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시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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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시너우(루마니아어: Chișinău, 문화어: 끼쉬뇨브)는 몰도바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인구는 약 53만 명이고 인근 지역을 포함하면 73만 명으로 몰도바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대도시 지역에 살고 있다. 러시아어 이름인 키시뇨프(러시아어: Кишинёв)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독립한 몰도바의 수도가 되었다.[1]
개요[편집]
키시너우는 드니스테르강의 지류인 브크강 연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업과 서비스업의 중심지이다. 몰도바 중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몰도바의 정치, 문화, 상업의 중심이고 교통의 허브이다. 키시너우는 1436년 수도원을 중심으로 건설되어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다. 1812년 러시아의 손에 들어가 베사라비아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1918년에서 1940년 사이에는 루마니아가 키시너우를 지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영토가 되었으며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독립한 몰도바의 수도가 되었다. 주민은 대부분이 몰도바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이다. 유대인과 불가리아인, 독일인도 거주한다. 키시너우 인구의 43%였던 유대인들은 1903년 4월 6-7일, 1905년 10월 19-20일 두 차례에 걸친 유대인 학살(키시뇨프 포그롬)을 계기로 서유럽과 미국 등지로 이주하였다. 도시에는 1836년에 세워진 예수탄생성당과 종탑을 비롯하여 많은 19세기 건물들이 있다. 20세기 후반 소비에트 시기에 고층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세워졌다.[2][3]
지리 및 기후[편집]
키시너우는 드네스트르강의 지류인 브크강 연안에 있고 중부 몰도바에 위치한다. 주변의 땅은 매우 비옥하고 비교적 평평하다. 도시 주변에 농업 환경이 발달해 있다. 포도와 과일 경작은 이 지역에서 중세 때부터 행해져 왔다. 키시너우 남서쪽 변두리에 브크강의 지류인 이슈노버츠강이 있다.
키시너우는 남동부 유럽 지질 구조의 중심에 있으며 그 핵은 화강암과 고대의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침식면에는 진흙, 모래, 석회암만이 나타난다. 키시너우 전체에 있는 진흙과 모래층은 깊이가 2m에서 30m에 이른다. 브크강 계곡의 사면에는 1.3m 폭의 충적토가 있다.
키시너우와 그 주변의 땅에 석회석, 진흙, 모래, 자갈 등 많은 건설 자재 물질이 묻혀 있다. 타일은 부부이에치, 밀레스티미치의 채석장에서 캔 원자재에서 만들어지고 모래, 자갈 등은 코부스차, 바둘루이보더에서 채취된다.
키시너우는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고 바람이 세게 부는 대륙성기후 지역에 있다. 여름 온도는 평균 21°C이고 때때로 35°C에서 40°C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겨울에는 0°C 내외에 머물지만 -10°C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봄과 가을에는 16°C에서 24°C 사이의 기온을 보인다. 연평균 강수량은 543mm 내외이고 6월과 7월에 가장 비가 많이 내린다.[4]
역사[편집]
1436년에 수도원이 있는 마을로 세워진 키시너우는 몰다비아공국에 속했다. 19세기 초에 키시너우는 인구 7천 명의 조그만 도시였다. 1812년에 러시아-터키전쟁(1806~1812)의 여파로 몰다비아의 동쪽 반은 러시아제국에 할양되었다. 러시아가 새로 얻은 영토는 베사라비아로 알려졌다.
키시너우는 새로 편입된 베사라비아주의 주도가 되었다. 1834년에 넓고 긴 길을 가진 러시아제국풍의 도시경관이 도시계획의 결과로 생겨나 신시가지가 되었다. 1836년 예수탄생성당이 6년 공사를 거쳐 준공되었다. 1840년에 개선문이 완공되었다. 이후에도 많은 건물과 랜드마크들이 지어졌다.
1871년 키시너우를 동쪽 티라스폴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었다. 1873년에는 서쪽 코르네슈티로 가는 철도가 부설되었다. 1875년 키시너우-운게니-이아시 철도가 러시아-터키전쟁(1877~1878)에 대한 준비로 개통되었다. 키시너우는 러시아의 침공 준비 구역으로서 러시아와 오스만제국 사이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키시너우의 인구는 1862년 92,000명에서 1900년에 125,787명으로 크게 늘어다.
19세기 말에, 특히 러시아제국 안에서의 커져가는 반유대주의 정서와 몰도바의 좀 더 나은 경제적 여건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키시너우에 정착했다. 1897년에 키시너우 인구의 46%가 유대인이었고 그 수는 5만 명을 넘었다.
러시아제국에서 집단학살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키시너우에서도 후일 키시너우대학살로 알려진 대규모 반유대인 폭동이 1903년 4월 19~20일에 발생하였다. 이 폭동에서 47명의 유대인이 죽고 92명이 중상, 500명이 경상을 입었다. 수백 채의 가옥과 많은 상점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이 집단학살은 당시의 유일한 공식 신문이었던 베사라베츠가 반유대인선동을 하여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 8월 22일 다른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경찰이 약 3천 명의 시위 농민에게 발포했다. 그리고 불과 두 달 뒤인 10월 19~20일에 항의 시위가 발생해 결국 니콜라이 2세가 10월 선언을 해야 했다. 이들 시위는 갑자기 반유대인 학살로 바뀌었고 19명이 사망했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베사라비아는 붕괴하는 러시아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루마니아왕국에 들어가기 전에 몰다비아민주공화국이 되었다. 1919년에 133,000명으로 추정되는 인구의 키시너우는 루마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1918년에서 1940년 사이에 키시너우의 중심부는 큰 보수 작업을 거쳤다. 루마니아는 키시너우에 상당한 보조금을 주었고 이로써 베사라비아 주요 도시의 인프라에 대규모 투자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 철도 인프라가 확장되었고 광범위한 문맹퇴치 사업이 시작되었다.
1940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약의 직접적인 결과로 베사라비아는 루마니아로부터 소련으로 편입되었다. 키시너우는 새로 성립된 몰다비아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소비에트의 지배 이후 1940년 6월과 1941년 6월 사이에 잔학 행위와 대량 추방이 자행되었다. 키시너우에서 400명이 넘는 사람이 1940년 7월 즉결 처형되었다. 공산주의 권력에 대한 잠재적 반대 세력을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수만 명의 사람이 베사라비아에서 소련의 다른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1940년 11월 10일 키시너우에서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였다. 리히터 척도로 진도 7.4였던 지진의 진앙은 브란체아산맥에 있었고 이어서 큰 파괴를 불러와 78명이 죽고 2,795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1941년 6월 베사라비아를 되찾기 위해 루마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때 독일군의 지휘 아래로 들어갔고 소련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2차대전의 혼란 속에서 키시너우는 심하게 타격을 입었다. 1941년 6~7월 키시너우는 나치 공군의 공습을 당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와 새로운 몰도바의 소식통은 피해의 책임 대부분을 소비에트 비밀경찰 파괴부대의 탓으로 돌렸다. 이 부대는 추축국에 의해 제압된 1941년 7월 17일까지 작전을 펼쳤다.
독일과 루마니아의 재점령 후에 키시너우는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고통을 겪었다. 유대인들은 키시너우 교외에서 학살되어 흙구덩이 속에 파묻혔다. 약 만 명의 유대인들이 키시너우 점령 후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키시너우에서 다시 한번 독일군과 루마니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키시너우는 1944년 8월 24일 이아시키시너우작전의 결과로 붉은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전후에 베사라비아는 완전히 소련으로 통합되었고 영토의 65%는 몰다비아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에, 35%는 우크라이나사회주의공화국에 소속되었다.
몰도바주민에 대한 다른 두 추방이 소비에트당국에 의해 시행되었다. 첫번째 추방은 소비에트 재점령 직후에 실행되어 194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고 두번째 추방은 195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건축가 알렉세이 시추세프는 다른 건축가들의 도움을 받아 키시너우시의 재건 계획을 세웠다.
1950년대에 빠르게 인구가 증가했고 이에 대응해 소비에트 당국은 대규모 주택단지를 스탈린식 건축 스타일에 따라 지었다. 이 과정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통치 시기에 계속되었다. 흐루쇼프는 "더 좋게, 더 싸게, 더 빨리 짓자"라는 구호 아래 건설을 촉구했다. 새로운 건축 스타일은 극적인 변화를 낳았고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이들 흐루쇼프시대 건물은 보통 흐루쇼프카라 불린다.
가장 중요한 도시 재개발 시기는 1971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소련 정부는 '키시너우시의 개발에 대한 방법에 대해'라는 결정을 채택하고 10억 루블이 넘는 자금을 국채를 통해 제공하기로 했다. 이는 1991년 몰도바 독립 때까지 계속되었다. 소비에트 시기인 1951~1990년에 지어진 주택의 비율은 현재 전체 주택의 74%를 차지한다.
1991년 독립 후에 키시너우의 많은 거리가 역사적인 인물과 지명, 사건 이름을 따서 이름이 다시 붙여졌다.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뒤에 공산주의식 이름에서 민족적 이름으로 바뀌었다.[5]
교통[편집]
몰도바 안에서의 가장 보편적인 교통 수단은 버스이다. 티라스폴, 이아시 등 주요 국내 도시는 물론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로 가는 버스가 있다. 버스터미널은 키시너우역 앞과 남부버스터미널 등에 있다.
키시너우는 몰도바의 철도 교통의 중심이다. 철도는 국영 몰도바철도(CFM)회사가 운영한다. 모든 철도의 중앙 허브는 키시너우중앙역이다. 이 역에서 국제선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벨라루스의 민스크, 러시아의 모스크바, 사마라, 바르나,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열차가 있다. 키시너우국제공항 부근에 레바카역이 있다.
시내 교통은 트롤리버스, 버스, 미니버스 등이 있다. 트롤리버스는 키시너우에서 가장 싼 교통 수단으로 새벽 5시부터 다음날 3시까지 운행된다. 버스는 키시너우에 29개 노선이 운행되고 정류장은 330개가 있다. 미니버스는 루티에러라고 불리며 민간 회사가 운영하고 요금은 버스 요금과 같다.
키시너우국제공항은 키시너우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13km 떨어진 데 있다. 이 공항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주요 지역으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할 수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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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키시너우〉, 《위키백과》
- ↑ 〈키시너우〉, 《나무위키》
- ↑ 〈키시너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키시너우(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 ↑ 〈지치누〉, 《요다위키》
참고자료[편집]
- 〈키시너우〉, 《위키백과》
- 〈키시너우〉, 《나무위키》
- 〈지치누〉, 《요다위키》
- 〈키시너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키시너우(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