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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蔣英實)은 조선 전기 세종 때의 과학자이다.
개요[편집]
장영실은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였다. 그의 과학적 재능으로 태종 때 이미 발탁되어 궁중기술자 업무에 종사하였다. 제련(製鍊) ·축성(築城)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으며 1421년(세종 3) 세종의 명으로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다. 1423년(세종 5) 왕의 특명으로 면천(免賤)되어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가 되면서 관노(官奴)의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역할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조상은 원나라 소주, 항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에 귀화하여 아산군(牙山君)에 봉해졌던 장서(蔣壻)의 9대손이며 그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대대로 과학기술분야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부친은 고려말 전서라는 직책을 지낸 장성휘이며 모친은 기녀였다고 전해진다. 장영실은 이순지와 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 당대의 훌륭한 최고의 과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장영실의 생애[편집]
장영실은 본래 동래현의 관노였다. 세종은 실용주의자로서 장영실의 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부왕의 뒤를 이어 중용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세종 4년)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다. 귀국 후 장영실 나이 약 34세 때인 1423년(세종 5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고 다시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종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다.
1424년(세종6) 5월, 임금은 그를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켰고 갱점지기(更点之器)를 만들라고 명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첫 물시계였다. 그 후, 세종의 명에 따라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책임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년)와 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欽敬閣)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다. 이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大簡儀), 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圭表) 등이 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정4품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하였다.
1434년(세종 16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다. 갑인자는 약 20여만 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판본이 깨끗하였다.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 생활을 지고 있던 중 세종대왕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 형벌을 2등을 감해 주었다고 한다. 장영실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다. 후세에도 그의 공교한 솜씨가 간혹 회자되었다. 한편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아산 장씨 시조인 장서의 묘 바로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있다.
장영실의 가계[편집]
장영실의 생몰 연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1385년경에서 1390년(우왕 11년~공양왕 2년)경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영실의 아버지가 원나라 때에 중국 소주, 항주로부터 귀화하였으며 어머니는 동래의 관노였다는 것만이 세종의 발언으로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장영실의 일족이라고 자처하는 아산 장씨는 장영실의 아버지 이름이 장성휘(蔣成暉)로 아산 장씨의 시조 장서의 8세 손이고 고려 말 전서(典書)였으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장영실의 어머니와 장영실이 관기 및 관노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순히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의 자제라면 고대 중국식으로 외자로 이름을 짓고 자나 호를 짓거나, 아니면 평범한 이름으로 짓지, 당시의 아산 장씨 집안의 항렬에 맞게 짓고 족보에 올린다는 것은 유교적 정서에서 힘들다. 그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하며 사촌여동생이 당대의 천문학자 김담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옥루[편집]
옥루는 1438년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이다.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인형이 북, 종, 징을 쳐서 시각과 경(更)을 알렸다. 모든 기관은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동으로 이루어졌다. 1438년(세종 20) 1월에 완성되어 경복궁 안 흠경각(欽敬閣)에 설치하였다. 그 구조를 보면 흠경각 안에 호지(糊紙)로 높이 7자[尺] 가량의 종이산을 만들고 거기에 태양의 모형을 비롯해서 옥녀(玉女) ·사신(四神) ·사진(司辰) ·무사(武士) ·종인(鐘人) ·고인(鼓人) ·징인(鉦人) ·십이신(十二神) 등의 인형을 배치하고, 옥루의 기륜(機輪)을 설치하여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기륜이 회전되면서 이들 인형이 북 ·종 ·징 등을 쳐서 시각과 경(更) 등을 알리게 하였다.
오위(午位:午時에 해당하는 위치)의 앞에 있는 대(臺) 위에 장기(裝器)를 놓았는데 그것은 물이 흘러들어가 그릇이 비면 기울고 반쯤 차면 수평이 되며, 엎어지도록 하여, 이 모든 기관이 사람의 힘을 빌지 않고 자동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종이산의 사방에는 농촌 사계절의 광경을 계절마다 그려 세웠고 인물 ·오수(烏獸) ·초목의 모양을 나무에 새겨 절후마다 해당되는 것을 진열하였다.
창경궁 자격루 누기[편집]
창경궁 자격루 누기는 조선 중종 때 만든 자동시보장치의 물시계이다. 조선 시대의 표준시계는 경루, 누각으로 이어지는데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를 사용하다가 성종 때 시보와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아 중종 때 장영실의 자격루를 개량하여 만든 것을 표준시계로 사용하였다. 1985년 8월 9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1536년(중종 31) 제작되었으며, 대파수호(大播水壺) 1개·소파수호 2개·수수호(受水壺) 2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청동제 대파수호는 지름 93.5㎝, 높이 70㎝이고, 도자기로 만든 소파수호 2개는 최대 지름 46㎝, 높이 40.5㎝이며, 청동제 수수호(통) 2개는 바깥지름 37㎝, 높이 196㎝이다.
조선시대의 표준시계는 경루(更漏:1398년) ·누각(漏刻:1424)으로 이어지고, 1434년(세종 16) 장영실(蔣英實) 등에 의하여 만들어진 자격루를 사용하여 오다가, 성종 때에 이르러 이 물시계의 자격장치에 의한 시보(時報)와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아, 1534년(중종 29) 새 자격루의 제작에 착수, 1536년에 완성하여 이를 창덕궁에 세운 보루각에 설치하고 그해 8월부터 표준시계로 사용하였다. 두 번째 자격루의 구조는 장영실의 그것과 거의 같으나, 점수(點數)를 자격할 뿐만 아니라 인정(人定)과 파루(罷漏)도 자격할 수 있게 개량한 것이다. 이 물시계는 그 후 100여 년을 표준시계로 사용하다가 1653년(효종 4), 이제까지의 1일 100각(刻)으로 된 수시력(授時曆)이 폐지되고 1일 96각의 시헌력(時憲曆)이 시행됨에 따라, 자격장치(자동시보장치) 96각에 맞추어 사용할 수 없게 됨으로써 이 장치를 제거하고 누기(漏器:漏刻)만을 한말까지 그대로 표준시계로 사용하여 왔다.[1]
앙부일구[편집]
1434년 조선 세종대왕 16년 이후로 제작·사용된 해시계이다. 과학·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었다. 앙부일구는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초기의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제작된 앙부일구는 남아 있지 않아 18세기에 제작된 것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휴대용 앙부일구는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로 강건이 제작한 것이다.
갑인자[편집]
갑인년에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이다. 1420년(세종2년)에 만든 경자자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하여 보기가 어려워지자 조금 더 큰 활자가 필요하다하여 1434년(세종16년) 갑인년에 왕명으로 주조된 활자이다. 이천·김돈·김빈·장영실·이세형·정척·이순지 등이 두 달 동안에 20여 만의 큰 중자인 대자와 소자를 만들었다. 활자의 모양이 바르고 글자의 크기가 고르게 조립되었으며, 자판의 빈틈을 납을 사용하지 않고 대나무를 이용하였으므로 글자가 선명하고 아름답다. 하루에 활자를 찍어 내는 양이 40여 장에 달하여 경자자보다 배 이상의 생산력을 가질 수 있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창경궁 자격루 누기(Clepsydra of Changgyeonggung Palace,昌慶宮 自擊漏 漏器)〉, 《두산백과》
- 원자력안전위원회, 〈(우리나라의 위인들) 장영실 - 과학을 위해 태어난 인물〉, 《네이버포스트》, 2021-05-15
- 매경출판, 〈세종의 믿음에 보답한 과학자, 장영실〉, 《네이버포스트》, 2023-05-24
- 빠다마켓, 〈만원 지폐에 새겨진 혼천의를 만든 장영실. 세종과 장영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네이버블로그》, 2024-10-19
- 〈장영실〉, 《위키백과》
- 〈장영실〉, 《나무위키》
- 〈장영실 (蔣英實)〉,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장영실(蔣英實,?~?)〉, 《두산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