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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서희(徐熙)는 고려 제6대 성종 시기의 외교관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개요[편집]

  • 서희는 고려의 외교가 ·문신이다. 거란(契丹)의 내침 때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에 극력 반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그 후 여진을 몰아내고 지금의 평북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회복했다. 본관 이천(利川). 자 염윤(廉允). 시호 장위(章威). 960년(광종 11) 문과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되었던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가 되어 귀국했다.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의 내침 때 중군사(中軍使)로 북계(北界)에 출전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안(案)과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했으나 이에 극력 반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가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때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에 반박,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994년 평장사(平章事)로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女眞族)을 축출, 장흥진(長興鎭) ·곽주(郭州) 등을 축성, 압록강 진취의 전략기지로 삼았다. 또 압록강 문제를 전담할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를 두게 했으며, 이듬해 안의진(安義鎭: 安州) 등지에 축성하고 선주(宣州: 宣川) 등지에 성보(城堡)를 쌓아 지금의 평북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회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내고 신병으로 개국사(開國寺)에서 죽었다.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 덕종 때 태사(太師)가 추증(追贈)되었다.[1]
  • 서희는 고려의 문신이다. 960년(광종 11) 과거에 급제한 후 원외랑을 거쳐 병관어사로 재직 중, 993년(고려 성종 12년) 거란의 침입 때 거란 측 장수인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하여 교전을 치르지 않고 퇴각시켰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서희의 외가 어르신 중 용이 구름에 걸려 추락하다 바다의 신의 도움을 받아 용궁으로 간 태몽을 꾼 사람이 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지리에 밝았고 무예에 능했다. 960년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내의시랑 등을 거쳐 983년 병관어사가 되었다. 996년에 병으로 사찰 개국사에 요양하게 되자 성종이 직접 왕림하여 어의 한 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000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쾌유를 기원하기도 했다. 998년 57세를 일기로 졸하자 부음을 들은 왕이 크게 슬퍼하며 베 1천 필, 보리 3백 석, 쌀 5백 석, 뇌원다 2백 각, 대다 10근, 전향 3백 량을 부의로 주었다. 시호는 장위이다. 1027년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2]
  • 서희는 고려전기 장흥진 등에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공헌한 문신. 정치인, 외교가이다.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염윤(廉允). 아버지는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서필(徐弼)이다. 할아버지인 서신일(徐神逸) 때까지는 이천 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이어 재상 위에 올랐고, 다시 아들 서눌(徐訥) · 서유걸(徐惟傑)이 수상인 문하시중과 재상인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특히 서눌의 딸은 현종(顯宗)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스스로의 재능으로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다. 960년(광종 11) 3월에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郎) · 내의시랑(內議侍郎) 등을 거쳤다. 983년(성종 2) 군정(軍政)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고, 얼마 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 · 내사령(內史令)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중책을 맡아 활동했으며, 외교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올렸다. 972년에 십수 년간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이를 물리친 일이었다. 서희가 996년(성종 15)에 병으로 개국사(開國寺)에 머물게 되자, 성종이 친히 행차해 어의 한 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000석을 시주하는 등 서희가 완쾌되도록 정성을 다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3]
  • 서희는 고려 전기의 문신으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960년 과거 시험에서 갑과로 합격하였고, 광평원외랑과 내의시랑을 지냈다. 972년에는 10여 년간 외교가 중단되었던 송나라의 사신으로 가서 국교(나라와 나라 사이에 맺는 외교 관계)를 다시 시작하였고, 송태조부터 검교병부상서의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993년 거란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봉산군을 점령하였는데, 당시 고려 조정은 항복하자는 입장과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입장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거란 측의 속셈을 파악한 서희는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직접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짓고 거란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또한 압록강 동쪽에 자리 잡고 있던 여진을 몰아냈고, 강동 6주의 성을 쌓아 우리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후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국사를 이끌다가 병환으로 죽었다. 현재 서희의 묘는 여주시 금사면 후리에 있으며, 이천시 중리동 시청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서희 장군 묘[편집]

  • 서희 장군 묘(徐熙 將軍 墓)는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문신 서희(徐熙)의 묘이다.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고려 초기의 외교가이며 문신 서희(942~998)의 묘로 998년(목종 1)에 조성되었다. 봉분은 부인 묘와 쌍분을 이루며, 장대석으로 2단의 호석(護石)을 두른 장방형이다. 쌍분의 중앙 정면에 묘비 1기가 있고 쌍분 앞에는 상석(床石)과 장명등(長明燈)이 각각 1기씩 놓여 있으며, 좌우로는 문석인이 1쌍씩 배치되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계체석을 이용한 3단정제(三段庭制)이며, 고려시대 묘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관리는 후손인 서강익이 담당하고 있다.

서희의 가계와 출사[편집]

  • 서희는 광종대의 명신 서필(徐弼)의 아들이다. 자(字)는 염윤(廉允)이었다. 『고려사』에서 서필이 이천(利川) 사람이라 하였으므로, 그의 집안은 지금의 경기도 이천 지역 출신으로 보인다. 서희의 조부인 신일(神逸)이 현재 이천 서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서희가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간 것은 광종대의 일이었다. 18세였던 960년(광종 11)에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관직자의 길에 들어선 서희는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郎)과 내의시랑((內議侍郎)을 거쳤다.
  • 972년(광종 23) 8월에는 송나라에 파견되는 사신단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었다. 이때의 사신단 파견은 1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 사신단의 대표인 정사가 된 것은 당시 서희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서희의 행동이 법도에 잘 맞아, 송나라 태조(太祖)가 이를 높이 여겨 검교병부상서부사·내봉경(檢校兵部尙書副使·內奉卿)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광종 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서희였지만, 다음 국왕인 경종(고려)(景宗) 시대에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고려 초의 자료가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성종대의 기록에서 서희는 다시 중요한 역할로 등장한다. 983년(성종 2)에 서희는 좌승(佐丞)을 거쳐 병관어사(兵官御事)로 승진했다. 이는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비교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이 시기의 기록에 서희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국왕 성종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영명사(永明寺)라는 사찰 일대에 가서 즐기려 하자 간언을 올려 중지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성종은 이에 그 계획을 중단하고, 서희에게 바른 건의를 한 상으로 안장과 말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서희는 승진하여 내사시랑(內史侍郞)에 올랐다.

서희의 업적[편집]

  • 성종(成宗) 12년에 거란이 침입해 왔다. 서희(徐熙)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군대에 종사했다.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은 봉산군(蓬山郡)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왕은 이로 인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방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왕은 땅을 떼어 주자는(割地) 주장에 따르려 했지만 서희가 이를 거절하고 스스로 거란의 진영으로 건너가 의견을 절충하는 임무를 맡았다. 소손녕은 서희를 힐난하여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가 이를 침략했다. 또 우리와 영토를 접하고 있는데도 그를 고려하지 않고,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라고 했다. 그러자 서희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바로 옛날의 고구려이다. 때문에 고려라고 부르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만약 경계를 논한다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도 역시 우리의 국경 안에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침략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찾아가서 천자를 알현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서희의 말투가 매우 격렬했다. 소손녕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돌아가 구체적으로 상황을 아뢰었다. 거란의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는 이미 화친을 청했다. 군대를 철수함이 마땅하다'라고 했다. 마침내 그는 땅을 떼어 주지 않고 거란을 돌아가게 할 수 있었다. 서희는 목종(穆宗) 원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7세 때이다.

서희테마파크[편집]

  • 서희테마파크는 장위공 서희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외교적 리더십을 깊이 새기며,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역사 체험과 미래상 제시의 공간으로 전시관, 체험관, 영상관, 추모관으로 구성한 복합문화의 장이다. 이곳은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에 있는 고려 시대 서희를 주제로 한 테마공원이다. 청소년들이 할 수 있는 역사 체험과 전시관, 체험관, 영상관, 추모관으로 구성한 복합문화의 공간이다. 서희 역사 산책로에는 국내 유명 조각가들이 인연의 시작, 서희의 성장, 여요전쟁, 영웅의 활약 4단계의 이야기로 나누어 제작하여 설치한 조형 작품이 있어 산책로를 거닐며 감상할 수 있다.
  • 장위공 서희는 942년 고려초 서필의 아들로 이천에 태어난 서희 선생의 호는 복천이며, 이천의 젖줄인 복하천에서 글자를 따다가 지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성종 때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앞세우고 고려를 침공했을 당시 뛰어난 협상력을 발휘하여 고려를 전쟁의 위기에서 구하고 압록강변까지 영토를 확장시킨 역사상 최고의 외교가로 2009년 외교통상부의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1호'로 선정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서희(徐熙,942~998)〉, 《두산백과》
  2. 서희〉, 《위키백과》
  3. 서희(徐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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