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
장수왕(長壽王)은 고구려의 제20대 왕(재위 413~491)이다.
개요
- 장수왕은 고구려 제20대 왕이다.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적극적으로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름은 거련(巨連)·연(璉)이며,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맏아들이다. 모습이 괴걸(魁傑)하고 지기(志氣)가 호매(豪邁)한 대장부로서 409년(광개토대왕 19) 태자로 책봉되고, 413년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해 동진(東晉)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맺었으며, 414년에는 지금의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광개토왕비를 건립하였다. 427년(장수왕 15)에는 도읍을 퉁거우 지방의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平壤)으로 옮기고 적극적으로 남하정책을 추진하였다.[1]
- 장수왕은 고구려의 제20대 국왕이다.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 휘는 거련(巨連·巨璉) 혹은 연(璉)이다. 97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붙었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어갔으며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정책을 추진하였고 중국의 남북조와 등거리 외교를 통해 안정을 구가한 국왕이다. 대한민국 충청북도 충주시에 장수왕이 423년에 세운 충주 고구려비(中原 高句麗碑)가 있다. 말년의 장수왕은 정복 전쟁을 그만두고 내치에 힘썼으며, 중국과의 외교 관계도 계속 우호적으로 유지하여 안정을 구가하였다. 그리고 491년 음력 12월, 9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북위 효문제는 특별히 직접 애도를 표했으며 관작을 추증하고 강왕(康王)이라 시호를 내렸다.[2]
- 장수왕은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태왕들 중 한 명으로, 394년에 광개토대왕의 아들로 태어나 412년 10월 제20대 태왕으로 즉위하고 491년 12월 97세를 일기로 승하하며 79년 2개월의 기나긴 재위를 마쳤다. 그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국의 지위를 누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전하는 시호는 '장수왕'(長壽王)이다. '긴 장'(長), '목숨 수'(壽). 말 그대로 '긴 수명'이라는 뜻이다. 오래 살아서 '장수'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해석이 대세이고, 종종 불교 용어 '장수'와 연관 짓기도 한다.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했고,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개의 절을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주장이다. 휘는 거련(巨連)으로, 단순 한자 풀이로는 '크게 잇는다'라는 뜻이다. 아마도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인 듯하다. 중국에서는 줄여서 '연'(璉)이라 기록했다. 허나 그때는 순우리말 이름을 여러 한자로 음차했기에 풀어 읽어서 '크게 잇는다'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위에서는 '강'(康)이라는 시호를 주기도 했다.[3]
- 장수왕은 고구려의 제20대 왕이다. 재위 413∼491.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대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장수왕(長壽王, 394~491, 재위 412~491)의 시대를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및 문화적인 전성기로 부르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가장 넓은 땅에, 가장 잘 갖추어진 제도 그리고 선진적인 문화를 이루었다. 남진정책을 펼친 끝에 고구려의 국가 정체성은 확실히 한반도의 그것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에 따라 신라와 백제도 자극과 위협을 받았다.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은 아버지인 광개토왕을 이어 등극, 한 해 빠진 80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다. 말 그대로 장수한 왕이다. 이름은 거련(巨連 또는 巨璉)이었다. 장수한 오랜 시간, 그는 아버지를 이어 고구려를 한반도에서 태어난 나라 가운데 가장 큰 나라로 만들었다. 그의 이름 가운데 연(璉)은 호련(瑚璉)을 말한다. 호련에 곡식을 담아 천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성스러운 제기인 것이다. 장수왕은 성스러운 제기 가운데서도 큰 그릇이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보는바, 장수왕의 시대는 문화적으로도 벌써 절정의 시기에 와 있었다.
장수왕의 업적
-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394년에 태어났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몸과 얼굴이 크고 잘 생겼으며 뜻과 기운이 호걸을 초월하였다고 하며, 409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412년 음력 10월에 광개토왕이 죽자 1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연가(延嘉), 연수(延壽), 건흥(建興) 등의 연호가 새겨진 유물이 일부 발견되고 있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14년에 광개토 대왕릉비를 건립하여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렸으며, 423년에는 충주 고구려비를 세워 고구려의 위상을 널리 선포하였다.
- 장수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의 위상을 높여서 국내성의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427년에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남조(南朝)의 여러 왕조들과 북조(北朝)의 북위에 모두 화친을 맺고 조공을 바치는 등거리 외교를 통해 정세를 안정시켰다. 북위와는 풍홍의 망명이나 후궁을 보내는 문제로 일시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꾸준히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고구려 및 장수왕의 국제적 위상은 매우 높았으며, 장수왕은 높은 직위로 책봉을 받았고 고구려의 사신 또한 높은 대우를 받았다.
- 중국에 남조의 송과 북조의 북위가 대립하는 남북조시대가 열리자 장수왕은 중국의 각국과 다중적인 외교관계를 통하여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436년(장수왕 24)에 북연(北燕)의 왕 풍홍(馮弘)이 고구려로 망명해 온 사건과 466년(장수왕 54년)에 북위(北魏)의 청혼을 거절한 일로 북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백제와 신라의 위협을 돌파하고자 북위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위협을 느낀 백제는 신라와 함께 연합을 추진하여 '나제동맹'을 맺었다. 또한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대한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북위는 이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었고 장수왕은 백제 공격을 준비하였다.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첩자로 파견하여 백제의 허실을 탐지하는 한편 백제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키고 나서, 475년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지금의 충청남도 공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 450년 실직(悉直;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에서 고구려 장수가 신라에 의하여 살해되고 464년에는 신라에 주둔하던 고구려 군인 100명이 살해되자 468년(장수왕 56)에 고구려는 말갈 군사와 함께 신라의 실직성을 공격하였다. 481년에는 호명성(狐鳴城) 등 7성을 함락시켜 미질부(彌秩夫;지금의 경상북도 흥해)까지 진군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아산만(牙山灣)에서 동쪽의 죽령(竹嶺)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는 랴오허강[遼河] 이동(以東)의 만주지방 대부분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밖에 내정개혁에도 힘을 기울여 부족제도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장수왕의 외교
- 장수왕 당시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였다. 남쪽은 진(晉) 나라가 동진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다가 망하고 그 자리에는 송(宋)이 세워졌다. 420년의 일이었다. 중국의 한족이 북쪽의 오랑캐에게 쫓겨 본토를 내주기로는 역사상 이때가 처음이었다. 북쪽은 바야흐로 북위(北魏)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오랑캐가 세운 여러 나라가 쟁패를 벌이다 마지막에 북연(北燕)과 북위가 패권을 다투었다. 435년, 북위의 공격에 시달리던 북연은 송나라에 신하의 지위에서 섬기겠다고 하며 원병을 청한다. 아울러 고구려에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장수왕은 고민에 빠졌다. 북위는 한참 기세를 올리며 새로 일어나는 나라, 북연은 그동안의 관계도 관계려니와, 중간에서 북위의 위협을 막아 줄 방패이기도 했다. 사실 북연은 고구려와 깊은 연관관계가 있었다. 북연의 앞은 후연(後燕)인데, 이 나라는 고운(高雲)이 세웠으며, 광개토왕이 사신을 보내 ‘종족(宗族)의 의(誼)를 표할 만큼, 고구려와 후연은 한 집안과 같았다. 고운이 피살된 후 그의 부하였던 풍발(馮跋)이 나라를 이어 북연이라 하였다. 고구려는 북연을 후연과 같은 태도로 대하였다.
- 북연의 요청이 있던 해 고구려는 도리어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해가 장수왕 23년이었다. 그의 나이 41세, 깊이 경륜을 쌓은 장수왕의 판단에 북위의 존재가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았을 터이다. 물론 사신을 파견한 장수왕의 입장이 북위에 대한 항복은 아니었다. 이듬해인 436년, 북연의 수도인 화룡성에서 북위와 맞붙어 무력시위를 벌였고, 북연의 왕과 백성 다수를 데리고 회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북위에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현란한 양동책이었다. 이 같은 양동책은 남조의 송을 두고도 마찬가지였다. 북연이 고구려에 배신감을 느끼고 송과 관계를 맺자 이에 단호히 대처하였다. 고구려는 북연을 도와주러 출동한 송의 장군 왕백구(王白駒)를 사로잡아 들였다. 438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더 큰 분쟁을 막기 위해 왕백구를 송환하고 송과 관계를 회복하였다. 이는 북위를 견제하는 데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송은 한족의 본토 수복을 위해 북위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런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미묘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 5세기 중반의 동아시아는 국가 간의 직접적인 당사국의 분쟁에 그치지 않고 열강이 개입하여 국제적인 차원에서 밀고 당기기가 이어졌다. 그 한 축에 고구려가 놓여 있었다. 고구려는 이 복잡한 국제관계의 톱니바퀴를 현명하게 물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힘이 필요하면 힘으로, 조정이 필요하면 조정으로 장수왕은 절묘하게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지켜나간 현실정치의 달인이었다.
장수왕에 대한 평가
-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가 3대라고 이야기한다. 고구려의 경우를 고국원왕 때 한 번 망했다 친 뒤 3대로 빗댄다면 소수림왕-고국양왕 형제가 1세대로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여 힘을 다시 비축했고, 2세대가 고국양왕의 아들인 광개토대왕으로서 비축한 힘으로 주변국을 정복하고 다녔다면 3세대인 장수왕은 넓어진 나라를 다스릴 체제를 다시 재구축하고 조상들이 남긴 과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넓어진 영토, 점점 다시 강해지는 남북조 국가들, 고구려의 빈틈을 시시각각 찾는 백제와 신라, 가야를 사방에 두고 장수왕은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하며 국내성 주변에서 힘을 길러온 귀족들을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시켰으며 고구려의 체제를 정비했다. 동시에 남쪽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남벌을 천명하며 백제와 신라를 제압했다. 다만 광개토대왕때 신하국으로 굴복시킨 신라와의 관계를 형제 관계로 재조정해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가 반기를 들어 상황을 엎어버리는 바람에 신라가 완전히 세력권 밖으로 나갔다. 이 시기에 고구려의 강역이 청주와 세종을 지나 대전까지도 뻗어 있었는데도 신라는 소백산맥을 방패 삼아 다름 아닌 고구려에게서 직접 배워온 각종 군사 지식을 활용하여 고구려에게 꽤 날카롭게 반격했는데, 도리어 장수왕 측에서 경계했을 백제가 취약하게 무너졌다. 한편으로는 요동을 놓고 누대의 원수이던 모용선비의 후예인 연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켜 요동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졌고, 중원의 남북조에게는 양면외교를 시행하며 형식상의 조공을 주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외교로 남북조, 유연과 함께 4강 체제로 평화를 정착시켰다.
- 장수왕은, 소수림왕 시기부터 천천히 시작해 광개토대왕시기까지 오면서 만들어진 전성기의 고구려를 편하게 운영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시대적 상황에서 집권했다. 하지만 탁월한 본인의 능력을 활용하여 강력해진 고구려의 국력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왕권 강화, 밖으로는 주변국 장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으며, 고구려 왕실의 두 원수인 북연 황제와 백제 왕을 주살하여 조상들의 원수도 갚았다. 본인도 장수하면서 강력한 고구려의 국력을 향유한 왕이었다. 신라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아쉬움 외엔 모든 부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실제로 장수왕이 받은 중국 왕조들의 시호들과 지위들, 그리고 주변국들의 대접들은 역대 한국사 군주들 중에서 당연히 최상위라고 할 만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장수왕〉, 《위키백과》
- 〈장수왕〉, 《나무위키》
- 〈장수왕/생애〉, 《나무위키》
- 〈장수왕(長壽王,394~491)〉, 《두산백과》
- 〈장수왕(長壽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상민 기자, 〈충주시, 고구려 장수왕 주제...박물관 시민강좌 운영〉, 《국제뉴스》, 2023-10-18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