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
최우(崔瑀)는 고려 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집권자이다.[1]
개요
최우는 고려 시대의 권신이다. 1219년 추밀원부사로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했다. 개경의 황라성을 수축하는 등, 몽골의 침입에 대처했다. 1225년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고 도방을 확장했다. 몽골의 침공 소식에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여 성을 쌓아 대비했다. 1243년 국자감을 수축했으며 사재를 동원해 대장경판 재조를 완성케 했다.[2]
최우는 최충헌(崔忠獻)의 아들로서 그가 죽은 1219년(고종 6년) 이후로 1249년(고종 36)까지 집권한 최씨 무인정권의 2대째 집정자이다. 최우는 그의 첫 이름이고, 나중에는 최이(崔怡)로 개명하였다.
최우의 생애
최우(?~1249년 12월 10일)는 고려의 무신(武臣), 권신(權臣), 정치가이다. 본관은 우봉(牛峰)이다. 아버지는 최충헌(崔忠獻)이며, 어머니는 상장군 송청(宋淸)의 딸이다. 원종의 국구 김약선은 그의 맏사위이며, 충렬왕에게는 외외증조부가 된다. 정순왕후의 외할아버지이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가 1219년(고종 6)에 최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이 때 자신이 축적해둔 금은(金銀), 진완(珍玩) 등을 왕에게 바치고 아버지가 빼앗은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각각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또한, 한사(寒士)를 많이 선발, 등용하였으며 아버지에게 아부하여 백성을 괴롭히던 관리를 유배 또는 파면하고, 아우 최향(崔珦)을 귀양보내는 등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하였다.
1221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 · 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 ·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어 집권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특히, 몽골(蒙古)의 침입에 대비하여 의주(宜州: 지금의 함경남도 德源) · 화주(和州: 함경남도 영흥) · 철관(鐵關: 지금의 鐵嶺) 등 요충지에 성을 쌓게 하였다. 1223년에는 은병(銀甁) 300여 개, 쌀 2,000여 석을 내고, 가병(家兵)을 동원, 개성의 나성(羅城)을 수리하였으며, 황금 200근으로 13층 탑과 화병(花甁)을 만들어 흥왕사(興王寺)에 안치하였다.
1225년에는 사제(私第)에 정방(政房)을 설치하고 문무백관의 인사문제를 처리하였다. 이 정방에서 백관의 전주(銓注: 인사행정)를 헤아려 비목(批目)에 써서 왕에게 올리면 왕은 그것을 결재하여 내릴 뿐이었다. 1227년에 사제에 서방(書房)을 두고 문객 가운데 명유(名儒)를 소속시켜 3번(番)으로 나누어 숙직하게 하였다. 이것은 도방(都房)과 더불어 최씨정권의 숙위기관(宿衛機關)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도방은 아버지 때의 것을 계승, 강화하여 내 · 외도방(內外都房)으로 개편하였다.
1228년에 오대진국공신(鼇戴鎭國功臣)에 봉해졌으며, 이듬해에는 이웃집 수백 호를 강제로 철거해 격구장(擊球場)을 만들고 매일 도방과 마별초(馬別抄)를 모아 격구를 하게 하였다. 그 자신도 격구장에 나가 5, 6일에 걸쳐 구경하는 한편, 재추(宰樞)와 기로(耆老)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마별초는 최우가 만든 기병대로서 최씨정권의 호위 및 의장대로 활약하던 사병집단이다.
최우는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하여 야간순찰과 도둑을 단속하게 하였다. 이 야별초는 후에 삼별초(三別抄)로 확대, 개편되어 최씨정권의 사병집단으로서 경찰과 전투의 임무를 맡았다. 1231년에 처 정씨(鄭氏)가 죽자 왕은 채단(綵緞) 70필을 내려 왕후의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으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을 증직하고 시호를 경혜(敬惠)라 하였다. 1232년에는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왕에게 강화천도(江華遷都)를 청하고 나서 녹봉거(祿俸車) 100대로 가재(家財)를 강화로 옮기고 개성 사람들을 강화로 피란하게 하였다.
제도(諸道)의 백성을 산성과 해도(海島)로 피란시키고, 마침내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하게 하였다. 1234년에는 천도의 공으로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졌다. 이때 최우는 사제를 지었는데, 원중(園中)에 송백(松栢)을 심어 그 원림(園林)이 수십 리에 달하였다. 1242년에 작(爵)이 올라 진양공(晉陽公)이 되었다.
1243년에 국자감을 수축하고 양현고(養賢庫)에 쌀 300곡(斛)을 바치는 등 장학에 힘썼다. 또, 사재(私財)를 희사하여 강화에서 대장경 재조(再雕)에 착수하게 하였다. 이는 최우가 죽고 2년 뒤인 1251년에 완성을 보았다. 이때부터 차츰 횡포와 사치가 심해져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샀다. 1247년에 서자(庶子) 최만전(崔萬全)을 환속시켜 이름을 최항(崔沆)이라 고치고 예를 배우게 하는 한편,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 · 호부상서를 삼고 가병(家兵) 500명을 나누어 주었다. 해서(楷書) · 행서(行書) · 초서(草書)에 모두 능하였다. 천도공신(遷都功臣)으로서 공신당(功臣堂)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고 강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나, 최씨정권이 몰락된 뒤 재추의 건의로 도형이 제거되고 묘정에서 배향이 폐지되었다. 시호는 광렬(匡烈)이다.
최우의 아들 최항
최우는 일생 동안 세 명의 본처를 두었는데, 이들에게서는 모두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애첩 서련방(瑞蓮房)의 소생이었다. 최우는 이 두 아들이 자신의 후계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에 사위인 김약선에게 권력을 물려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훗날 권력투쟁을 염려한 최우는 두 아들의 머리를 깎아 승려로 삼았으니, 첫째는 만종(萬宗)이고 둘째는 만전(萬全)이었다. 이 둘은 순천(順天)의 송광사(松廣寺)로 출가했다가 훗날 만전은 화순(和順)의 쌍봉사(雙峰寺)로, 만종은 산청(山淸)의 단속사(斷俗寺)로 가서 머물렀다. 그러나 이 형제는 두 사찰을 본거지로 삼아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온갖 횡포를 부리며 돌아다녔다.
한편 강화도의 김약선은 1235년(고종 22)에 자신의 딸을 태자, 즉 이후의 원종[고려](元宗)의 비로 들이는 등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약선이 처녀들과 가까이하는 모습에 질투를 느낀 그의 처가 자신의 아버지인 최우에게 이를 호소하는 일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최우는 결국 사위를 제거해버렸다. 후계자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만종과 만전 형제가 남방에서 부리는 횡포는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국 최우는 박훤(朴暄), 송국첨(宋國瞻)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아들들이 부정으로 축재한 재산을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그의 수하들을 모두 잡아들여 가두어버렸다. 그리고 두 아들을 강화도로 소환하였다. 최우는 만전을 환속시켜 최항으로 개명하게 하고, 그에게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게 하였다.
결정적으로 최우는 죽기 1년 전인 1248년(고종 35)에 자신의 가병 5백여 명을 최항에게 나누어주면서 후계자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었다. 1249년 11월 최우는 30년의 집권을 끝으로 사망하였다.
국왕 고종은 곧바로 최항에게 추밀원부사·이병부상서·어사대부라는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처음 받았던 관직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를 교정도감의 최고 책임자인 교정별감(敎定別監)으로 임명함으로써 그의 집권을 정식화하였다. 최씨 무신정권은 3대째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1249년(고종 36년)에 집권한 최항은 8년간 권좌에 있다가 1257년(고종 44)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권력은 다시 그가 비첩에게서 낳은 아들인 최의(崔竩)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최의는 불과 1년을 채우지 못하고 1258년(고종 45) 3월에 유경(柳璥), 김준(金俊), 임연(林衍) 등이 주도한 쿠데타로 제거당하였다. 이로써 4대 60년에 걸친 최씨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서방
서방(書房)은 고려시대 최우정권기에 설치된 숙위(宿衛) 및 문한(文翰) 담당기관이다. 1227년(고종 14) 최우(崔瑀)에 의해 설치되었다. 최우는 문객(門客) 가운데 명유(名儒)가 많자 이들 문사(文士)로 하여금 3번(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숙위하게 하였다. 이 기구를 서방이라 하였다. 서방을 설치한 목적은 문사를 우대하겠다는 뜻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고사(故事)에 밝고 식견이 높은 문사를 고문(顧問)에 등용함으로써 정치에 활용하고자 했던 데 있었다.
최씨정권은 사병과 같은 무력적 기반을 통해 정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지만, 대외관계에서 문사들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몽전쟁(1231∼1259)이 지속되면서 표문(表文)과 서 · 장(書狀) 등 대몽골 외교문서 작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으로 급부상 되었다. 결국, 서방은 최씨정권이 자신의 정권을 계속 유지, 강화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씨정권은 전 · 현직관과 무사를 위주로 편제한 도방(都房)과 문사를 중심으로 편제한 서방으로 문무쌍벽(文武雙璧)의 숙위기관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서방의 설치로 문사들이 무신정권 수립 이후 자연스럽게 현실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최씨정권에서 서방의 비중과 역할은 중요하였다. 최씨정권의 제3대 집권자 최항(崔沆)이 죽자 서방은 다른 권력기구인 야별초(夜別抄) · 신의군(神義軍) 및 도방과 더불어 밤낮으로 경비를 하였다. 그리고 최항의 아들 최의(崔竩)를 제4대 집권자로 추대하였다. 최씨정권을 지탱시키는 데 한 축이 되었던 서방은 최씨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김준(金俊)에게 계승되었다. 그리고 다시 임연(林衍)을 거쳐 임유무(林惟茂) 집권기까지 존속되었다.
서방은 최씨정권의 권력기구인 도방 및 정방과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즉, 서방과 도방은 숙위기관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서방이 문사 집단인데 비해, 도방은 무사를 중심으로 편제되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서방은 숙위기관이고 정방은 인사행정기관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양자가 모두 문사 집단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특히, 서방과 정방은 최씨정권이 무신정변 이후 소외되었던 유자(儒者)와 문사를 대거 회유하는 의미와 더불어 무인지배체제의 약점을 보완하려는데 활용된 사적 지배기구였다.
정방
정방(政房)은 고려 최씨 집권 때 정무를 행하던 곳으로서, 최우가 인사문제 처리를 위해 1225년(고종 12년)에 자신의 집에 설치한 기관이다. 정방 역시 무신정권기의 다른 기구와 마찬가지로 유력한 지배 기구의 하나로, 이것이 정방이라는 명칭을 띠고 공식기구로 발전하는 것은 고종 12년이다. 정방에 관해서는 이제현의 《역옹패설》에 잘 나와 있다. 백관의 승강(昇降)·임면(任免)·이동(移動)에 관한 이른바 전정(銓政)의 권한을 장악하여 모든 인사 행정을 행하였다.
정방에는 왕께 아뢰는 직책을 맡은 최고관직 정색승선(政色承宣)을 두었고, 그 밑에 이를 보좌하는 정색서제(政色書題) 등이 있었다. 정방은 최씨 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오래 존속되었다. 권신의 사설 기관으로 발족한 정방은 후기에는 일반 정무를 관장하는 국가 기관화하였다.
정색승선(政色承宣)이라는 요원도 갖추었던 정방은, 그 직책문제로 현재 약간의 논란이 일고 있으나, 직제상 문제보다는 정방의 요원이 최씨 무인정권 주변의 문인(文人)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초기의 정방과 달리 후기의 정방은 그 성격을 일률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오랫동안 소멸의 위협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버텨온 역사를 생각할 때 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정방은 고려 후기 정치사에서 여러모로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동영상
각주
- ↑ 〈최우 (崔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최우(崔瑀,?~1249)〉, 《두산백과》
참고자료
- 〈최우(崔瑀,?~1249)〉, 《두산백과》
- 지식창고, 〈대당영요| 역사 속 영웅들의 이야기 | 고려, 무신정권, 최충헌, 최우, 김준, 역사, 인물, 사건〉, 《네이버블로그》, 2024-10-26
- 〈최우 (崔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우〉, 《나무위키》
- 서유당, 〈고려 무신정권기 최우 핵심기구 정방, 교정도감〉, 《네이버블로그》, 2023-07-10
- 〈최우(崔瑀,?~1249)〉, 《두산백과》
- 내일에듀, 〈(고려무신정권) 최충헌과 최우, 대표적인 농민봉기까지〉, 《네이버포스트》, 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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