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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30일 (월) 15:50 기준 최신판

혜초

혜초(慧超, 704~787)는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이다.

개요[편집]

  • 혜초는 신라의 고승으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密敎) 경전을 연구하였다. 저서로 인도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남아 있다. 723년(성덕왕 22) 당나라 광저우(廣州)에 가서 인도의 승려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그의 권유로 나신국(裸身國)을 경유하여 인도 동해안에 도착, 불교 성적(聖跡)을 순례하였다. 이후 파미르고원을 넘어, 727년경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龜玆]를 거쳐 733년 당나라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의 도량(道場)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密敎) 경전을 연구하였다. 740년(효성왕 5)부터 이 경전의 한역에 착수하였으나 741년 금강지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혜초는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不空三藏) 6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며 우타이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의 인도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908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중국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에서 발견되어 고대의 동서 교섭사(交涉史)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1]
  • 혜초는 신라의 고승으로, 787년에 중국의 오대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인도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908년 발견되어 동서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혜초가 언제 중국으로 건너갔는지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20대가 되자마자 723년에 당나라의 광저우에서 시작해 수마트라와 스리랑카, 인도 전역과, 북서부 이란(니샤푸르),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미르 고원 부근 그리고 카슈가르라 불리는 카슈가르(喀什, 그 당시의 소륵국(疏勒國))와 이곳 쿠차(庫車, 그 당시의 구자국(龜玆國))를 마지막으로 하는 그의 8년간의 여행기를 기초로 《왕오천축국전》을 썼다. 《왕오천축국전》의 내용대로라면, 혜초는 한반도 태생의 사람으로는 최초로 이슬람 문명권을 다녀온 사람이다.[2]
  • 혜초는 신라 출신의 입당 구법승이다. 신라 성덕왕 22년(723) 당나라 광저우에 가서 인도의 승려 금강지의 제자가 되었는데 금강지의 권유로 인도 순례를 결심해 당나라 남쪽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시아를 항해해서, 각멸(閣蔑), 나신국(裸身國)을 경유하여 인도 동해안에 도착했다. 이후 인도에서 육로로 불교 성지를 순례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올 때와 달리 육로 루트를 선택해서 중앙아시아 지역을 비롯해 보통 중동 지역으로 보는 페르시아 일부 지역까지 여행했다. 740년부터 경전의 한문 번역에 착수하였으나 741년 금강지가 죽자 중단하였다. 혜초는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 6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쳤다. 불공은 죽기 직전인 774년 5월 7일 자신의 사후 법을 이을 증득제자 6명에게 뒷일을 부탁했는데 신라승 혜초가 포함되었다. 780년 4월 우타이산 건원보리사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건원보리사에서 위에서 나온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서》를 필사하고 서문을 지었는데 이것이 현존한다. 그 후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이미 고령이라 신라로 돌아왔다고 보기는 무리이고 기록도 없어 아마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하지 않았는가 추측한다.[3]

왕오천축국전[편집]

  •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신라의 승려 혜초가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하고 쓴 여행기. 필사본이다. 1권 1책. 이 책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P.펠리오가 중국 북서 지방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천불동 석불에서 발견하였으며 중국의 나진옥(罗振玉)이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는 당시 인도 및 서역(西域) 각국의 종교와 풍속·문화 등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때는 벌써 불타(佛陀)의 유적은 황폐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있어서 공양미가 매일 15석이나 소요되어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곳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대·소승(大小乘)이 구행(俱行)하고 있으나 곳에 따라 대승만 행하는 곳도 있고, 소승만 행하는 곳도 있으며, 북방에는 사원과 승려 및 신자가 많아서 조사설재(造寺設齋)할 때에는 아내와 코끼리까지 사시(捨施)하는 독신자(篤信者)도 있다고 하였다. 나체 생활의 풍속, 가봉뇌옥(枷棒牢獄)은 없고 벌전(罰餞)만 있는 법률, 장(醬)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으로 같이 사는 것, 살생하지 않는 것, 흙솥에 밥을 짓는 것 등 여러 색다른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신라 성덕대왕 때, 신라의 승려 혜초가 인도 5국(五國) 부근의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그 행적을 적은 여행기이다. 혜초는 723년부터 727년까지 4년간 인도와 중앙아시아, 아랍을 여행하였다. 왕오천축국전은 세계 4대 여행기로 손꼽히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여행기이다. 8세기 초에 씌여진 이 《왕오천축국전》은 세계 4대 여행기로도 손꼽히며 또한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세계 4대 여행기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13세기 후반에 쓰여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초반의 오도릭의 《동유기》 그리고 14세기 중반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손꼽는데, 혜초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간쑤성 둔황의 막고굴 장경동에서 당시 장경동을 지키던 왕위안루(왕원록)에게서 구매한 7,000점의 유물 중에 섞여 있었으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처음에는 당나라 고승 현장 이외의 당나라 승려로 여겨지다가 당시의 일본 서본원사의 승려이자 돈황학자인 오타니 고즈이가 신라승 혜초의 것임을 밝혀내었다.

혜초의 생애[편집]

  • 혜초의 생애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미궁 속에 빠져 있다가 근세에 와서야 비로소 그 대략적인 면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지난 세기 초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오늘날까지 그의 생애는 약력 정도만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719년(성덕왕 18) 남인도(南印度)의 밀교승(密敎僧) 금강지(金剛智)에게 불도를 배웠다. 바닷길로 인도에 이르러 사대령탑(四大靈塔) 등의 모든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오천축국(五天竺國) 등 40여 개국을 거쳐 727년(성덕왕 26) 당나라 장안(長安)에 돌아왔다. 여기서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3권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았는데 1906년에서 1909년 사이에 프랑스의 학자 폴 펠리오(Pelliot)가 중국 간쑤 성 지방을 탐사하다가 둔황 석굴에서 구매한 앞뒤가 떨어진 책 2권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 혜초의 고국은 여행기가 발견된 지 7년 후인 1915년에 처음으로 일본의 종교학자인 다카쿠스 준지로(일본어: 高楠順次郎)와, 일본의 승려이자 니시혼간지의 세습 주지인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에 의해 밝혀졌다. 그전에는 다만 그가 밀교승으로 불공(不空, Amoghavajra, 705~774) 삼장의 제자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의 출신지는 미지로 남아 있었다. 다카쿠스 준지로는 당대 밀교 최성기의 중요 문헌인 원조(圓照)의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장화상표제집》(代宗朝贈司空大瓣正廣智三藏和尙表制集) 속에 수록되어 있는 사료를 인용하여, 혜초는 신라인으로서 유년기에 당나라에 들어가 중국 밀종(密宗)의 시조인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71~741) 삼장을 사사하고 불경의 한역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고증하였다. 《왕오천축국전》에 의하면 혜초는 여행을 마치고 787년까지 당나라의 오대산(五臺山)의 금강지 대공삼장(大空三藏)의 역장(譯場)에서 54년 동안 지내면서 많은 불경을 번역하였다.

혜초와 밀교[편집]

  • 혜초는 밀교(密敎)의 고승이다. 혜초는 천국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뒤 밀교(密敎) 승려로 활동했다. 밀교는 대중 교화를 중요시하는 대승(大乘) 불교의 한 종파로, 불교 교리의 이론적 탐구 보다 실천적인 수행을 강조하였다. 밀교의 수행자는 진언(眞言, 불교의 주문)을 외우는 수행법을 통해 현재의 육신 자체가 바로 부처가 되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이루고자 하였다. 따라서 불교 종파 중에서 신비주의적이고 주술적 성격이 강했다. 밀교는 4세기 인도에서 발생하여 7세기에 경전이 성립되고 교리가 체계화되었다. 신라도 일찍부터 밀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무속신앙을 대체하는 역할을 했으며, 삼국통일전쟁기에는 국가적 차원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밀교가 이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혜초는 일찍부터 밀교를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밀교 승려가 된 것은 천축 순례를 마치고 5년이 지난 때였다.
  • 혜초는 733년(성덕왕 32) 인도에서 당으로 건너와 중국 밀교 초조(初祖)가 된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69~741)를 스승으로 삼고, 당의 수도 장안에 있는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승유가금강오정오지존천비천수천발천불석가만수실리보살비밀보제삼마지법(大乘瑜伽金剛五頂五智尊千臂千手千鉢千佛釋迦曼殊室利菩薩秘密菩提三摩地)'라는 밀교법을 전수받았다. 그는 이후 금강지와 함께 지내면서 밀교를 공부하고 수행하였다. 천축을 다녀와 범어(梵語,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스트어)에 능통했던 혜초는, 740년(효성왕 4)에 당 황제의 칙명으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經)』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741년 금강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번역을 계속 해나가면서 밀교 경전 연구와 수행에 힘썼다. 금강지 밑에서 동문수학한 불공(不空, Amogha-vajra, 705~774)을 스승으로 삼고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경』의 내용을 다시 묻고 정리하여 번역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 경의 서문을 지어 대의를 서술하였는데, 이것이 이후 이 경에 대한 해제의 모범을 될 정도로 그는 밀교의 교리에 정통했었다. 아울러 같은 해 당 대종(代宗)의 명으로 장안 인근의 옥녀담(玉女潭)에서 기우제를 주관하는 등 밀교 승려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는 신라 출신이었지만 끝까지 신라로 돌아가지 않고 당나라에서 활동하였다. 780년 밀교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우타이산(五臺山, 중국 산시성 신저우시 우타이현 소재)에 입산해 수행을 이어가다가, 그곳에서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혜초는 불공을 이어 중국 밀교를 집대성한 혜과(惠果, 746~805)와 함께 불공 6대 제자로 꼽힐 정도로 중국 밀교를 대표하는 고승이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혜초(慧, 惠)超,704~787〉, 《두산백과》
  2. 혜초〉, 《위키백과》
  3. 혜초〉,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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