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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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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이중섭(李仲燮)은 20세기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개요

이중섭은 한국의 서양화가이며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서양화의 양대 거목으로 시대의 아픔과 굴곡 많은 생애의 울분을 '소'라는 모티프를 통해 분출해냈다. 대담하고 거친 선묘를 특징으로 하면서도 해학과 천진무구한 소년의 정감이 작품 속에 녹아 있으며, 경쾌하고 유연한 필선의 은지화는 그 고유성을 인정받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되어 있다.

이중섭은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그의 삶 전체와 동일시된다. 주요 작품에는 《서귀포의 환상》(1951년),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1953년), 《소》(1953년), 《부부》(1953년경), 《황소》(1953~1954년경), 《길 떠나는 가족》(1954년), 《도원》(1954년), 《달과 까마귀》(1954년), 《투계》(1954년경), 《흰 소》(1954년경), 《누운 소》(1954년경), 《구상네 가족》(1955년) 등이 있다. 그는 화가이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주업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지탱시키는 원동력이자 구원자였기에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절실하고 삶 전체가 오롯이 화폭 안에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

이중섭의 생애

이중섭(1916년 4월 10일~1956년 9월 6일)의 본관은 장수이며 1916년 평남 평원(平原)에서 대지주 집안의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스승인 임용련을 만나 서구의 새로운 예술에 일찍 눈을 뜨는 한편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일본 문화학원 미술학부(양화과)로 옮겼다. 당시 문화학원은 문부성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로 상류층 자제들이 많이 다녔다. 김병기, 문학수, 유영국, 안기풍, 이정규 등이 문화학원에 먼저 들어와 있어 이들과 교유했다.

이중섭은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의 제2회 공모전에 출품해 수상을 하고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자유미술가협회는 당시에 가장 전위적인 미술 단체로 일본 추상미술의 중심 그룹이었다. 한국인으로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박생광, 송혜수, 문학수 등이 참여했으며, 추상을 표방한 단체였지만 표현파,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파 등 새로운 예술사조도 수용하고 있었다. 이중섭은 표현주의적인 경향으로 소를 모티프로 한 작품을 주로 그렸다. 그는 1941년 일본에 유학한 미술가들이 결성한 조선신미술가협회의 회우로 추대되어 민족적 미의식의 실현을 도모했다. 1943년에는 제7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했다.

이중섭은 1943년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만두고 원산에 머물렀다. 1945년 문화학원 재학 중 일본인 후배이며 애인이었던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가 홀로 현해탄을 건너와 그해 5월 원산에서 결혼했다. 마사코는 이남덕(李南德)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신사실파 동인으로도 참여했다. 월남 이후에는 부산, 제주, 통영, 진주, 대구 등지를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고,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渡日)하자,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還都)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종이 그림이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되고 팔린 그림 값을 떼이는 등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큰 실의에 빠졌다. 그는 일본에 보낸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유랑 생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깊은 좌절과 자괴감으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져 조현병(정신분열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56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다가 9월 6일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이중섭에 대한 평가

이중섭은 평탄치 않았던 생애로 인해 '비운의 화가'로 전설처럼 기억되고 있다. 그는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고독과 절망을 그림으로 해소하려는 듯 격렬한 터치로 소를 그렸고,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도원과 같은 환상적인 이상세계를 화폭에 담았다. 소 그림은 1930년대부터 이중섭의 작품에 등장하는데, 흰 소를 자주 그린 것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킨 두 마리 소의 대결에서 민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준다. 또한 그에게 소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 갈등과 고통, 절망, 분노를 표현하고, 때로는 희망과 의지, 힘을 상징한다. 또한 소와 아이가 어울려 노는 장면을 통해 특유의 해학적인 웃음과 인간적인 정감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중섭의 작품은 복합한 미술적 스타일과 표현, 예술적인 스타일과 독창성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은 서양화와 동양화의 요소를 융합하여 표현하였으며, 미국과 유럽에서의 화가들의 작품을 학습하면서 독자적인 화풍을 개발하였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재료와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현대적인 표현 방식을 도입하여 새로운 시각을 선보였다.

이중섭은 한국 미술사에 큰 흔적을 남긴 화가로서, 그의 작품과 예술적인 업적은 현대 한국 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작품은 한국 미술의 전통과 현대성, 동양과 서양의 융합 등을 표현하면서 다양한 시대적 의미와 이해를 이끌어내었다. 이중섭의 작품은 국내외에서 전시되고, 그의 예술적인 영향력은 많은 한국 화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이중섭의 예술의 특징은 자유분방한 선묘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가 그린 소 그림은 한 마디로 선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격렬한 소의 동세를 표현한 것은 그의 거침없는 필선에 기인한 것이다. 특히 담뱃갑 속에 든 은종이 위에 송곳이나 나무 펜으로 아이들이 물고기와 어우러져 노는 장면이나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담은 그림은 그 경쾌하고 유연한 필선에서 살아있는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은지화는 그의 선묘화의 특성이 발현되고 독자적으로 창안된 정수로서 가치를 지닌다.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미술관은 서양화가 이중섭을 기리기 위해 2002년 11월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이중섭 거리 안에 설립한 미술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1월 가족을 데리고 서귀포에 거주하면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12월 부산으로 떠난 이중섭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기념관이자 전시관으로, 2002년 12월 28일 개관하였다.

서귀포시에서는 1996년 한국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이자 천재화가인 이중섭을 기리기 위해 피난 당시 거주했던 초가 일대를 이중섭 거리로 명명하였다. 이어 1997년 4월 그가 살던 집과 부속건물을 복원해 이중섭 거주지와 그의 호인 대향(大鄕)을 따서 대향전시실을 꾸미는 한편, 매년 10월 말 이중섭의 사망주기에 맞추어 이중섭 예술제를 개최해 왔다. 이중섭 거리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문화관광의 거리로 활성화하기 위해 서귀포시에서 다시 이중섭 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전쟁 중 세들어 살던 초가 바로 옆, 서귀포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으며, 미술관 앞에는 이중섭 공원이 있다. 그러나 개관 당시에는 원화가 없어 일부 복사본만 전시하다가, 뒤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문화인들의 기증과 노력으로 현재는 이중섭의 서귀포 생활 당시의 모습이 담긴 작품을 비롯해 여러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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