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
한명회(韓明澮)는 조선 전기의 권신이자 외척이며 정치가이다.
개요
- 한명회는 조선 전기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에 등극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살해하는데 가담하였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관직이 삭탈되어 압구정에서 노년을 보내다 사망하였다. 본관 청주(淸州). 자 자준(子濬). 호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 시호 충성(忠成). 장순왕후(章順王后:睿宗妃)·공혜왕후(恭惠王后:成宗妃)의 아버지이다. 그의 조부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받고 돌아온 한상질(韓尙質)이며 부친은 한기(韓起)이다. 젊어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히 낙방하자 나이 40세가 다되어 1452년(문종 2) 음보(蔭補)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을 얻었다.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무리에 가담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양정 등 30여 명을 추천하였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왔다.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1467년(세조14년)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반역했다고 하여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고, 다음해 세조가 죽고 이 해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올랐고,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불편한 관계였던 예종이 갑자기 죽고 막내사위인 성종이 즉위하자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아보는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결재하였다. 이때도 병권에는 관심이 높아 병조판서를 겸하였고 그의 세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고, 그 해 춘추관영사(春秋館嶺事)에 이르렀다. 평소 몸이 쇠약했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명회의 권세도 추락하기 시작하였다. 성종 5년에 영의정과 병조판서에서 해임되었고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윤비(尹妃) 사사(賜死)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는 토막내어졌으며 목을 잘라 한양 네거리에 걸렸다. 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신원되었다.[1]
- 한명회는 조선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본관은 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일찍이 조선 태조 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자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의 아들이고, 이조참판과 직제학을 지낸 여주 이씨 이적의 외손자이자 대제학 이행의 외증손이다.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상환(韓尙桓), 류태재(柳泰齋)의 문인이다. 1466년~1467년, 1469년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러나 후일 종묘 세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오가작통법과 면리제(面里制)를 창시한 인물이며, 그가 만든 행정제도인 면리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한말의 불교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은 그의 친아우인 한명진의 후손이다.[2]
- 한명회는 조선 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 · 사우당(四友堂).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한수(韓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 한상질(韓尙質)이고, 아버지는 감찰 한기(韓起)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李逖)의 딸이다. 두 딸은 장순왕후(章順王后: 睿宗妃)와 공혜왕후(恭惠王后: 成宗妃)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글을 읽어서 성취한 바 있었으나 과거에는 늘 실패하였다.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景德宮直)이 되었다. 이어 어린 단종이 즉위해 김종서(金宗瑞) 등 대신이 집권하자,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해 심복을 삼게 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심복 참모로서 대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된 뒤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동부승지,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되었다. 1455년 가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오르며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였다. 1457년 이조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59년황해 · 평안 · 함길 · 강원 등 4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우의정,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폐사(廢死)에 관련하였다 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3]
- 한명회는 충청남도 천안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 대군(首陽大君)을 보좌하여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웠으며,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켰다.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공신으로 책봉된 이후 성종 조까지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하였던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훈구 대신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할아버지는 예문관 제학을 역임한 한상질(韓尙質), 아버지는 한기(韓起)이며, 어머니는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이적(李逖)의 딸 여주 이씨(驪州李氏)이다. 두 딸이 예종의 비 장순 왕후(章順王后)와 성종의 비 공혜 왕후(恭惠王后)이다.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 묘소가 있다. 수신면 지역은 현재는 천안시 권역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청주목에 속해 있었다. 청주는 한명회의 본향이면서 농장이 있던 곳이다. 현재 묘역에는 신도비와 재실이 있으며, 청주 한씨 충성공파 묘역과 접해 있어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신도비는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3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사사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나 뒤에 신원되었다.[4]
한명회의 권력 투쟁
- 한명회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건국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개국 전부터 이성계를 보좌하며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고, 특히 이성계가 혁명을 거쳐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그는 태조 이성계의 신임을 얻어 여러 요직을 거치며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그는 조선 건국 초기에 벌어진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을 짜고 실행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한명회는 단순히 권력을 추구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 건국의 이상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힘을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정적과 대립했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비윤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초기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행동은 훗날 조선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조선왕조실록에는 한명회의 권력 행사와 관련된 기록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데 능숙했다. 특히 그는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를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한명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처럼 한명회는 조선 초기 권력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권력의 핵심에 자리 잡았다. 한명회의 권력 행사는 조선 초기 권력 구조의 특징을 보여준다. 조선 건국 초기에 권력은 개국 공신들에게 집중되었고,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명회는 이러한 권력 구조 속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권력 행사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조선 사회에 윤리적 문제를 야기했다.
- 한명회는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대했지만, 동시에 조선 초기 개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과 대립하며 개혁의 진행을 방해하는 데 앞장섰다. 개혁은 조선 건국의 이상을 실현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하지만 한명회는 개혁을 통해 자신의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조선 초기 개혁은 왕권 강화와 사회 질서 확립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한명회는 개혁을 통해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개혁을 방해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그의 개인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며 조선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이러한 한명회의 행동은 조선 초기 개혁의 실패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명회에 대한 평가
- 실록의 사관은 한명회를 "도량이 크고 성격이 활달했으며 결단력이 뛰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만큼 열정과 능력은 지략가로서 대단히 출중한 인물이었다. 한명회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가 있는데 세조 대에 오가작통법을 만들면서 면리제를 실시했고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면리제는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일제강점기와 현대 남한과 북한의 행정 제도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그 능력을 악용해 치부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으고 비정상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수완은 뛰어나지만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명분이 없는 계유정난의 실질적 설계자였다는 것 때문에 해당 사건을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역적 취급을 받는다.
- 공신을 무려 4번 그것도 모두 1등을 수여받았지만 모두 부정적으로 볼만한 소지가 높은 공신이다.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해서 받은 거라 오히려 역적으로 볼만하고 익대공신은 후대에 비운의 인물로 숭상받는 남이의 옥에 참여해 받은 거라 멀쩡한 사람 잡은 간신 취급받기 좋은 일이다. 좌리공신은 성종을 잘 보필했다는 도저히 객관적 기준이 없는 뜬구름 잡는 사유로 수여한 공신이라 당대에도 말이 많았던 퍼주기식 공신이기에 역시나 좋은 소리를 못 듣는다. 한명회는 단종과 관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난언죄등으로 참소했다. 이들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참소된게 아니라 단종에 대한 충을 지키기 위한 것 때문에 참소된 것인지라 명분이 전무한 정적 공격일 뿐이다. 결국 숙종 때 정몽주의 후손들이 신원되고, 정조도 정몽주 후손의 절의에 대해 살아있는 사육신이라고 인정했다.
- 한명회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기에 이에 관련해서도 부정적 인식이 있다. 그러나 한명회는 본인 실력이 아닌 잘나신 조상을 두었다는 것 하나로 특혜를 받고 관직에 진출한 사람으로만 평가절하하긴 어렵다. 음서로 얻은 관직 이래봐야 한양도 아닌 개성의 경덕궁직이라는 미관말직에 불과했으며 음서로 관직에 들어와야 주요 요직과 고위직에 진출이 가능했다. 한명회가 엄청난 출세가 가능했던 건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와 같은 비정상적인 사건들을 설계하고 진두지휘한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한명회 선생 신도비
- 한명회 선생 신도비(韓明澮 先生 神道碑)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창리에 있는 조선 시대 신도비이다. 1994년 11월 4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한명회(韓明澮) 사후 1년 뒤인 1488년(성종 19) 건립되었다. 높이 1.95m, 넓이 97㎝, 두께 24.5㎝로 화강암과 석영석으로 만들었다. 비석받침은 160㎝×114cm로 옆면에 10개의 안상을 새기고 윗면에는 12개의 연화문(蓮花紋)을 새겨넣었다. 이수는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갖고 노는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였고, 비문에는 1,000여 자의 해서(楷書)로 한명회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 한명회는 예종비(睿宗妃)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비(成宗妃)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아버지로 자 자준(子濬), 호 압구정(狎鷗亭),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칠삭동이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다가 1452년(문종 2) 음보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고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 가담, 세조가 즉위하자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사후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의 사사(賜死)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정여창, 남효온 등과 함께 부관참시되었다가 후에 신원되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한명회〉, 《위키백과》
- 〈한명회〉,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명회(韓明澮,1415~1487)〉, 《두산백과》
- 〈한명회 (韓明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피오나, 〈한명회를 탄핵한 조선 언론 대간臺諫의 힘〉, 《네이버블로그》, 2024-10-04
- 현동민 기자, 〈(오늘의 역사) 조선 쿠데타의 권신 한명회, 죽어서 목이 잘리다〉, 《인천투데이》, 2024-07-02
- 달뫼, 〈11월 14일 / 한명회 죽음〉, 《네이버블로그》, 2023-11-14
- 북스고, 〈(역사괴담)세조의 오른팔, 살생부를 만든 한명회의 뼈에서 나온 벌레〉, 《네이버포스트》, 2022-08-18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