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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슈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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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슈티나
프리슈티나 위치

프리슈티나(알바니아어: Prishtina/Prishtinë, 세르비아어: Приштина, Priština)는 2008년 독립을 선포한 코소보수도이자 코소보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면적은 97km²,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현재 재건 중에 있으며 국제 연합의 관리를 받고 있다.[1]

개요[편집]

프리슈티나는 동남유럽발칸반도에 위치한 미승인국 코소보 공화국의 수도로 골랴크산맥 가까운 코소보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2008년 코소보 독립선언 이후 세르비아에서 독립해 코소보 공화국이라는 국명을 채택했다. 주민의 다수는 알바니아인이고 그밖에 소수 민족이 살고 있다. 코소보는 1999년 세르비아의 인종청소에 맞서 싸웠고 프리슈티나는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코소보는 2008년에 독립을 선포했으나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들 때문에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프리슈티나도 다른 유럽 도시들에 비해 발전이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유고슬라비아 시절의 개발 작업으로 인해 구시가지들이 많이 사라져버린 통에 통상적으로 인식되는 유럽 도시들에 비해 소위 콘크리트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 전형적인 회색도시이다. 그래도 시가지 곳곳에 오스만 제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절의 유산을 찾아볼 수 있으며 최근에는 국제공항을 새로 확장 개장하는 등 재건 작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69년 설립된 옛 프리슈티나대학교는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알바니아계 대학교와 세르비아계 대학교로 분리되어 다시 설립됐다. 프리슈티나에는 신생국가의 탄생을 세계에 알리는 뉴본기념물이 있고 빌 클린턴 대통령의 동상이 서 있다. 또 알바니아 출신의 성인 마더테레사수녀의 동상과 성마더테레사성당, 마더테레사거리가 있다. 구시가지에 모스크인 하미아에차르시서와 하미아에마드헤가 있고, 코소보 박물관과 시계탑, 대중 목욕탕인 하맘이마드, 인종박물관 등 중세 또는 근세의 건축물들이 있다.[2][3]

지리[편집]

프리슈티나는 코소보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골랴크산맥이 가까이에 있다. 남쪽으로 시트니차강의 지류인 그라찬카강이 흐른다. 그라찬카강은 시트니차강과 만나고 시트니차강은 다시 이바르강과 합류한다. 프리슈티나는 심각한 식수난에 시달리는 지역이다. 강수량과 적설량이 부족하여 프리슈티나 시민들은 물 부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상수도는 시내 외곽 북동쪽의 바틀라바저수지와 시내 남동쪽의 바도브츠(그라찬카) 저수지에 의존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1999년 전쟁 후에 도시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프리슈티나시립공원에 새로운 돌 포장로가 생겼고 큰 나무가 심어졌다. 마더테레사광장이 재건된 후 많은 나무와 꽃을 심었다. 정부청사 앞의 오래된 건물들은 광장을 만들기 위해 철거되었다.[4]

역사[편집]

프리슈티나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인간이 남긴 흔적은 구석기시대의 것부터 있으며 중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흔적도 있다. 스타르체보, 빈차, 부바니훔과 바덴문화가 프리슈티나 지역에서 융성했다. 오늘날 프리슈티나 지역에는 약 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기원전 8세기부터의 초기 신석기시대 유물이 마티찬, 그라차니차와 울피아나 등 프리슈티나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4세기에 바르딜리스왕이 일리아족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서 다르다니아왕국을 세웠다. 기원전 168년에 로마 제국이 일리아를 정복한 후에 이 지역의 여러 도시를 식민지로 삼았고 이름을 다르다니아라고 붙였다. 오늘날 프리슈티나 시내 남쪽 울피아나는 발칸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로마제국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고 기원전 2세기에 울피아나는 무니키피움(도시)이 되었다.

프리슈티나는 서기 518년에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비잔틴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도시를 굉장히 웅장하게 재건하고 이름을 유스티니아나 세쿤다라고 새로 붙였다. 그러나 베오그라드대학의 한 외딴 분교로 운영되었던 시기를 끝내고 코소보의 알바니아어 교육과 문화를 크게 북돋웠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점령되었지만 전쟁 이후에는 다시 세르비아의 지배로 되돌아갔다. 다만 세르비아 자체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전간기에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라고 개칭하였고 프리슈티나도 유고슬라비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이탈리아군 그리고 독일군에 점령되었지만 1944년에 파르티잔에 의해서 해방되었다. 1980년 유고슬라비아를 이끈 티토가 사망하면서 세르비아 내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코소보의 자치 또는 알바니아와의 통일 등을 내거는 운동이 대두되었다. 이에 대하여 세르비아 정부는 강경책으로 임하였고 무력진압도 불사했다.

1989년 밀로셰비치 아래서 코소보의 자치가 폐지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알바니아인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세르비아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코소보 자치를 축소한 후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한 가혹한 탄압이 코소보 전역에 걸쳐 행해져서 알바니아인들은 국영 기업과 기관에서 쫓겨났다. 코소보 해방군이 1996년부터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리슈티나는 1999년 3월의 코소보전쟁 발발 때까지 대체로 잠잠했다.

알바니아인들은 알바니아 국기를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10년 만에 프리슈티나는 거의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나 1971년에는 69,514명이었던 것이 1981년에는 109,208명이 되었다. 외부의 재정지원을 받은 이 급속한 성장의 황금시대는 유고슬라비아의 경제 붕괴와 1981년 학생 봉기로 막을 내렸다. 프리슈티나는 코소보의 나머지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사회적 위기로 빠져들어갔다.

프리슈티나는 세르비아군에 심하게 당한 갸코바, 페치 같은 도시와 비교할 때 대규모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나토의 공중작전 동안 우체국, 경찰서, 군부대(코소보폴레 가는 길에 있는 오늘날의 아뎀야샤리 주둔지)를 포함, 프리슈티나에 있던 많은 군사 목표가 공습을 당했다. 광범위한 폭력 사태가 프리슈티나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군대는 여러 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무장단체와 연합해서 알바니아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그 과정에서 알바니아인들의 재산에 대한 약탈과 파괴가 동반되었다. 쫓겨난 사람들 다수가 북마케도니아 국경으로 추방되기 위해 프리슈티나 중앙역으로 보내졌다. 알바니아인 대부분은 세르비아 정책을 피하고자 프리슈티나에서 도망쳤다.

1999년 6월 초에 처음 프리슈티나에 들어오기로 한 나토군은 노르웨이 특수부대와 영국 특수항공대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아파트들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시 공원 뒤의 로마구역에 불을 질렀다. 프리슈티나의 전략 목표 몇 개가 나토에 의해 전쟁 중 공격을 받았으나 심각한 물리적 피해는 유고슬라비아 보안군의 공격을 받은 몇몇 특정 마을에 주로 한정됐다. 전쟁이 끝났을 때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의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곳에서 세르비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세르비아어를 말했거나 세르비아인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됐다. 폭력은 코소보 알바니아 극단주의자 무리들이 아파트단지에서 아파트단지로 옮겨다니며 남은 세르비아인들의 거처를 뒤졌던 2004년에 극에 달했다. 계속되는 폭력 때문에 45,000명의 세르비아 거주민들 거의 모두가 코소보를 도망쳐 나왔다. 오늘날 소수의 세르비아인만이 프리슈티나에 남아 있다.

주도이면서 유엔사무처가 있는 곳으로서 프리슈티나는 국제기구로부터 막대한 예산과 인적 지원을 받았다. 기부자들, 국제기구, 알바니아인 등으로부터 재건을 위한 펀드를 투입받음으로써 전례 없는, 그러나 단기간에 그친 경제 부흥이 일어났다. 과도하게 많은 새 카페, 레스토랑, 자영업이 프리슈티나의 새 시대 시작과 함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5]

교통[편집]

프리슈티나 국제공항은 연 200만 명을 수송한다.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 슬로베니아, 터키, 영국 등과 항공노선이 연결되어 있다. 프리슈티나는 코소보에서 철도, 도로, 항공교통의 허브이다. 프리슈티나에는 기차역이 둘 있다. 시내 서쪽에 있는 프리슈티나역과 시 외곽 공업단지 서쪽에 있는 포셰코소베기차역이다. 기차는 프리슈티나와 북마케도니아의 스코페와 매일 운행한다.

경관[편집]

426개의 코소보의 역사적 보호 기념물 중에서 21개가 프리슈티나에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비잔틴시대와 오스만제국 시대의 것이다. 1945년부터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옛 것을 부수고 새 것을 짓자'는 슬로건 아래 현대적 프리슈티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현대화는 건물 구조, 건물의 기능, 주변 환경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네 개의 모스크, 복원된 정교회, 오스만 목욕탕, 연못, 시계탑, 전통가옥, 코소보박물관 같은 유럽에 영향을 받은 건축물 등 많은 문화재들은 보존되었다. 이런 건물들은 오랜 세월을 통해 정복 제국들(로마, 비잔틴, 오스만투르크,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신으로 발전해온 프리슈티나의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보여준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코소보 국민들에겐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고 코소보 정부는 감사의 표시로 클린턴 전 대통령의 동상을 세웠다. 동상이 있는 대로는 빌클린턴대로로 명명되었다. 클린턴 대통령뿐 아니라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아 프리슈티나의 명소 중 하나인 뉴본기념물 앞의 광장은 매들린광장으로 명명되었다.

뉴본기념물은 프리슈티나의 주요 명소로서 청소년스포츠궁 앞에 있다. 뉴본기념물은 2008년 2월 17일 제막되었다. 이날은 코소보가 세르비아에 대해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뉴본기념물은 영어 NEWBORN이 대문자로 씌어 있는 조형물이다. 가로 3m, 세로 24m이고 무게가 9톤인 뉴본기념물은 24시간 작업을 해서 10일만에 만들어졌다. 영어 단어 '뉴본(Newborn)'은 새로운 나라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선택되었다. 이 기념물은 디자인 부문에서 여섯 개의 주요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 이 기념물은 코소보의 디자이너인 피스니크 이스마일리와 오길비코소바 회사가 협력해서 만들었다. 뉴본기념물은 세계에서 가장 새로운 국가인 코소보 국민들이 자유를 획득한 것에 대해 느끼는 국민적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프리슈티나〉, 《위키백과》
  2. 프리슈티나〉, 《나무위키》
  3. 프리슈티나(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4. 프리슈티나(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5. 프리스티나〉, 《요다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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