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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4일 (토) 16:38 기준 최신판

을지문덕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 관리이고 무장이다.

개요[편집]

  • 을지문덕은 고구려 명장이다. 수(隋)나라 군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적진에 가 형세를 정탐하였으며 후퇴작전을 이용하여 적군을 지치게 만든 다음, 거짓 항복을 하여 후퇴하는 수나라 군을 살수에서 공격하였다. "을지"라는 성은 연장자를 의미한다고도 하며 "을"만 성이고 "지"는 존대의 접미사로 보기도 하며, 선비족 계통의 성씨로 보아 을지문덕을 귀화인으로 보기도 한다. 612년(영양왕 23) 수(隋)나라의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이 113만여 명의 수륙양군(水陸兩軍)으로 고구려를 침범하였다. 육군은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항전에 교착상태에 빠졌고 수군(水軍)은 바다를 건너 패강(浿江: 대동강)을 거슬러 와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가 일시에 섬멸당했다. 우중문, 우문술 등은 별동부대를 편성하여 평양을 직공(直攻)하기로 하였다. 고구려가 평양성 공격의 위기에 봉착하자 을지문덕은 항복한다는 구실로 수나라 군대에 가 형세를 정탐하였다. 수나라 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적의 군사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하루에 7번 싸워 7번 거짓 패배를 가장하는 후퇴작전을 이용하여 평양성(平壤城)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다. 이때 장군은 적장 우중문에게 "神策究天文妙算窮地理戰勝功旣高知足願云止(귀신 같은 꾀는 천문을 구명하고 신묘한 셈은 지리에 통달했네. 전승의 공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그치기를 바라오)"라는 희롱의 시를 보내며 수군이 물러나면 영양왕이 수 양제를 알현하겠다고 하여 퇴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우중문이 지친 군사로 회군(回軍)하자, 을지문덕은 살수(薩水:淸川江)에서 수나라의 후군(後軍)을 무찔러 대승하였다(薩水大捷).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1]
  •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제2차 침입을 물리친 장수로 유명하다. 612년 수 양제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요동성에서 지지부진하자 별동대 30만 5천 명을 뽑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직공하였다. 별동대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기는 했지만 모두 을지문덕의 유인작전이었고, 극도의 피곤과 군량 부족으로 인해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별동대가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서 강을 건널 때 습격하여 궤멸시켰다. 을지문덕은 생몰연대부터 출신, 관직 등 살수 대첩을 제외한 삶은 모든 것이 미상이다. 평양의 석다산(石多山)에서 태어났다거나 선비족 출신의 귀화인이라는 말도 있지만 모두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혹은 을지는 '웃치'의 음차로서 대인과 같이 윗사람을 뜻한다거나 고구려의 귀족 가문이었던 을(乙)씨 가문에 귀인에 대한 존칭사 지(支)를 붙인 것이라고도 하지만 역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는 없다. 조선에서는 고구려 고유의 복성(複姓)으로 파악하였다. 원전인 《삼국사기》에는 '가문의 계보는 알 수 없고,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과 문장력도 갖추었다.'라고만 적혀 있다. 이때의 국제 정세는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힘의 균형이 급격하게 기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신(大臣)이었다. 살수대첩 하면 흔히 귀주 대첩과 함께 수공(水攻)을 떠올린다. 그러나 《삼국사기》, 《수서》, 《자치통감》, 《동사강목》, 《해동역사》 등 한국과 중국의 사서에는 상류의 둑을 무너뜨려 수공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오직 근대 기록에만 등장하는데 이는 민간의 전설이었던 칠불전설(七佛傳說)이 변형되어 수록된 것이다. 실제 수공을 활용한 전투는 흥화진 전투뿐이다.[2]
  • 을지문덕은 영양왕 대의 고구려-수 전쟁 당시 고구려를 지켜낸 장수이다. 그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수나라와 고구려가 국가의 존망을 걸고 맞붙었던 2차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살수대첩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를 거둔, 고구려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자 전쟁 영웅으로 부르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이 승리로 위진남북조시대를 최종적으로 평정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했던 수나라가 멸망했다는 점에서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던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을지문덕은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의 인물이었다. 《수서》에 기록될 만큼 위대한 전쟁 영웅인 을지문덕의 선대 계보 및 이후 행적이 기록에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는 하나 고대 한국의 남은 기록은 정책은커녕 임금의 이름조차 기록이 뜸할 정도로 부족한 실정이다. 알다시피 고구려의 역사서는 현존하는 것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중국의 역사서를 검토해 봐야 하는데 중국의 역사가들이 일부러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을 배제시킨 것은 아닐 테고 또한 수양제가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는 밀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양제는 이미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추론이 성립된다.[3]
  • 을지문덕은 고구려 영양왕대(嬰陽王代, 재위 590~618) 활약한 장수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그 활약이 전한다. 기록에는 그가 침착하면서도 날쌔고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고, 글을 잘 지었다는 평가만 전하고, 가계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중국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그의 이름이 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울지(尉支)를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성씨인 울지(尉遲)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를 선비족 출신의 귀화인으로 보기도 한다. 또는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을 짓는 등 한문학에 능숙한 것에 착안하여, 그를 낙랑군(樂浪郡)이나 대방군(帶方郡) 지역 토착 호족세력(豪族勢力) 출신으로 이때에 새롭게 등장한 신진 귀족세력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한편 조선 후기 문신인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삼국시대부터 조선 인조대까지의 애국 명장을 전기로 엮은 책인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그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라고 밝힌 것이 있다. 조선 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을지문덕을 평양부(平壤府)의 인물로 적고 있다. 현재로서는 오로지 고구려와 수의 전쟁, 그중에서도 612년(영양왕 23)에 있었던 수의 2차 침략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고구려의 뛰어난 장수였다는 사실만 파악할 수 있다.

을지문덕 이름 논란[편집]

  • 이름인 을지문덕에서 성으로 여겨지는 을지(乙支)는 논란이 있다. 乙(을)은 고대어에서 '이리'라고 읽혔으며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支(지)는 관직명인 대막리지(大莫離支),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씨'와 같이 일종의 존칭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을지는 '대단하신 분'이라는 존칭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 지(支)를 '이공순신(李公舜臣)'의 공(公)과 비슷하게 쓰인 것으로 보고 성을 을(乙)씨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몇몇 야사에서는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을파소의 후손이라고 적기도 한다. 支(지)의 발음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그 자음이 c 혹은 ch로서 당시의 자음에는 없던 발음이라 ㄱ, ㅅ, ㄷ 등으로 한국에 전래되었다. 그래서 을지의 원래 발음은 '이리기' 혹은 '이리시(이리씨)'로 읽혔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가능성으로 연태조와 동일인설이 나왔는데, 《일본서기》에서 연개소문을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로 칭하고 있으므로, 카스미가 개소문(蓋蘇文)의 음차이고 이리가 연(淵)에 해당하여 같은 성씨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의 왕"을 쿠다라노 코니키시(くだらのこにきし)라 불렀는데, 이 중 코니키시라는 말이 건길지(鞬吉支)의 당대 발음인 것으로 추정되어 백제에서는 접미어 "지"가 시로 읽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백제의 곤지(昆支)와 직지왕(直支王)의 경우 코니키, 토키오우로 훈하고 있어 지(支)가 시로 읽혔다고 확정할 순 없다. 신라, 가야 지도자층의 호칭인 간지(干支)의 이표기로 한기(旱岐)가 있으므로 支(지)는 기로 읽혔다고 볼 수 있다.

살수대첩[편집]

  • 살수 대첩(薩水大捷)은 제2차 고수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장식한 살수에서의 전투이다. 평양을 직공했던 수의 별동대가 살수를 건너 회군하던 중 을지문덕 군의 공격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 귀주 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612년 1월(음력) 제2차 여수 전쟁이 발발하여 수 양제는 1,133,800명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요동성과 여러 성으로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러 달 동안 함락시키지 못하고 피해가 누적되자 6월(음력)에 수군(水軍)과 육군으로 편성된 별동대를 조직하여 평양성을 단숨에 공격하려 하였다. 육군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 좌효위대장군(左驍衛―) 형원항(荊元恒), 우익위장군 설세웅, 우둔위장군 신세웅, 우어위장군(右禦衛―) 장근(張瑾), 우무후장군(右武侯―) 조효재(趙孝才), 탁군태수 겸 검교좌무위장군(檢校左武衛―) 최홍승(崔弘昇), 검교우어위대장군 위문승이, 수군(水軍)은 우효위대장군 내호아, 좌무위장군 주법상이 지휘하였다.

을지문덕에 대한 평가[편집]

  •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 제26대 영양왕대의 장군으로 612년 수나라 113만 대군의 침공에 맞서 고구려를 위기로부터 구하였다.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당시 고구려의 방어 전략을 수립하고 전쟁을 이끌어 나갔다는 점에서 최고위급 관료였음을 알 수 있다. 612년 수나라의 침공은 침공 병력만 113만에 달할 정도로 수가 전력을 기울인 것이었다. 또한 수의 침공군은 요동(遼東)을 가로질러 고구려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육로군과 고구려의 수도를 직공하려는 수로군으로 나뉘어 침공하였다. 을지문덕이 이끈 고구려군은 수의 육로군을 요하 일대의 국경선에서 저지하여, 대군을 투입하여 각 방면으로 병진(竝進)하려던 수의 전략을 무산시켰다. 이에 수는 별동대 30만을 뽑아 우중문(于仲文), 우문술(宇文述)의 지휘로 고구려 수도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수로군과 연결하여 고구려의 중심부를 직공하고 자 했던 것이다. 을지문덕은 적의 군사력을 소모하기 위해 거짓 패배를 가장하여 적군을 평양성(平壤城)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다. 뒤늦게 함에 빠진 것을 깨닫고 회군하던 수군은 살수(薩水 현재의 淸川江)에서 고구려군의 총공격을 받아 괴멸하였다. 을지문덕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던 인물이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 을지문덕은 수나라라는 당대 동아시아 최강대국의 압도적인 군세를 맞아 그냥 물러가게 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회전에서 적군의 야전 병력을 깡그리 전멸시켜 고구려의 대승을 이끌었다. 불세출의 전쟁 영웅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내지 못할 군공이자 업적이다. 당시 중국이 고구려를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에서 가지는 위상은 현대 미국에 버금가는 정도였고 동시대 다른 지역의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수나라 주변의 다른 세력들은 수나라에 의해 일거에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다. 이 나라가 괜히 천자를 운운하는 천조국이었던 게 아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그런 나라의 군대를 말 그대로 전멸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인류 전쟁사 최대 기적이라 봐도 부족함이 없는 엄청난 업적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고 국군의 무공훈장도 강감찬까지 포함한 세 인물에서 따왔다.
  •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에게 항복하겠다면서 혈혈단신 적진에 들어가 정찰을 하고 나오는 생사를 넘나드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나오는 강심장인 데다가 뛰어난 지략을 발휘해 적을 무찌르는 혜안도 가지고 있었으며 <여수장우중문시>를 지어서 수나라군을 농락할 정도의 문장력도 지니고 있었던 명장이었다. 종합하면 적을 기만하고 조롱하는 고도의 심리전, 적의 수가 많음에도 확실히 이길 수 있을 때라고 판단하고 과감하게 야전을 거는 판단력, 보급이 전쟁 승패의 본질임을 파악한 정확한 진단, 목숨을 걸고 적의 정보를 직접 캐내려고 하는 용감함을 갖춘 희대의 걸물이라 일컫기에 손색이 없다.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역사적 기록이 너무 부족한 것이 단점이다. 세계 전쟁사에서 한민족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명장이었기 때문에 훨씬 후대인 조선시대 숙종도 숙종 33년(1707) 을지문덕에게 '청천(淸川)'이라는 호를 내리고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하도록 지시하였다. 호를 받고 사우에 향사된 것은 이순신, 최윤덕, 이원익, 김덕함 등과 함께였으나 조선 이전의 시대 인물은 을지문덕이 유일하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을지문덕(乙支文德)〉, 《두산백과》
  2. 을지문덕〉, 《위키백과》
  3. 을지문덕〉,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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