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듀런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
|||
7번째 줄: | 7번째 줄: | ||
==역사== | ==역사== | ||
− | + | 듀런트는 당시 미국 자동차 시장을 주름잡던 포드의 경영 방침에 반기를 들었다. 단 하나의 브랜드가 아닌, 여러 개의 회사와 브랜드를 갖춰 다양한 상품을 소비자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다. 듀런트는 1904년 미국의 자동차 회사 뷰익 인수를 시작으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다. 뷰익의 자동차 생산량은 인수 당시 연간 28대에 불과했지만 4년 만에 8000여 대 수준으로 급성장했다. 듀런트는 뷰익 성장에 힘입어 1908년에 윌리엄 듀런트는 찰스 스튜어트 모트와 함께 제너럴모터스(General Motors)를 설립했다. GM 설립 이후에는 기업 인수 합병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당시 미국은 5000여 개의 중소 자동차 제조사가 난립했다고 한다. 듀런트는 이를 기회로 삼아 회사 규모를 크게 불려 나간다. 올즈모빌, 캐딜락, 오클랜드(현 폰티악) 등의 자동차 회사를 연달아 흡수 합병한다. 그러나 지나친 사업 확장이 문제였다. 두려움 없는 문어발식 사업 확장은 회사의 재정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대부분 부실기업 위주로 회사를 인수해왔던 탓에, GM은 내실을 다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11년 GM 이사회는 듀란트의 강제 퇴출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듀런트는 기술자 루이 쉐보레와 손을 잡고 쉐보레 회사를 설립한다. 이후 1916년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하며 GM 지분을 사들여 최대 주주에 다시 오르게 된다. 그러나 영광은 겨우 4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무리한 경영 탓에 다시 모든 것을 잃은 듀런트는 영영 자동차 업계에서 떠나게 된다. 듀런트 자동차 회사란 상호명의 회사를 만들어 또 다시 재기를 시도했지만, 1929년 세계대공황의 늪에 빠져 결국 1930년 GM은 파산하고 말았다. 뒤이어 GM은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포드는 비용을 낮춰 소비자 가격을 줄이기 위해 조금의 변화도 없이 검은색의 같은 차를 대량으로 제조하여 파는 전략을 취한 반면, GM은 다양한 브랜드들을 사들였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다채로운 브랜드를 재편하여 각 브랜드의 이미지에 맞춘 다양한 차량과 옵션을 제공하는 전략을 취했다. 예를 들면 캐딜락은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고급 차량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반면, 쉐보레는 보다 저렴한 가격에 젊은 디자인을 합쳐 좀 더 젊고 디자인적인 면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을 타깃으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브랜드마다 급(class)을 정한 후 해당 급에 맞는 차량을 제작했다. 또한 이제는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차량에 원하는 색상을 입히는 일도 GM에서 처음 도입한 것이다. 결국 GM은 포드를 제압하고 미국 내에서 자동차 업계의 1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1950년대에는 유럽과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다시 한 번 제너럴모터스는 시련을 겪었다. 이어 새로운 경영자인 잭 스미스(Jack Smith)를 중심으로 GM은 다시 한 번 일어서기에 도전하였다. 불필요한 사업과 공장들은 과감히 접어버리고 미국 내 판매보다 더 큰 세계 시장을 목표로 나아갔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이러한 GM만의 특별한 브랜드 전략을 유지하여 미국 시장 점유율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함으로써 GM은 드디어 1993년 적자를 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과 과정을 바탕으로 결국 GM은 북미 이외의 24개국에서 28개의 자회사를 가지고 169개국에서 자동차를 판매하는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하였다.<ref>김성진 기자, 〈[http://www.sisajournal-e.com/news/articleView.html?idxno=180335 윌리엄 듀런트, GM의 영욕 지켜본 창업자]〉, 《시사저널e》, 2018-02-18</ref> | |
+ | |||
+ | ==각주== | ||
+ | * 김성진 기자, 〈[http://www.sisajournal-e.com/news/articleView.html?idxno=180335 윌리엄 듀런트, GM의 영욕 지켜본 창업자]〉, 《시사저널e》, 2018-02-18 | ||
== 같이 보기 == | == 같이 보기 == |
2021년 12월 27일 (월) 15:03 판
윌리엄 듀런트(William Durant)(1861년 12월 8일 ~ 1947년 3월 18일)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선도적인 선구자였으며, 통합된 기업 지주 회사 아래에 각각 다른 자동차 라인이 있는 여러 개의 마크를 보유한 하나의 회사를 만들었다. 듀런트는 프레드릭 스미스와 함께 제너럴모터스(GM), 그리고 루이스 쉐보레와 함께 쉐보레(Chevrolet)를 공동 설립했다.
[타고] 1개월 단위로 전기차가 필요할 때! 타고 월렌트 서비스 |
역사
듀런트는 당시 미국 자동차 시장을 주름잡던 포드의 경영 방침에 반기를 들었다. 단 하나의 브랜드가 아닌, 여러 개의 회사와 브랜드를 갖춰 다양한 상품을 소비자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다. 듀런트는 1904년 미국의 자동차 회사 뷰익 인수를 시작으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다. 뷰익의 자동차 생산량은 인수 당시 연간 28대에 불과했지만 4년 만에 8000여 대 수준으로 급성장했다. 듀런트는 뷰익 성장에 힘입어 1908년에 윌리엄 듀런트는 찰스 스튜어트 모트와 함께 제너럴모터스(General Motors)를 설립했다. GM 설립 이후에는 기업 인수 합병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당시 미국은 5000여 개의 중소 자동차 제조사가 난립했다고 한다. 듀런트는 이를 기회로 삼아 회사 규모를 크게 불려 나간다. 올즈모빌, 캐딜락, 오클랜드(현 폰티악) 등의 자동차 회사를 연달아 흡수 합병한다. 그러나 지나친 사업 확장이 문제였다. 두려움 없는 문어발식 사업 확장은 회사의 재정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대부분 부실기업 위주로 회사를 인수해왔던 탓에, GM은 내실을 다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11년 GM 이사회는 듀란트의 강제 퇴출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듀런트는 기술자 루이 쉐보레와 손을 잡고 쉐보레 회사를 설립한다. 이후 1916년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하며 GM 지분을 사들여 최대 주주에 다시 오르게 된다. 그러나 영광은 겨우 4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무리한 경영 탓에 다시 모든 것을 잃은 듀런트는 영영 자동차 업계에서 떠나게 된다. 듀런트 자동차 회사란 상호명의 회사를 만들어 또 다시 재기를 시도했지만, 1929년 세계대공황의 늪에 빠져 결국 1930년 GM은 파산하고 말았다. 뒤이어 GM은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포드는 비용을 낮춰 소비자 가격을 줄이기 위해 조금의 변화도 없이 검은색의 같은 차를 대량으로 제조하여 파는 전략을 취한 반면, GM은 다양한 브랜드들을 사들였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다채로운 브랜드를 재편하여 각 브랜드의 이미지에 맞춘 다양한 차량과 옵션을 제공하는 전략을 취했다. 예를 들면 캐딜락은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고급 차량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반면, 쉐보레는 보다 저렴한 가격에 젊은 디자인을 합쳐 좀 더 젊고 디자인적인 면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을 타깃으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브랜드마다 급(class)을 정한 후 해당 급에 맞는 차량을 제작했다. 또한 이제는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차량에 원하는 색상을 입히는 일도 GM에서 처음 도입한 것이다. 결국 GM은 포드를 제압하고 미국 내에서 자동차 업계의 1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1950년대에는 유럽과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다시 한 번 제너럴모터스는 시련을 겪었다. 이어 새로운 경영자인 잭 스미스(Jack Smith)를 중심으로 GM은 다시 한 번 일어서기에 도전하였다. 불필요한 사업과 공장들은 과감히 접어버리고 미국 내 판매보다 더 큰 세계 시장을 목표로 나아갔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이러한 GM만의 특별한 브랜드 전략을 유지하여 미국 시장 점유율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함으로써 GM은 드디어 1993년 적자를 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과 과정을 바탕으로 결국 GM은 북미 이외의 24개국에서 28개의 자회사를 가지고 169개국에서 자동차를 판매하는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하였다.[1]
각주
- 김성진 기자, 〈윌리엄 듀런트, GM의 영욕 지켜본 창업자〉, 《시사저널e》, 2018-02-18
같이 보기
|
- ↑ 김성진 기자, 〈윌리엄 듀런트, GM의 영욕 지켜본 창업자〉, 《시사저널e》, 2018-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