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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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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소(印刷所, print shop)는 인쇄를 업무로 하는 곳을 말한다. 대형 신문의 경우 신문사가 취재, 편집, 조판, 인쇄, 배송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지만, 다른 분야의 인쇄는 인쇄소의 일이다. 인쇄 회사는 건축 회사와 마찬가지로 수주 산업이다. 인쇄랑은 관련이 없는 사람이 인쇄를 만들려고 하면, 원고 작성 이후의 일은 모든 인쇄 회사에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상업 인쇄에 DTP 도입 등의 과정에서 조판에 관해서는 다른 회사에서 할도 늘고 있다.

개요

인쇄소는 말 그대로 인쇄를 전문적으로 해 주는 업체를 말한다. 대형 신문의 경우 신문사가 취재, 편집, 조판, 인쇄, 배송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지만, 다른 분야의 인쇄는 인쇄소의 일이다. 지역지 등 소형 신문사는 대형 신문사 윤전기에 인쇄를 위탁하기도 한다. 윤전기는 작아야 지하 2~3층을 뚫어 차지하는 거대한 시스템이고 오프셋 인쇄기 대비 상상 초월 비싸기 때문이다.

소규모 인쇄소의 경우엔 주로 대학가에 위치해 있다. 위엔 언급한 전문적인 인쇄업체와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이 쪽은 보통 '복사집'이라는 용어로도 통한다. 대학생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곳. 학교에 인쇄기를 비치하기도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대학교 근처의 인쇄소에서는 한 장에 50원(흑백, A4 기준)~100원(컬러, A4 기준) 정도로 보고서나 수업 프린트 등의 적은 분량을 인쇄할 수 있다.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큰 유명한 인쇄소의 경우 인쇄뿐만 아니라 팩스, 복사나 코팅, 스캔, 제본 작업도 병행하는 경우가 있다. 대학가 외에는 공공기관(정부청사, 도청, 시청, 군청, 구청 등), 공기업, 대기업 등 직장 주변에 있는 인쇄소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데 이는 서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것 때문에 그렇다.

사무실이나 기업들이 몰린 곳의 인쇄소들은 아예 특정 기업이나 특정 사무실로부터 주기적으로 인쇄일을 받는 경우도 있다. 특히 명함을 인쇄하는 일이 많기 때문.

인쇄할 일이 거의 없는 가정에서 프린트기를 구입하고 잉크를 구입하는 경우도 있는데, 금수저가 아니라면 굳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프린트기가 의외로 비싸고 최근에는 거추장스럽게 인쇄를 할 일이 거의 없고 죄다 스마트폰 따위로 공문을 전송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들을 감안한다면 차라리 인쇄소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좋다.

주의

특히 규모가 크지 않은 경우 1000원 이하는 카드를 긁을 수 없는 경우도 많으니 현금을 챙겨가자. 스테이플러는 필수 구비템이며, 풀, 가위 등을 배치해서 필요할 경우 가볍게 쓸 수 있게 해둔 곳도 많다. 양면 인쇄의 경우 설정을 잘못 해서 한 쪽만 인쇄될 경우 돈 아끼려다 돈을 더 내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주의하고, 본인이 컴맹이어서 영 힘들다 싶으면 아예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여담

어떤 이들은 세계 최고의 취존 집단이라고 한다. 돈만 주면 BL동인지든 고어물이든 심지어 어디서 찾기도 힘든 마이너한 취향이든 모조리 인쇄해주기 때문에...

Grand Theft Auto: Vice City의 주인공인 토미 버세티가 어린 시절에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인쇄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작중에서도 인쇄소를 구입한 후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좋은 책을 찍을 꿈에 부풀어있는 토미를 씹어먹고 인쇄소면 당연히 위폐를 찍어야 한다는 공장장에 의해 미션을 수행이 가능하며 토미의 이야기가 인쇄소 첫 번째 미션에서 언급된다.

옛날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들 중 인쇄소 노동자 출신인 사람들이 많다. 인쇄공들은 본의 아니게 조판작업을 하면서 수많은 책을 정독하게 되어 다른 공장 노동자들보다 지식이 풍부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 대표적으로 최초의 아나키스트인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은 중졸 학력으로 인쇄공 일을 하며 많은 책을 읽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독학했다.

또한 노동운동가는 아니지만 과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도 처음엔 제본소에서 일하면서 책을 읽고 이를 통해 기초 지식을 쌓았다. 단 컴퓨터가 도입된 현대의 인쇄소와는 무관한 이야기.

2020년대 들어 대학가 인쇄소들이 줄줄이 폐업하고 있다. 대학생들이 종이책 대신 아이패드, 갤럭시탭, 태블릿,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필기도 기기들에 적는 탓에 종이를 인쇄할 일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PDF파일도 출력하지 않는다. 또한 인쇄기가 대학 내부와 편의점에도 있어 인쇄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작용했다.

그나마 대학원생, 교수와 몇몇 특정 학과 학생들이 찾는 정도.

이런 이유로 프린트 카페들이 계속 생기고 있다.

최초의 민간 인쇄업체 광인사

광인사 발간 '충효경집주합벽' 초판본, 납활자로 인쇄된 우리나라 초초의 단행본. 자료=국립중앙도서관

광인사는 1880년대 초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민간 인쇄업체로, 일본에서 납활자와 활판인쇄기를 도입하여 인쇄시설을 완비하고 있었다. 갑신정변 때 박문국이 훼손됨에 따라 한성순보를 광인사에서 속간하려고 시도했다.

규모가 있는 민간 인쇄업체들은 1900년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는데, 대표적인 인쇄소로 광문사와 박문사가 있었다. 1905년 당시 전동(현재 수송동)에 설립된 보성사는 8면 활판기 등을 독일에서 수입하고 석판 인쇄시설까지 갖춰 당시 한국인 인쇄소로서는 시설이 가장 좋았다. 1907년에는 손병희와 공진환의 보문사가 소안동(현재 안국동 종로경찰서 인근)에 설립됐으며, 1908년에는 최남선에 의해 신문관과 보인사가 설립됐다. 신문관에서는 최초의 근대 종합잡지인 소년을 펴냈으며, 보인사는 활판 시설 외에 석판기와 사진 제판부, 제본 부까지 갖추고 있었다.

경성일보와 곡강상점

일제 강점기시절 인쇄소.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개화기 이후 빠르게 성장한 인쇄업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사업체 수와 규모가 급증했다. 이때 경성 도심부에 자리한 인쇄업체는 크게 경성부청 인근 지역, 종로 북쪽 지역, 인현동 일대 지역으로 나뉘어 분포했다.

일본인 거주지였던 남산 북쪽 자락에는 일본인이 경영하였던 인쇄소가 다수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주자동에 위치했던 경성일보(1906~1914)와 곡강상점(谷岡商店, 1920~1945)이다. 통감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는 이후 대한매일신보를 매입하여 매일신보라는 총독부 기관지를 만들었다. 곡강상점은 인쇄‧제본‧종이 판매 등을 겸한 업체로, 이곳에 자리한 종이·문구·인쇄업체의 납부 세액 중 거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1930년대 말까지 경성에서 가장 큰 인쇄업 밀집지역은 경성부청 근처였다. 하지만 경성 시내 인쇄소 120여 곳 가운데 30여 곳이 인현동 일대에 분포했다. 이것은 당시 인현동 일대가 인쇄업의 중요 분포지 중 하나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인쇄골목 인현동

1960년대 영화포스터.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인현동 인쇄골목 풍경. 자료=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45년 광복과 함께 일본인들이 떠났고, 이들이 남긴 시설과 주택은 한국인들에게 적산이란 이름으로 불하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인쇄업체 또한 한국인들에게 넘겨졌다.

1950년 6·25전쟁으로 많은 인쇄소가 큰 피해를 보아 인쇄업은 침체기에 빠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에는 외국의 원조금으로 인쇄 기계가 다량 수입됐고, 인쇄물 수요가 증가하면서 인쇄업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됐다.

인현동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이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인쇄업체 밀집 지역이었다. 당시 영화는 큰 대중적 인기를 끌었는데, 영화포스터 입장권 등이 필요한 서울 시내 영화관은 인쇄소의 주요 고객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인현동의 인쇄업 입지가 더욱 탄탄해졌다. 그 당시 서울시 전역에 분포하고 있던 인쇄업체 325개 중에서 42개가 인현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특히 인현동 1가 중심도로(현 마른내로)를 따라 많이 들어섰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인현동 인쇄골목'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까지 서울 최대의 인쇄업 밀집 지역은 서울시청 주변에 자리한 장교동(을지로1가 부근)이었다. 하지만 1983년 장교동이 재개발되면서 인쇄소가 대거 인현동 일대로 옮겨왔다. 주택·상가·인쇄소가 공존하고 있었던 인현동 일대가 드디어 인쇄업의 중심지로 부상한 것이다.

이때 이곳에서 찍은 인쇄물에는 우리 현대사가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수출이 늘어 나면서 수출입에 필요한 봉투 편지지·명세서·승인서 등을 찍어내기 위해 인쇄기가 밤낮없이 돌아갔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스포츠 포스터 등 컬러 인쇄물에 대한 수요도 높아져 갔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가 실시되면서 선거에 필요한 각종 공보물·포스터·홍보전단 등도 인현동 인쇄 골목을 떠받치는 거대한 수요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인현동 인쇄골목은 그야말로 호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황도 오래가지 못 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인쇄물량이 급감하고, 값비싼 수입 인쇄기의 리스료 부담 이 폭등하면서 인쇄골목은 급격한 한파를 맞게 되었다.

인현동 인쇄골목은 행정동으로 중구 을지로동, 필동, 광희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인쇄 관련 사업체들이 밀집해 있다. 2013년 기준으로 25,800여 개의 사업체가 분포하고 있다. 이 중 인쇄 관련 사업체는 전체의 22%인 5,181개로, 모든 업종 가운데 가장 많다. 이곳에서 일하는 인쇄업 종사자 14,152명은 전체 거주 인구인 13,007명보다 천 명 이상이 나 많다.

하지만 막상 이곳에 가보면, 사업체들이 밀집해 있을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이다. 격자형으로 짜인 고른 골목길도 없고, 최신식 건물도 많지 않다. 길은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고, 심지어 막다른 골목길도 있다. 폭도 좁고 제각각이고, 건물도 오래됐다. 남산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는 마른 내를 비롯한 작은 물길을 따라 들어섰던 상가와 주택은 6.25 전쟁 때에도 큰 피해를 보지 않아 옛 도시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의 낡고 미로 같은 풍경은 누군가에게는 무질서와 불편함으로 비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굴곡진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다.

서울시 중구 인현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인쇄 관련 사업체의 집중도는 이례적이다. 2014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쇄업 및 인쇄 관련 사업체의 44%가 서울에 몰려 있고, 이 중에서 2/3 이상이 중구에 자리하고 있다. 기타 인쇄 관련업까지 따지면, 80%가 중구에 집중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보아도 30% 정도가 중구라는 극히 좁은 공간에 몰려 있다. 이는 사실상 인현동 일대가 전국 최대의 인쇄업 집적 지역임을 의미한다.

이곳에서는 못하는 것이 없다. 기획부터 후가공까지 인쇄와 관련된 모든 분야가 인현동에서 소화된다. 3층도 안 되는 난쟁이 건물들이 밀집해 있지만, 수많은 작업장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어떤 형태와 수량의 인쇄물이든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인현동 인쇄골목은 전국 최대·최고의 인쇄업 집적 지역이라는 위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인현동 인쇄골목은 갈림길에 서 있다. 대형 인쇄업체가 도입한 인터넷 견적 이 활발해지면서 원가가 일반에 알려진 탓에 인쇄업체들은 이윤이 거의 없는 수준에서 가격경쟁을 하고 있다. 또한 개인 프린터가 보편화되고, 온라인 광고매체가 활성화되면서 인쇄 수요도 급감했다. 인쇄업의 불황으로 공실이 증가하면서 낡은 골목은 황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구나 재개발을 원하는 건물주들이 시설투자를 하지 않아 인쇄골목은 더욱 쇠락하고 있다.

그러나 인현동 인쇄골목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랜 역사만큼 다양한 연식의 기계와 후가공 과정을 갖추고 있어, 다른 어느 곳보다 고객들의 크고 작은 요구를 더 잘 맞출 수 있다. 그리고 도심부에 위치한 인현동 인쇄골목은 접근성이 좋아 시내에 있는 고객들이 찾아오기에 편리하다. 고객의 주문으로 모든 일이 시작되는 주문 제작 업종의 특성상 고객에게 가까이 자리 잡은 것은 다른 곳이 가질 수 없는 최대 강점이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인쇄 서비스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인현동 인쇄골목의 아성은 쉽게 깨지기 어려울 것이다.

아메리카 최초의 인쇄소

멕시코 시티 아메리카 최초의 인쇄소
멕시코 시티 아메리카 최초의 인쇄소

멕시코 멕시코시티에 위치한 역사 건축물이자 박물관이다. 고문헌, 서적, 현지 발굴 조각상 등을 소장하고 있다. 스페인의 정복 전에는 아즈텍 왕국의 테노치티틀란 마요르 사원이 위치했던 곳으로 1524년 스페인 출신 프란시스코회 성직자 헤로니모 데 아길라르(Jerónimo de Aguilar)가 세운 건축물이다. 당시 스페인 국왕인 카를로스 5세와 멕시코시티 대주교인 후안 데 수마라가(Juan de Zumárraga)의 허가를 받아 1539년 유럽에서 활자인쇄기를 전달받았다. 활자인쇄기가 들어온 후 스페인 세비야 출신 출판업자 후안 크롬버거(Juan Cromberger)와 이탈리아 출신 인쇄공 후안 파블로스(Juan Pablos)가 10년 간 인쇄소를 경영하며 스페인 부왕청과 교회 관련 문헌을 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인쇄소 건물은 “종(鐘)의 집(Casa de las Campanas)”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멕시코에서 최초로 인쇄된 출판물 중 하나인 《천주교리요해 멕시코언어본 Breve y más compendiosa doctrina christiana en lengua mexicana y castellana》를 제작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17세기에는 수도원 건물로, 18세기에는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 1847년 미군이 주둔하면서 건물 내에 보관되어 있던 문헌들을 파기하였다. 그 후 민간인들이 사용하다가 20세기부터는 관공서 건물로 활용되었고 1989년부터 멕시코 광역자치대학교(Universidad Autónoma Metropolitana)가 소유하게 되었다. 그 후 멕시코 국립인류학협회(Instituto Nacional de Antropología)와 발굴 및 보수작업을 진행하였고 1993년 11월 23일 광역자치대학교 평생교육원 전시실 및 서점으로 개관하였다. 2008년부터는 건물 내부에 책 박물관을 개관하여 운영하고 있다. 전시활동 이외에 문학워크샵, 북토크, 콘서트 등 다양한 활동을 주최한다.

주요 시설

인쇄소 건물은 면적 344.59㎡ 규모로 후안 파블로스 전시실, 미술작품 특별전시실,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José Guadalupe Posada) 전시실, 제1, 2특별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후안 파블로스 전시실 이외는 모두 특별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주요 소장품

건물터에서 발굴된 아즈텍 문명 뱀 머리 조각상과 후안 파블로스의 인쇄 활동과 관련된 문헌 및 서적이 있다.

부대시설

전시시설 이외에 대학강의실과 서점을 운영한다.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1961. 12. 30 법률 제904호).

출판업 및 인쇄업을 보호함으로써 출판문화의 향상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출판사 또는 인쇄소를 경영하는 자는 일정한 사항을 당해 출판사 또는 인쇄소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시장·군수·구청장에게 등록하여야 한다. 등록청은 그 등록이 있은 때에는 등록사항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등록한 출판사가 만화·사진집·화보집 및 소설을 출판한 때에는 그 출판물 2부를 등록청을 거쳐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납본하여야 한다. 문화관광부 장관은 납본한 자에게는 납본필증을 교부한다. 등록청은 출판사 또는 인쇄소의 등록을 한 자가 허위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등록한 사실이 있는 경우와 변경사항을 등록하지 않은 경우, 등록된 장소에 출판사 또는 인쇄소가 없고 또한 그 소재지를 알 수 없는 경우,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한 등록을 하지 않고 정기간행물을 발행한 경우, 음란한 간행물이나 아동에 유해한 만화 등을 출판하여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였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

전문 8조와 부칙으로 되어 있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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