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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시아주(갈리시아어: Comunidade Autónoma de Galicia, 스페인어: Comunidad Autónoma de Galicia)은 스페인 서북부에 있는 주다. [1]
목차
개요[편집]
갈리시아주의 면적은 29,574km²이며 인구는 2,698,875명이다. 남쪽은 포르투갈과의 국경에 맞닿아 있고 동쪽에는 아스투리아스주, 카스티야이레온주와 맞닿아 있다. 주도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이다. 도시로는 리아에 면한 어업기지인 라코루냐·비고·폰테베드라와 내륙의 중심인 루고·오렌세 등이 있다. 켈트인(人)의 혈통으로 알려진 갈리시아인은 금발과 녹색 눈이 특징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갈리시아어(語)는 원래 라틴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에스파냐어보다는 포르투갈어에 가깝다.
갈리시아란 이름은 라틴어의 갈라이키아에서 유래되었다. 1978년에 스페인의 자치지역으로 인정받았다. 해안선이 포르투갈보다는 구불구불한 편인데, 리아스(Rías)식 해안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옥수수를 저장하는 '오레오(Hórreo)'라는 건물이 이 지역의 상징 중 하나인데, 건물을 높이 지은 것은 쥐가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습기로 인해 옥수수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돌기둥 몇 개로 띄운 구조이기 때문에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아서 성인 한 사람이 겨우 들락날락 하는 정도이나, 수가 많아서 가는 곳마다 볼 수 있다. 지붕에는 십자가를 붙이는 관습이 있어서 조그마한 성당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지역의 특색으로 밀고 있는지 관광지의 기념품 샵에서는 모형도 판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프랑코 정권의 온건 인사들이 창립한 인민당의 전 당수 마누엘 프라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의 가족도 갈리시아 출신이며, 현지에서는 워낙 촌동네라 스페인과 세계의 주목을 받고 싶어서 예비 독재자들을 키운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2][3]
자연환경[편집]
칸타브리아 산맥의 서쪽 끝에 해당하며, 중앙부를 미뇨강이 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간다. 산맥의 서쪽 가장자리가 함몰되어 많은 리아(ria:길고 좁은 쐐기형 후미)를 형성한다. 리아스식 해안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연 강수량 1,500mm 이상으로 낙엽수림도 잘 자라지만, 전반적으로 산이 많고 경작지가 적어서 농업은 부진하다. 칸타브리아주, 아스투리아스주와 함께 스페인에서 가장 서늘하고 습한 지역으로, 최대 도시인 비고(Vigo)는 연 강수량 1,909mm에 12월 강수량만 300mm에 달하지만 눈이 오는 경우는 드물다. 연교차도 적고 타 지방보다 전체적으로 서늘한 편인데 일 평균기온이 7~8월에 19~21도로 시원하지만, 1~2월에도 10~12도로 온난하다. 8월 최고 평균 기온 23도, 2월 최저 평균 기온 4.3도이기에,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까지 치고 올라오지 못했고 그 결과 레콩키스타를 일으키는 지역들 중 하나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를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역사[편집]
고대~서고트 왕국[편집]
히스파니아를 정벌한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에 의해 복속되었지만 포에니 전쟁으로 히스파니아가 로마 제국의 세력권에 들어온 이후 오랫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갈라이키아 속주가 설치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무렵 수에비족에게 점령되어 수에비 왕국의 근거지가 되었고, 수에비 왕국이 히스파니아에서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데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수에비 왕국은 다시 서고트 왕국에게 멸망당했으며, 이 무렵 기존의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가 몰락하고 가톨릭이 전파되는 한편 잉글랜드, 웨일스 지방의 켈트 족이 앵글로 색슨 족으로부터 피해 갈리시아 북부에 상륙하기도 했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신하국으로서 갈리시아에 왕국이 잠시 부활하기도 한다. 서고트 왕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멸망한 뒤 무슬림에게서 가톨릭 세력을 수호하려는 운동인 레콩키스타가 일어나게 되고, 갈리시아는 이 운동의 중심이 된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편입된다.
갈리시아 왕국[편집]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편입된 갈리시아는 알폰수 3세 대왕의 세 아들에게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레온을 분할 상속하는 과정에서 독립된 왕국이 되기도 하지만 오르도뉴 2세부터 알폰수 4세까지의 20여년에 그쳤고 이후 갈리시아를 기반으로 베르무두 2세에 의해서 잠시 독립국이 되기도 하지만 베르무두 2세 자신이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레온을 통합하자 다시 레온 왕국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레온 왕국은 페르난도 1세 이후 카스티야와 사실상 합쳐졌으며, 페르난도 1세의 상속 과정에서 포르투갈과 함께 가르시아 2세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페르난도 1세가 죽자 포르투갈 공작 누누 멘데스가 갈리시아의 왕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국력을 소진한 갈리시아는 가르시아 2세의 큰형인 카스티야 왕 산초 2세에게 공격을 받아 카스티야에 흡수당한다. 이 때 카스티야 측에서 활약한 영웅이 엘 시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산초 2세가 암살당하고 원래 레온의 왕이었던 둘째 알폰소 6세가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후에 포르투갈의 독립 여론은 점점 강해져 갔고 결국 알폰소 6세 사후 포르투갈은 갈리시아에서 떨어져 나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게 된다. 이후 갈리시아는 카스티야 왕국의 일부로 확정되었고, 갈리시아 왕 작위는 카스티야 왕에게 대대로 계승되는 명예직에 가까운 왕위가 되었다가 1833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4]
산업[편집]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기간 동안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 정작 프랑코 본인은 이 지역 페롤 시 출신인 게 아이러니. 프랑코 사후부터 자동차 산업이 조금씩 발달했으며, 비고는 현재 스페인에서 가장 자동차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 중 하나다. 라 코루냐의 경우 스페인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업 중 하나인 인디텍스가 있고 수 많은 중소기업들이 인디텍스의 협력업체로 사업을 운영하기 때문에 갈리시아주에서 가장 소득수준이 높다. 이외에는 목재, 어업 등이 주요 산업.
주도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의 시종착지 및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유명하며, 순례길의 최종 구간이 모두 갈리시아 지방에 속해 있어 자치 지방 정부 차원에서 관광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이를 홍보하기 위한 인스타그램 계정도 운영되고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기준 마드리드에서 육로 기준 600km 이상 떨어져 있으며, 버스로 8시간 이상, 고속철도로도 거의 4시간이 걸릴 만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그나마도 비교적 최근인 2020년대에 고속선을 개통해서 이 정도이지 그 이전엔 5시간 이상은 각오해야 했을 정도다.
스포츠[편집]
가장 유명한 것은 축구로, 라 코루냐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와 비고의 RC 셀타 데 비고는 서로 간에 경쟁이 매우 강렬하여 갈리시아 더비라고 불린다. 산티아고의 SD 콤포스텔라와 라 코루냐의 페롤을 연고지로 두는 라싱 데 페롤 팀도 지역 인기 구단이었지만 현재는 4부 리그까지 추락한 상태이며, 최근에는 세군다 리가에서 성장한 CD 루고가 저 둘을 잇는 3번째 팀으로 지지를 얻고 있다. 카탈루냐나 바스크 지역과 더불어 갈리시아에도 지역 협회가 있어서 지역 대표팀을 선발한다.
라 코루냐가 연고지인 롤러 하키팀 HC Liceo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데, 특히 코루냐의 축구 클럽 데포르티보가 암흑기에 빠져 있었던 1980년대에는 전통적으로 롤러 하키의 강호였던 카탈루냐를 누르고 스페인 컵, 스페인 리그에서 우승한 것은 물론 유럽 선수권, 세계 선수권까지 석권했다.
언어[편집]
스페인어와 갈리시아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고대에는 켈트어의 일종인 갈라이키아어(Gallaecian language)도 쓰였지만 로마의 지배를 받는 동안 라틴어로 대체되었으며, 갈리시아어는 라틴어의 후계 언어다. 몇몇 범켈트주의자들은 갈리시아를 켈트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보기도 하지만 범켈트주의 국제 단체인 켈트 연맹(Celtic League)에서는 현재 켈트계 언어가 사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다.
분리주의[편집]
스페인은 각지의 분리주의 경향이 조금 강한 나라이며, 이곳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다만 이곳의 분리주의는 그냥 독립하자는 것이 아니라 언어 문화적으로 뿌리를 같이하는 포르투갈과 합치자는 점이 다르다. 일각에서는 포르투갈어와 갈리시아어가 한 계통임을 근거로 갈리시아를 스페인에서 떼어내어 포르투갈리시아(포르투갈+갈리시아)의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reintegracionismo)도 있으며, 2000년대에 활동한 분리주의단체 레시스텐시아 갈레가가 정부나 금융기관을 노려서 산발적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방 민족주의가 강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카탈루냐나 바스크 지방과 달리 갈리시아는 독자적인 언어, 문화 공동체로서의 집단 정체성이나 자치욕구는 강하지만 정치적 분리주의는 미약한 편이다. 아예 다른 문화권에서 시작하여 탄탄한 공업에 자유주의적, 국민주의적 지식인들을 토대로 발전해 온 카탈루냐나 바스크와는 달리 애초에 변방 미개발 농어촌이었던 갈리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한 명인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세계 가톨릭 신앙의 3대 성지이자 스페인 국민가톨릭주의 사관에서 받들어 마지 않는 레콩키스타의 정신적 지주이니[3] 토착 유지들로서는 굳이 자신들을 떠받들어주는 마드리드 중앙정부를 거부하고 독자적 민족주의를 주창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편이다. 쓰는 언어가 사투리 취급당해서 그렇지 적어도 이베리아 동군연합 당시의 포르투갈 지역처럼 에스파냐인으로서 푸대접 받는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수백년간 이어져내려온 오늘날의 포르투갈인과 갈리시아인의 정체성 차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갈리시아는 아스투리아스와 함께 매년 살인적인 여름 햇살을 피해 관광을 오는 스페인인들의 피서휴양지인 만큼 스페인과 결별하고 포르투갈과 합쳐 봤자 지역경제에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갈리시아 분리주의는 사실상 일부 이상주의자들의 떡밥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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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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