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기
이정기(李正己)는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절도사로서, 약 55년간 존재한 제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개요
- 이정기는 산둥반도 일대 15개 주를 다스린 제나라를 건국한 인물로서, 고구려 출신의 장군이며, 번진 평로치청의 절도사이다. 사후 제나라의 시조로 추존되었다.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이며, 732년 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에서 태어났다. 이정기는 781년에 죽었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열전에 의하면, 등창이 나 죽었다고 한다. 향년 49세. 사후 태위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이납이 아버지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병권과 정권을 모두 총괄해 상을 치렀다. 이납은 이유악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조정으로부터 절도사의 자리를 계승하는 데 대한 승인을 거부당했지만, 결국 덕종은 그가 절도사의 자리를 계승하는 것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1]
- 이정기는 남북국시대 당나라에서 평로치청절도관찰사를 역임한 고구려의 유민이다. 본명은 회옥(懷玉)이며, 당나라 평로(平盧)에서 출생하였다. 778년(대력 13) 중국의 속적(屬籍)으로 바꿨다. 당나라의 평로치청절도관찰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로서 안사(安史)의 난 이후 산동지역 일대를 장악하여 중앙권력의 통제권에서 이탈했으며 국왕처럼 행세하였다. 이정기(李正己)의 선조가 언제 평로에 들어와서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758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의 군인들과 함께 희일(希逸)을 군사(軍師)로 추천하는 일에 관여하였다. 이 사건은 평로절도사 왕충지(王充志)가 죽자 후임을 그의 아들로 삼으려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두려워한 나머지 먼저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그가 희일을 군사로 추천한 이유는 희일의 어머니가 고모이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희일의 외제(外弟)가 된다. 그 뒤, 희일과 함께 청주(靑州)로 가서 군공을 세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762년에는 전군(全軍)이 안녹산(安祿山)의 잔당인 사조의(史朝義)를 토벌하게 되자 그도 정주(鄭州)로 갔다. 이때 당나라의 조정을 돕기 위해 참전한 위글(廻紇)의 횡포가 심하자, 그는 그들의 수령을 붙들어 기를 꺾음으로써 이후부터는 방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가 대략 건원(乾元) 원년(758)∼보응(寶應) 연간(762) 사이의 일이다. 이정기는 이때 대략 26세였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위덕(威德)절도사 이보신(李寶臣) 등과 서로 협력하기로 하고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당시 당 조정은 안사의 난 이후 지방 절도사세력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정기 사후에도 이정기를 따르는 무리가 워낙 많았고 이 지역 번진 세력이 이미 하나의 소왕국(小王國)과 같은 존재로 성장해 있던 상황에서 이납이 이정기의 뒤를 이어 통치권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 조정으로서는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이사도에 이르기까지 이정기 가문은 4대 60여 년 동안 이 지역에 대한 독자적인 세력을 세습 · 유지하였다.[2]
- 이정기는 당나라의 절도사로,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으로, 절도사가 되었다가 안사의 난 이후로 어지러워진 당나라 후기의 혼란을 틈타 산동 지역에서 사실상 자립했다. 고선지나 왕사례, 고문간 등과 더불어 고구려 유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에서 크게 출세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732년, 고구려 유민들이 대규모로 군집되어 있었던 당나라의 영주[3]에서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758년, 안사의 난 당시에 평로절도사인 왕현지가 병사하자 이정기는 왕현지의 아들이 절도사가 될 것을 염려하여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하고, 같은 고구려 유민이자 고종사촌형인 후희일을 평로절도사에 추대한 후 자신은 그 부장의 지위에 올라섰다. 이후 공격해오는 해족의 군대와 안녹산군을 피해 산동 지역의 청주를 점령하고, 청주 절도부까지 장악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정기는 젊은 나이에 무력이 상당하고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위구르 장수와 벌인 결투의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러 활동에서 병사들의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이를 시기한 후희일이 이정기를 제거하려고 하자 오히려 후희일이 역관광을 당했다. 그 결과 이정기는 병사들이 추대한 최초의 절도사가 되었다.[3]
- 이정기는 서기 732년에 당나라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의 치소(治所)인 영주(營州)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회옥(懷玉)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 20여만명 중 일부는 옛 고구려 땅에서 가까운 영주(營州)로 돌아와 살았는데, 이정기의 부모도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이었다. 안사(安史) 의 난(755∼763)이 일어났을 때 이정기는 평로군(平盧軍)의 비장(裨將)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었다. 이후 758년에 평로절도사 왕현지(王玄志)가 죽자 왕현지의 아들을 죽여서 자신의 고종사촌형인 후희일(後希逸)이 절도사가 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후희일은 이정기를 부장(副將)으로 삼고 산동반도의 등주(登州)로 건너가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당나라 조정이 후희일을 치주(淄州)·청주(靑州) 등 6개 주를 관장하는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에 임명하였으며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 벼슬을 주었다. 절도사가 된 이정기는 당나라 조정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에 당나라 조정은 그를 평로치청절도관찰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押渤海新羅兩蕃使)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 어사대부(御史大夫) 청주자사(靑州刺史)에 임명하고 정기(正己)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이정기는 당나라 조정과 대립하며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갔다가 781년 8월 갑자기 악성 종양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9세였으며, 관직은 평로치청절도관찰사사도태자태보동중서문하평장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司徒太子太保同中書門下平章事)였다.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는 당나라 조정과 정면 대결을 벌이다가 정세가 불리해진 819년 2월경 부하인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유오(劉悟)에게 죽임을 당하였다.[4]
이정기의 생애
- 이정기는 26세 때 평로절도사 왕현지가 죽자, 그의 아들을 죽이고 고종사촌인 후희일을 절도사로 내세웠다. 762년 당 숙종이 후희일을 평로절도사로 임명한 뒤에는 성덕절도사 이보신과 연합세력을 구축해 청주(지금의 益都)에서 안록산의 잔당인 사조의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때 당나라의 조정을 돕기 위해 참전한 위구르(Uighur, 廻紇)의 횡포가 심하자, 그는 그들의 수령을 붙들어 기를 꺾음으로써 이후부터는 방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후희일과 함께 평로, 치청, 기주, 제주, 해주, 밀주 일대를 관할하였다.
- 765년에는 후희일을 몰아내고 평로치청절도사, 해운육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 검교병부상서 겸 어사대부, 청주자사가 되었으며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후 신라, 발해, 일본을 오가는 해상 · 육상 무역을 관장하는 한편, 산둥에서 염전을 운영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775년 이보신과 함께 위박절도사 전승사의 군대를 물리치고 덕주를 손에 넣은 뒤, 이듬해에는 전승사를 사로잡으면서 2개 주를 다시 손에 넣었다. 전승사를 사로잡은 공으로 이정기는 검교상서우복야를 거쳐 요양군왕(堯陽郡王)에 봉해진 뒤, 다시 검교사공과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올랐다. 번진은 당시 여러 번진 중에서 최대로 강성했으며, 중앙정부에 대해서는 거의 독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781년 이보신이 숨을 거둔 뒤에는 덕종이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에게 절도사 지위를 세습하지 않자, 이유악 · 양숭의 · 전열 등과 함께 산둥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정기는 자신이 관할하던 15개 주에서 얻은 막대한 부와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바탕으로 당군과 맞서, 강회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정기에 대한 평가
- 당 제국의 동쪽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쳤던 이정기는 고선지, 왕사례와 더불어 대표적인 고구려 유민 출신 고위 장교였으며, 동시에 산동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반(半) 독립국을 세우고, 당 조정에 도전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한편 정통성 확보의 명분으로 당나라의 종성인 이씨를 하사받는 등 이정기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 제(齊)나라가 55년 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정기의 능력뿐만이 아니라 바다 건너의 발해가 이정기와 그 가문의 뒤를 봐주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도 많다. 당시 당나라는 안사의 대란을 어느 정도 진압했고 게다가 곽자의라는 불패의 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나라가 마음만 먹었다면 토벌할 수 있었지만 당시 이정기에게 발해가 중요 군사물자인 말을 대놓고 지원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왕 시기 대둔산 전투와 등주성 전투에서 발해에게 패배한 경험이 있었던 당나라 입장에서는 한창 말갈 부족들을 복속하며 잘나가던 발해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이정기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동영상
각주
- ↑ 〈이정기 (732년)〉, 《위키백과》
- ↑ 〈이정기(李正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이정기〉, 《나무위키》
- ↑ 〈이정기(李正己,732~781)〉, 《두산백과》
참고자료
- 〈이정기〉, 《나무위키》
- 〈이정기 (732년)〉, 《위키백과》
- 〈이정기(李正己,732~781)〉, 《두산백과》
- 〈이정기(李正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어이해, 〈고구려 유민 이정기〉, 《네이버블로그》, 2023-11-30
- 서유당,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이정기에게 발해가 말을 수출한 이유!〉, 《네이버블로그》, 2023-06-14
- 자유로운 영혼, 〈잊혀진 또 하나의 고구려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치청왕국)〉, 《네이버블로그》, 2021-03-13
- 호연지기, 〈평로치청국의 이정기〉, 《네이버블로그》,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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