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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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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유관순(柳寬順)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열사이다.

개요

  • 유관순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유관순은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태어났다.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6년 선교사의 소개로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에 참가하였고, 일본 총독부의 학교휴교령으로 휴교에 들어가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때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가 2019년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가로 서훈되었다. 1996년 5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는 그녀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2년에 유관순상을 제정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수상자에게는 유관순횃불상을 수여한다.[1]
  • 유관순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일제강점기에 3.1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운동을 하다 일본 형사들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뤄진 모진 고문으로 인해 순국했다. 1916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감리교회 선교사인 사애리시 부인(사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장학생으로 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했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사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교도소에서 1920년 9월 28일에 순국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에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과 천안종합운동장 내 '유관순체육관'은 유관순의 이름을 딴 것이다. [2]
  • 유관순은 1902년(광무 6)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유중권과 이소제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 여성 감리 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기어이 전원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일제는 전국 모든 학교들에 강제로 휴교령을 내렸고,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천안으로 귀향해 만세 운동에 참여했는데,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만세 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모두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였고, 이 과정에서 유관순도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었다. 유관순은 결국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후유증 끝에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하였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3]
  • 유관순은 일제강점기 때, 충청남도 천안의 아우내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사회개혁, 부녀자 계몽, 교육사업 등을 통해 자주독립의 길을 찾고자 흥호학교(興湖學校) 운영에 가담하여 인재 배출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이며,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72년에는 유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되었고, 197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1991년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생가가 복원되었으며, 1996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이 추서되었다.[4]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天安 柳寬順 烈士 遺蹟)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와 탑원리에 있는 유관순 열사 유적이다. 1972년 10월 14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3·1운동 당시 일본 헌병에 의해 불타 없어진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에 유허비를 세웠는데, 1977년 정화사업을 하면서 유관순기념비를 다시 세웠다. 또 유 열사의 오빠 관옥(寬玉)이 살던 초가를 기와집으로 개축하였고, 3·1운동 당시 봉화지인 매봉에는 봉화대와 봉화탑을, 매봉 너머 탑원리에는 유관순사우(柳寬順祠宇)를 건립하였다. 생가 옆에는 매봉교회(梅峰敎會)를 지어 유 열사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다. 1986년 경역을 재정비하면서 사우를 확장, 개축하고 명칭을 추모각(追慕閣)으로 바꾸었다. 추모각 안에는 유 열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전야제를 개최한다.

유관순의 명칭

  • 본관은 고흥 유씨이다. 두음법칙과 관련하여 성명 표기에 대해 과거에 논란이 있었다. 2007년 4월에 일부 성씨의 사람들이 호적상 이름을 변경해 달라며 낸 신청을 받아들이는 지방법원의 결정이 있었고, 표기 문제에 대해 여러 국가기관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논의의 결과 2007년 8월에 대법원의 호적예규가 개정되었고 이에 따라 류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본인 의사에 따라 한글로 '류'로 쓸 수 있게 되었다. 2007년 10월 현재는 개정된 호적예규가 문제시될 것이 없다고 확인을 했다.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비영리 사단법인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는 처음에 '유' 표기를 쓰고 있었고 2001년에 '류'로 바꾸었다. 그러나 두음 법칙에 따라 교과서나 공식 행사에서 오랜 기간 '유관순'으로 표기해왔고 '류'로 고쳐서 생긴 사회적 혼선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2014년부터 유관순으로 표기하고 있다.

유관순의 체포와 장례

  •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에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한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 형을 언도받아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심법원에서 다시 3년 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 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3,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교장 월터(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했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했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 기록표의 사진을 통해 보면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 1920년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 실전(失傳) 되었고, 유관순 생가가 있었다는 용산구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었다. 이태원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에 부군당역사공원이 들어섰고, 유관순 열사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추모비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아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3·1 운동

  •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인민봉기(三一人民蜂起)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의 지배에 항거하여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 선언을 목적으로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비폭력 만세 운동이다.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줄여서 기미운동(己未運動)이라고도 부른다.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장례가 있던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조선 전역에서 봉기하였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 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민족 분열책인 일명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만주 지린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2월 1일 무오 독립선언을 통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조선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2·8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삼일운동은 고종의 독살설로 인하여 일본의 부당한 조선 점령과 폭력에 의한 통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갖게 되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시위는 순수한 평화적 시위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폭력화되었다.

동영상

각주

  1. 유관순(柳寬順, 1902.12.16.~1920.9.28)〉, 《두산백과》
  2. 유관순〉, 《위키백과》
  3. 유관순〉, 《나무위키》
  4. 유관순(柳寬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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