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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다 기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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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8월 1일 (일) 02:1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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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다 기이치로(丰田喜一郎)
토요타자동차 제2대 사장
토요타(トヨタ自動車株式会社, Toyota Motor Company, 丰田汽车)

도요다 기이치로(豊田 喜一郎 とよだ きいちろう)는 일본의 경영가이고 기술자이며 토요타(Toyota)의 창업자이다. 1894년 6월 11일에 출생하고 1952년 3월 27일에 별세하였다. 토요타자동차공업(현 토요타자동차)의 2대 사장과 사단법인자동차기술회 제2대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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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도요다 기이치로는 1894년 6월에 일본의 시즈오카현(静岡県)에서 출생하였으며 1920년에 토쿄제국대학(東京帝国大学) 공학부(工学部)를 졸업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아버지인 도요다 사키치(豊田佐吉)의 뜻에 따라 1920년 9월부터 1921년 3월사이에 토쿄제국대학법학부에서 법학공부를 하였으며 1921년 7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샌프란시스코, 런던, 잉글랜드의 올덤(Oldham), 프랑스의 마르세유(Marseille), 중국의 상하이 등 지역을 견학하였다.

해외견학을 마치고 아이치현(愛知県)헤키카이군(碧海郡)에 시험공장을 구축하였으며 그 뒤에 자동직기 개발을 시작하였다. 1926년에 토요타자동직기제작소(豊田自動織機製作所)를 설립하고 常務取締役을 맡았으며 1933년 9월에 토요타자동직기제작소안에 자동차제작부문을 신설하였다. 1936년에 자동차제조사업법(自動車製造事業法) 허가회사로 지정된 뒤 1937년에 자동차제작부문을 토요타자동차공업주식회사(トヨタ自動車工業株式会社)로 독립시켰으며 같은 해에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가 1941년에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38년에 아이치현(愛知県)니시카모군(西加茂郡)고로모정(挙母町)에 약 200만 평방미터의 부지를 취득하고 자동차공장을 구축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이 종료한 후에 식품확보로 미꾸라지 사육과 메추라기 사육을 하였다.

1949년에 돗지라인( Dodge Line) 긴축정책의 영향으로 불황에 처하게 되면서 토요타자동차의 채무가 늘어났으며 조기우대퇴직(早期優遇退職)을 시행하고자 하는 경영측과 전일본자동차산업노동조합(全日本自動車産業労働組合)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1950년 6월에 사장에서 퇴임하였다. 그 뒤 토쿄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엔진연구 등을 추진하였으며 1952년에 다시 사장으로 재임하고자 하던 차에 병으로 별세하였다.[1]

주요 활동

자동차 사업의 꿈

1921년에 토쿄제국대학을 졸업한 도요다 기이치로는 아버지가 꾸리는 회사 토요타방직㈜에 입사하여 방직기 개발업무를 맡았으며 그 해에 도요다 리사부로(豊田利三郎) 상무와 함께 미국유럽방직기사업 해외시찰에 동행을 하다가 자동차산업에 흥미를 가졌다. 그 당시 일본은 시내전차와 철도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923년에 간토대진재(関東大震災)가 터지면서 시내전차와 철도의 역할이 마비되었으며 이로인해 기이치로는 부흥에 필요한 교통수단은 자동차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1929년에 기이치로는 토요타자동직기제작소(豊田自動織機製作所)의 상무이사(常務取締役) 신분으로 자동직기에 관련된 특허양도 협의를 추진코자 미국으로 출장나가는 기회를 빌어 업무는 동행자한테 맡기고 본인은 매일마다 자동차공장과 기계공장을 돌아다녔다. 강대한 공업력을 기반으로 10년전에 유럽에서 탄생한 자동차를 자동차산업으로 만든 미국을 보면서 기이치로는 자동차의 꿈을 이루고자 전력을 할 타산을 가졌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기이치로는 토요타자동직기제작소 안에 연구소를 개설하고 소형엔진 개발을 추진하였으며 그 당시 정부에서도 국산화를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에 4마력 가솔린 엔진의 시험제작에 성공하였으며 1934년에 A형 엔진 개발을 완성하였다. 잇달아 회사도 자본금 300만 엔을 증자하여 자동차제조사업에 진출하기로 합의를 이루었으며 시작공장을 완공하고 일본에서 지원이 안 되는 장비는 해외에서 수입하기로 하였다. 1934년 5월에 1호차 설계지침을 확정하였으며 엔진, 섀시 그리고 파워트레인 관련 부품은 쉐보레 부품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모든 준비가 순조로 가는 가운데 엔진 주조에서 큰 애로를 겪었으며 1935년 3월에 겨우 접수할 만한 주조물을 제작하였으며 이를 가지고 엔진 조립을 추진하여 마력 테스트를 진행한 결과 65마력의 측정치가 나왔다. 이 뒤로 엔진의 본격적인 조립이 개시되었으며 1935년 5월에 A형엔진을 탑재한 A1형 승용차 시제작이 완료되었다.

군부의 강력한 요청으로 승용차 제조는 3대에서 마치고 월 200대 생산량의 G1형 트럭 생산이 급하게 추진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트럭생산을 추진하지 않을 경우 승용차제조허가를 받지 못한다는 압박도 있었다. 1935년 11월에 G1형 트럭 전시판매를 추진하였으며 일본국산차가 출시되었다는 연유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36년부터 자동차생산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회사인원도 1931년의 500여명에서 3,500명을 초과하였고 정부로부터 자동차제조사업법 허가회사로 인정을 받았다. 중일전쟁이 폭발하면서 정부는 생산규모의 확장을 촉구하였고 이로인해 1938년 10월말에 월 2만대 생산능력을 갖춘 고로모공장이 구축되었다. 62만평의 부지에 주조, 단조, 도금, 차체, 프레스, 기계, 도장, 조립 등의 각 공장과 사무시설, 연구시설 그리고 숙소, 사택, 식당 등 후생시설을 완비시켰다. 기이치로의 손으로 스위치를 눌러 고로모 공장가동이 개시되었으며 기이치로의 자동차 꿈은 현실에 가까와졌다. 하지만 전쟁의 소요로 정부당국은 트럭에 사용되는 외의 자재, 부품생산을 금지시켰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진 뒤로는 자동차의 판매조차도 자유판매에서 배급판매로 전환하였다. 1942년에 정부의 기업정비령에 따라 산업체재는 전부 집중관리체재로 넘어갔으며 1944년 1월에는 군수회사로 지정되었다. 1945년에 태평양전쟁이 끝나면서 군수산업의 생산은 중지되고 일정한 범위내의 민수생산은 가능해졌다.

전 회사의 노력으로 1947년 1월에 SA형 소형 승용차 시제작을 완료하고 1948년 3월에 BM형 트럭생산을 개시하였으며 연합군사령부로부터 년간 50대 대형 승용차 제조허가가 떨어져 승용차를 생산하는 길이 다시 열렸다. 하지만 1949년에 배포된 돗지라인 긴축 정책으로 자동차 소요의 급감과 자금운영이 악화되는 2중 타격을 받았으며 그 해 2억 엔의 융자가 불가능할 경우 도산의 길 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혔다. 1950년 6월 5일에 경영악화에 따른 노사분규로 기이치로는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사장직에서 퇴임하였다.

1950년 6월 25일에 조선전쟁이 터지면서 연합국군은 지리적으로 편리한 일본에서 군수품을 조달하였으며 이로 인해 토요타도 대량 수주를 하게 되어 기업은 경영악화 상황에서 벗어났다.[2]

각주

  1. 豊田喜一郎〉, 《Wikipedia》
  2. 喜一郎のあゆみ〉, 《トヨタ産業技術記念館》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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