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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슈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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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슈푸(李书福)
지리자동차그룹(吉利控股集团)
지리자동차(吉利汽车)

리슈푸(李书福, lǐ shū fú, 이서복)는 지리자동차그룹(吉利控股集团)의 창업자이며 회장이다. 2020년 4월 6일 기준으로 리슈푸 일가는 1,000억 위안(약 17조원)을 소유함으로써 "후룬 글로벌 100대 기업가 순위" 83위에 올랐고 2020년 5월 12일 리슈푸와 그의 아들 리싱싱(李星星, lǐ xīng xīng)은 498억 8000만 위안을 소유함으로써 "2020 뉴 재부 부자 500인" 리스트에서 39위를 차지하였다.[1]

리슈푸는 지리홀딩스 회장, 볼보 자동차 회장, 중국 정협 위원, 중국 공상연합회 부회장, 저장성 공상연합회 부회장, 타이저우시 인민대표, 중국 자동차공업협회 부회장, 전국 사립 교육 협회 부회장, 제13차 중국 인민대표대회 대표를 역임하였으며 중국 자동차산업에 영향력 있는 인물, 중국 자동차 공업 우수 인물, 2009년 CCTV 올해의 경제인, 개혁 개척자 등 칭호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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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약력[편집]

120위안(2만원)으로 시작한 첫 창업[편집]

소년 시절의 리슈푸

리슈푸의 재산은 이미 중국에서 39번째 부자이지만 처음에는 단돈 120위안(약 2만 원)으로 창업했다. 그의 사업 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냉장고 공장을 하면서 돈을 벌었고 하이난다오(海南島)에서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크게 실패했지만 중국의 유대인이라고 하는 이른바 "저장상인의 기질"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는 안목이 뛰어났고 목표가 정해지면 용감하게 앞으로 치고 나갔으며 절대로 포기할 줄 모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리슈푸는 1963년 6월 25일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타이저우(台州)에서 태어났다. 타이저우는 그가 사업을 일으킨 본고장이자 근거지이며 그는 가난하고 낙후된 산골인 타이저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이러한 시골 촌놈은 "첫째, 고생이 두렵지 않고, 둘째 가난이 겁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당연히 돈 버는 것을 좋아한다!"고 늘 말했다. 그가 처음 사업을 했던 때는 19살인 1982년의 일이다. 환경의 영향으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리슈푸는 학업을 계속하지 않고 사진관을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 부친께서는 나에게 120위안을 주셨다"라고 회고했다. 그 해는 그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던 때이다. 처음 사진관을 시작했을 때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몰랐다. 작은 카메라를 하나 구매하고 중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줬다. 사실 이런 이야기도 리슈푸 회장은 말하기를 싫어하며 주변 사람들이 얘기하기를 그때 리슈푸는 카메라를 등에 메고 공원에서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는 "이리 오십시오! 동지들 사진을 찍으세요!"라고 소리치면서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하고 다녔다.

이렇게 리슈푸의 사진 사업은 수입이 꽤 쏠쏠하여 반년 만에 1,000위안(약 17만 원)을 벌자 그는 정식으로 사진관을 열었다. 일 년이 지난 뒤 20살에 리슈푸는 처음 기업을 설립하는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는 "내가 선택한 사업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이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쓰레기 속에서 금과 은을 분리하는 일이다. 리슈푸는 언제나 일부 부품을 산 뒤 사진기를 조립했다. 천성적으로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것을 좋아했던 리슈푸는 사진을 현상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약품에 담그면 폐기물 가운데 금과 은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리슈푸는 이렇게 분리한 금과 은을 저장성의 소재지인 항저우(杭州)에 가져다가 팔았다. 이 일에 재미를 느낀 리슈푸는 아예 사진관 문을 닫고 전문적으로 이 장사에 모든 것을 투입했다. 그는 이 사업에 당시로는 거금이었던 1만 위안(170만 원)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당시 사진관은 장사가 잘되었지만 그는 주저 없이 사진관을 닫아버렸다. 리슈푸는 "이 사업은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라고 말했다. 리슈푸는 이 사업으로 돈을 벌었던 것에 대해 지금도 좋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냉장고를 팔아 1000만 위안 부자가 되다[편집]

베이지화 냉장고

1984년에 이르러 리슈푸는 형제들과 함께 황옌현(黄岩县)에 스취(石曲) 냉장고 부품공장을 설립했다. 어떻게 보면 리슈푸의 사업적인 수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때 그의 직함은 공장장이다. 갑자기 냉장고 공장의 공장장이 된 사연은 그가 우연히 조그만 구두공장에 가서 구두를 하나 맞출 심산이었다. 여기서 그의 눈이 번뜩였다. 구두공장에는 모두 4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그들은 구두를 만들면서 한편으로 냉장고의 부품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 말하면 저장성에서 말하는 "샤오꺼우 경제"(小狗經濟)이다. 이 용어는 최초로 저명한 경제학자 종펑롱(鍾朋榮)이 저장성의 원저우와 타이저우 등의 경제 형태를 관찰한 뒤 사용한 것이다. 그 의미는 작은 개 세 마리가 큰 개를 이기는 방법은 이들 작은 개들이 큰 개의 코, 몸통과 꼬리를 물어서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저장성 경제가 발전하게 된 이유가 바로 철저한 분업, 긴밀한 연계 등을 장점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면 북쪽의 일부 도시에는 냉장고의 공급은 아직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리슈푸는 구두를 맞추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골똘하게 생각하고 결론을 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냉장고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리슈푸는 이때부터 직접 개인적으로 부품을 생산한 뒤 포장을 해서 자전거로 냉장고 공장에 배달하였다. 이후 리슈푸와 형제들도 함께 냉장고 부품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래서 냉장고 공장장이 된 것이다. 당시 사업이 잘 됐으며 1년 영업액이 4, 5천 위안이나 되었다. 이때 리슈푸는 더욱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바로 냉장고를 직접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1985년을 전후하여 중국에서는 민영경제가 발달하지 못하였고 국가가 정식으로 허가를 해주지 않던 때였으며 냉장고는 국가가 통일적으로 판매하는 상품이다. 당시 관련 부문으로부터 생산허가 비준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슈푸는 모험을 감행했으며 1986년 리슈푸는 전기냉장고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증발기를 직접 개발하고 생산한 뒤 황옌현(黃岩縣)에 베이지화(北極花) 전기냉장고 공장을 설립하고 "베이지화"(北極花)라는 브랜드의 전기냉장고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냉장고는 불티나게 팔렸으며 1989년 5월, 냉장고의 판매액은 4,000만 위안에 달했으며 이미 명성이 있던 산동성 칭다오(靑島)의 홍싱공장(紅星廠)과 합작을 하여 홍싱공장의 냉장고와 냉동고를 생산했다. 베이지화 냉장고는 이미 당시 중국 내 냉장고 업계에서 유명한 제품이 되었으며 26살이 된 1989년 리슈푸는 베이지화 냉장고 공장의 공장장이 되었다. 이미 1,000만 위안(17억 원)을 번 부자의 반열에도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큰 변화가 나타났는데 1989년 6월 중국 정부는 냉장고를 국가 중점 생산품으로 지정하며 안타깝게도 당시 민영 사업으로 최고 상품이던 베이지화 냉장고는 국가 중점 생산기업에 선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리슈푸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 시기에 그는 새로운 충전을 준비했다. 그는 그동안 번 1천만 위안을 들고 학생 신분으로 개혁개방의 심장 광동의 선전에 갔다. 리슈푸가 처음으로 밖으로 나가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그는 선전, 상하이, 하얼빈 세 곳에서 대학을 다니며 공부하고 독학으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대학을 다니고 공부한 덕분이다.

오토바이 및 자동차 제조에 뛰어들다[편집]

지리 첫 차량 호우칭

리슈푸는 선전에서 공부할 때 어느 날 자신의 숙소를 수리하게 되었다. 이때 리슈푸는 실내장식 일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인테리어 사업의 미래가 괜찮을 것으로 직감했다. 앞으로 인테리어 재료 시장의 전망이 밝을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1989년 그는 공부를 마치자마자 즉시 고향 저장성 타이저우로 돌아와 형제들과 실내장식 자재 생산회사를 창업하였다. 이때부터 1991년까지 2년 동안 저장성 타이저우에 지리(吉利) 장식 자재 공장을 경영했으며 이곳에서 중국 최초로 알루미늄 강판을 생산하였고, 아울러 중국 최초로 알루미늄 강판 생산 공장을 설립하였다. 이 사업은 리슈푸 가족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물론 지금까지도 중국에서는 이 업종은 매년 수억 위안의 이윤을 달성하고 있다.

잘나가던 사업가로서 리슈푸의 생애에 가장 크게 실패를 한 것은 부동산 투자이다. 1992년 리슈푸는 냉장고 사업으로 번 돈 수천만 위안을 들고 하이난다오(海南島)를 찾아가 이곳에 투자하였으며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소문들이 자자하여 리슈푸도 이 대열에 참여하였다. 그는 2년 동안 부동산 투자에 골몰하지만 5~6백만 위안에 달하는 투자금을 모두 날렸다. 그는 이때의 이야기를 지금도 극도로 꺼려 하며 그의 개인적인 소개에도 이 시기 이야기는 없다. 그는 크게 실패를 경험한 뒤 얻게 된 가장 큰 교훈은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부동산 투자 실패 이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리슈푸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베이징의 옌산대학(燕山大學)에서 공부를 하면서 1993년 베이지화 냉장고가 국가 지정품목에 들어가지 못했던 실패를 거울삼아 수천만 위안을 투자하여 저장성 린하이(臨海)의 "국유우전오토바이공장(国有邮政摩托车厂)"을 인수했다. 발로 작동하는 스쿠터식 발동기를 연구하여 생산에 성공하고 당시 이 업종의 선두주자인 "자링(嘉陵)"과 합작으로 "자지(嘉吉)"라는 오토바이 브랜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판매량이 중국 스쿠터 시장의 순위를 달리기 시작하였으며 미국과 이탈리아 등 32개 국가에 수출까지 할 정도로 사업이 성공했다.

1994년 오토바이 장사가 잘되자 리슈푸는 다시 한번 과감한 결정으로 사람들이 놀라게 했으며 그것은 바로 "자동차 생산"이다. 이 일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중국 정부는 생산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기간 산업으로 누구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리슈푸는 먼저 자동차 산업과 관련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저장성의 린하이시에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토지 850무를 사들이고 이곳을 오토바이 생산을 이유로 지리(吉利)의 "하오칭자동차공업단지(豪情汽車工業園區)"라고 명명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997년 때마침 스촨(四川)의 소형차량 생산 기업이 부도가 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리슈푸는 1,400만 위안을 투자하고 "스촨지리보잉자동차제조회사(四川吉利波音汽車制造公司)"를 설립했다. 이렇게 소형차와 이른바 봉고차(面飽車)의 생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1998년 8월 8일 리슈푸는 정부로부터 최종 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지리하오칭(吉利豪情)" 자동차 생산을 위한 두 개의 라인을 먼저 설치했다. 2000년 12월 국가경제무역위원회가 제7차 차량 생산기업 생산품에 대한 공고를 발표하면서 리슈푸의 지리그룹의 숙원 사업이던 승용차 생산 자격을 마침내 얻게 되었다. 2001년 지리는 린하이(臨海)에는 하오칭(豪情), 닝보(寧波)에는 메이르(美日), 그리고 상하이 푸동에는 화푸(華普)등 세 곳의 자동차 생산기지를 보유하게 되며 지리는 자동차 공업의 기본적인 전략 구조를 완성하였다.

지리그룹은 2010년까지 이미 위엔징(遠景), 진깡(金剛), 진잉(金鷹), 쯔요우지엔(自由艦), 요오리오(優利歐), 메이런바아오(美人豹), 슝마오(熊猫), 띠하오(帝豪) 등 시리즈의 자동차 라인업을 갖추게 되었다. 지리자동차가 발표한 수치에 따르면 2010년 2월 자동차 총 생산량은 28,712대로 2009년 동기 대비 54.2% 성장을 보였으며 2010년 2월 지리자동차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3총사는 쯔요우지엔(自由艦), 지리진깡, 위엔징으로 각각 9,460대, 5,156대와 3,884대가 팔렸다.[2]

연도별 주요사건[편집]

  • 1963년 06월 25일 : 중국 저장성 타이저우에서 출생
  • 1984년~1986년 : 타이저우(臺州) 시취(石曲)냉장고부품공장 공장장
  • 1986년~1989년 : 타이저우 베이지화(北极花)냉장고 공장장
  • 1989년~1992년 : 타이저우 지리장식재료 공장 공장장
  • 1992년~1995년 : 얜산대학(燕山大学)에서 공부
  • 1995년 : 지리자동차그룹 회장, 지리홀딩스 회장
  • 2010년 08월 : 볼보승용차 회장
  • 2015년 12월 : 제2회 세계인터넷대회 개막식 게스트
  • 2017년 07월 : 저장성공상련(工商联) 부주석
  • 2017년 11월 : 12기 전국공상련 부주석 당선
  • 2018년 01월 : 제13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저장성 대표 당선

주요 활동[편집]

글로벌 인수[편집]

리수푸는 2010년 3월 미국 포드로부터 볼보를 인수하고 합병은 하지 않고 독자 브랜드로 볼보를 운영하였으며 2013년 2월 런던택시컴퍼니를 인수하였다. 2017년 6월 지리는 말레이시아 자동차 회사인 프로톤 지분 49.9%와 영국 스포츠카인 로터스 지분 51%를 인수하고 11월에는 하늘을 나는 플라잉카를 개발 중인 미국 스타트업 테라푸지아도 인수하였다. 2018년 2월에는 독일 다임러 지분 9.69%를 확보하며 최대주주에 올랐다.

지리자동차의 다임러(Daimler)의 지분인수 과정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다임러는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를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는 독일 기업이다. 리슈푸가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발한 금융기법으로 다임러 지분을 9.7%나 인수한 것이다. 우선 2017년 리슈푸가 다임러에게 지분인수와 기술 공유 협정 체결을 타진했지만 다임러는 단칼에 거절했다. 외신에 따르면 리슈푸는 즉시 홍콩 페이퍼 컴퍼니와 파생상품, 은행 파이낸싱 및 주식옵션 같은 방법을 총동원해서 암암리에 다임러 지분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투자진행과 자금조달은 모건스탠리와 BOA메릴린치를 활용했으며 지리자동차는 모건스탠리 출신 인사를 고용해서 독일의 주식 대량보유 공시제도를 피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독일은 주식을 3% 이상 보유하게 될 때와 5% 이상 보유하게 될 때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리슈푸의 다임러 지분 인수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누구도 리슈푸가 지분을 9.7% 매입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독일에서 주식 대량보유 공시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3]

각주[편집]

  1. 李书福〉, 《百度百科》
  2. 심명숙, 〈지리자동차 창업자 리슈푸〉, 《타고》, 2021-02-18
  3. 김재현, 〈지리자동차와 현대차, 10조원을 쓰는 다른 방법〉, 《머니투데이》, 2018-03-16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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