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황진이(黃眞伊)는 조선 중종 때 개성(송악)의 여류시인·명기이다.
개요
- 황진이는 조선시대의 시인 겸 명기(名妓)이다.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 등이 있다.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滿月臺懷古詩)》, 《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 《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 《영초월시(咏初月詩)》 등이 있다.[1]
- 황진이는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이다. 중종·명종 때(16세기 초, 중순경) 활동했던 기생으로, 다른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인 명월(明月)로도 알려져 있다. 황진이의 정확한 출생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506년 전후로 추정된다. 그녀는 개성(開城)에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녀였다. 아버지는 황씨 성을 가진 양반으로 일설에는 진사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기생 또는 천민 출신으로 누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진현금'(陳玄琴)이라고 불리던 시각 장애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일설에는 시각장애인인 평민의 딸로 태어났다는 전설도 있다. 그녀가 살던 장단군 입우물 고개에는 1945년 광복 당시까지도 약수가 나왔다고 한다. 황진이는 조선의 신분제인 종모법에 따라, 아버지가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천출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황진이라는 이름 자체도 본명이 아닌 것으로 추측하는데,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본명이 '황진'이고 접미사 '-이'가 붙은 이름이 전해 내려온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은 옛 조선 여성들의 이름에 그 근거를 둔다. 그가 지은 작품으로는 한시로 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 영초월시(咏初月詩), 등만월대회고(登滿月臺懷古), 등이 전하고 있다. 그의 시들은 남녀간의 애정을 노래하면서도, 정교하고 빈틈이 없는 점 등 완성도가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 구사를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2]
- 황진이는 조선 전기의 기생이자 시인이다. 이매창과 더불어 조선의 최고 여류시인으로 꼽힌다. 박연 폭포, 서경덕과 함께 '송도 삼절'로 불렸다. 서경덕과의 일화, 백호 임제가 황진이의 묘를 보고 시조를 읊었다는 등의 이야기로 보면 중종 시기의 인물인 듯하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통한 초특급 기생으로 명성을 날리며 저명한 문인, 학자들과 교류했다. 10년 동안 면벽 수행을 하며 생불이라 불리던 천마산의 지족 선사를 유혹해 파계시켜 버리고 왕족 벽계수가 한양으로 돌아가려 하자 단장을 한 뒤 말을 타고 벽계수의 가는 길 앞에 나타나서 "청산리 벽계수야~"라고 시작되는 시조를 읊자 벽계수가 놀라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벽계수와 지족 선사를 무너뜨린 뒤 송도에서 저명한 학자였던 서경덕에게 찾아가 서경덕도 유혹하려 했지만 보통 내공이 아닌 서경덕은 황진이의 유혹에도 덤덤했고 서경덕에게 감탄한 황진이는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송도 사람들이 시신을 고이 안장하여 현 북한 장단 남정현 고개에 황진이의 묘가 있다. 묘비명은 한글로 "명월 황진이의 묘"라고 되어 있고 북한에도 일반 유적으로 지정되어 묘역도 잘 정돈되어 있다.[3]
- 황진이는 조선 전기 시서와 음률에 뛰어났던 개성의 기녀이다. 본명은 황진(黃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신. 확실한 생존연대는 미상이다. 중종 때의 사람이며 비교적 단명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용모가 출중하고 시서 음률에 뛰어났으며 여류시인으로 허난설헌과 병칭된다. 서화담 ·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이라 일컫는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私淑)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하여 당시(唐詩)를 정공(精工)하였다고 한다. 황진이가 지은 한시에는 「박연폭포(朴淵瀑布)」 · 「만월대회고(滿月臺懷古)」 ·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 등이 전하고 있다. 시조 작품으로는 6수가 전한다. 이 중에 「청산리 벽계수야」 · 「동짓달 기나긴 밤을」 · 「내언제 신이없어」 · 「산은 옛산이로되」 · 「어져 내일이여」의 5수는 진본(珍本)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구사를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4]
황진이의 생애
- 황진이는 중종 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시와 그림, 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일사들과도 어울렸다. 성리학적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 황진이는 뛰어난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正史)에 등장하지는 않으며, 여러 야사(野史)들을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온다. 성리학 지식도 해박하였으며, 학자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다가 실패했다고도 한다.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도 불렸으며,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 등이 있다.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 황진이는 시와 글씨, 그림, 서예에 두루 능하였다.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성리학과 고전 지식 역시 해박하였다. 한편으로는 당대의 명사, 한량들과 교류하며 시문 등을 주고받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한번은 왕족인 벽계수를 유혹하는가 하면 당대의 고관대작들을 유혹하거나 망신을 주기도 했다. 황진이의 여러 시조들은 문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어 고전 한국문학의 일부로 인정되며, 교과서에도 실리는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성리학자 화담 서경덕과의 사랑 등으로도 유명하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거나 교류하였으며, 남녀 간의 애정에 대한 내용을 시와 그림으로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몇 수의 시가 현재 전한다. 뛰어난 시, 그림, 글씨 재주와 함께 성리학과 고전에도 능하였으며 뛰어난 미모를 갖추어 유명하였으며,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황진이에 대한 평가
- 황진이는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다. 그녀의 시는 그녀 시대의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또한 가야금을 포함한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했고, 그녀의 뛰어난 춤 실력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널리 칭송되었고, 그녀는 많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천재로 여겨졌다. 황진이는 페미니즘의 개념이 이해되기 훨씬 전부터 페미니스트의 아이콘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시대에 대한 사회적 기대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했고, 자신의 사회를 지배하는 가부장제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독립과 표현의 자유를 소중히 여겼고, 그녀는 수많은 여성들이 그녀의 뒤를 따르도록 영감을 주었다. 황진이는 또한 한국의 문화 아이콘으로 여겨진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수많은 책,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제가 되었다. 그녀는 종종 비극적인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녀의 사회의 엄격한 경계에 맞서 싸웠고 결국 그녀의 독립에 큰 대가를 치른 여성이다.
- 황진이의 삶과 업적은 수 세기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평가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영웅으로, 용기 있게 시대의 규범에 도전하고 미래 세대의 여성을 위한 길을 닦은 여성으로 본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비극적인 인물로 보고 있다. 그녀는 독립을 위해 큰 대가를 치렀고 결국 그녀가 도전했던 사회로부터 벌을 받은 여성이다. 황진이를 어떻게 보든 한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예외적인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녀의 유산은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그 힘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조선의 황진이는 한국 역사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그녀 시대의 엄격한 사회적 기대에 얽매이기를 거부한 뛰어난 시인, 음악가, 그리고 궁녀였다. 그녀의 예술적 재능, 페미니스트인 가치관, 그리고 반항적인 성격은 그녀를 한국 문화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만들었고,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고 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황진이〉, 《위키백과》
- 〈황진이〉, 《나무위키》
- 〈황진이(黃眞伊)〉, 《두산백과》
- 〈황진이(黃眞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금안네, 〈황진이 한시 시조 모음〉, 《네이버블로그》, 2022-02-02
- 김준옥 기자, 〈인가?〉, 《SPN 서울평양뉴스》, 2021-10-05
- 친절한김쌤, 〈이야기로 만나는 시조 – 황진이와 벽계수의 청산리 벽계수야 –해석과 야사〉, 《네이버블로그》, 2021-09-01
- 조정훈 기자, 〈황진이가 새긴 시가 있어 아름다운 '박연폭포'〉, 《통일뉴스》, 2015-07-28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