모임이 교차하면서 시너지가 일어났다. 문학 비평에 쓰인 개념이 음악 비평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음악을 보는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 곡을 가져다 가사만 바꿔도 작곡가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문인과 음악인이 함께 하는 살롱 문화가 정착하면서 '독창성'이 음악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18세기에 들어서기 전에는 음악을 평가할 때 독창적이라는 게 좋은 평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문학에서 16, 17세기를 거치며 독창성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고, 이것이 좋은 음악을 감별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다. 현재도 독창성은 음악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다.

음악가의 삶을 바꾼 살롱음악회

독창성과 더불어 천재성도 음악가의 새로운 기준으로 떠올랐다. 당시 문학 작품을 비평할 때 작가의 타고난 능력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기 시작했는데, 이를 음악에도 적용했다는 것이다. 음악가는 전수된 기술을 갈고 닦아 연주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바뀌는 계기였다.

천재성이라는 관념이 음악가에게 적용되면서 19세기에는 예술가의 능력이 열심히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신이 부여한 영감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관념이 처음 만들어지게 된다.

음악가의 새로운 정체성은 사회적 지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재적인 예술가는 경외받아 마땅한 특별한 존재가 됐다.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가 봉건사회에서는 하인 정도였지만, 부르주아 문화인 대중음악회와 살롱음악회를 통해 천재에 가까운 지위로 바뀌었다.

살롱음악회는 장르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곡은 살롱 음악회를 통해 발전했다. 이전에도 가곡이 있었지만 '아리랑'과 같이 구전민요의 가사를 가진 곡이었다. 문인과 음악가가 살롱 문화를 함께 접하면서 괴테처럼 유명한 시인의 시에 맞춘 가곡이 많이 나오게 됐다. 음악을 평가하는 기준, 음악가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 음악 장르까지 부르주아 사회의 살롱음악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1]

요절한 천재 음악가 TOP 10[편집]

클래식 음악계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천재들이 사라져갔다.

오랫동안 많은 명작들을 남기고 떠난 사람들도 안타깝지만, 신의 계시를 받아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간 천재 음악가들은 우리에게 더욱 진한 안타까움을 남긴다. 위대한 음악가에게 순위를 매기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나, 이를 통해 그들의 짧은 생애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0. 데니스 브레인(Dennis Brain, 호른연주가) 36세(1921-1957)

영국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호른주자인 브레인은 어떠한 기술도 표현 가능한 전설적인 실력의 연주자였다. 그의 실력은 브리튼이나 힌데미트 같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작품을 만들 정도였다.

1953년에 녹음된 모차르트 <호른 협주곡 4번>은 브레인의 전설적인 명반 중 하나로 꼽히며, 현재도 이 곡의 규범이 되고 있다.

36세 때 에딘버러(Edinburgh) 음악제 공연을 마친 뒤 런던으로 돌아가는 도중 새벽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세계적인 호른 연주자들이 존재하지만, 그의 뛰어난 천재성은 지금도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9. 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Mary Du Pre, 첼리스트) 42세(1945-1987)

뒤 프레는 남자들로 가득한 클래식 연주계에서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영국 옥스포드 출신의 천재 첼리스트다.

거장 로스트로포비치는 그녀에 대해서 “내가 이룬 업적과 동등한, 아니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젊은 세대의 유일한 첼리스트”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녀가 20세에 녹음한 엘가의 <첼로협주곡>은 지금도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21세 때 만난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사랑은 이듬해 결혼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26세 때 ‘다발성 경화증’이란 병을 얻게 되어 가혹한 투병생활을 하였고, 28세 때부터는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다. 14년간 긴 투병 끝에 결국 눈을 감았다.

8. 디누 리파티(Dinu Lipats, 피아니스트) 33세(1917-1950)

루마니아 태생인 그는 1934년 빈 국제 음악 콩쿠르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등장하였다. 심사위원이었던 코트로의 초청으로 파리에 온 그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뮌쉬, 뒤카, 불랑제)에게 지휘, 작곡, 피아노를 배웠다.

27세에 이미 제네바 음악원 교수로 활동할 만큼 음악적 재능과 학문적 지식을 겸비하였으나, 백혈병으로 이후 5년 밖에 활동하지 못하였다.

비록 30세라는 젊은 나이였으나, 기교와 해석에서 당대 가장 완벽한 ‘완성된’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쇼팽, 바흐, 모차르트 연주는 모두 명반으로 남아있다.

7. 귀도 칸텔리(Guido Cantelli, 지휘자) 36세(1920-1956)

그는 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군대에서 복무하는 도중 나치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지휘자로서의 재능이 빛을 발하였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인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그의 '라스칼라(La Scala)'에서의 지휘에 감명 받아 자신의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초대하였고, 그는 여기서 5년간 객원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56년 11월 그는 '라스칼라'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지 1주일 뒤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그가 죽기 전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그를 음악감독으로 내정하였으나, 그의 사망으로 인해 뉴욕 필 음악감독 자리는 레너드 번스타인에게 주어졌다.

6.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작곡가) 39세(1898-1937)

거슈윈은 재즈를 예술 음악으로 끌어올린 미국이 낳은 천재 작곡가로 클래식계 뿐만 아니라 재즈, 뮤지컬 분야에서도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다.

그는 선율의 천재였으며 재즈와 클래식 양쪽 모두에서 높은 재능을 발휘하였으나, 뇌종양으로 4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에게는 <랩소디 인 블루>, <포기와 베스> 등으로 유명하다.

5.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작곡가) 38세(1809-1847)

생전에 '19세기 모차르트'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당대에 재능을 높이 인정받았으며,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 서곡을 작곡한 것이 그의 나이 17세였다는 사실은 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 잘 보여준다.

과도한 작곡 활동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Leipzig Gewandhaus Orchestra) 운영, 그리고 누이의 사망 충격 등의 영향으로 38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른 요절한 천재들에 비해 생전에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4. 조르쥬 비제(Georges Bizet, 작곡가) 37세(1838-1875)

23세 때 비제는 이미 리스트가 '자신과 같은 수준의 연주자'라고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그는 피아니스트 활동보다 작곡에 열중하였다.

1875년 37세 때 그의 걸작 오페라 <카르멘>이 파리에서 초연 되었으나, 당시 바그너와 베르디의 오페라가 지배하던 시대라 그의 작품은 크게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3개월 뒤 결핵성 호흡기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뒤, 오페라 <카르멘>은 당시 오페라계에 혁신을 일으키게 되었고 일반 대중들도 열광하는 작품이 되었다. 브람스는 <카르멘> 공연을 20번이나 관람할 만큼 그의 음악에 감탄하였고,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zsche)는 ‘찬란한 태양의 음악’이라고 오페라 <카르멘>을 극찬하였다.

3.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작곡가) 31세(1797-1828)

그가 16세 때 이미 교향곡 1번을 작곡했다는 사실이 그의 짧은 생애를 감안하면 빠르다고 볼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 31년의 생애 중 그가 남긴 주옥같은 가곡이 600여 개에 달한다는 점에서 그의 놀라운 작곡 속도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서 교향곡을 9곡이나 작곡했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다.

그의 엄청난 작곡 속도를 감안할 때, 만약 그의 수명이 5년 정도만 더 연장되었더라면 더 많은 걸작을 세상에 남겼을 것이다. 여기서 소개한 10명 중 가장 일찍 세상을 떠난 음악가다.

2. 쇼팽 (Frederic Francois Chopin, 작곡가) 39세(1810-1849)

베토벤 없는 교향곡을 상상할 수 없듯이, 쇼팽 없는 피아노곡을 상상할 수 있을까?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와의 교제는 그의 결핵 질환을 오히려 악화시켰다. 하지만 그녀와의 사랑과 이별이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200여 곡의 피아노 작품들은 후세의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곡들은 쇼팽의 음악들이다.

1.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작곡가) 35세(1756-1791)

그는 클래식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악가이자, 가장 불행한 음악가일 것이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그를 잃은 것은 음악계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큰 손실일 것이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그가 만든 작품들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경제력은 오히려 더 궁핍해졌다. 장남과 삼남을 잃는 비극에 본인의 중병까지 겹치면서, 그의 최후는 더 비참해졌다.

그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시대를 앞서간 천재성으로 수많은 명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귀족들의 소유였던 클래식 음악을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그의 음악은 베토벤이란 위대한 작곡가가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이미 서거하였지만, 그의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시작된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세계 최고의 음악 축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2]

세계에 한국을 빛낸 음악가들[편집]

윤이상[편집]

경남 산청(山淸) 출생.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1935년 오사카[大阪]음악학교에 입학, 1937년 귀국하였다.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56년 프랑스로 가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59년 독일에서 열린 다름슈타트음악제 때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正樂) 색채를 담은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 유럽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강제소환, 2년간의 옥고를 치뤄야만 했으나, 세계음악계의 구명운동을 힘입어 풀려났다.

71년 독일에 귀화하고, 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의 《심청》을 비롯, 옥중에서 작곡한 《나비의 꿈》(6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81),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87),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94) 등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서양음악의 기교와 스타일, 한국전통음악 '아악'의 미학논리를 통해 만들어낸 자신의 고유의 음을 융합시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동양의 도교사상의 음양의 원리가 적용되면서 부분 속에 전체를,변화 속에서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그의 음악세계는 서구의 예술세계에 새로운 충격을 주면서 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었다. 특히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나라를 빼앗긴 일제로부터 분단까지 우리 민족의 고통과 희망은 그의 예술을 관통한 주요한 주제였다.‘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또는'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산파(産婆) 역할도 하였다.

정명훈[편집]

세계적인 지휘자로 한국을 대표해 온 음악가 정명훈씨는 동양인이라는 불리한 입지를 극복하고 세계정상의 오페라단 상임지휘자를 지내는 등 해외에서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쳐왔다.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 3년만에 서울시향과 협연을 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 그는 9세때 미국으로 유학한 이후 뉴욕타임즈 주최 WQXR 피아노 콩쿠르 1위 입상을 필두로, 쇼팽 콩쿠르, 뮌헨 국제음악 콩쿠르,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입상하고 챔버 뮤직상을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지휘자로서의 변신을 시도한 정명훈씨는 78년 LA필의 부지휘자로부터 베를린 필, 뮌헨 필, 암스테르담 필, 런던 필, 파리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이탈리아 피렌체오케스트라 수석 객원지휘자에 이르기까지 지휘자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89년에는 프랑스의 자랑이자 세계 정상의 오페라단인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총감독 겸 상임지휘자가 됨으로써 세계 정상급의 오페라단을 지휘하게 된 첫번째 한국인으로 기록됐다.

그에 대한 세계 음악계의 평가는 화려한 수상이력에서도 나타난다. 89년에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니니상을 수상하였으며, 프랑스 문화부가 수여하는 오시피에 문화훈장과 일본의 아사히 음악상을 받고, 음악을 통해 인류의 화합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아 초대 유엔 마약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최근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되는 등 유럽 음악계의 중앙무대에 복귀한 지휘자 정명훈씨는 아시아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음악감독을 맡아 음악을 통한 아시아인의 협력과 화합을 위해 힘쓰고 있기도 하다.

정경화[편집]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 4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5세때 바이올린으로 바꾸어 존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12세때 언니인 명화, 남동생인 명훈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유명한 교수 이반 갈라미안 에게 배웠으며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쿨에서 주커만과 공동으로 1위를 차지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970년 지휘자 안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협연하여 절찬을 받음으로써 유럽에 데뷔했다. 그다음 해에 언던 심포니와 함께 일본을 거쳐 모국을 방문했다. 1972년엔 로린 마젤이 지휘하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협연으로 베를린 페스티발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어려운 콘체르토를 연주했을때는 청중들이 일어서서 5분간이나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며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그 뒤 하이팅크가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도 협연했으며 다시 로린 마젤의 협연으로 베를린 필하모니, 클리블란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정경화는 합리적으로 음악을 다운다기보다는 어떤 작품이든지 도전해 보는 태도로 음악을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작곡자 스트라빈스키는 정경화가 연주하는 자기의 콘체르토를 듣고 "내 작품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고 하며 절찬했다고 한다. 수차례의 고국 방문 연주로, 또 데카의 음반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그녀는 현제 세계 무대에서 가장 이름을 떨치고 있는 한국의 음악가이다.

장영주[편집]

장영주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는 모두 한국인이다. 그녀는 4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배운지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필라델피아 지역의 오케스트라들과 연주했다. 그녀는 8세 때 주빈 메타와 리카르도 무티 앞에서 오디션을 받았는데, 이들은 곧 뉴욕 필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연주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 1992년 5월 그녀가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상을 역대 최연소로 수상함으로써,그녀의 놀라운 재능은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는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재능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녀는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미국의 여러 음악 중심지에서, 뉴욕 필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시카고 필, 보스턴 심포니,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LA 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및 피츠버그 심포니를 포함한, 거의 모든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또한 그녀는 유럽에서 베를린 필,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그리고 영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그녀가 함께 협연했던 지휘자로는 다니엘 바렌보임, 콜린 데이비스 경, 샤를르 뒤트와,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제임스 르바인, 쿠르트 마주어,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 앙드레 프레빈, 볼프강 자발리쉬, 레오나르드 슬라트킨 등이 있다. 그녀는 콘서트 실황 중계나 음반의 방송 등을 통하여 그동안 방송에 많이 출연하여,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백건우[편집]

백건우는 열살 때 서울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열두살 때 국립 교향악단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하는 등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다.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간 백건우는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위대한 전통을 잇고 있는 로지나 레빈(Rosina Lhevine)을 사사하였다. 백건우는 1967년 런던으로 건너가 일로나 카보스(Ilona Kabos)를 사사하였고 같은 해 나움버그 콩쿠르(Naumberg Award)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1969년 백건우는 리벤트리(Leventrill)콩쿠르의 결선에 올랐으며 같은 해 드디어 세계적인 권위의 부조니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후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백건우는 1972년 뉴욕의 앨리스 툴리 홀에서 처음으로 라벨의 독주곡 전곡을 연주하였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 이어 런던과 파리에서 연주함으로써 라벨의 뛰어난 해석자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백건우는 또한 리스트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6개의 리사이틀 시리즈를 파리와 런던에서 개최하여 크게 호평받았다. 1987년 백건우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프롬스 콘서트의 "Last Night of the Proms"에 출연하였으며 1991년 5월에는 폴란드 TV로 중계된 '프로코피에프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안토니 윗 지휘의 폴란드 국립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함께 프로코피에프의 5개의 협주곡 모두를 연주하였다.

이외에도 백건우는 미국과 아시아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하고 있으며, 유럽의 주요 공연장에서 연주회를 개최한 것을 비롯하여 블라디미르 스피바코프 지휘의 러시안 스테이트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스크바 12월 축제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였다. 백건우는 또한 1996년 4월 보르도 오케스트라와 함께 3개의 바르톡 협주곡을 연주하였다.

이런 화려한 경력과 함께 백건우는 1992년 1월, 스크리아빈 피아노 작품집 앨범으로 디아파종 상을 수상하였으며, 1993년 낙소스 레이블로 발매된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5개 전곡 녹음으로 다시 한번 디아파종 상을 수상하는 동시에 프랑스 3대 음반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외에도 버진 레이블로 발매된 "헝가리안 랩소디"는 그라모폰 시상식에서 크게 호평받았다. 그리고 2000년 DECCA와 계약을 맺은 후 첫 CD로 바흐-부조니가 그리고 2001년 10월 17일 두 번째 CD 포레의 소품집이 출반되어 또 한번 음악계의 찬사를 받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면서 연주에 전념하고 있는 그는 200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기사훈장 designtimesp=8076>을 수여 받았으며, 국내의 호암재단으로부터 <호암예술상 designtimesp=8077>을 수상하였고, 아셈회의를 기념하는 음악회에서 재일 북한국적의 지휘자 김홍재와 부조니를 협연하였다.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1994년부터 프랑스 디나르의 에머랄드 해변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한나[편집]

장한나가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세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다 첼로로 바꾼 것은 여섯 살 때. 첼로와 사랑에 빠진 계기가 자클렌 뒤 프레의 '엘가 협주곡'을 듣고 나서부터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혼신을 다하는 자클린 뒤 프레의 연주에서 뿜어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 듣는 이를 끌어들이는 강한 흡인력이 장한나를 사로잡았다.

앳된 모습의 소녀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연주 의자에 앉아 첼로 현에 활을 긋는 순간, 마치 무아에 빠진 듯한 표정과 연주에서 자클린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이야기해준다.7살에 국내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 8살에 서울시향과 하이든 첼로 협주곡을 협연하는 등 특별한 재능을 보인 장한나는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음악 수업을 받는다. 11살에는 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를 보고 싶은 마음에 참가한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국제 콩쿠르에서 대상과 현대음악상을 수상하면서 세계 음악계를 놀라게 하였다. 장한나의 재능을 아낀 세계적인 거장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으며 이후 음악적 성장과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콩쿠르를 계기로 인연을 맺은 '할아버지' 로스트로포비치는 장한나를 '정신적인 딸'로 생각하고 있으며 장한나를 실질적으로 발굴하여 데뷔시킨 가장 큰 후원자 미샤 마이스키, 얼마전 젊은 나이로 타계하여 음악팬들의 안타까움을 더한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 세계 음악계의 원로이자 차기 뉴욕필의 상임지휘자로 떠오른 거장 로린 마젤 등 많은 거장들이 장한나를 아끼고 후원하고 있다.

조수미[편집]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돈나로 데뷔한 조수미. 카라얀으로 부터'100년에 한 두명 나올까 한 목소리의주인공.', 메타로부터'신이 주신 목소리'라는극찬을 받으며세계를 휩쓸고 있는 그녀는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어릴때 무용, 성악, 가야금, 피아노 등 다방면에 걸친 폭넓은 교양을 익혔고 또 소질을 보였던그녀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어머니에 의해, 그 유달리뛰어난 성악적 재능을 인정받고 성가가로 클 수 있는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다. 동북 국민학교를 거쳐 선화 예중,고를 수석으로입학했던 그녀는 서울대 성악과를 과 개설 사상 최고의 실기점수를 받으며 수석으로 입학, 이때부터이미 남다른 가능성을 지닌 재목으로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교 생활에 크게 만족하지못했던 그녀는 입학한지 채 1년도 않되어 성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로의 유학을 떠나게 된다. 역시 대어다운 탁월한선택이었다. 이곳의 세계 적인 명 성악가인 산실 '산타체칠리아'음악원에 입학하면서 그녀는 비로서 그천재성에 걸맞는 순도 높은 조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그녀의 목소리에 새 생명력을 불어 넣어준 이는음악원의 자넬라 보넬리 여사. 비록 메조소프라노로 음역은달랐지만 그녀는 조수미의 고음을 연마시켜주고완벽한 테크닉을 갖추도록 큰 공헌을 했다.

음악원 유학 2년만인 85년 그녀는나폴리 존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제무대에 두각을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어 여러 콩쿠르를 차례로석권하면서 경력을 쌓은 그녀는 드디어 1986년 정식으로오페라 데뷔를 갖게 된다. 이탈리아 5대 극장의하나인 트리스테 베르디 극장에 <리골레토 designtimesp=8164>의 질다로출연한것이 그것. 이때 선보인 환상적인 가창으로거장 카라얀을 감복시킨 그녀는 2년뒤 그의 오디션에 초청되어함께 작업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결정적인전기를 마련했다. 이후 라 스칼라(88), 메트(89),코벤트 가든(91), 빈 국립 오페라(91), 파리 오페라(93)등 소위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을 차례로 섭렵하며, 유럽과 미국의 음악펜을 열광시킨 그녀는 이제 셰릴 스투더, 캐슬린 베틀의 뒤를 잇는 세계의 프리마돈나로서 당당히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강동석[편집]

탁월한 예술성과 투철한 음악가 정신, 그리고 대가적 기교로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강동석은 전 세계에 걸쳐 열렬한 환호속에 연주활동을 해오고 있다. 8세에 첫 연주회를 가져 "신동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리며 일찍부터 재능을 드러냈던 그는 12살 때 동아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고, 1967년 뉴욕 줄리어드 음악학교를 거쳐 커티스 음악원에서 이반 갈라미언에게 사사했다.

1971년 17세의 나이로 미국 음악계가 가장 주목하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재단 콩쿠르와 워싱턴의 메리웨더 포스트 콩쿠르에서 연달아 우승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으며, 케네기 센터에서의 데뷔 연주회와 세이지 오자와와의 협연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세계적인 연주자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후 세계 3대 바이올린 콩쿠르인 몬트리올 콩쿠르, 런던 칼 플레쉬 콩쿠르, 브뤼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차례로 석권하며 그의 명성을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에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세계의 저명한 오케스트라들과 함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 클리브랜드, 로스앤젤레스, 세인트루이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몬트리올 오케스트라와 유럽의 로얄 필하모닉, 런던 필하모닉, BBC 오케스트라, 할레, 버밍햄, 스코틀랜드 국립 오케스트라, 뮌헨 필하모닉,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닉, 게반트 하우스,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 고텐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라디오, 폴란드 국립 오케스트라와 로테르담 오케스트라 등 수많은 오케스트라들과의 협연을 비롯해 뒤트와, 오자와, 마주르, 제르비, 메누인, 잘로넨, 슬라트킨, 정명훈, 바르샤이, 잰슨스, 포스터, 노링턴, 스베틀라노프, 베르그룬트, 라자레프와 헤르비히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함께 공연하며 섬세하고 이지적인 연주로 관객을 매료시켰다.

아시아 순회연주에서는 NHK, 요미우리, 도쿄 메트로폴리탄, 홍콩, 싱가포르, KBS 그리고 서울시향과 협연하였다. 특히 서울시향과 함께 미국과 유럽에서 순회연주를 가지기도 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전역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방송 협회의 여섯개 오케스트라 모두와 협연했고, 런던 프롬즈를 비롯한 그의 콘서트들은 많은 나라에서 TV와 라디오로 자주 방송되었다. 실내악에도 강한 관심을 가져 스폴레토, 산타페, 쿠모, 시애틀, 벤쿠버, 뉴포트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실내악 축제들을 위시한 다양한 실내악 페스티발에 참여했다. 또 링컨센터 실내악 협회의 게스트 아티스트로 뉴욕에서의 연주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을 순회 공연했다.

1981년에는 롱 티보 국제 콩쿠르의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위촉받은 바 있으며, 영국과 벨기에 왕실 초청 연주를 비롯해 백악관에서 레이건 부처가 마련하는 음악회에 초청되어 백악관 연주를 갖기도 하였다. 강동석의 폭 넓은 레퍼토리에는 표준적인 작품들뿐 아니라 대다수 연주가들이 도외시하는 작품들 또한 많이 포함되어 있다. 1995년 윤이상의 협주곡 1번을 초연하여 찬사를 받았고, 1997년에는 '세계음악제' 개막 연주회에서 윤이상의 협주곡 3번을 아시아 초연하여 다시금 그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최근 영국에서 BBC가 위촉한 앨런 호디노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미스트랄"을 역시 초연하면서 새로운 곡에 대한 그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녹음분야에서도 그는 잘 알려진 작품들뿐 아니라 닐슨과 엘가의 협주곡, 오네거와 아클란의 실내악 전곡 그리고 푸르트 뱅글러의 소나타를 녹음하였다. 그의 앨범들은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아카데미 샤를르크로부터 수상한 그랑프리와 누벨르 아카데미 디 디스크로부터 받은 그랑프리 등이 그것이다. 영국의 '세계 음악 인명사전', 프랑스의 '연주가사전'에 그의 이름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 음악계에 이름을 떨친 강동석은 끊임없이 탐구하고 도전하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빈틈없는 기교, 완벽한 활놀림으로 영혼을 감화시키며, 그의 위상과 명성은 이미 비르투오조의 반열에 우뚝 서있다. 2000년부터 세계적 제약회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 후원, 한국 간의학회로부터 간염퇴치 명예대사로 위촉되어 전국 투어 콘서트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홍혜경[편집]

풍부한 성량과 서정적인 음색의 중견 프리마돈나인 홍혜경은 성악가들에게는 '꿈의 무대'로 불리우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시즌마다 세계 정상의 성악가?지휘자들과 협연하고 있는 "디바"로 16년째 메트 무대를 지켜 오고 있다. 프리마돈나 홍혜경은 예원학교 2학년때 도미하여 줄리어드 음악원과 대학원을 나와, 1982년 한국인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1984년 제임스 레바인이 지휘하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의 세르빌리아역으로 메트로폴리탄에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1986년에는 워싱턴 오페라 가이드지에서 '올해의 예술가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오직 메트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욕심 부리지 않고 신중하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더하여 자신의 목소리 색깔을 정확히 파악하고 풍부한 성량과 서정적인 음색, 음역에 맞는 역할만을 선택, 완벽한 발성과 음역의 역량을 최대화하는 절제력을 발휘했다.

이런 그녀의 음악성은 "라보엠"의 미미, "리콜레토"의 질다,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역 등에 수차례 출연하면서 음악적 깊이가 더해지면서 더욱 세련되고 유려해졌다. 1991-1992년 시즌에는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 기념 오페라 다섯 작품 중 무려 네작품에 출연하였고, 1996-1997년 시즌에는 유럽 무대에 진출, 빈 국립 오페라단이 공연한 "라보엠"의 미미역으로 출발하여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카르멘"의 미카엘라역, 니스와 네덜란드 오페라에서의 "라보엠"역으로 영역을 넓혀 성공을 거두었다.

따뜻하고 서정적인 그녀의 음악성은 유럽무대에서 청중들과 언론을 열광시킨 후 메트로 돌아와 1997년 "투란토트"에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상대역인 '류'역을 맡아 열연했고, 1998년 뉴욕 챔버 오케스트라 데뷔 리사이틀에서 전회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이변을 낳았다. 곧이어 케네기센터의 스프링 갈라 콘서트에서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와 듀오로 열창했으며, 클링턴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 리사이틀에서는 "그리운 금강산"을 불러 화제를 모았다. 또한 첫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세이지 오자와 협연하는 등 그녀에게는 환호와 갈채가 끊이지 않았다. 같은 해 8월에는 첫 독집 앨범으로 '빌보드'지 클래식 차트에서 22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1996-1997년 시즌에 "에브게니 오네긴"의 타티아나역으로 워싱턴 오페라로부터 '올해의 예술가상'을 수상하기도 한 홍혜경은 모차르트 200주년 기념 시즌에서 "이도메네오"의 일리아역을 플라시도 도밍고와 공연한 것을 비롯해 "마술피리"의 파미나,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라보엠"의 미미, 제피렐 리가 새로 제작한 "카르멘"의 미카엘라,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상대역인 "리골레토"의 질다역 등 총 150여 공연에서 8개의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 내며 명실공히 프리마돈나로 자리잡았다.

1999-2000 시즌에는 시즌 초연을 포함하여 7차례나 공연을 했으며, Heavy voice가 주로 맡아왔던 바그너 오페라에까지 진출하여 Light voice로서 과감히 새로운 영역 확보에 진입하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원숙하고 안정된 빛깔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부동하게 만들고 있는 홍혜경은 뉴욕타임즈로부터 '디바'의 칭호를 받으며 생애 최고의 황금기를 맞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해를 맞아 월드컵 조직위원회로부터 명예홍보대사로 위촉, 2001년 12월 1일 부산BEXCO 에서 열린 한.일 월드컵 본선 조추첨 행사에 초청되어 연주한 바 있다.

김덕수[편집]

1978년 공간사랑에서 사물놀이의 초연을 한 이후로 김덕수라는 이름과 사물놀이는 항상 함께 다녔다. 다섯살때 부친의 손에 이끌려 조치원 난장에서 남사당 무동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선 이후 40년이 넘 는 음악생활 속에서 가장 으뜸가는 업적은 자칫 기억속에 사라져 갈 뻔했던 '풍물' 이라는 전통을 밑 천삼아 사물놀이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농악에 쓰이는 기본적인 타악기인 북, 장고, 징, 꽹과리의 네 악기 (사물) 를 이용하여 마당놀이적 성격이 강한 전통적 농악의 다채로운 음악 재료들을 도회적 무대공간으로 옮겨 재구성하고 재창조하여 양식화시킨 것이 사물놀이이다. 전통의 새로운 해석과 재창조를 통해 20세기 말의 한국적인 상황을 담은 가장 한국적인 심성의 예술이다.

김덕수는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다. 뿌리는 우리 것, 옛것에 있지만 갇혀있지 않고 항상 자유롭다. 수많은 해외 공연과 다른 나라의 아티스트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것과의 만남, 새로운 음악과의 융합을 시도해왔다. 사물놀이는 이미 민속음악이 아니라 보편화된 세계의 음악이 되어가고 있고, 그 중심에 김덕수가 있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 바로 재즈 그룹인 <레드선>과의 공동작업이다. <레드선>은 울프강 푸쉬닉(색서폰), 자말라딘 타쿠마 (베이스), 릭 야나코네 (기타), 린다 샤록 (보컬)로 구성된 세계적인 재즈그룹이다. <레드선>과 김덕수는 서로의 음악에 깊은 흥미와 감동을 느끼고 함께 네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1집은 라는 타이틀의 음반으로 1989년 POLYGRAM사에 의해 제작되었다. 경기도당굿, 동해안 푸너리 등의 무속장단에 기초한 이 음반은 새로운 음악에 대한 흥분과 에너지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93년에 제작된 두 번째 음반은 라는 타이틀로 ECM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 "첫 음반은 비엔나에서, 두 번째 음반은 한국에서 녹음했다. 완전히 다른 문화, 다른 기후와 토양에서 만들어진 음악이기 때문에 담고 있는 정서도 완전히 틀리다. 두 번째 음반의 <수양골>이라는 곡은 춘천의 강변에서 만들어진 곡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여유로운 마음가짐 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곡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라고 김덕수는 이야기한다. 1995년 한국의 King Record에서 이라는 타이틀로 제작된 세 번째 앨범에는 동살풀이 장단 위에 힙합, 레게, 랩, 재즈와 같은 서양 음악들이 녹아 있고, 판소리가 서양 악기들과 만난다. 하지만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단순히 크로스오버된 음악이 아니다. 우리 장단은 많은 음악을 포용할 수 있을만큼 열려있는 음악이고, 은 그러한 우리 음악을 바탕으로 한 우리만의 새로운 음악이다.

네번째 음반 는 음반 전체가 드라마처럼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는 땅을 뜻하고, 마지막을 알리는 징은 하늘을 뜻한다. 그 안에서 자유로이 노는 소리와 연주는 사람의 것이다. 땅을 딛고 하늘을 향하는 (From the earth, to the sky) 웅대한 꿈이 이 음반의 주제이다. 이 음반의 기본 흐름은 그간 사물놀이가 연주해 온 '삼도 농악 가락'이다. 우리 나라 각도의 풍물 가락을 재구성, 하나의 산조와 같은 형식을 갖고 있는 '삼도 농악 가락'은 꽹과리, 징, 장고, 북의 사물에 의해서 연주되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완벽한 구 조와 구성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사물놀이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음악을 잘 이해하고 있는 레드선과의 협연을 통해 더욱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었다.

음악에 대한 김덕수의 열려있는 모습은 97년 12월 발매된 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앨범에서 김덕수는 대중음악계의 지인들과 함께 연주를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김광민, 한충완, 정원영, 한상원과 같은 재즈 뮤지션, 유진박과 같은 클래식과 팝의 경계선상에 있는 크로스오버적인 뮤지션들뿐 아니라 넥스트와 같은 록그룹, DJ DOC의 이하늘과 같은 랩퍼도 있다. 이들은 김덕수와 함께 연주함으로써 한국 전통음악의 거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비단 이 음반에서 뿐만이 아니라 서태지 2집에 수록된 <하여가>에서의 공동작업, 신해철의 동계아시안게임 오프닝 <아리랑>에서의 공동작업, <난장, 뉴호라이즌>에서의 구준엽과의 공동 작업 등 김덕수의 음악세계는 경계가 없다. 사물놀이를 통한 전통의 재창조. 만족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다니며 한 곳에 갇히지 않는 김덕수의 음악 여정은 바로 세계로 향하는 한국 문화의 자존심이다.

신영옥[편집]

서울 태생의 신영옥은 줄리어드 음악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리골레토 질다역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화려하게 입문하였다. 맑고 아름다운 음성과 기품있는 외모로 클래식 애호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신영옥은 뉴욕, 파리, 런던, 캐나다. 칠레, 이탈리아, 중국, 베이징 등 전세계 오페라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세계 정상의 소프라노 신영옥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리골렛토의 질다로 데뷔한 이래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가면 무도회의 오스카, 청교도의 엘비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돈 죠반니의 쩨를리나등의 주역을 맡으며 세계무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또한 파리 바스티유 극장에서 질다 및 오스카,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질다, 쾰른 오페라에서 코지 판 투테의 데스피나, 토리노의 레지오 극장에서 엘비라, 오페라 코믹에서 아디나, 그리고 캐나다 오페라 컴퍼니에서 질다 및 루치아로 세계 최고의 무대와 페스티발에서 활동하며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오페라 무대에서의 프리마돈나로서 뿐만 아니라 콘서트 아티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해 온 신영옥은 링컨센터의 모스틀리 모짜르트 페스티발에서 모짜르트 아리아 여주회, 테너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한 갈라 콘서트, 뉴저지 심포니와의 카르미나 부라나 협연, 사토쿠아 페스티발 오케스트라 협연, 뉴욕 엘리스 툴리 홀 및 토론토 로이 톰슨홀에서의 독창회를 통해 섬세한 음악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최근 제임스 콜론이 지휘한 신시내티 메이 페스티발에서 하이든의 로드 넬스 미사와 스트라빈스키의 나이팅게일을 연주해 화제가 되기도 하였으며 에사 페카 살로넨이 지휘하는 LA 필하모닉의 1999-2000 시즌 개막공연을 하였다. 신영옥은 벨칸토 아리아집 Vocalise, 성가곡집 Ave Maria, r그리고 크로스 오버 음반 My Romance등을 통해 음반 활동을 해왔다.

왕성한 연주 활동과 음반 작업을 하고 있는 그녀는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등 3테너와 각각 공연을 갖었고 '99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개최된 '밀레니엄 콘서트', 메트 무대를 뜨겁게 달군 오페라 리골레토 중 질다역을 소프라노 조수미와 함께 공연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3]

각주[편집]

  1. 김현균 이예슬 방재혁 기자, 이예진 PD, 〈음악가, 귀족의 하인에서 대중의 천재로〉, 《단비뉴스》, 2021-03-17
  2. 박민우, 〈요절한 천재 음악가들 : TOP 10〉, 《ZUM 허브》, 2018-02-20
  3. 제뉴어리, 〈세계에 한국을 빛낸 음악가들 - ┠▒ 클래식노트 ▒┨ - SPO Friends〉, 《다음카페》, 2006-10-03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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