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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5일 (일) 17:3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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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우크라이나어: Київ) 또는 키예프(러시아어: Киев, 영어: Kyiv, 문화어: 끼예브)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드니프로강을 따라 우크라이나 중북부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약 296만 명으로 유럽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키이우는 동유럽의 중요한 산업, 과학, 교육, 문화의 중심지이다.[1]
개요[편집]
- 행정 단위: 우크라이나 수도
- 면적: 839 km²
- 인구: 2,949,558명 (2018년)
- 지역어: 우크라이나어
키이우는 드니프로강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드니프로강이 흑해로 흘러드는 어귀로부터는 952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키이우는 드니프로강이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교역과 교통의 중심지로 중세 동슬라브 문명 발달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키이우라는 도시명은 이 도시를 세운 것으로 알려진 전설의 고대 슬라브족 4남매 중 맏이인 키이(Кий)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키이의 소유’라는 뜻이다.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이자 특별시이면서 24개 주(州)를 포함한 27개 광역 행정구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행정 체계가 이중적이다. 시민들이 선거로 선출하는 시의회 의장이 키이우 시장(市長)이고, 시정을 담당하는 시 행정국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또한 키이우는 키이우주(州)의 행정적 중심지로서, 주정부와 주의회도 키이우 시내에 있다. 그러나, 키이우는 수도이자 특별시로서 자체적 시정에 의해 운영되기 때문에 주정부나 주의회의 관할 밖에 있다. 키이우는 스칸디나비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거대한 교역로에 위치한 슬라브족의 정착지로, 9세기 중반에 바랑기아인 (바이킹)에게 함락될 때까지 하자르의 지류가 거주하였다. 바랑기아인의 통치하에, 키이우는 최초의 동슬라브 국가인 키예프 루스의 수도가 되었다. 1240년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된 이 도시는 이후 수 세기 동안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처음에는 리투아니아, 다음에는 폴란드, 그리고 결국 러시아와 같은 강력한 이웃 국가가 통제하는 영토 외곽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지역 중심지였다. 키이우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의 산업혁명 기간 동안 다시 번영했다. 1918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러시아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키이우는 수도가 되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우크라이나의 독립 이후,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의 수도로 남아 다른 지역에서 온 우크라이나인 이주자들의 꾸준한 유입을 겪었다. 습한 대륙성기후를 보이며 기온이 가장 높은 시기는 6~8월로 13.8~24.8 °C 사이이다. 가장 추운 시기는 12~2월로 평균 기온은 -4.6~-1.1 °C 수준이다. 특히, 11월 중순부터 3월 말까지 눈이 내린다. 하항(河港) 및 공항이 있고 방사상(放射狀)으로 철도가 뻗어 있으며 키이우 지하철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대중교통 시스템과 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우크라이나 기계공업의 중심지로서 자동공작기계, 촬영기, 라디오, 토목기계 등의 생산이 활발하다. 현대에 와서도 첨단기술산업이 발달해 있고 고등교육기관과 역사적 명소들이 많다. 시역(市域)의 60%가 녹지이며, 세계유산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키이우는 드니프로강 양안에 자리 잡고 있다. 길이 약 2,200km로 유럽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인 드니프로강은 러시아의 스몰렌스크(Smolensk) 인근에서 시작하여 벨로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지나 흑해로 이어진다. 키이우가 처음 건설된 드니프로강 서안(西岸) 지역은 우안(右岸) 우크라이나(Right-bank UKraine)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고지대의 일부로, 숲이 우거진 많은 언덕과 협곡 및 지류들로 형성돼 있다. 키이우가 드니프로강 동안(東岸)까지 확장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좌안(左岸)으로도 불리는 동안 지역은 저지대이기 때문에 모래로 매립하고 둑을 쌓아 강물이 넘치는 것을 막고 있다.
키이우는 북쪽으로는 데스나(Desna)강의 하구와 키이우 저수지, 남쪽으로는 카니브(Kaniv) 저수지와도 접해 있다. 키이우 내에는 이러한 강과 지류, 저수지, 인공연못 등이 400여 개나 있어 아름다운 경관과 물놀이 기회를 제공한다. 키이우를 지나는 드니프로강과 데스나강에는 배들도 운항하는데, 저수지의 수위조절에 따라 운항이 통제되며 겨울에는 강물이 얼어붙을 때가 많다.
키이우는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습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가장 따뜻한 6~8월의 평균 기온은 13.8~24.8℃이고, 겨울인 12월과 1~2월의 평균 기온은 –4.6~1.1℃이다.[3]
역사[편집]
키이우는 동유럽의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후기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가 세워진 것은 5세기 말에서 6세기로 추정된다.
고대 슬라브족의 기원과 설화 등을 담은 원초연대기(Primary Chronicle)에 따르면 고대 동슬라브족의 키이와 슈체크(Щек), 호리프(Хорив) 형제, 그리고 그들의 여동생 리비드(Либідь)가 이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1982년 당시 우크라이나가 속해 있던 소련은 이 도시가 세워진 해를 서기 482년이라고 선포하고 건립 1,500주년 기념 메달을 만들어 키이우 발전에 기여한 이들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철기 시대 초기 키이우 인근의 정착민들은 토지를 경작하면서 흑해 연안의 고대 국가들과 교역을 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2~4세기 로마 시대의 동전은 로마제국과도 교역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8~9세기 키이우는 당시 카프카스(Caucasus) 지역에서 흑해 북부의 볼가(Volga)강과 돈(Don)강 유역까지 지배하던 하자르(Khazar) 제국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10~11세기 키이우는 중세 동슬라브 문화의 중심지로 전성기를 누렸다. 9세기 말 바이킹과 같은 게르만족 일파인 바랑기인(varangians) 왕족이 현재의 노브고로드(Novgorod) 부근에 나라를 세우고 이어 드니프로(Dnipro)강 일대를 점령하면서 키이우를 수도로 삼았는데, 이것이 바로 후대에 키이우 루스(Kyiv Rus), 혹은 키이우 공국이라고 불리게 되는 동슬라브족 최초의 봉건국가였다.
키이우 루스가 하자르 제국까지 침략하며 영토를 넓히고,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그리스도 정교회와 비잔틴 문화를 받아들이며 문화적 융성기를 보내는 동안 키이우도 그 중심지로서 번창했다. 12세기 초 키이우의 인구는 100,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1240년 몽골의 침략은 화려한 수도였던 키이우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이어진 리투아니아 군대와 타타르족의 침략 등으로 부침을 겪던 키이우는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합병과 함께 폴란드에 귀속되었다가 1654년에 러시아군에 점령되었다.
18~19세기 제정 러시아 시대에 키이우는 정교회의 여러 주요 인물들과 관련된 종교적 성지로서 순례자들의 발길을 모으며 활기를 되찾았다. 또한,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의 산업혁명은 키이우를 경제적으로도 재건시켰다.
철도와 드니프로강을 통한 설탕 및 곡물 교역은 키이우를 러시아 제국의 무역 및 교통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1892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첫 전차(트램)이자 세계에서 세 번째인 전차가 키이우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한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의 군대와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에 의해 점점 자치권을 잃게 되면서 키이우도 행정, 경제, 문화적으로 러시아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19세기부터 러시아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해 오며 20세기 초 키이우 도심부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우크라이나 고유의 언어와 문화는 변두리 하층민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키이우는 다시 여러 국가 간 분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3월부터 11월까지 독일군에게 점령됐던 키이우는 러시아 내전과 폴란드-소련 전쟁 등을 거치며 1918년 말부터 1920년 8월까지 주인이 16번이나 바뀌었다. 이어 1919년 탄생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는 수도를 하르키프(Kharkiv)로 정하고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의 창립 회원국이 된다.
소련 체제의 우크라이나에서 키이우는 주요 역사적 사건들의 최전선에 있었다. 1920년대 말 시작된 소련의 산업화는 무역과 종교의 중심지였던 키이우를 첨단기술과 과학의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또한 1932~33년의 대기근 때는 배급카드에 등록되지 않았던 이주민 상당수가 굶주림으로 사망했고, 1937~38년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이 도시의 지식계층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키이우는 1934년 우크라이나의 수도가 되면서 다시 명실상부한 제1 도시의 지위를 찾았다. 그러나 1939년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키이우에 또다시 큰 위기를 가져왔다. 1941년 독일 나치군의 키이우 포위전에서 60,000여 명의 소련군이 사망하거나 생포되었으며 나치군에 점령된 직후 키이우에 남아있던 소련 비밀경찰대에 의해 시내 중심가의 건물 대부분이 폭파되면서 25,000여 명의 주민이 거주지를 잃었다.
특히, 나치군은 폭파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1941년 9월 29일과 30일 34,000명에 가까운 현지 유대인을 총살한 것을 시작으로, 키이우에서 퇴각하기 직전인 1943년 9월까지 키이우 외곽의 바비야르(Babi Yar) 골짜기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 100,000여 명을 총기로 살해했다. 이는 바비야르 대학살로 불리며,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대학살과 더불어 나치군이 벌인 대표적인 반인류적 학살 사건으로 꼽힌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졌을 때, 사고 현장은 키이우에서 불과 100km 북쪽으로 떨어진 곳이었으나, 마침 북쪽으로 바람이 부는 덕분에 키이우는 다량의 방사능 오염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인접국인 벨라루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90년 7월 24일 키이우 시청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처음 게양되었으며, 우크라이나 최고의회는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선포했다.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로 독립을 확정한 우크라이나는 12월 8일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키이우에서 키이우 전투가 일어났다.[4]
경제[편집]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에서 기업 활동이 가장 활발한 경제적 중심지로, 2018년 기준으로 264,766개의 사업체가 등록돼 있다. 국영 석유가스기업인 나프토가즈 우크라이나와 이동통신업체인 키이우스타 등 우크라이나 최대 기업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일부 산업이나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고 경제적 기반이 크고 다양해서 실업률도 비교적 낮은 편이다. 우크라이나의 전국 평균 실업률이 2018년 8.8%였는데, 키이우는 평균 6.2%였다. 부동산도 키이우 경제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아파트 평균가격이 우크라이나 전역은 물론, 동유럽에서도 가장 높다.
역사적인 도시인 만큼 관광산업도 빼놓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가 2005년 유럽연합(EU) 회원국과 스위스에 무비자 제도를 도입한 뒤 외국인 관광객이 더 늘고 있다.
교통[편집]
키이우의 대중교통은 지하철, 버스, 미니버스, 트롤레이 버스, 트램, 택시, 케이블카가 있다. 지하철은 대중교통의 일일 승객 운송량 중 38%를 차지하고 있으며 도시를 여행함에 있어 가장 편안하고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다. 지하철 노선은 현재는 3개의 노선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연장하고 있다. 트램은 러시아 제국 시대에 처음 도입되었으며 현재는 21개 노선이 운영되고 있다. 현재는 버스와 트롤레이 버스가 운영되면서 트램은 점차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있다.
보리스필 국제공항과 줄리아니 국제공항이 있다. 보리스필 국제공항은 키이우 동쪽 29km 지점에 있는 단 러시아 노선은 상호 제재로 단항했고 에어 아스타나, 터키항공, LOT 폴란드 항공 등을 이용하여 들어와야 한다. 키이우 시내에 있는 키이우 줄리아니 국제공항은 유럽 서부로 통하는 공항이다. 안토노프 항공이 사용하는 호스토멜 공항도 있지만 화물 공항이어서 여객 노선은 취항하지 않는다.
관광[편집]
키이우의 가장 유명한 역사적 건축물은 소피아 대성당(Софія Київська)과 키이우 동굴수도원(Києво-Печерська лавра)이다. 11세기 초에 세워진 두 건축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또한, 마린스키궁(Маріїнський палац)과 미카엘 대성당(Михайлівський золотоверхий монастир), 성 안드레아 성당(Андріївська церква), 성 블라디미르 성당(Собор святого Володимира), 그리고 황금문(Золоті ворота) 등도 주목할 만한 건축물로 꼽힌다.
현대적 건축물로는 드니프로강 우안(右岸)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우크라이나 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the History of Ukraine in the Second World War)에 서 있는 조국의 어머니 기념비(Батьківщина-Мати)가 가장 유명하다. 1981년 공개된 이 티타늄 조각상은 칼과 방패를 든 여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본체의 높이만 62m이고 받침대를 포함하면 높이 102m, 무게 560t에 이른다.
이러한 명소들은 키이우의 다양한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찾아갈 수 있다. 키이우에는 지하철, 버스, 택시는 물론, 트롤리버스(무궤도전차)와 트램(노면전차), 그리고 케이블카도 여러 노선이 운행 중이다. 또한, 도심 외곽을 도는 순환철도도 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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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키이우〉, 《위키백과》
- 〈키이우〉, 《나무위키》
- 〈키예프〉, 《요다위키》
- 〈키이우(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키이우(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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