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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2일 (금) 17:57 기준 최신판
하이데라바드(Hyderabad)는 인도 텔랑가나주 주도(州都)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하이데라바드는 남인도 데칸고원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남인도 문화 중심지인 하이데라바드는 역사적 유적, 다양한 문화, 급성장하는 기술 산업으로 유명하다. 도시 중심에는 차르미나르(Charminar)를 비롯한 인도-이슬람 건축의 유산들이 남아있는 한편, 현대에 이르러 정보 기술, 생명 공학 및 제약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사이버라바드(Cyberabad)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인도의 하이데라바드는 파키스탄의 하이데라바드와 도시 이름이 동일하다.
개요[편집]
- 행정 당위: 인도 텔랑가나주 주도
- 면적: 650km²
- 인구: 6,809,970명(2011년)
- 지역어: 텔루구어, 우르두어
- 시장: Gadwal Vijayalakshmi
역사[편집]
하이데라바드는 데칸 지역의 골콘다의 꾸뜹 샤히 왕조(Qutb Shahi Dynasty)의 계획도시로 발전했다. 골콘다의 쿨리 꾸뜹 샤(Quli Qutb Shah, 재위 1580~1612) 술탄은 1591년 하이데라바드를 건설하면서 십자형 대로 중심에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건축물로 남아있는 차르미나르(Charminar)를 세웠다. 골콘다의 왕국 지배층은 이란 사파비 왕조(Safavid Dynasty)를 비롯해 중동과 아프리카에서도 이주한 사람들이었고, 그중에서도 대다수를 차지했던 시아파 이란계 이주민들의 영향으로 골콘다 왕조와 하이데라바드는 이슬람교 시아 무슬림 정체성을 띠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에도 차르미나르 내부에서 시아파와 관련된 유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Aurangzeb, 재위 1658~1707) 황제가 꾸뜹 샤히 왕조를 정복하면서 하이데라바드는 무굴제국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07년 아우랑제브 황제의 사후 무굴제국의 왕위 계승 전쟁은 1719년 무함마드 샤의 등위 이후 끝이 났다. 무함마드 샤의 수상이었던 아사프 자(Asaf Jah, 1671~1748)는 델리에서 관직을 내려놓고 1724년 하이데라바드로 향했다. 개선되지 않는 관직 임명 체계와 정치적 부패에 환멸을 느끼고 10여년 전 과거 주지사(Subahdar)로서 다스렸던 데칸 지역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시기 아사프 자와 그를 따르던 궁정 인구의 데칸 이주는 골콘다 왕국부터 남아있던 무슬림 인구와 맞물려 오늘날까지 하이데라바드의 무슬림 인구 및 우르두어 사용 인구가 일정 비율을 차지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는 하이데라바드와 데칸 지역의 독립적인 행정과 외교 교섭권 등을 토대로 지역을 다스렸으나 명목상으로는 무굴제국의 아래에 있었다. 이후 아사프 자와 그의 후계자들은 하이데라바드의 니잠(Nizam) 칭호로 불리며 그의 왕국은 1948년 인도연방이 니잠의 하이데라바드를 병합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1748년 아사프 자의 사후 외부의 세력들이 하이데라바드의 정치를 크게 좌우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인도 데칸 서부에서 성장한 마라타족(Maratha Clan)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니잠은 명목상으로는 무굴제국의 신하였기 때문에 1720년대부터 무굴과 마라타 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패배로 세금(Chauth)을 납부하여 군사적, 경제적으로 약해졌다. 또한 유럽 세력도 하이데라바드에 개입했는데 1750년 경 남인도 동부 연안의 카나틱(Carnatic) 지방의 총독 자리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분쟁이 생겼고 프랑스가 승리하였다. 프랑스의 총독 뒤플렉스(Joseph François Dupleix, 1697-1763)는 위와 같이 정치적 혼란에 빠진 하이데라바드에 간섭하여 자신의 계획대로 하이데라바드의 니잠을 세웠다.
1762년부터 아사프 자 2세(Asaf Jah Ⅱ, 재위 1762~1803)가 즉위하면서 왕위 계승의 불안이 종식되었지만, 18세기 말부터 영국의 정치 개입이 본격화되었다. 1798년 영국의 총독 웰즐리는 인도 왕국들의 분열을 이용하여 동인도 회사의 군대를 하이데라바드에 주둔할 수 있도록 했다. 동인도회사 군대의 비용은 왕국이 부담하였기에 자금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군사력까지 동원하여 국정에 개입할 수 있는 조치였다. 1803년 제2차 영국-마라타전쟁에서 동인도 회사가 승리한 이후 하이데라바드는 영국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후 1858년 영국이 식민 지배를 시작하면서 영국령 토후국으로 편입되었다.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하이데라바드를 독립 토후국으로서 인도에 편입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인도의 분리 독립 이후 하이데라바드는 주나가드(Junagadh), 카슈미르와 함께 마지막까지 인도에 합병되지 않고 남아있던 세 왕국이었다. 이때 하이데라바드의 니잠은 왕국을 병합하려는 인도 정부의 제안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분리 독립 시기 격렬했던 힌두교와 무슬림 인구의 반목도 존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무슬림 민병대인 라자카르(Razakar)가 힌두교 공동체를 공격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사다르 발라바이 파텔(Sardar Vallabhbhai Patel, 1875~1950)은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폴로 작전(Operation Polo)'을 통해 군대를 빠르게 투입하여 1948년 9월 17일 하이데라바드를 합병하였다.
하이데라바드는 병합 이후 인도의 하이데라바드주에 속하였으나, 1956년 언어별로 주가 개편되면서 하이데라바드주는 마하라슈트라주, 카르나타카주, 안드라프라데시주로 나뉘었다. 하이데라바드시는 텔루구어를 주로 사용하는 안드라프라데시주의 주도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안드라프라데시 지역과 텔랑가나 지역 사이에 세금 징수와 혜택 분배의 측면에서 형평성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었고, 이는 텔랑가나주 분리 운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2014년 의회의 승인으로 하이데라바드는 텔랑가나주의 주도로 안드라프라데시주에서 분리되었다. 하지만 2014년의 안드라 프라데시 재조직법을 해석하는 두 주 정부의 입장 차이로 인해서 여전히 자산과 부채의 배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인도 연방정부가 분쟁을 조정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리[편집]
하이데라바드는 인도 남부 데칸고원(Deccan Platau)에서 상대적으로 동북쪽에 위치하였다. 하이데라바드 대도시권의 평균 고도는 542m 정도이며 최고 고도는 도시 중심부에 있는 반자라 언덕(Banjara Hills, 672m)이다. 하이데라바드의 지형은 완만한 경사를 띄고 있는 대지 군데군데 작은 언덕이 위치해 있는 형태이다. 회색 또는 분홍색 화강암이 주를 이루는 암반이 분포한 암석 지형으로, 주요 하천을 이루는 동-서 방향이 다소 낮은 편이며, 그 중에서도 하천의 하류 부분인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편이다. 하이데라바드의 주요 하천은 무시강(Musi River)이며, 도시의 동-서 방향의 상당 부분이 무시강의 자연제방에 분포한다. 무시강은 데칸고원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의 벵골만으로 흐르는 크리슈나강(Krishna River)의 주요 지류이다. 하이데라바드에는 인공 호수를 포함해 140여 개의 호수를 가지고 있고 이 지역의 언어로 이를 바다(Sagar)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하이데라바드의 구릉지와 호수 등 다양한 지형 경관은 생물 서식처의 다양성을 높여 준다. 하이데라바드에는 세 개의 국립공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인도의 유명한 자연보호구역으로 악어 등의 생태가 보존되어있는 만지라 생태보호구역(Manjira Wildlife Sanctuary)은 하이데라바드에서 북서쪽으로 50km정도 떨어져 있다. 그러나 하이데라바드 생태구역의 범위는 도시화에 대한 압력으로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1996년의 산림 면적이 2.7% 정도였으나 2016년에는 1.7%로 1%가 감소하였다.
하이데라바드는 열대기후와 건조기후의 경계선상에 있어 두 기후 특성 모두를 지닌다. 구체적으로는 쾨펜 기후구분 상의 열대 사바나기후(Aw)와 아열대 반건 기후(BSh)의 특성을 모두 보인다. 연평균 기온은 26.8℃ 로 연중 온화하다. 가장 추운 달은 12월로 평균 15℃ 정도이며, 5℃이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드물다. 가장 따뜻한 달은 우기가 도래하기 직전인 5월이며, 평균기온은 33℃에 이르고, 동일한 시기 40℃를 넘는 날씨를 보일 때도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854.6mm로, 대부분은 남서 몬순이 영향을 주는 우기인 6월부터 10월까지 내린다. 인도양의 열대 저압대인 사이클론은 이 지역의 9월부터 12월에 영향을 주며, 이 지역 홍수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 바 있다.
무시강의 홍수와 수질오염 문제가 하이데라바드의 주요한 환경 문제로 지적된다. 사이클론의 내습으로 인한 무시강의 범람으로 하이데라바드 지역은 1908년, 2000년, 2020년 심각한 홍수 피해를 입었다. 1908년의 대홍수는 하이데라바드에서만 약 50,000여 명의 사상자를 유발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였다. 또한 무시강은 현재 인도에서 가장 오염된 강 중 하나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이데라바드의 산업시설에서의 오염물질에 대한 처리가 불량하여 많은 화학물질이 유출되고 있으며, 특히 하이데라바드의 제약 산업에서 항생제 누출이 빈번하여, 이 강에서 항생제에 내성을 갖춘 박테리아가 서식하는 등 생태적 문제에서 공중위생 문제로 오염문제가 확산되고 있다. 그 외에도 인도 대도시권에서 나타나는 대기오염 문제, 특히 교통수단에 의한 미세먼지가 주요한 오염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도시구조[편집]
하이데라바드의 총면적은 650㎢이며, 인도 남동부 텔랑가나주의 남부에 위치한다. 데칸고원의 도시인 하이데라바드에는 크리슈나강(Krishna river)의 지류인 무시강(Musi river)이 흐르고 있다.
행정 조직으로는 하이데라바드 시 위원회(Greater Hyderabad Municipal Corporation, GHMC)가 있으며, 여섯 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뉜다. 남쪽(Charminar), 동쪽(L.B. Nagar), 서쪽(Serilingampally), 북쪽(Kukatpally), 북동부(Secunderabad), 및 중앙(Khairatabad) 구역이 행정구역에 해당한다. 구역들은 150개의 구로 나뉘며 각각의 구에서 선출된 대표가 GHMC의 시장을 선출한다. 시 위원회에는 스물네 개의 주 입법부 선거구가 있으며 다섯 개의 하원(Lok Sabha) 선거구가 있다.
하이데라바드는 도시 간 교통이 발달해있다. 델리, 콜카타, 뭄바이 등 북인도는 물론이고 첸나이, 벵갈루루, 골콘다 등을 오가는 철도와 항공 서비스가 있다. 항공은 하이데라바드의 남쪽 외곽에 위치한 하이데라바드국제공항을 이용할 수 있다. 철도는 하이데라바드 역, 세쿤데라바드역(Secunderabad Station), 카체구다 역(Kacheguda) 등을 통해 인도 전역으로 연결되어 있다. 도로 교통은 급속한 인구 증가와 함께 교통 체증이 심하다. 이에 하이데라바드 시는 대중교통 활성화하고 도로 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대중교통 수단으로 경전철 건설에 역점을 두고 있다.
경제[편집]
하이데라바드 도시의 총생산(PPP)은 2021년 기준 752억 달러(약 92.5조 원)이다. 특히 상업과 IT 산업뿐만 아니라 문화적 중심지이다. 2021-2021 IT 발전 리포트(IT Progress Report)에 따르면 하이데라바드의 IT 수출액은 230억 달러로 점점 더 성장하고 있다.
하이데라바드는 1591년 도시 건설 이후 상업적 중심지였다. 하이데라바드는 세계 유일의 다이아몬드 시장이 위치한 도시로서 과거부터 국제 무역이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상업 연결망을 기반으로 수공예품이 수출되고 있다. 또한 꾸뜹 샤히 왕조(Qutb Shahi Dynasty)와 니잠 왕조의 후원으로 진주 무역이 발달하여 "진주의 도시"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담배 제조, 직조 산업 등이 발달했다.
1990년대 이후 IT 산업이 하이데라바드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사이버라바드(Cyberabad, 사이버 도시)"라는 별칭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도시의 하이텍 시티(HITEC City) 단지는 IT 산업, 생명공학, 제약 산업 등을 망라한 국제적인 비즈니스 지구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적인 기업인 메타(Meta), 아마존 글로벌 캠퍼스(Amazon Global Campus), 구글(Google), 애플(Apple) 등이 진출한 상태이다.
제약과 의약품 분야도 발달했다. 1961년 설립된 인도 의약품 및 제약 유한공사(Indian Drugs and Pharmaceuticals Limited, IDPL)는 하이데라바드에서 신약 개발 및 복제 약품이 생산될 수 있도록 여러 기업들을 유치했다. 대표적인 상주 기업으로는 인도의 제약회사인 바라트 바이오테크(Bharat Biotech)를 비롯하여 다국적 제약회사인 노바티스(Novartis),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존슨앤존슨(Johnson & Johnson) 등이 있다.
하이데라바드는 자동차공업도 발달해 있는데, 인도의 타타 그룹(Tata Group), 마힌드라 그룹(]]Mahindra Group]])이 대표적인 기업이며, 우리나라 기업으로 텔랑가나 주정부의 도움을 받아 현대가 진출해있다.
교육[편집]
하이데라바드는 발전된 산업분야만큼 대학과 연구 기관들이 집중되어 있다. 기술, 공학,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과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오늘날 인도 대학 순위의 상위권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국제적 수준의 연구와 교육을 제공한다. 주요 종합대학으로 1918년 하이데라바드의 니잠에 의해 설립된 오스마니아대학교(Osmania University)와 1974년 개교한 하이데라바드 대학교(University of Hyderabad)가 있다. 또한 하이데라바드 인도공과대학(IIT-H, 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 Hyderabad)에서는 정보 기술과 컴퓨터 공학 분야에서 인재를 길러내고 있으며, 인도 경영대학(Indian School of Business)은 국제적으로도 경쟁력을 갖춘 MBA 기관이다.
문화[편집]
문화적으로 도시는 남인도와 북인도가 혼합된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무굴제국이 쇠퇴하면서 북인도의 이슬람교 무슬림 인구가 하이데라바드로 다수 이주하였기 때문인데, 특히 시문학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사프 자 왕조의 니잠은 우르두어 문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주로 북인도에서 볼 수 있는 우르두어 시문학인 가잘(ghazal)이 발전했다. 이러한 문학적 자산을 바탕으로 2010년부터 하이데라바드 문학 축제(Hyderabad Literary Festival)을 매년 1월경에 개최되고 있다.
하이데라바드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문화 산업은 영화이다. '탈리우드(Tollywood)'라고도 불리는 텔루구어 기반의 영화 산업은 1909년경부터 소규모로 시작하였지만 현재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티켓 판매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텔루구어 영화는 상업적 측면과 예술적 측면에서 인정받으며 주요 영화제에 출품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RRR》(2022)이 있다.
관광[편집]
인도 정부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신청했던 유적들로는 골콘다 꾸뜹 샤히 왕조(Qutb Shahi Dynasty)의 유산인 골콘다 요새, 꾸뜹 샤히 영묘, 차르미나르가 있다. 이 세 건축물들은 인도 데칸 지역의 정체성이 가미된 정교한 인도-페르시아 건축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10년 이 세 장소를 유네스코에 등재하고자 했으나 승인되지는 못했다.
골콘다 꾸뜹 샤히 왕조가 인도-페르시아 양식을 잘 보여준다면 아사프 자 왕조 시기의 건축은 서양식 건축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반영한 19세기 궁전 건축이 이루어졌다. 20세기에는 미르 오스만 알리 칸(Mir Osman Ali Khan, 재위 1911~1948)의 통치 기간 동안 하이데라바드 고등 법원, 오스마니아 병원, 카치구다 역 등에서 복합적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건물들이 다수 세워졌다.
- 꾸뜹 샤히 영묘(Qutb Shahi Tombs)
꾸뜹 샤히 영묘는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꾸뜹 샤히 왕조에 지어진 건축물로 골콘다 요새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복원되었고, 정원에 둘러싸여 기단부 위에 돔이 올라간 인도-페르시아 이슬람 건축의 독특함이 잘 드러난다. 이곳에 일곱 명의 꾸뜹 술탄이 묻혀있다고 전해진다.
- 차르미나르(Charminar)
하이데라바드를 대표하는 건축인 차르미나르는 1591년 골콘다 꾸뜹 샤히 술탄 왕조 시기 건설되었다. 십자형 대로 교차로에 위치한 차르미나르는 가장 위층에 모스크가 있으며, 네 개의 미나레트가 세워져 있다. 차르미나르의 이름은 이 특징적인 네 개(Char)의 미나렛(Minar)에서 따오게 되었다. 차르미나르의 내부 인테리어는 시아파 이슬람에서의 도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일례로 스투코(Stucco) 장식 부조는 시아 무슬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무함마드의 손자 후세인이 680년 우마이야 왕조에게 패배하고 순교한 비극적 사건을 그리고 있다.
- 초우마할라 궁전(Chowmahalla Palace)
하이데라바드 니잠 왕조의 궁전으로 사용된 초우마할라 궁전의 명칭 중 "초우(Chow)"는 '넷'을 의미하는 '차르(Char), 차하르'의 변형이고 "마할라(Mahalla)"는 '궁전'이라는 뜻의 '마할'에서 비롯되었다. 차르미나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 장소는 19세기 후반에 완공되어 신고전주의, 무굴 건축 양식 등 다양한 건축양식이 혼재된 것을 볼 수 있다. 궁전 내에는 연못과 정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왕국의 의례가 행해진 궁전 접견실을 관람할 수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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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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