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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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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建立)은 건물, 기념비, 동상, 따위를 만들어 세움, 기관, 조직체 따위를 새로 조직함을 뜻한다.

독립문의 건립

서울서대문구 현저동에는 개선문처럼 생긴 화강암으로 만든 문이 서 있다. 이 문이 바로 독립문이다. 독립문을 자세히 보면 매우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우에 화강석 돌기둥을 세우고 중앙을 아치모양으로 만들었으며, 그 안쪽에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돌층계와 출입문을 만들었다. 옥상에는 돌난간이 둘려져 있고, 문 앞에는 영은문의 주초(柱礎)였던 돌기둥이 남아 있다.

독립문의 전체적인 모양은 개선문과 닮았지만, 석재를 쌓는 방법이나 돌기둥의 캐피탈은 서양인 기술자가 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모양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서재필(徐載弼)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러시아인 사바틴이라고도 한다)가 설계를 했지만, 공역(工役)은 한국인 건축기사인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했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독립문의 이맛돌에는 대한제국의 문장(紋章)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문 정면과 뒷면에는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지고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 '獨立門'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현판석(懸板石)이 있다. 이것은 독립문건립을 제안한 서재필이 그 사업을 국민국가 건설의 상징으로 인식했다는 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독립문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事大外交)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헌 자리에 세워졌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한 뒤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은 박영효의 권고로 1896년 귀국하면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당시 뜻있는 인사들에게 발의하였다.

관민들의 폭넓은 지지 속에서 1896년 6월, 독립문 건립계획이 구체화되었다. 9월 6일 국왕의 동의 하에 서재필의 책임 하에 독립문을 건립하도록 했다. 독립문을 건립하면서 조선시대 중국 사신에게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었던 모화관(慕華館)도 독립관(獨立館)으로 바꾸었다. 11월 21일 대대적인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였고,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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