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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국기.jpg|썸네일|300픽셀|오른쪽|'''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국기]] | [[파일: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국기.jpg|썸네일|300픽셀|오른쪽|'''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국기]] | ||
[[파일:탈레반 정부 국기.jpg|썸네일|300픽셀|오른쪽|'''탈레반 정부''' 국기]] | [[파일:탈레반 정부 국기.jpg|썸네일|300픽셀|오른쪽|'''탈레반 정부''' 국기]] | ||
− | '''아프가니스탄'''(파슈토어·다리어: افغانستان, 영어: Afghanistan)은 [[아시아]]에 있는 [[내륙국]]이다 | + | '''아프가니스탄'''(파슈토어·다리어: افغانستان, 영어: Afghanistan)은 [[아시아]]에 있는 [[내륙국]]이다. 정식 명칭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파슈토어: امارت اسلامی افغانستان, 다리어: د افغانستان اسلامي امارت, 영어: 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이다. 간략히 '''아프간'''이라고도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지리적으로는 [[남아시아]]에 속하는데, 넓은 의미로 [[중동]] 지역에도 속한다. 북쪽은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북동쪽은 [[중국]], 동쪽과 남쪽은 [[파키스탄]], 서쪽은 [[이란]]과 맞닿아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다민족 국가로서 주류 민족인 [[파슈툰족]]을 비롯해 [[타지크족]], [[하자라족]], [[우즈베크인]], [[아이마크인]] 등이 거주한다. 역사적으로 [[중동]]과 [[아시아]]의 여러 지역의 문화가 만나는 곳이었으며, 여러 세기를 거쳐 다양한 [[민족]]들의 [[고향]]이 되었다. 2021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여행금지국에 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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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 개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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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지도자: [[하이바툴라 아훈드자다]] | * 최고지도자: [[하이바툴라 아훈드자다]] | ||
− | + | 아프가니스탄은 전략적인 위치로 인해 수많은 군사 활동이 이루어진 곳이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정복 세력으로는 [[알렉산더 대왕]], [[이슬람제국]], [[몽골제국]], [[대영제국]], [[소련]], 그리고 현대의 서방 세력에 이른다. 또한 [[쿠샨제국]], [[에프탈제국]], [[사만 토후국]], [[사파르 토후국]], [[가즈나제국]], [[고르 술탄국]], [[할지 술탄국]], [[무굴제국]], [[호타크제국]], [[두라니제국]], 기타 등등의 제국들을 일으킨 민족들의 근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1747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두라니제국]]을 세웠는데, 이 때가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나중에 두라니제국의 도읍은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겨졌으며, 제국 영토 대부분은 이웃 강국들에게 빼앗겼다. 19세기 말, [[영국령 인도제국]]과 [[러시아제국]]이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이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은 두 제국의 완충국으로 전락하였다. 제3차 앵글로-아프간 전쟁 이후 1919년 8월 19일에 이 나라는 [[대영제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하였다. [[자히르 샤]]의 40년 통치 동안 아프가니스탄은 평화를 유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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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970년대 말부터 아프가니스탄은 내전 상태에 빠진 상황이였으며, 1979년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001년 [[미국]] 주도로 [[탈레반]]을 축출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외국의 점령을 겪게 되었다. 2001년 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대서양 조약기구 군대로 구성된 국제 안보 지원군(ISAF) 창설을 승인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후발 개발도상국의 하나로, 농업과 목축업의 의존도가 높다. 현재 해외 원조로 재건되고 있으나 심각한 내부 분쟁을 겪고 있다. 최근에는 1000억 달러 규모의 전국적인 재건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미군 철수 직후 이어진 탈레반의 공격(2021년 탈레반 공세)으로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정부가 탈레반에 항복하고 대통령 등이 외국으로 도주함에 따라(카불 함락),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은 탈레반에게 권력이 넘어가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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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판지시르주]]에 있는 민병대와 기존 정부군, 부통령 등의 정치가가 합세하여 판지시르 저항군을 결성해 판지시르주에서 탈레반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하며,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의 철수를 시작으로 탈레반이 승리하기 시작하고 2021년 탈레반 공세를 마지막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탈레반의 승리로 끝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은 멸망하고 20년만에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 ||
== 역사 == | == 역사 == | ||
근대적인 아프가니스탄 국가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1747년에 세웠으나, 이 땅은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며 다양한 문명들이 들어선 바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루이스 뒤프레, 스미소니언 학회 등에서 발굴한 원시 시대 유적을 보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땅에 사람이 산 것은 적어도 50,000년 전의 일이며, 이 지역의 농경 집단은 세계적으로 초기에 속함을 알 수 있다. | 근대적인 아프가니스탄 국가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1747년에 세웠으나, 이 땅은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며 다양한 문명들이 들어선 바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루이스 뒤프레, 스미소니언 학회 등에서 발굴한 원시 시대 유적을 보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땅에 사람이 산 것은 적어도 50,000년 전의 일이며, 이 지역의 농경 집단은 세계적으로 초기에 속함을 알 수 있다. | ||
− | 아프가니스탄은 수많은 [[인도]]-[[유럽]] 문명들이 상호작용하고 투쟁하던 독특한 연결점이며,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땅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은 온갖 민족의 터전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박트리아]], [[아리아]], [[아라코시아]] 등 [[인도이란인]]들도 있었다. 또 이 땅을 정복한 집단으로는 [[ | + | 아프가니스탄은 수많은 [[인도]]-[[유럽]] 문명들이 상호작용하고 투쟁하던 독특한 연결점이며,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땅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은 온갖 민족의 터전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박트리아]], [[아리아]], [[아라코시아]] 등 [[인도이란인]]들도 있었다. 또 이 땅을 정복한 집단으로는 [[메디아제국]], [[페르시아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 [[셀레우코스제국]], [[인도-그리스]] 왕국, [[튀르크인]], [[몽골인]] 등이 있었다. 현대에는 [[영국]]과 [[소비에트]]가,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과 동맹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원주민 집단은 주변의 [[이란 고원]], [[중앙 아시아]], [[인도 아대륙]]을 침략하여 자신들의 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
===이슬람 이전 시대=== | ===이슬람 이전 시대=== | ||
20세기에 이루어진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적 영역은 이웃 지역들과 문화, 교역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 시대]]의 유물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되어 왔다. 도시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문디각 (칸다하르 인근의 남부 도시)은 인근의 [[인더스 문명]]의 식민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더욱 최근의 발견들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이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영역을 넓혀서, 현재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 지역에 고대 문명이 존재했던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더욱 자세하게는, 현재의 파키스탄 북동부에서 인도의 북서부와 아프가니스탄의 북동부까지 영역을 넓혔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이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쇼투가이의 아무다리야 강에서 발견된 바 있다. 여러 작은 규모의 인더스 부락들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되어 왔다. | 20세기에 이루어진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적 영역은 이웃 지역들과 문화, 교역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 시대]]의 유물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되어 왔다. 도시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문디각 (칸다하르 인근의 남부 도시)은 인근의 [[인더스 문명]]의 식민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더욱 최근의 발견들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이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영역을 넓혀서, 현재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 지역에 고대 문명이 존재했던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더욱 자세하게는, 현재의 파키스탄 북동부에서 인도의 북서부와 아프가니스탄의 북동부까지 영역을 넓혔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이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쇼투가이의 아무다리야 강에서 발견된 바 있다. 여러 작은 규모의 인더스 부락들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되어 왔다. | ||
− | 기원전 2000년 이후에는 [[중앙아시아]]의 반유목민이 계속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남하하였다. 그 중엔 절대다수의 인도이란어파를 사용하는 인도이란인이 있었다. 이 종족은 이후에 더 멀리 [[남아시아]], [[서아시아]], 또는 [[카스피 해]]의 북부 지역을 통해 [[유럽]]으로 이주해왔다. 당시 이 지역은 [[아리아나]]라고 불렸다. 이들은 아이리아넴 바에자라는 민족을 이루게 된다. 인도이란인의 원래 터전은 아나톨리아, 쿠르디스탄, 중앙 아시아, 이란 또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는데, 이런 각 주장에 따라 역사상의 이주 방향이 달라진다. 나중에 파르티아와 | + | 기원전 2000년 이후에는 [[중앙아시아]]의 반유목민이 계속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남하하였다. 그 중엔 절대다수의 인도이란어파를 사용하는 인도이란인이 있었다. 이 종족은 이후에 더 멀리 [[남아시아]], [[서아시아]], 또는 [[카스피 해]]의 북부 지역을 통해 [[유럽]]으로 이주해왔다. 당시 이 지역은 [[아리아나]]라고 불렸다. 이들은 아이리아넴 바에자라는 민족을 이루게 된다. 인도이란인의 원래 터전은 아나톨리아, 쿠르디스탄, 중앙 아시아, 이란 또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는데, 이런 각 주장에 따라 역사상의 이주 방향이 달라진다. 나중에 파르티아와 사산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 곳은 "아리아인들이 지배하는 땅"을 뜻하는 '이란사르'로 불리게 되었다. |
− | [[자라투스트라교]](조로아스터교)가 발생한 곳은 기원전 1800년~800년 사이의 아프가니스탄 땅으로 여겨지는데, 창시자 자라투스트라는 발흐에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자라투스트라교가 발흥하던 시기에 아베스타어와 같은 고대 동부 이란 언어는 이 지역에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아케메네스 왕조의 [[ | + | [[자라투스트라교]](조로아스터교)가 발생한 곳은 기원전 1800년~800년 사이의 아프가니스탄 땅으로 여겨지는데, 창시자 자라투스트라는 발흐에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자라투스트라교가 발흥하던 시기에 아베스타어와 같은 고대 동부 이란 언어는 이 지역에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은 [[메디아제국]]을 무너뜨리고, 아프가니스탄(그리스인들은 아라코시아라고 불렀다.)을 병합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0년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땅을 잠시 정복한 이후 후계국인 [[셀레우코스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다 기원전 305년에 동맹 조약의 일환으로 인도의 [[마우리아제국]]에 이 지역 거의 대부분을 넘겨 주게 된다. 마우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힌두교]]와 [[불교]]가 아프가니스탄 땅의 주요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85년에 마우리아제국이 숭가제국에 무너지고, 기원전 180년경에는 헬레니즘 국가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정복하였다. 이내 아프가니스탄 상당 부분은 그리스-박트리아에서 떨어져나가 인도-그리스 왕국의 영토로 넘어간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인도-스키타이]]에 패배하고,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르러선 아프가니스탄 땅 대부분을 잃게 된다. |
− | 1세기경, [[ | + | 1세기경, [[파르티아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였으나, 인도-파르티아 봉신들에게 땅을 빼앗겼다.기원후 1세기 중엽에서 말엽에는 광대한 [[쿠샨제국]]이 아프가니스탄 땅을 중심에 두고, 불교 문화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서 지역 내에서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3세기에 [[쿠샨제국]]은 [[사산왕조]]에 격퇴당하였다. 스스로를 쿠샨샤스(보통 인도-사산으로 알려짐)라고 부른 수많은 통치자들이 이 땅의 일부를 계속 다스렸으나, 이들은 사산 왕조에 종속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쿠샨 이후로는 키다라 훈족이 지배자가 되었다가, 강력한 [[에프탈이 5세]]기 초에 잠시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였다. 서기 557년에 사산 왕조의 [[호스로 1세]]가 에프탈을 무찌르고, [[페르시아]]에서 사산 왕조의 패권을 재확립하였다. 그러나 쿠샨과 에프탈의 후손들이 카불리스탄에 쿠샨-에프탈 또는 카불-샤한이라 불리는 작은 왕조를 세웠다. 지역의 북동부와 남부의 대부분이 계속하여 불교 문화의 지배를 받았다. |
− | ===이슬람과 | + | ===이슬람과 몽골제국의 침공=== |
서기 642년 아랍계 무슬림이 헤라트와 자란즈 등지에 이슬람교를 전파하였고 이후 동쪽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 아랍계 무슬림과 맞닥뜨린 일부 원주민은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일부는 반발하였다. 당시 인도 문화권과의 문화적 관련성의 이유로 아랍인은 지역을 총괄하여 알-힌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슬람이 소개되기 이전에는 대부분 불교나 조로아스터교를 믿었고, 시리아와 나나의 신봉자와 유대교인도 있었다. 자란즈의 사파르계 무슬림 세력이 서기 870년 지역을 장악한 이후에, 힌두쿠시 남부로 이슬람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0세기의 가즈나인의 집권 이전까지 카불에서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공존하였다고 전해진다. | 서기 642년 아랍계 무슬림이 헤라트와 자란즈 등지에 이슬람교를 전파하였고 이후 동쪽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 아랍계 무슬림과 맞닥뜨린 일부 원주민은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일부는 반발하였다. 당시 인도 문화권과의 문화적 관련성의 이유로 아랍인은 지역을 총괄하여 알-힌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슬람이 소개되기 이전에는 대부분 불교나 조로아스터교를 믿었고, 시리아와 나나의 신봉자와 유대교인도 있었다. 자란즈의 사파르계 무슬림 세력이 서기 870년 지역을 장악한 이후에, 힌두쿠시 남부로 이슬람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0세기의 가즈나인의 집권 이전까지 카불에서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공존하였다고 전해진다. | ||
− | 11세기에 이르러서는 마흐무드가 남은 힌두교 지도자를 몰아내고, [[가즈나 왕조]]를 세웠으며 카피리스탄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이슬람을 전파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의 황금 시대에서 이슬람 세계의 주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가즈나 왕조는 당시 이미 강력한 | + | 11세기에 이르러서는 마흐무드가 남은 힌두교 지도자를 몰아내고, [[가즈나 왕조]]를 세웠으며 카피리스탄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이슬람을 전파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의 황금 시대에서 이슬람 세계의 주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가즈나 왕조는 당시 이미 강력한 [[이슬람제국]]을 확장하고 발전시킨 [[고르인]]들에 의해 몰락한다. |
− | 서기 1219년, [[징기즈칸]]과 [[툴루이]]를 비롯 그들의 [[ | + | 서기 1219년, [[징기즈칸]]과 [[툴루이]]를 비롯 그들의 [[몽골제국]] 군사가 지역을 공격하였다. 그의 군사는 바미안 뿐만 아니라 헤라트와 1220년 발흐 지역을 섬멸, 파괴하였다. 몽골인의 파괴로 많은 주민들이 죽거나, 농촌 사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몽골의 지배는 북서부 지역에서 [[일 칸국]]으로 지속되었고 [[할지 술탄국]]이 힌두쿠시 남부 지역의 아프간 부족 지역을 지배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아 1370년 [[티무르제국]]을 건국한 티무르가 지역을 정복한다. |
− | 16세기 초, 페르가나에서 온 [[바부르]]가 [[아르군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카불]]을 함락시킨다. 그는 1526년에 델리를 정복하여 로디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 | + | 16세기 초, 페르가나에서 온 [[바부르]]가 [[아르군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카불]]을 함락시킨다. 그는 1526년에 델리를 정복하여 로디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무굴제국]]이 세워지게 한다. 16세기와 18세기 사이에는 부하라 칸국, 사파위제국, 그리고 무굴제국이 지역의 부분들을 지배한다. 19세기 이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북서부 지역은 호라산이라는 지역명으로 불렸다. 호라산의 네 수도들 중 두 곳 (헤라트와 발흐)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 위치해 있었고, 칸다하르, 자불리스탄, 가즈니, 카불리스탄, 그리고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지역들이 호라산과 힌두스탄 사이의 변경지대였다. |
− | ===호타크 왕조와 | + | ===호타크 왕조와 두라니제국=== |
1709년 길자이 부족의 파슈툰족인 미르 와이스 호타크가 사파비 왕조의 [[칸다하르]] 태수인 구르긴 칸을 죽이고 아프가니스탄을 독립시킨다. 미르 와이스는 사파비 왕조의 토벌군을 무찌르고 칸다하르 지방을 장악하여 1715년에 죽을 때까지 지배하였다. 미르와이즈는 1715년에 자연사하여 그의 형제 압둘 하지즈 호타크가 왕위를 물려받으나, 곧 미르와이즈의 아들 마흐무드 호타크가 반역죄로 그를 죽이게 된다. 그의 아들 미르 마흐무드 호타크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1722년, 미르 마흐무드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이끌고 이란의 이스파한으로 진군하여 구나바드 회전을 기점으로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을 페르시아의 왕으로 선포하였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 지배자를 찬탈자로 여겨 거부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스파한 시민 수 천명을 학살한 이후 (그 가운데는 3천 명이 넘는 신학자, 귀족, 사파비 왕족도 있었다.) 이들은 1729년 담간 전투 이후 페르시아의 새 지배자인 [[나디르 샤]]에게 격퇴되었다. | 1709년 길자이 부족의 파슈툰족인 미르 와이스 호타크가 사파비 왕조의 [[칸다하르]] 태수인 구르긴 칸을 죽이고 아프가니스탄을 독립시킨다. 미르 와이스는 사파비 왕조의 토벌군을 무찌르고 칸다하르 지방을 장악하여 1715년에 죽을 때까지 지배하였다. 미르와이즈는 1715년에 자연사하여 그의 형제 압둘 하지즈 호타크가 왕위를 물려받으나, 곧 미르와이즈의 아들 마흐무드 호타크가 반역죄로 그를 죽이게 된다. 그의 아들 미르 마흐무드 호타크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1722년, 미르 마흐무드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이끌고 이란의 이스파한으로 진군하여 구나바드 회전을 기점으로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을 페르시아의 왕으로 선포하였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 지배자를 찬탈자로 여겨 거부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스파한 시민 수 천명을 학살한 이후 (그 가운데는 3천 명이 넘는 신학자, 귀족, 사파비 왕족도 있었다.) 이들은 1729년 담간 전투 이후 페르시아의 새 지배자인 [[나디르 샤]]에게 격퇴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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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와 그의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의 호라산 주와 코히스탄 주를 비롯해 인도의 [[델리]]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제3차 파니팟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들 중 하나를 거두었고 인도의 [[마라타 동맹]]을 굴복시킨다. 1772년 10월, 두라니는 자연사하여 칸다하르 망토의 사당에 인접한 곳에 묻히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티무르 샤 두라니가 왕위에 오른 후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겼다. 티무르 샤는 1793년에 죽었으며 아들 자만 샤 두라니가 왕권을 승계하였다. 1793년에 티무르의 사망 이후로는 두라니의 왕위는 그의 아들 자만 샤가 이어받고, 이후로 마흐무드 샤, 슈자 샤 등의 인물들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 1751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와 그의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의 호라산 주와 코히스탄 주를 비롯해 인도의 [[델리]]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제3차 파니팟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들 중 하나를 거두었고 인도의 [[마라타 동맹]]을 굴복시킨다. 1772년 10월, 두라니는 자연사하여 칸다하르 망토의 사당에 인접한 곳에 묻히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티무르 샤 두라니가 왕위에 오른 후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겼다. 티무르 샤는 1793년에 죽었으며 아들 자만 샤 두라니가 왕권을 승계하였다. 1793년에 티무르의 사망 이후로는 두라니의 왕위는 그의 아들 자만 샤가 이어받고, 이후로 마흐무드 샤, 슈자 샤 등의 인물들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 ||
− | + | [[아프간제국]]은 19세기 초에 서로는 [[카자르왕조]], 동으로는 영국의 지원을 등업은 [[시크제국]]으로 위험에 처해 있었다. 바라크자이족의 지도자 파테 칸은 제국 안밖에 21명의 형제들을 주요 관직에 임명한다. 파테 칸의 죽음 이후, 형제들은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영토를 그들 사이에 갈라놓는다. 이러한 격동기 동안, 아프가니스탄은 도스트 모하마드가 1826년에 자신을 왕족으로 선언하기 전까지 많은 임시 지도자들이 거쳐갔다. 펀자브는 당시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를 침공하였고 1834년에는 페샤와르를 점령한 란짓 싱에 빼앗겼다. 1837년, 잠루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카이버 패스 인근에서 악발 칸과 그의 아프간 군사들이 시크 사령관였던 하리 싱 날와를 살해한다. 당시 영국은 동쪽에서 진군해오고 있었고 "그레이트 게임"의 첫번째 주요 충돌이 착수되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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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인구의 99%가 넘는 사람들은 [[무슬림]]으로 그 중 70% 정도가 [[수니파]]이며, 29%는 [[시아파]]이다. 1890년대까지 누리스탄주를 둘러싼 지역은 카피리스탄{카피르인(무신론자들, 이방인의 땅)}으로 불렸는데, 이는 누리스탄족이 [[이슬람교]]를 믿지 않고 [[애니미즘]], [[다신교]], [[샤머니즘]] 등과 같은 민속신앙을 가지고 있던 문화적 특성에 비롯된 것이엇다. 아프가니스탄 사람 중에 [[시크교]]나 [[힌두교]]를 믿는 집단도 주요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작은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하였으나 20세기 말에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주하여 자블론 시민(토프) 한 명만이 남아있다. |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99%가 넘는 사람들은 [[무슬림]]으로 그 중 70% 정도가 [[수니파]]이며, 29%는 [[시아파]]이다. 1890년대까지 누리스탄주를 둘러싼 지역은 카피리스탄{카피르인(무신론자들, 이방인의 땅)}으로 불렸는데, 이는 누리스탄족이 [[이슬람교]]를 믿지 않고 [[애니미즘]], [[다신교]], [[샤머니즘]] 등과 같은 민속신앙을 가지고 있던 문화적 특성에 비롯된 것이엇다. 아프가니스탄 사람 중에 [[시크교]]나 [[힌두교]]를 믿는 집단도 주요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작은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하였으나 20세기 말에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주하여 자블론 시민(토프) 한 명만이 남아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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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4일 (화) 08:5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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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파슈토어·다리어: افغانستان, 영어: Afghanistan)은 아시아에 있는 내륙국이다. 정식 명칭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파슈토어: امارت اسلامی افغانستان, 다리어: د افغانستان اسلامي امارت, 영어: 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이다. 간략히 아프간이라고도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지리적으로는 남아시아에 속하는데, 넓은 의미로 중동 지역에도 속한다. 북쪽은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북동쪽은 중국, 동쪽과 남쪽은 파키스탄, 서쪽은 이란과 맞닿아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다민족 국가로서 주류 민족인 파슈툰족을 비롯해 타지크족, 하자라족, 우즈베크인, 아이마크인 등이 거주한다. 역사적으로 중동과 아시아의 여러 지역의 문화가 만나는 곳이었으며, 여러 세기를 거쳐 다양한 민족들의 고향이 되었다. 2021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여행금지국에 속한다.
목차
개요[편집]
- 수도: 카불
- 면적: 652,864 km2
- 인구: 37,132,065명(2021년)
- 공용어: 다리어, 파슈토어
- 정치체제: 단일 국가 군사정부
- 최고지도자: 하이바툴라 아훈드자다
아프가니스탄은 전략적인 위치로 인해 수많은 군사 활동이 이루어진 곳이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정복 세력으로는 알렉산더 대왕, 이슬람제국, 몽골제국, 대영제국, 소련, 그리고 현대의 서방 세력에 이른다. 또한 쿠샨제국, 에프탈제국, 사만 토후국, 사파르 토후국, 가즈나제국, 고르 술탄국, 할지 술탄국, 무굴제국, 호타크제국, 두라니제국, 기타 등등의 제국들을 일으킨 민족들의 근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1747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두라니제국을 세웠는데, 이 때가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나중에 두라니제국의 도읍은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겨졌으며, 제국 영토 대부분은 이웃 강국들에게 빼앗겼다. 19세기 말, 영국령 인도제국과 러시아제국이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이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은 두 제국의 완충국으로 전락하였다. 제3차 앵글로-아프간 전쟁 이후 1919년 8월 19일에 이 나라는 대영제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하였다. 자히르 샤의 40년 통치 동안 아프가니스탄은 평화를 유지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 아프가니스탄은 내전 상태에 빠진 상황이였으며, 1979년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001년 미국 주도로 탈레반을 축출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외국의 점령을 겪게 되었다. 2001년 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대서양 조약기구 군대로 구성된 국제 안보 지원군(ISAF) 창설을 승인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후발 개발도상국의 하나로, 농업과 목축업의 의존도가 높다. 현재 해외 원조로 재건되고 있으나 심각한 내부 분쟁을 겪고 있다. 최근에는 1000억 달러 규모의 전국적인 재건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미군 철수 직후 이어진 탈레반의 공격(2021년 탈레반 공세)으로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정부가 탈레반에 항복하고 대통령 등이 외국으로 도주함에 따라(카불 함락),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은 탈레반에게 권력이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판지시르주에 있는 민병대와 기존 정부군, 부통령 등의 정치가가 합세하여 판지시르 저항군을 결성해 판지시르주에서 탈레반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하며,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의 철수를 시작으로 탈레반이 승리하기 시작하고 2021년 탈레반 공세를 마지막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탈레반의 승리로 끝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은 멸망하고 20년만에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역사[편집]
근대적인 아프가니스탄 국가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1747년에 세웠으나, 이 땅은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며 다양한 문명들이 들어선 바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루이스 뒤프레, 스미소니언 학회 등에서 발굴한 원시 시대 유적을 보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땅에 사람이 산 것은 적어도 50,000년 전의 일이며, 이 지역의 농경 집단은 세계적으로 초기에 속함을 알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수많은 인도-유럽 문명들이 상호작용하고 투쟁하던 독특한 연결점이며,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땅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은 온갖 민족의 터전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박트리아, 아리아, 아라코시아 등 인도이란인들도 있었다. 또 이 땅을 정복한 집단으로는 메디아제국, 페르시아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 셀레우코스제국, 인도-그리스 왕국, 튀르크인, 몽골인 등이 있었다. 현대에는 영국과 소비에트가,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과 동맹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원주민 집단은 주변의 이란 고원, 중앙 아시아, 인도 아대륙을 침략하여 자신들의 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슬람 이전 시대[편집]
20세기에 이루어진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적 영역은 이웃 지역들과 문화, 교역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 시대의 유물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되어 왔다. 도시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문디각 (칸다하르 인근의 남부 도시)은 인근의 인더스 문명의 식민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더욱 최근의 발견들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이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영역을 넓혀서, 현재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 지역에 고대 문명이 존재했던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더욱 자세하게는, 현재의 파키스탄 북동부에서 인도의 북서부와 아프가니스탄의 북동부까지 영역을 넓혔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이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쇼투가이의 아무다리야 강에서 발견된 바 있다. 여러 작은 규모의 인더스 부락들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되어 왔다.
기원전 2000년 이후에는 중앙아시아의 반유목민이 계속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남하하였다. 그 중엔 절대다수의 인도이란어파를 사용하는 인도이란인이 있었다. 이 종족은 이후에 더 멀리 남아시아, 서아시아, 또는 카스피 해의 북부 지역을 통해 유럽으로 이주해왔다. 당시 이 지역은 아리아나라고 불렸다. 이들은 아이리아넴 바에자라는 민족을 이루게 된다. 인도이란인의 원래 터전은 아나톨리아, 쿠르디스탄, 중앙 아시아, 이란 또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는데, 이런 각 주장에 따라 역사상의 이주 방향이 달라진다. 나중에 파르티아와 사산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 곳은 "아리아인들이 지배하는 땅"을 뜻하는 '이란사르'로 불리게 되었다.
자라투스트라교(조로아스터교)가 발생한 곳은 기원전 1800년~800년 사이의 아프가니스탄 땅으로 여겨지는데, 창시자 자라투스트라는 발흐에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자라투스트라교가 발흥하던 시기에 아베스타어와 같은 고대 동부 이란 언어는 이 지역에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은 메디아제국을 무너뜨리고, 아프가니스탄(그리스인들은 아라코시아라고 불렀다.)을 병합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0년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땅을 잠시 정복한 이후 후계국인 셀레우코스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다 기원전 305년에 동맹 조약의 일환으로 인도의 마우리아제국에 이 지역 거의 대부분을 넘겨 주게 된다. 마우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힌두교와 불교가 아프가니스탄 땅의 주요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85년에 마우리아제국이 숭가제국에 무너지고, 기원전 180년경에는 헬레니즘 국가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정복하였다. 이내 아프가니스탄 상당 부분은 그리스-박트리아에서 떨어져나가 인도-그리스 왕국의 영토로 넘어간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인도-스키타이에 패배하고,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르러선 아프가니스탄 땅 대부분을 잃게 된다.
1세기경, 파르티아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였으나, 인도-파르티아 봉신들에게 땅을 빼앗겼다.기원후 1세기 중엽에서 말엽에는 광대한 쿠샨제국이 아프가니스탄 땅을 중심에 두고, 불교 문화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서 지역 내에서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3세기에 쿠샨제국은 사산왕조에 격퇴당하였다. 스스로를 쿠샨샤스(보통 인도-사산으로 알려짐)라고 부른 수많은 통치자들이 이 땅의 일부를 계속 다스렸으나, 이들은 사산 왕조에 종속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쿠샨 이후로는 키다라 훈족이 지배자가 되었다가, 강력한 에프탈이 5세기 초에 잠시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였다. 서기 557년에 사산 왕조의 호스로 1세가 에프탈을 무찌르고, 페르시아에서 사산 왕조의 패권을 재확립하였다. 그러나 쿠샨과 에프탈의 후손들이 카불리스탄에 쿠샨-에프탈 또는 카불-샤한이라 불리는 작은 왕조를 세웠다. 지역의 북동부와 남부의 대부분이 계속하여 불교 문화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과 몽골제국의 침공[편집]
서기 642년 아랍계 무슬림이 헤라트와 자란즈 등지에 이슬람교를 전파하였고 이후 동쪽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 아랍계 무슬림과 맞닥뜨린 일부 원주민은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일부는 반발하였다. 당시 인도 문화권과의 문화적 관련성의 이유로 아랍인은 지역을 총괄하여 알-힌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슬람이 소개되기 이전에는 대부분 불교나 조로아스터교를 믿었고, 시리아와 나나의 신봉자와 유대교인도 있었다. 자란즈의 사파르계 무슬림 세력이 서기 870년 지역을 장악한 이후에, 힌두쿠시 남부로 이슬람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0세기의 가즈나인의 집권 이전까지 카불에서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공존하였다고 전해진다.
11세기에 이르러서는 마흐무드가 남은 힌두교 지도자를 몰아내고, 가즈나 왕조를 세웠으며 카피리스탄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이슬람을 전파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의 황금 시대에서 이슬람 세계의 주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가즈나 왕조는 당시 이미 강력한 이슬람제국을 확장하고 발전시킨 고르인들에 의해 몰락한다.
서기 1219년, 징기즈칸과 툴루이를 비롯 그들의 몽골제국 군사가 지역을 공격하였다. 그의 군사는 바미안 뿐만 아니라 헤라트와 1220년 발흐 지역을 섬멸, 파괴하였다. 몽골인의 파괴로 많은 주민들이 죽거나, 농촌 사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몽골의 지배는 북서부 지역에서 일 칸국으로 지속되었고 할지 술탄국이 힌두쿠시 남부 지역의 아프간 부족 지역을 지배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아 1370년 티무르제국을 건국한 티무르가 지역을 정복한다.
16세기 초, 페르가나에서 온 바부르가 아르군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카불을 함락시킨다. 그는 1526년에 델리를 정복하여 로디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무굴제국이 세워지게 한다. 16세기와 18세기 사이에는 부하라 칸국, 사파위제국, 그리고 무굴제국이 지역의 부분들을 지배한다. 19세기 이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북서부 지역은 호라산이라는 지역명으로 불렸다. 호라산의 네 수도들 중 두 곳 (헤라트와 발흐)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 위치해 있었고, 칸다하르, 자불리스탄, 가즈니, 카불리스탄, 그리고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지역들이 호라산과 힌두스탄 사이의 변경지대였다.
호타크 왕조와 두라니제국[편집]
1709년 길자이 부족의 파슈툰족인 미르 와이스 호타크가 사파비 왕조의 칸다하르 태수인 구르긴 칸을 죽이고 아프가니스탄을 독립시킨다. 미르 와이스는 사파비 왕조의 토벌군을 무찌르고 칸다하르 지방을 장악하여 1715년에 죽을 때까지 지배하였다. 미르와이즈는 1715년에 자연사하여 그의 형제 압둘 하지즈 호타크가 왕위를 물려받으나, 곧 미르와이즈의 아들 마흐무드 호타크가 반역죄로 그를 죽이게 된다. 그의 아들 미르 마흐무드 호타크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1722년, 미르 마흐무드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이끌고 이란의 이스파한으로 진군하여 구나바드 회전을 기점으로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을 페르시아의 왕으로 선포하였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 지배자를 찬탈자로 여겨 거부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스파한 시민 수 천명을 학살한 이후 (그 가운데는 3천 명이 넘는 신학자, 귀족, 사파비 왕족도 있었다.) 이들은 1729년 담간 전투 이후 페르시아의 새 지배자인 나디르 샤에게 격퇴되었다.
1738년, 나디르 샤와 그의 군대(그 가운데는 4천 명의 파슈툰족 압달리 씨족도 있었다.)는 마지막 호타크 요새였던 칸다하르를 정복하였으며, 같은 해에 가즈니, 카불, 라호르도 그의 손에 떨어졌다. 이후 감금되어 있었던 16살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를 풀어주고 아프간족 연대장으로 임명한다. 얼마 후 페르시아 군대와 아프간 군대들은 인도를 침공한다. 1747년 6월 19일, 나디르 샤는 암살당하였는데, 이 일은 조카 알리 콜리의 음모로 말미암은 것 같다. 나디르가 죽자 그의 부장이자 경호병이었던 압달리 씨족의 파슈툰족 아흐마드 샤 압달리가 로야 지르가('대회의')를 요청하였다. 칸다하르에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모여 아흐마드 샤를 새 통치자로 삼고, 1747년 10월에 대관식을 치렀다. 아흐마드 샤는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창건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임금이 된 아흐마드 샤는 자신의 칭호이자 씨족명을 '두라니'로 바꾸었는데, 이 말은 '진주'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두르'에서 나온 말이었다.
1751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와 그의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의 호라산 주와 코히스탄 주를 비롯해 인도의 델리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제3차 파니팟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들 중 하나를 거두었고 인도의 마라타 동맹을 굴복시킨다. 1772년 10월, 두라니는 자연사하여 칸다하르 망토의 사당에 인접한 곳에 묻히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티무르 샤 두라니가 왕위에 오른 후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겼다. 티무르 샤는 1793년에 죽었으며 아들 자만 샤 두라니가 왕권을 승계하였다. 1793년에 티무르의 사망 이후로는 두라니의 왕위는 그의 아들 자만 샤가 이어받고, 이후로 마흐무드 샤, 슈자 샤 등의 인물들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아프간제국은 19세기 초에 서로는 카자르왕조, 동으로는 영국의 지원을 등업은 시크제국으로 위험에 처해 있었다. 바라크자이족의 지도자 파테 칸은 제국 안밖에 21명의 형제들을 주요 관직에 임명한다. 파테 칸의 죽음 이후, 형제들은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영토를 그들 사이에 갈라놓는다. 이러한 격동기 동안, 아프가니스탄은 도스트 모하마드가 1826년에 자신을 왕족으로 선언하기 전까지 많은 임시 지도자들이 거쳐갔다. 펀자브는 당시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를 침공하였고 1834년에는 페샤와르를 점령한 란짓 싱에 빼앗겼다. 1837년, 잠루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카이버 패스 인근에서 악발 칸과 그의 아프간 군사들이 시크 사령관였던 하리 싱 날와를 살해한다. 당시 영국은 동쪽에서 진군해오고 있었고 "그레이트 게임"의 첫번째 주요 충돌이 착수되고 있었다.
서양의 개입[편집]
1842년 영국령 인도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아프간군이 승리한 후, 영국은 아프간 정부와 수교하고 모든 군대를 나라 밖으로 철수시킨다. 영국군은 1870년대 후반에 아유브 칸을 몰아내고 압둘 라흐만 칸의 집권을 돕기 위해 다시 돌아와 2년간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른다. 이후 영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아프간의 외교정책까지 통제하였다. 1893년, 모티머 듀랜드는 당시 아미르였던 압둘 라흐만 칸이 파슈툰인과 발루치족의 관할지역을 듀랜드 라인으로 나누는 합의서에 서명하게 한다.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고 1919년 라왈핀디 조약이 체결된 이후, 아마눌라 칸 국왕은 아프가니스탄을 주권국이자 완전한 독립국으로 선언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관습적인 고립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수교를 맺기 시작하며, 이후 1927-28년 유럽과 터키의 순방에 나서는가 하면, 국가를 근대화하기 위해 여러 개혁들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여러 개혁들 사이엔 마흐무드 타지가 있었는데, 그는 여성 교육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초등교육의 의무가 명시된 1923 아프가니스탄 헌법 68조가 제정되게 하였다. 노예제가 명시된 법은 1923년에 폐지되었다.
여성의 전통적인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거나 남녀공학의 교육기관을 세우는 등의 개혁은 부족장과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빠르게 소외되었다. 압도적인 무장 반란세력에 부딪혀, 아마눌라 칸은 1929년 1월, 하비불라 칼라카니가 이끌던 세력에 의해 퇴위당하였다. 아마눌라의 사촌이었던 모하메드 나디르 샤 왕자는 1929년 11월에 칼라카니를 굴복시키고 살해하며, 자신 스스로를 국왕 나디르 샤로 칭한다. 그는 점진적인 근대화를 위해 아마눌라의 개혁을 단념하였으나, 1933년 하자라족 출신의 학생 압둘 칼리크에 의해 암살당한다.
나디르 샤의 아들이였던 당시 19세의 무함마드 자히르 샤는 왕위를 물려받아 1933년부터 1973년까지 집권한다. 자히르 샤는 1946년까지 그의 삼촌의 보조를 받아 나라를 통치하였는데, 그는 총리의 자리에 올라 나디르 샤의 정책을 이어나갔다. 자히르 샤의 또다른 삼촌이었던 샤 마흐무드 칸은 1946년에 총리직에 임명되어 더 큰 범위의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기 위한 실험들을 해 나갔는데, 그의 예상보다 더 발전하자 정책을 무산시켰다. 총리직은 1953년 국왕의 사촌이자 매부였던 무함마드 다우드로 교체된다. 다우드 칸은 소련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길 원하였고,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지 않고 냉전 시대에도 어떠한 세력과도 연맹을 맺지 않으며 중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미국은 상호 경쟁하는 과정에서 서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영향력을 얻기 위해 앞다투어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고속도로, 공항, 기타 기반 시설을 지어 줌으로써 중립 상태는 국가에게 이득이었다. 1인당 기준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어떠한 국가보다 많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1973년, 국왕 자히르 샤가 해외 순방길에 있었던 동안 다우드 칸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첫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파키스탄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게 하였다. 어떤 전문가들은 부토가 1978년 4월 샤우르 혁명의 기반을 다진 것으로도 해석한다.
공산 혁명과 소련의 침공[편집]
1978년 4월, 공산주의 정당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PDPA)이 샤우르 혁명을 기점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권력을 잡게 된다. 공산 정부에 반대하던 세력은 몇 개월 만에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는데, 이는 곧바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무자헤딘이 이끄는 게릴라군이 정부군에 대항하는 내전으로 발전한다. 소련이 인민당을 지원하기 위해 몇 천명의 군사 고문을 보내는 동안, 파키스탄 정부는 반란군들에게 비밀 훈련소를 제공하였다. 그동안 인민당에서는 다수였던 칼크와 온건적인 파르참으로 계파가 나뉘어 마찰을 연이어 빚다, 파르참 계파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구실로 관련된 정부 각료를 해고하고 군 장교를 체포한다. 하피줄라 아민과 인민 민주당의 군부 인사는 건재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바브락 카르말, 하피줄라 아민이 이끄는 인민 민주당은 무함마드 다우드 정권을 전복하였으며, 다우드는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정변은 샤우르 혁명, 즉 위대한 4월 혁명으로 알려졌다. 1978년 5월 1일, 타라키는 대통령, 총리, 인민 민주당 사무총장직을 겸임하였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으로 개명하였으며, 인민 민주당 정권은 1991년까지 존속하였다.
1978년의 칼크 반란으로 두라니족(다우드 칸을 비롯하여 이전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조)과 대립하던 파슈툰족의 길자이 부족이 소생하게 되었다.
권력을 잡은 인민 민주당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야심찬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전국의 농민 부채를 탕감하였다. 이들은 또 여성의 권리에 관한 여러 정책을 내놓고 여성을 정계로 끌어들였다. 저명한 여성 정치인으로 아나히타 라테브자드를 들 수 있는데, 그녀는 유력한 마르크스주의자 지도자이자 혁명 평의회의 의원이었다. 라테브자드는 1978년 5월 28일에 '뉴 카불 타임스' 지의 사설에서 '권리를 통해 여성은 평등한 교육, 직업, 안전, 의료 서비스, 국가의 미래를 위해 건강한 자녀를 기를 자유 시간을 누려야 하며 ... 여성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일은 이제 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 일이다."라고 썼다.
카불 등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정책에 환영하기도 하고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세속적 성격 때문에 농촌 지역에 사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이에 반감을 가졌으며, 전통적인 이슬람 율법을 선호하였다.
미국은 1979년 중반부터 파키스탄의 파키스탄 정보부 (ISI)를 통해 반소련 무자헤딘 세력과 아프간계 아랍인 전투원들을 지원해왔다. 엄청난 양의 현금과 무기들, 2천 개 이상의 FIM-92 스팅어 지대공 미사일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파키스탄으로 전달되었다.
1979년 3월, 하피줄라 아민이 총리가 되었으며, 원수직을 보유하고 최고 국방 평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1979년 9월,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가 인민당 내부에서 칼크 동료였던 하피줄라 아민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살해되고, 아민이 대통령직에 오른다. 소련은 아민을 불신하여, 1979년 12월 소련 특수 부대가 아민을 암살한다. 이후 바브락 카르말이 소련이 양당 인사를 모두 등용하여 구성한 정부를 이끈다. 소련은 카르말 정부의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시키기 위해 소련군을 배치하나, 아프가니스탄 내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 관여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었었다.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의 파르참 파를 지원하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1978년에 양국이 맺은 우호 협력 및 선린 조약을 명분으로 1979년 12월 24일에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였다. 10여 만 병력이 넘는 소비에트 군대가 침공에 동원되었으며, 만여 명의 병력과 파르참 파의 구성원들도 가세하였다. 아민은 살해당하고 바브라크 카르말이 뒤를 이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하여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은 무장하고 소련 점령군에 맞서 봉기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히딘을 지원하였다. 미국의 지원은 카터 행정부 때 시작되었으나, 레이건 행정부에서 크게 늘어나,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앙골라, 니카라과 등의 반공 저항 운동을 지원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레이건 독트린의 핵심 사항이 되었다. 무자히딘은 미국의 지원과 더불어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지원도 받았다.
소련의 점령으로 6만~2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주민이 살상당하였다. 5백여만이 넘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조국을 등지고 파키스탄, 이란 등 해외로 떠났다.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 데다 사상자가 크게 늘면서 소련은 1989년에 철수하였다.
소련은 계속 모하마드 나지불라 대통령(전에는 아프가니스탄 비밀 경찰 KHAD의 수장이었다.)을 지원하다가 1992년에 새 러시아 정부가 나지불라 정권에 석유 제품 판매를 거부하였다.
내전[편집]
전쟁 때문에 수많은 엘리트와 지식인들이 해외로 피신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도층의 불균형 현상이 일어났다. 소련군을 물리친 무자히딘 내 각 분파들은 계속 서로 싸웠으며, 아프가니스탄은 군벌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 시기에 가장 심각한 전투는 1994년에 있었는데, 카불 한 곳에서 10,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탈리반(탈레반)이 정치-종교 세력으로 성장하여 결국 1996년에 카불을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2000년 말에 탈리반은 국토의 95%를 장악하고 있었다.
탈리반이 7년간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면서, 주민 절대다수는 자유가 억압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했다. 여성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엄금되었으며, 어린 여성이 학교나 대학에 가는 것도 엄금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적으로 근절되었으며, 절도범은 손과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2001년에 탈리반은 아편 생산을 거의 일소하였다.
탈레반 토후국과 북부 연맹[편집]
1994년 말 탈리반의 초창기에 이룬 몇몇 승리들은 엄청난 손실로 끝난 패배들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탈레반은 1995년 초 카불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북부동맹의 마수드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1996년 9월,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군사적 지원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경제적 지원을 등에 업고 또다른 주요 공격을 준비하였고, 마수드는 카불에서 철수해야 했다. 탈레반은 같은 달에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그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유사한 형태의 엄격한 샤리아를 도입하였다. 인권을 위한 의사회(PHR)는 이와 같은 체제에 대하여 "그 동안 세계의 어떠한 정권이나 체제가 인구의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을 사실상 가택 연금을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강제한 바가 없었으며,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거나 남성과의 동행 없이 의료 진찰을 받거나 학교에 다니는 것을 신체적 처벌행위로 금지한 사례가 없었다."라고 표명하였다.
탈레반에게 카불을 빼앗긴 이후에 북부동명 지도자인 아흐메드 샤 수드와 도스툼은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전선 (북부 연맹)을 형성한다. 탈레반은 마자리샤리프 전투 (1997-98)에서 도스툼 세력을 패배시켰다. 당시 파키스탄의 군 참모장이였던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탈레리반 북부 연맹을 물리치는 것을 돕기 위해 몇 천명의 파키스탄인들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오사마 빈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이끌던 알카에다 네트워크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가동되었다. 미국은 이 사실과 함께 100만 명에 이르는 아프간인들이 내부적으로 축출되었다는 소식에 대해 우려하였다. 1990년부터 2001년 9월까지 40만명의 아프간인들이 내부적으로 이루어진 접전들에 의해 사망하였다.
2001년 9월 9일,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 주에서 알카에다가 사주한 명의 아랍인들에 의해 자살 공격을 당해 암살되었다. 이틀 후,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난다. 미 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을 공격의 가해자로 지목하며, 탈레반에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다. 탈레반이 협조를 거부하자 2001년 10월 작전명 항구적 자유 작전이 실행되었다. 최초의 침공 기간동안, 미군과 영국군은 알카에다 훈련 캠프를 폭격하였다. 미국은 탈레반을 권력에서 몰아내기 위해 북부 동맹과 협력한다.
2001년 12월, 구 무자히딘의 지도자와 난민들이 독일에서 만나 본 협정을 맺었는데, 여기서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칸다하르 시 남부 출신으로 파슈툰족 두라니 씨족(구 왕가 출신) 사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의 의장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최근 역사[편집]
2001년 12월, 탈레반 정부가 전복된 이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출범하였고, 카르자이 행정부를 보조하고 기본적인 방위를 위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국제안보지원군을 결성한다. 반면 탈리반 세력은 파키스탄에서 재결성되었고, 그동안 아프가니스탄에는 연합군이 진입하고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였다.
탈레반은 권력을 찬탈당한 뒤에 곧바로 반란을 일으킨다. 2000년대 동안 ISAF와 아프간 국군은 탈리반에 수차례 공격을 실행하였으나, 완전히 탈리반을 패배시키지 못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해외 투자의 부족과 정부 부패, 그리고 탈리반의 반란 등의 이유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 구조를 세울 수 있었고, 국가명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꾼다. 여러 차례의 외국 원조와 함께 나라의 경제, 보건, 교육, 교통, 그리고 농업 분야들의 발전시키기 위한 시도도 많이 이루어졌다. ISAF 군대들도 아프가니스탄 국군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2002년부터 10여년 동안 서방 국가들에서 강제 추방된 사람들을 포함한 50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2009년에 들어서는 탈리반이 이끄는 그림자 정부가 국가 곳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카르자이 대통령이 탈레반 지도자들과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반란 단체들은 2015년 중반에 탈리반 최고 지도자가 협상을 결정하기 전까지 협상 참석을 거부하였다.
2011년 5월 파키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사망하면서 많은 수의 아프간 주요 인사들이 암살되었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 간 접전이 늘어났고 하카니 네트워크 주도 아래 많은 대규모 공격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루어졌다. 미 정부는 증가한 공격 횟수를 두고 파키스탄 정부를 비판했다. 미 정부는 15년 넘게 수십억 달러를 개발 원조 지원금으로 지출하였고 같은 기간 동안 1조가 넘는 달러를 군사 지원에 지출하였다.
2014년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카르자이 대통령은 권력에서 물러났고 2014년 9월 아슈라프 가니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의 전쟁 (미 역사상 가장 길었던 전쟁)이 2014년 12월 28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수천명이 넘는 미국 주도의 나토 군대가 아프가니스탄 정부 군대를 훈련시키고 자문하기 위해 나라에 남았다. 전쟁은 반란 주동자, 아프가니스탄 시민들과 정부 군대를 포함하여 직접적으로 9만여명의 사망자를 남겼다. 10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2021년 6월 미군 철수의 움직임을 계기로 탈리반이 다시금 아프간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고, 결국 8월 15일 수도 카불이 사실상 함락되며 구 정권은 탈리반에 항복을 선언했다.
지리[편집]
아프가니스탄은 서남아시아]에 속하는 지역으로, 북부와 남서부의 평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역이 산악 지방인 내륙국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7,492 m (24,580 ft)의 노샤크 산이다. 아프가니스탄은 대륙성 기후에 속하여, 중앙의 고원 지역과 누리스탄 주 주변의 빙하 지역, 그리고 와칸 회랑지대 등의 지역은 1월에 평균 −15 °C (5 °F) 이하까지 기온이 내려가며, 남서부의 시스탄 유역과 동부의 잘랄라바드 유역, 그리고 북부의 아무다리야 강을 둘러싼 투르케스탄 평원 등의 저지대는 7월에 평균 35 °C (95 °F)까지 기온이 올라간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수많은 강과 저수지가 분포하여 있으나, 국토의 많은 부분이 건조하다. 내륙유역인 시스탄 유역은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 중 하나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기존 강우량 외에도 동절기에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에서 눈이 내리며 봄이 되며 녹은 눈이 주변의 강, 호수 그리고 하천에 유입된다. 그러나 나라의 전체 물 자원의 3분의 2가 이란, 파키스탄,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 등의 인접 국가로 유출된다. 물 자원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선 최소 20억 달러 이상의 관개 시스템 정비 비용이 필요하다.
아프가니스탄 바다흐샨 주 안과 주변에 위치한 힌두쿠시 산맥은 거의 매년 지진이 일어나는 지역으로 지질적으로 활발한 곳이다. 지진은 종종 파괴적인 성격을 띄는데, 겨울 동안 산사태와 눈사태를 일으키기도 한다. 역대 가장 강력한 지진은 1998년에 일어났는데, 타지키스탄 인근 바다흐샨에서 6,000여명의 사망자를 기록했다. 이어 2002년 힌두쿠시 지진이 일어나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고 1,000명이 넘는 부상자를 기록했다. 2010년에 일어난 지진은 11명의 사망자, 70명이 넘는 부상자, 그리고 2,000 가구 이상의 가옥들이 파괴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매장된 주요 자원은 다음과 같다: 석탄, 구리, 철광석, 리튬, 우라늄, 희토류 원소, 크로뮴, 금, 아연, 활석, 황산 바륨, 유황, 납, 대리암, 보석, 천연 가스, 그리고 석유.[83][84]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양국 정부는 2010년 아프가니스탄 내에 매장된 자원 중 미개발된 광물 매장량의 가치가 최소 9,000억 달러에서 최대 3조 달러에까지 이른다고 발표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면적은 652,230 km2 (251,830 sq mi)으로, 세계에서 41번째로 넓은 국가로 프랑스보다 조금 넓고 미얀마보다 조금 작으며, 미국 텍사스 주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남쪽과 동쪽으로는파키스탄; 서쪽으로는 이란; 북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그리고 북동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인구[편집]
아프가니스탄은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졌다. 주요 민족으로는 파슈툰인, 타지크인, 하자라족, 우즈베크인, 아이마크인, 투르크멘인, 발루치족 그외에 파샤이족, 누리스탄족, 아랍인, 브라후이족, 파미르인, 구르자족 등 민족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공식언어는 다리어와 파슈토어로, 국가 전체에 다중언어 생활이 보편화되어 있다. 파슈토어와 다리어 모두 이란어군 어파에서 나온 인도유럽어족 언어이다. 다리어(아프간족 페르시아어)는 오랫동안 민족 상호 소통에 있어 공통어(링구아 프랑카) 역할을 해왔다. 또한 다리어는 타지크인, 하자라족, 아이마크인, 그리고 키질바쉬족의 모어이다. 파슈토어는 파슈툰인의 모어이나, 많은 파슈툰인들이 다리어에 능하고, 파슈툰인이 아닌 민족 구성원들도 파슈툰어에 능한 경우가 많다.
우즈베크어, 투르크멘어, 발루치어, 파샤이어, 그리고 다수의 누리스탄 부족어 등을 포함한 기타 언어들은 나라 전체에 분포한 소수 민족들의 모어이며 널리 사용되고 있는 지역에서 공식 지위를 가진다. 소수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우르두어, 영어, 아랍어 그리고 다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99%가 넘는 사람들은 무슬림으로 그 중 70% 정도가 수니파이며, 29%는 시아파이다. 1890년대까지 누리스탄주를 둘러싼 지역은 카피리스탄{카피르인(무신론자들, 이방인의 땅)}으로 불렸는데, 이는 누리스탄족이 이슬람교를 믿지 않고 애니미즘, 다신교, 샤머니즘 등과 같은 민속신앙을 가지고 있던 문화적 특성에 비롯된 것이엇다. 아프가니스탄 사람 중에 시크교나 힌두교를 믿는 집단도 주요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작은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하였으나 20세기 말에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주하여 자블론 시민(토프) 한 명만이 남아있다.
아프가니스탄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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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편집]
- 〈아프가니스탄〉,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
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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