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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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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한용운(韓龍雲)은 한국의 시인, 승려, 독립유공자, 불교사회주의자이다.

개요

한용운은 일제강점기 동안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의 선구자로 활동하였으며,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그는 기존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이 있다. 한용운의 활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정신적 저항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재조명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한용운은 시집 《님의 침묵》을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시는 전통적인 시정신을 심화하고 확대하여 창조적 계승을 성취하였으며, 민족주체성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했다.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한용운의 생애

한용운(1879.8.29.~1944.6.29)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호는 만해(萬海·卍海), 속명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계명은 봉완(奉玩)이다. 한용운의 아버지는 한응준(韓應俊)이고 어머니는 온양 방씨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출생이다. 저서로는 『한용운 전집』 (6권)이 있고,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 불교 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 주해(十玄談註解)』·『불교 대전』·『불교와 고려 제왕(高麗諸王)』, 장편 소설인 『흑풍(黑風)』·『박명(薄命)』 등이 있다.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지에 묘가 있으며, 2012년 10월 19일 등록 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되었다. 묘의 연보비에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서, 이 같은 본성은 남이 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조선독립에 관한 감상」중에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시에서는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하였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사용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한용운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한용운의 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해의 시는 은유와 역설 등 시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시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타고르(Tagore, R.) 등 외래 시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시에 그 정신과 방법상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8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이듬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한용운은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고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말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성북동 집인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만해의 생계는 그의 친구인 안재홍, 방응모,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주었다.

한용운은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였지만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입적하였다. 그가 사망하였던 1944년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1년 전이자 광복을 1년 앞두고 있던 때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이 패망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7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파고다 공원에 「용운당 대선사비」가 건립되었고, 1973년 『한용운 전집』 전6권이 간행되었다. 1981년 10월 21일 성북동 심우장에 만해 기념관을 열었다가 1998년 5월 20일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안에 새로 건축하여 이전 개관하였다.

한용운의 작품

주요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박명(薄命)》이 있으며, 1973년에는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그의 시는 서구지향의 문예사조 속에서도 전통시에서 연원한 은유와 역설을 통해 독창적인 시세계를 구축했다. 한용운의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문학적 성취를 넘어, 일제강점기 조선의 정신적 저항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재조명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현대시 <님의 침묵>과는 별도로 다수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죽음> · <흑풍> · <박명> 등의 소설도 남기고 있는데 이들 역시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의 문학이 한국 문학에 있어 가장 부족한 요소인 종교적 명상의 진지함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와 현실상황에 치열하게 부딪히면서도 물러나 정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 속에서 그의 시가 견지한 미적 거리와 형이상적 주제의 진지함은 한국 문학의 원숙을 위하여 참으로 값진 교훈이다. 일관성 있는 행동에 따른 실천의지와 저항정신을 깊이 있는 불교사상으로 이끌어 올리면서 끊임없이 변모하고 스스로 뛰어넘은 그의 시혼은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신사적 자산이 될 수 있다.

구리 한용운 묘소

구리 한용운 묘소(九里 韓龍雲 墓所)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승려인 한용운의 묘. 2012년 10월 19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만해 한용운의 묘로,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과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에 걸쳐 있는 망우리공원에 있다. 부인 유숙원의 묘와 나란히 조성되어 있으며, 2기의 봉분 앞으로 상석, 향로석, 비석이 배치되었다.

비석 앞면에 ‘만해한용운선생묘 부인유씨재우(萬海韓龍雲先生墓 夫人兪氏在右)’라고 새겨져 있어 오른쪽 묘가 부인 유씨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비석은 1981년 12월 만해사상연구회가 세웠으며, 비문의 글씨는 근현대 서예의 대가 여초 김응현이 썼다. 묘지등록번호는 204411번이며, 묘소 입구에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라는 안내비와 한용운 시비(詩碑)가 있다. 한용운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한용운의 묘소는 독립운동가, 시인, 종교인으로서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릴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있다.[1]

만해 한용운 심우장

만해 한용운 심우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유택이다. 2019년 4월 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5년 7월 5일 서울특별시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4월 8일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지은 집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지붕을 올린 민도리 소로수장집으로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만해가 죽은 뒤에도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 이곳 건너편에 자리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사용하였다.

한용운 선생 생가지

한용운 선생 생가지(韓龍雲 先生 生家地)는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있는 생가(지).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91년부터 한용운(韓龍雲:1879~1944)의 생가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사적화하기 위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생가인 초가 외에 사당·삼문·관리사·화장실 등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으며, 주변 정비사업을 추진하였다.

한용운은 14세가 되던 해에 결혼하였으나 결혼한 지 2년이 되던 16세에 돌연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3년형을 선고받고,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 일제 치하의 민족혼을 일깨웠으며, 52세 때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개혁에 앞장섰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유심

유심(惟心)은 1918년 한용운(韓龍雲)이 창간한 불교 잡지이다. 1918년 9월에 창간되어 같은 해 12월 통권 3호로 종간되었다. 국판, 65면 내외이며, 정가는 18전이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한용운이었고, 집필자는 대부분 불교도로 최린·최남선·유근·이광종·이능우·김남천·강도봉·서광전·김문연·임규 ·박한영·백용성·현상윤·홍남표·권상로 등이 참여하였다.

수록된 작품으로는 창간호에 한용운의 《조선청년과 수양》, 최남선의 《동정받을 필요있는 자 되지 말라》, 이능화의 《종교와 시세》 등이 있다. 그밖에도 타고르의 시와 《생의 실현》 등도 번역·게재하였고, 국여의 소설 《오(吾)》가 연재되었다. 다른 불교지와 달리 매월 문예작품 현상모집을 하였는데, 김순석의 논문 《인생의 진로》, 한용운의 소설 《고학생》 등이 당선되었다.

만해기념관

만해기념관(萬海記念館)은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백담사 내에 있는 만해 한용운 기념관. 1997년 11월 9일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 내에 개관하였다. 한용운이 불교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저술한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 원전을 비롯해, 《세계지리》·《영환지략》·《음빙실문집》 등의 책, 한용운의 유묵과 시집 《님의 침묵》 초간본·각종 판본, 1962년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한용운 연구논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만해의 출가와 수행, 3·1운동과 옥중투쟁, 계몽활동, 문학활동, 신간회활동 등을 분야별로 나누어 한눈에 만해의 일생을 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기념관 밖에는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이 조각된 만해시비와 만해두상 조각이 있으며, 백담사 내에는 만해당·만해적선당·만해교육관 등 만해 관련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한편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912번지 남한산성 내에도 만해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이 기념관은 1998년 4월 개관하였으며 대지 약 1,700㎡, 연건평 400㎡, 지상 2층의 규모이다. 종합전시실과 교육관·세미나실·자료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약 600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한용운의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 있는 만해생가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번지에 있는 만해한용운심우장(萬海韓龍雲尋牛莊)도 기념관 역할을 한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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